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293
“뭐야? 팬이라며?”
레온은 세계 최고의 싱어송라이터였다.
신세기 최고의 아티스트상을 수상했고 숱한 배우들과 염문을 뿌렸다.
물론 그 모든 설정은 며칠 전 히든 코드가 패치한 정보에 지나지 않았다.
누구도 위화감을 못 느끼는 것은 히든 코드가 논리적 모순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또한 레온도 미싱 링크가 적용되어 이 세계를 진짜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여자는 방을 둘러보았다.
“온통 야훼네. 관심이 많았나 봐? 나는 요즘 좀 그렇더라. 거짓말쟁이잖아.”
벽면에 붙은 최근 기사에 ‘바깥 세계의 진실은?’이라는 헤드라인이 적혀 있었다.
‘그랬나?’
레온은 기시감을 느꼈다. 마치 이 순간을 꿈에서도 경험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뭐…….”
흔한 일이니까.
“아직은 모르지. 본인의 입으로 밝힌 적은 없잖아. 그 반대일 수도 있고.”
“피, 말 안 하는 걸 보면 뻔하지 뭐. 근데 이상하다?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레온은 사탄 숭배자였다.
최후의 전쟁 이후 사탄 숭배 조직에 들어갔고, 광신의 힘으로 강력한 능력을 얻었다.
그런 설정.
레온은 손을 휘저었다.
“됐어.”
마법으로 만든 화면이 사라졌다. 그는 팔과 다리로 여자를 끌어안았다.
“세상도 개판이 됐는데 뭐.”
“잠깐, 잠깐!”
여자가 애원했다.
“나, 한 번만 씻으면 안 돼? 이틀 동안 안 씻었잖아. 내가 찝찝하단 말이야.”
“안 돼.”
“너 진짜 취향 특이하다. 도대체 왜?”
“글쎄.”
왜일까?
“사람의 몸 냄새를 맡으면, 내가 진짜로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어릴 때부터 체취를 탐닉했던 것 같다.
여자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결국 레온의 체중을 온전히 감당했다.
“하여튼 예술가들은…….”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오른 그녀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레온의 목을 쥐었다.
“그러고 보니 너, 불가촉천민이지? 미안하지만 나는 5억 번대란 사실.”
레온은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그가 낙인을 찍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멋있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다가 널 죽일 수도 있어.”
“그래.”
레온의 미소가 균열처럼 가늘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것도 재밌겠네.”
***
구스타프 제국.
나르바다의 고아원.
“당연히 알죠. 제르비스.”
에이미와 성음은 오래전에 제르비스가 살았던 고아원 원장의 얘기를 들었다.
“기억이 선명해요. 폭력성이 아주 강한 아이였죠. 고래고래 악을 지르고 나면 허무한 듯 멍한 상태에 빠지기도 했고요. 아마 아드레날린 작용일 거예요. 그런 상태가 지속되니 아이가 견딜 재간이 있나요? 어느 날 사정을 하더라고요. 자신을 가두어 달라고. 일단 그렇게 했어요. 그리고 경과를 지켜보려고 했는데…….”
“일이 터졌나요?”
“딱히.”
원장은 고개를 저었다.
“큰일은 없었어요. 다만, 환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때 여기서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병원에 보냈죠.”
원장은 창문을 돌아보았다. 불가촉천민인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제르비스가 세계를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지금도 믿기지 않아요. 난폭하기는 했지만, 반성할 줄도 아는 애였거든요. 밤마다 울면서 잠들었는데.”
에이미가 물었다.
“그 후로 소식을 들은 건 없나요?”
“네. 제르비스를 유독 아꼈던 교사가 있어요. 메이델 씨라고. 지금은 정년퇴직을 하셨지만 당시에 수도에 일이 있어서 아르페사에 들른 적이 있다더군요. 하지만 제르비스는 만나지 못했다고 해요.”
‘메이델이라.’
키워드를 추가한 건 수확이었다.
“그분은 지금……?”
“전쟁 직후 코트리아로 망명하셨어요. 정확한 주소는 저도 모르겠네요.”
어차피 성음이 있으니 성전에 들러 인구등록표를 조사하면 될 일이었다.
“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만 가 볼게요. 일이 끝나면 사례하겠습니다.”
“아뇨. 솔직히 말하면, 지원금 때문에 돌본 것도 있었어요. 저에게도 책임이 있는 거겠지요. 부디 제르비스를 옳은 길로 이끌어 주세요.”
그렇게 면담이 끝났다.
나란히 고아원을 나선 에이미와 성음은 한마디 말도 없이 생각에 잠겼다.
어색한 분위기에 에이미가 물었다.
“저기, 성음 씨는 어떻게 생각해? 난 우선 아르페사부터 확인해 보고 싶은데.”
“그러렴.”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또한 평소보다 말수가 적다는 건 에이미를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숨 막혀서 일을 할 수가 있나.’
에이미는 용기를 냈다.
“그나저나 이것도 인연이네. 사실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었거든, 성음 씨랑.”
“그러니? 나는 딱히.”
이쯤 되자 에이미도 부아가 났다. 애초에 그녀도 참는 성격은 아니었다.
“저기, 있잖아.”
“오해하지 말렴. 내 생각을 말했을 뿐이니까. 너에게 악감정이 있는 게 아니다.”
아마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오만할지언정 냉혈한은 아닌 성음이기에 오히려 더 기분이 나빴다.
성음이 마법을 시전했다.
공간이 급속도로 압축되면서 아르페사 병원의 정경이 빠르게 밀려들었다.
“가자. 시로네가 필사적으로 싸우는데 한가롭게 쉬고 있을 수는 없으니.”
성음이 경계선을 넘었다. 에이미도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래. 가자, 가.”
***
불가촉천민들은 굴종의 낙인을 찍은 자들을 피해 광활한 오지로 들어갔다.
그런 조직체가 적게는 100명에서 많은 곳은 3천 명 규모로 흩어져 있었다.
순위가 없기에 평등하고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은 그들의 착각일 뿐이었다.
“어이, 당신! 보급품을 왜 남에게 줘?”
“무슨 상관이야? 내가 받은 식량인데. 이분이 며칠째 굶으셨다잖아.”
“웃기고 있네! 여자니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거 모를 줄 알아? 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공동체를 망치는 거야. 룰을 따라야지, 룰을!”
빵을 받은 여자가 소리쳤다.
“아저씨가 뭔데 끼어들어요? 서로 돕고 사는 게 공동체죠! 빵이 뭐 별거라고.”
남자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결국 그 분노는 이 사달을 만든 자에게 쏠렸다.
“그 빵 이리 내놔! 넌 받을 자격이 없어! 여러분, 모두 동의하는 거죠?”
“누구 마음대로! 이건 내 거라고!”
“이익!”
몸싸움이 벌어졌다.
주변인들이 말리고 나섰으나 그들 또한 결국 화를 내고 싶을 뿐이었다.
“그만해! 누군 주먹 없는 줄 알아?”
너도나도 끼어들기 시작하면서 결국 집단 폭력 사태로 번지고 말았다.
“악! 아파! 그, 그만!”
구둣발로 짓밟히던 남자는 이러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선택했다.
‘제르비스에게 굴종합니다.’
손목에 낙인이 찍혔다.
11억 번대였으나 이곳에서는 그가 왕인 셈이었다.
“이 개자식들!”
충격을 무시하고 일어서자 그를 짓밟던 자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너, 설, 설마?”
“거지 같은 것들이. 날 우습게 여겨?”
처절한 복수극이 치러지자 낙인을 찍는 자들이 기하급수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제, 제르비스 님!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이와 유사한 일들이 세계 각지의 불가촉천민 공동체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흐으으으!”
제르비스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보랏빛 오라가 끝을 모르고 거대해졌다.
‘더 강해졌어.’
시로네는 미카의 신호를 받았다.
-울티마 수치 92.3퍼센트. 8시간 뒤에 울티마 시스템에 도달하는 추이입니다.
식은땀이 났다.
‘진짜로? 진짜 울티마라고?’
악을 위한 성지는 없다.
악의 방법론을 따르는 이상 절대로 100퍼센트에는 도달할 수 없을 거라고…….
‘틀렸어.’
생각했다.
‘악과 싸우기 위해 악의 방법론을 택한 사람 또한 울티마에 들어간다. 남은 건 불가촉천민. 하지만 그들은 곧 죽거나 낙인을 찍게 돼.’
그런 시스템인 것이다.
유일한 희망이라면 불가촉천민인데도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소수의 인원들.
하지만 제르비스가 지금보다 더 강해지면 그들도 막을 방도가 없을 터였다.
제르비스는 괴성을 토해 냈다.
“흐오오오!”
보랏빛으로 불타는 안광, 살의의 파동에 의해 공간이 일렁거릴 정도였다.
‘죽인다. 죽이고 싶어!’
제르비스는 의문한다.
이 끔찍할 정도로 강렬한 살의의 충동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신이여, 말해 보오. 그저 죽이는 것만이 내 삶의 전부라면, 그것 외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 없도록 태어난 것이라면…….’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
신은 무심하다.
그래서 제르비스는 더욱 증오하며, 그 감정을 모조리 바깥에 토해 내는 것이었다.
“죽어라! 야훼!”
세계를 일그러뜨리는 것 같은 힘으로 밀려든 문어의 다리가 시로네를 휘감았다.
위저드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해야 돼.’
2시간 가까운 사투 끝에 제르비스가 준동경계에서 사망한 횟수는 고작 12번.
‘애초에 상정한 1천 회는 의미가 없어. 내가, 내가 제르비스를 타격해야 돼.’
초공을 의식한 상태에서 무상신을 발동한다.
“으.”
온몸이 굳을 정도의 공포였으나, 시로네의 위기 앞에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간다!’
초공 무상신-앵화개박련.
1프레임이 소실되고, 다음 순간 제르비스의 몸에 붉은 꽃잎이 피어올랐다.
이미 기술은 들어가 버린 것.
따라서 절대로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충격파가 제르비스를 두들겼다.
“으아아아!”
문어의 화신이 사라졌다. 모든 풍경이 점으로 구겨지며 기억으로 스며들었다.
전투 시간 : 1시간 54분
제르비스 준동경계중사망 : 13회
“큭!”
새로운 풍경을 목도한 시로네는 정신을 차리고 곧바로 위저드를 살폈다.
“위…….”
“꺄아아악!”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위저드가 땅바닥에 쓰러져 몸을 웅크렸다.
“악! 아아악!”
나약한 아이가 아니다.
그럼에도 정신적 비명이 육성으로 터져 나올 정도의 공포. 그것이 무한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