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27
‘어제 그 녀석인가.’
주점 왕궁에서 한바탕 난리를 쳤기에 놈들이 잠복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적의는 느껴지지 않지만 조심해. 프로라면 살기를 감추는 것 정도는 쉬운 일이니까.”
레이피어를 꺼낸 테스가 먼저 전진하자 남은 세 사람도 천천히 뒤를 따랐다.
별장에 도착하자 과연 미약한 달빛 아래에 누군가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실루엣으로만 확인했을 때 미동조차 없이 벽에 기대어 있었다.
“저 녀석…….”
에이미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실루엣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푹 주저앉았다.
“지스?”
시로네가 황급히 뛰어갔다.
얼굴을 보고도 확신이 없는 이유는, 끔찍할 정도로 얻어터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앵무라는 이름(2)
“이봐, 괜찮아?”
시로네가 부축하려 했으나 단지 손이 닿은 것만으로도 지스는 경기를 일으켰다.
“크윽! 아, 아파!”
“누구한테 이렇게 당한 거야?”
시로네가 상체를 세워 벽에 기대어 주자 얼굴이 일그러진 지스가 손을 뿌리쳤다.
“저리 비켜!”
도와준 사람에게 뻔뻔하다 할 테지만 지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누구를 살리려고 이 지경이 되었는지 알면 할 말이 없을 테니까.
무엇보다 에이미 앞에서만큼은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아. 하아.”
한참이나 통증과 싸우던 지스는 반쯤 풀린 눈으로 일행을 살피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 시간까지 놀다 왔냐? 팔자 좋네.”
부상 정도를 봤을 때 집 안으로 들여야 했지만 테스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어젯밤에도 이상한 방법으로 에이미를 꼬드겨 위험에 빠트리지 않았던가?
반면 에이미는 서슴없이 다가갔다.
이 바닥의 생태를 아는 사람으로서, 지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는 듣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팔코아, 그 녀석이야?”
지스는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왜? 어제 일에 대한 앙갚음이야? 넌 그 자식이 하란 대로 했을 뿐이잖아.”
“큭큭.”
이유 없이 웃음이 터졌다.
“넌 그 녀석이 정상으로 보이냐? 그래, 내가 너를 데려가기는 했지. 하지만 좀 난리를 쳤어야지. 팔코아, 아니 그 자식 완전히 눈이 돌아갔어.”
지스의 몸에 힘이 풀렸다.
“널 다시 데려오래. 이번에는 아지트로. 부하들을 전부 동원해서 진짜로 너희들을 죽일 생각이라고.”
“……어떤 식으로?”
순순히 따라오지 않을 것은 팔코아도, 지스도, 시로네 일행도 알고 있었다.
“루프.”
지스는 손에 쥐고 있던 봉투를 땅에 던졌다. 하얀 가루가 팍 하고 터져 나왔다.
“너에게 루프를 탄 음료수를 주라고 했어. 너라면 순순히 마실 거라고. 하지만 치사량이야. 네가 무슨 능력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마시면…… 죽어.”
뒤편에서 듣고 있던 시로네 일행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여기까지만 듣고도 팔코아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자동으로 연상이 되었다.
시로네가 물었다.
“거절했다가…… 이 지경이 된 거야?”
“아니.”
고개를 저은 지스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엿이나 먹으라고 해 줬지.”
“…….”
“착각하지 마. 너희들을 위해서가 아니니까. 그런 정신병자 따위, 하나도 무섭지 않아. 내가 이 섬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왜 살아남으려고 했는데…….”
지스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삼키지 못한 침이 피와 섞여 입 밖으로 흘러내렸다.
“유나. 내 여동생. 팔코아 그 자식이…… 데려갔어. 너희들을 데려오지 않으면 죽인다고. 왜, 도대체 왜? 유나는 아무 죄도 없는데!”
허리를 튕긴 지스가 피를 토했다.
“컥! 컥!”
“지스! 진정해! 천천히 말해 봐!”
“흐으으.”
지스의 어깨가 서럽게 떨렸다.
결국은 이렇게 되는 것이다. 가진 것도 없고, 힘도 없는 놈이 자존심 따위를 내세워 봤자 말로는 비참할 뿐이었다.
‘유나. 유나야…….’
유일한 혈육을 지키기 위해, 지스는 자존심을 버리고 그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발…….”
올려다보는 눈동자에서 붉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도와주십시오.”
공기가 무거웠다.
“평민 주제에 무례하게 굴었던 것 전부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아요. 유나는 내 전부인데…… 유나가 잘못되면 나는…… 나는…….”
반쯤 넋이 나가 횡설수설하던 지스는 결국 공포를 견디지 못하고 흐느꼈다.
시로네 일행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물론 지스의 여동생이 납치된 데에는 그들도 어느 정도는 얽혀 있을 테지만, 혈기로 나설 상황이 아니었다.
‘팔코아의 아지트.’
주점 왕궁에서 접한 부하들은 모두 스키마 유저였고, 아지트에는 어쩌면 그보다 더 강한 자들이 즐비할지도 몰랐다.
결국 동료의 생명이 달려 있는 일인 만큼 선뜻 먼저 말을 꺼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시로네.”
리안이 말했다.
“네가 가면 나도 간다.”
테스가 말했다.
“리안이 가면 나도 가.”
시로네는 마지막으로 에이미의 의중을 살폈다.
굳이 시선을 교환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그녀의 눈빛은 전투의 의지로 타오르고 있었다.
시로네는 지스의 등을 짚었다.
“아지트가 어디야?”
그 말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지스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고맙…….”
에이미가 말을 끊었다.
“됐어. 하던 대로 해. 그러니까 더 이상하잖아. 일단 들어가서 상처부터 보자.”
“하, 하지만 여동생이…….”
“바보야! 무턱대고 덤볐다가는 우리가 먼저 당해. 너도 여동생을 데려오길 바라는 거잖아. 아지트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으니 우리가 가기 전까지는 무사할 거야.”
에이미가 문을 열자 리안이 지스를 두 팔로 안아 들고 침대로 옮겼다.
유나라는 아이가 걱정되기는 했으나 이대로는 지스가 먼저 죽을 터였다.
테스가 가위로 지스의 옷을 잘랐다.
검술학교 입학 이전부터 첩보 기술을 익힌 그녀는 한눈에 상태를 알 수 있었다. 피멍의 형태로 보아 갈비뼈가 상한 게 분명했다.
“좀 아플 거야.”
테스는 지스의 몸 이곳저곳을 눌러 보았다.
“아아아!”
“참아. 근육이 굳으면 더 안 좋아지니까. 그나저나 인정사정없이도 쳤네. 장기도 확인할게.”
테스는 있는 힘껏 지스의 배를 눌렀다.
뼈와 근육으로 보호되는 장기의 상태는 이 정도로 우악스럽게 들어가지 않으면 확인하기 어려웠다.
“으으으으으!”
지스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치료가 끝나야 유나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테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일단은 다행이야. 갈비뼈에 금이 갔고, 나머지는 단순 타박상이야. 정밀 검사를 받아야겠지만 장기도 심각하게 손상된 곳은 없는 것 같아. 너, 의외로 몸이 튼튼하네.”
지스는 그저 씁쓸했다.
호객꾼으로 수많은 귀족에게 덤볐던 탓에 맞는 일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에이미가 나섰다.
“기본적인 치료 마법을 할게. 회복이 조금은 빨라질 거야. 이럴 때 세리엘이 있으면 좋을 텐데.”
치료 마법이 부여되자 지스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약간의 진통 효과도 있는 듯했다.
다만 몸이 이완되자 피로감도 급격히 밀려들었다.
사실 핏줄의 생명이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면 이미 정신을 잃었어야 마땅한 상태였다.
반쯤 몽롱한 상태에서 지스가 말했다.
“놈들의 아지트는 섬의 북쪽에 있어. 나도 가 본 적은 없지만……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거든. 끝에는 절벽뿐이야.”
시로네도 배에서 본 기억이 났다.
천혜의 절벽으로 막혀 있었기에 섬을 우회하여 남쪽의 항구에 정박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북쪽이라면 케르고 자치 지구와 가까워 정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무뢰배의 아지트로 활용하기에는 이보다 좋은 환경이 없었다.
“좋아, 그럼 출발하자. 혼자 있을 수 있겠어?”
지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자신이 잘못된다고 해도 시로네 일행을 보낼 각오였다.
그럼에도 표정이 어두운 이유는, 유나와 상관없는 이들을 사지로 보낸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정말 괜찮겠어? 도와 달라면서 이런 말 하는 거 우습지만, 놈들은 정말 강해.”
에이미는 콧방귀를 뀌었다.
굳이 지스의 여동생 때문이 아니라도 자신을 죽이려고 계략을 꾸민 팔코아라는 인간을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
“그래 봤자 깡패들이야. 아무 걱정 말고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잠이나 푹 자 둬.”
“…….”
지스는 잠시 갈등했다.
동생을 구하러 떠나는 그들의 발목을 무겁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아는 팔코아는 한낱 깡패 같은 게 아니었다.
“그 녀석들…… 섬에 오기 전에는 앵무 도적단이라고 불렸던 것 같아. 들은 적 있어?”
“앵무 도적단?”
시로네의 눈이 커졌다.
에이미도 이번만큼은 의외라는 듯 표정이 심각해졌다.
‘분명 아케인 사건 때…….’
서쪽 감옥 인페르노에서 탈옥한 루카스라는 남자가 속해 있는 도적단이었다.
에이미 또한 어비스 노바의 효과가 풀리면서 루카스라는 남자의 무용을 기억해 냈다.
비록 시이나에게 처참하게 당하기는 했지만 이루키와 네이드의 협공으로도 제압할 수 없었던 실력자였다.
에이미는 더욱 의지를 불태웠다.
“괜찮아. 정체를 알았다고 상황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앵무 도적단이라면 악연이 좀 있거든. 너는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쉬고 있어.”
지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미안해. 나 때문에…….”
리안이 말했다.
“그쯤 해 둬. 우리도 한낱 동정심 때문에 목숨을 걸지는 않아. 네가 남자답게 부탁하니까 움직이는 거야. 따지고 보면 네가 에이미를 구한 셈이기도 하고.”
지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비록 인정할 수는 없지만 듣기 좋은 말이었다.
“남자답기는 무슨……. 내가 구하러 가지도 못해서 너희들에게 비는 건데.”
문으로 걸어가던 에이미가 돌아서며 말했다.
“그런 게 남자답다는 거야, 바보야.”
지스는 그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조금씩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시선조차 돌리지 못하는 가운데 멀어지는 시로네의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 마, 꼭 구출할 테니까.”
현관문이 닫히고 정적이 찾아왔다.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그런 감정조차 잠시, 지스의 눈꺼풀이 스르르 감기기 시작했다.
***
시로네 일행은 네 필의 말을 빌렸다.
섬의 북쪽은 험지였기에 마차로 진입하기 어려울뿐더러 기동성이 생명이었다.
사실 상황은 불리했다. 무엇보다 프리먼 조직의 정체가 앵무 도적단이라는 사실이 걸렸다.
시로네의 기억으로 앵무 도적단의 부단장 루카스는 B급 범죄자였다.
물론 범죄의 경중을 따지는 척도지만, 어느 정도의 무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B급에 준하는 범죄를 저지를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의외로 심각한 사안일 수도 있어.’
아케인 사건이 끝나고 듣기로는 앵무 도적단의 단장은 A급 범죄자로 현재 수배 중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들을 기다리는 프리먼 조직은 무엇인가?
“에이미, 정말로 앵무 도적단이 맞을까? 뭔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지 않아?”
“그러게. 수배 중인 조직이 어떻게 관광지에 정착할 수 있었던 거지? 게다가 지금은 아케인 건으로 앵무 도적단에 대한 추적이 강화되었을 텐데.”
테스가 끼어들었다.
“앵무 도적단이 아니야.”
시로네가 고개를 돌렸다.
“테스, 뭔가 알고 있어?”
“앵무 도적단은 토르미아 왕국으로 넘어오면서 찍힌 낙인 같은 거야. 정식 명칭은 앵무 용병단이야.”
“용병단?”
잠시 생각하던 시로네가 물었다.
“그럼 루카스도?”
“그건 나도 몰라. 용병단이라고 해서 꼭 정상인 놈들만 있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앵무 용병단이 어떻게 해서 도적단이 되었는지는 알지.”
일행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본래 큰 규모의 용병단은 아니었어. 다만 안 좋은 쪽으로 사건이 터져서 유명해졌지. 혹시 7년 전 아이론 왕국에서 벌어진 화병花甁 사건에 대해 들은 적 있어?”
앵무라는 이름(3)
“어라? 나 알아. 학교에서 배운 적이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