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286
“기정사실이라고 봐야지. 이제는 발로 뛰어서 찾는 수밖에 없어.”
네이드가 말했다.
“어느 세월에? 성전이 오늘 자정이야. 리퍼의 세력은 엄청난 속도로 불어나고 있고. 그 녀석이 1번을 가지고 있는 한 제대로 싸울 수도 없잖아.”
시로네가 말했다.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야. 제르비스도 아직 울티마를 완성시킨 건 아니니까. 시스템 한계치를 초과하는 위력이라면 율법을 깨트릴 수 있을 거야.”
알비노가 물었다.
“설마, 파계를 말하는 겐가?”
시스템 디스트럭션.
전쟁 당시에도 파계가 가능한 사람은 적과 아군을 합해 극소수에 불과했다.
루피스트는 가올드를 돌아보았다.
“할 수 있겠어?”
고통을 이겨 내는 극기로 파계를 이루었다면 현재 가올드의 통각은 정상이다.
설령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다시 지옥의 삶이 펼쳐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올드는 씁쓸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할 수 있어서 하냐, 해야 하니까 하는 거지. 막상 닥치면 어떻게든 되겠지.”
“난 반대야.”
미로가 말했다.
“가올드는 영웅이 아니야. 그냥 나를 위해 모든 걸 바쳐서 싸웠던 거잖아.”
가올드가 아픈 건 이제 그녀가 견딜 수 없었다.
“언제까지 가올드만 힘들어야 하는데? 그렇게 싸워서 결국 울티마도 이룬 거 아냐? 그럼 남은 자들이 알아서 해야지. 왜 또 가올드냐고!”
“여보, 흥분하면…….”
미로는 가올드의 손을 뿌리쳤다.
“내 남편이 바보인 줄 알아? 이 녀석은 좀 행복해도 돼! 그렇게 누구 하나 족치고 싶으면 내가 할게. 내가 나가서 싸우면 되잖아!”
침묵이 흘렀다.
누구 하나 모르지 않았다. 이 자리의 모두가 필사적으로 싸웠다는 사실을.
네이드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솔직히 우리, 진짜 열심히 했잖아. 나는 아직도 꿈에 나온다고. 그런 끔찍한 전투를 치렀는데 또 싸우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여기 있잖아.”
페르미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우리의 영웅, 시로네. 언제든, 몇 번이고 인류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사람. 그렇지?”
에이미의 눈이 사납게 찢어졌다.
‘저게 진짜.’
시로네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뭐, 그렇기는 한데. 일단 울티마의 시소 싸움에서 우위를 점해야지. 그러려면…… 응?”
누군가를 찾으려는 듯 회의실을 둘러보던 시로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위저드는 어디 있어?”
성음이 말했다.
“참석을 거부했다. 오지 않겠다고 하더구나.”
“거부라고? 아니, 왜?”
“시로네.”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자 이루키가 심각한 표정으로 깍지를 끼고 있었다.
“가장 망가진 건, 위저드일지도 몰라.”
아우터 리포트 (3)
***
굴종의 낙인 사태로 혼란스러운 것은 알페아스 마법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알페아스와 올리비아는 교사들을 긴급 소집해서 회의를 열었다.
“경거망동하지 말게. 협회에서 지시가 내려올 것이야. 학생들의 소요를 막아.”
굴종의 낙인은 여태까지 사회적으로 유지되던 순위 시스템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저급반 중에도 높은 순위가 있고, 졸업반에는 불가촉천민을 선택한 자도 있었다.
올리비아가 말했다.
“달라질 것은 없다는 걸 명확히 해야 합니다. 제르비스는 곧 처단될 것이며 학교도 정상화될 거예요. 안 좋은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세요.”
회의가 끝나자 교사들은 숙소에서 대기하고 있던 학생들을 클래스별로 소집했다.
시이나 또한 졸업반 학생들을 모아 두고 학교의 방침을 알렸다.
“제르비스는 세계를 어지럽히는 악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전쟁에 대비하는 거예요. 이제부터 학교에 엄폐물을 세우고 적의 침략에 대비할 것입니다. 비록 학생이지만, 마법사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네!”
학생들의 의지는 강했다.
평생 실전을 꿈꾸며 마법을 배웠으니 흥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시이나는 그 점이 우려스러웠다.
‘기존의 지휘 체계는 무용지물이야. 새로운 구심점을 찾아서 적과 맞서야 한다.’
니콜라이가 나섰다.
“자, 자! 다들 이쪽으로 모여 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포진부터 짜자고. 닥치면 늦으니까.”
졸업반 서열 3위의 자격에 더해서 학생 중 낙인의 번호가 가장 빠르기도 했다.
‘3,120번.’
정상적으로 사고하고, 빠르게 분석했으며, 과감하게 판단을 내린 정도의 순위.
“어차피 적들도 전부 높은 순위는 아닐 거야. 그렇다고 정확히 파악할 수도 없으니 단위대로 끊자. 일단 만 번대는 내 뒤에 서고…….”
니콜라이는 말을 멈췄다. 29명이어야 할 인원 중에 2명이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린 그는 구석에 웅크려 앉은 위저드와 서 있는 사사를 보았다.
“저것들이 진짜.”
니콜라이의 시선을 느낀 사사가 말을 빨리했다.
“어떡하지, 위저드? 계속 숨길 거야?”
위저드는 제르비스와 조우한 일을 보고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무상신에 대한 압박감이 더욱 강해져서, 신경이 극도로 예민한 상태였다.
“야! 너희들!”
니콜라이가 소리쳤다.
“뭐 해? 시뮬레이션 해야 한다고! 빨리 와! 다들 기다리고 있잖아!”
위저드가 말했다.
“사사, 너는 가. 나는 빠질래.”
“어? 그게…….”
니콜라이는 그 말이 거슬렸다.
성큼 걸어온 그가 위저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뭐가?”
“너도 이 학교 학생이잖아. 그럼 우리랑 같이 싸울 연습을 해야 하는 거 아냐?”
크리스가 나섰다.
“야, 윽박 좀 지르지 마. 네가 대장도 아니고, 당장 싸우는 것도 아니잖아.”
“내가 순위가 높다고 이러는 거 같아? 그냥 같이 좀 하자는 거야. 위저드가 이러고 있으면 다른 애들이라고 열심히 하고 싶겠냐?”
실제로 학생들의 표정도 조금씩 굳어졌다.
니콜라이가 위저드에게 물었다.
“순위부터 공유해. 몇 번이야?”
웅크리고 있던 위저드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딴 거 안 해.”
굴종의 낙인에 대한 순수한 감상일 테지만 니콜라이의 속은 부글거렸다.
“흥! 너는 좀 다르다 이거지? 세상이 이 지경이 됐는데, 아직도 특별하고 싶어?”
위저드의 마음은 어두웠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빛으로 가득 찼던 세계는 이제 저 먼 별처럼 작게 반짝거릴 뿐이었다.
“무엇을 기대했지?”
하비츠의 목소리가 들렸다.
웅크리고 앉은 위저드의 옆에 그도 똑같이 등을 기대고 하늘을 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미소와 친절 속에, 네가 모르는 아름다운 것이라도 있을 것 같았어?”
“…….”
“그래도 좋은 녀석들이잖아?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으니까. 아니, 이것도 자기 보호일까? 인간은 타인에게 온갖 것을 투영하지. 그리고 마치 자신이 그 사람에 대해서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처럼 군단 말이야.”
위저드는 그저 듣고 있었다.
“건조한 세상이야.”
하비츠가 넋두리처럼 말했다.
“대체 얼마나 차가울까, 미소 안에 감춰진 본심은. 대체 얼마나 냉철한 것일까, 감정 밑에 깔린 계산은? 대체 얼마나 잔인한 것일까, 호의 속에 감춘 적의는. 그런 생각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결국 미쳐 버린다.”
정신착란.
“바로 너처럼.”
위저드는 부정하지 않았다.
“다시 되찾는 수밖에 없어. 초공의 위저드, 너의 위치를 되찾으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올 거야. 할 수 있잖아? 너는…… 바로 나니까.”
니콜라이가 말했다.
“아, 몰라! 싸우기 싫으면 저기 가서 엄폐물 나르는 거나 좀 도와. 그건 할 수 있잖아?”
나의 위치.
“왜? 자존심 상하냐? 걱정 마. 나도 같이 할 거니까. 그럼 불만 없지? 자, 빨리 일어나.”
니콜라이가 손목을 붙잡고 일으켜 세우자 위저드가 순식간에 끌려갔다.
“어?”
평소라면 어림도 없는 결과일 것이기에 학생들이 받은 충격은 상당했다.
‘역시 굴종의 낙인이 작용한다.’
당황한 건 니콜라이도 마찬가지였으나 손목을 붙잡은 힘을 풀지는 않았다.
“쳇, 이렇게까지 해야 되냐? 저 짐만 옮기면 쉬게 해 줄 테니까, 그다음부터는…….”
“야.”
위저드가 말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망상 속의 하비츠 또한 위저드와 똑같이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니콜라이는 지지 않았다.
“그럼 우릴 도와.”
“싫어.”
“그럼 나도 안 놓아줄 거야. 정말 나한테 끌려가고 싶어? 저기까지?”
“니콜라이!”
크리스가 따지고 들려는 그때, 위저드를 제외한 모든 시간이 얼어붙었다.
순수한 분노.
그녀의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초공 무상신의 화신이 역뢰처럼 솟구쳤다.
1프레임이 지나갔다.
니콜라이가 깨달은 것은 갑자기 정수리를 강타하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큭!”
학생들은 입을 벌렸다.
위저드가 업어치기로 니콜라이를 땅에 수직으로 꽂아 버린 것이었다.
“어, 어떻게? 불가촉천민인데.”
시이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파계.’
방어 불능, 회피 불능, 어떤 대응도 불능.
마법은커녕 각오조차 없던 상태에서 충격을 받은 니콜라이의 의식이 흔들렸다.
“으으!”
위저드는 니콜라이의 허리에 올라타 목을 조였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니콜라이는 자신의 목에 압박감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무상신만 아니면 돼.’
정신을 가다듬고 반격을 하려는 그때, 위저드를 본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어, 어…….”
온몸의 장기가 굳어 버린 듯 숨조차 쉴 수 없는 공포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누, 누구야, 이 사람은?’
살의의 눈빛을 치켜뜬 얼굴은 평소에 그가 알고 있던 위저드가 아니었다.
“죽고 싶냐?”
니콜라이는 사지를 파르르 떨었다. 마법사의 정신마저 뭉개는 듯한 살의였다.
‘악마다.’
자신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살, 살려 주세요.”
위저드는 손을 풀지 않았다. 무상신을 다시 발동하면 목이 부러질 터였다.
하비츠가 말했다.
“그래, 정답은 분노야. 그것만큼 순수한 것은 없지. 너의 두려움도, 잡다한 생각들도 전부 세상에 투영시켜 불태워 버리면 되는 거라고.”
“위저드.”
지금은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누군가의 목소리에 그녀의 어깨가 움찔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곳에, 에테르 파동이 열린 공간에서 시로네가 서 있었다.
“스, 스승님.”
시로네의 놀란 표정에 정신이 들었다.
“헉!”
비로소 분노를 거두고 돌아보자 여전히 겁에 질려 있는 니콜라이가 보였다.
“아…….”
위저드는 깨달았다.
찬란했던 빛도, 애써 지켜 왔던 한 줌의 별빛마저도 이제 사라져 버렸음을.
‘끝났구나, 나는.’
그녀의 두 팔이 힘없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