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3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명심해라. 친구를 버리는 건 또 하나의 너를 버리는 것이다. 어설프게 할 생각 하지 마라.”
“네!”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인 리안은 검을 허리에 차고 저택으로 달려갔다.
카이트의 눈빛에 그리움이 담겼다.
‘내 역할은 끝났어.’
작별의 시간이 조금 빨리 왔지만 사나이답게 헤어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제자의 앞날에 무운이 깃들기를.
***
저택의 분위기는 싸늘했다.
모든 업무가 중단되었고, 집사들과 시녀들은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자리를 지켰다.
직계가족들이 앉아 있는 소파의 뒤편으로 집사장 루이스가 안경을 매만졌다.
그 옆에는 부집사 테무란이 꼬장꼬장한 시선으로 시로네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적의와 멸시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무릎을 꿇고 있는 시로네였다.
마치 콜로세움의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집사장, 보고하라.”
“네, 가주님. 테무란이 고용한 시로네는 1년 6개월 동안 기거하면서 오젠트 가문의 권위에 손상을 입힌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수많은 집사들이 막내 도련님과 시로네가 어울리는 걸 목격했으며, 저 또한 시로네가 도련님에게 함부로 말하는 것을 들은 바가 있습니다. 세부적인 정황 근거는 테무란이 작성한 집사들의 증언 서류로 첨부하겠습니다.”
비쇼프가 말없이 손을 뒤로 넘기자 루이스가 정확히 서류를 전달했다.
착! 착! 서류철이 거칠게 넘어가는 동안 레이나는 슬그머니 시로네에게 다가갔다.
“시로네,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아빠를 설득해 볼 테니까. 아무 일 없을 거야.”
시로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예상과 달리 너무나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어 레이나는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불안감은 찾아볼 수 없는 눈빛이었다.
‘침착한 척하는 게 아니야. 정말로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보고 있어.’
시로네는 두렵지 않았다.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일 뿐, 아직 무언가가 결정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서류를 훑어본 비쇼프가 입을 열었다.
흑발의 계통답게 차가운 인상의 그는 목소리에도 사람을 얼어붙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아리안 시로네, 이 서류에 적혀 있는 내용이 사실인가?”
“아빠, 시로네와 리안은…….”
“레이나, 너에게 물은 게 아니다.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지금은 가만히 있어라.”
레이나는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원리 원칙과 냉정함을 힘의 근거로 삼고 있는 비쇼프는 감정으로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로네가 말했다.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너무 침착한 모습에 지켜보던 집사들이 놀랐으나 그조차도 비쇼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말해 봐라.”
“만약 저와 막내 도련님이 친구라면, 막내 도련님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위험한 상황에서도 친구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에 레이나의 눈빛이 사랑스럽게 변했다.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지금 이 자리는 평민인 너를 추궁하는 자리다. 리안이 어떤 죄를 저질렀든, 그것이 가문의 일인 이상 우리는 리안을 보호하고 지킨다.”
비쇼프의 말에 가시가 있었으나 시로네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일말의 걱정을 털어 버린 시로네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사실을 고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저와 리안은 친구가 맞습니다. 1년 동안 우정을 쌓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감히 내색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시로네의 말은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나 반신반의했던 일이 사실로 드러나자 함께 생활했던 집사들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멍청한 녀석.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귀족 가문의 자제와 산꾼의 자식이 1년 넘게 친구로 지내 왔었다니.
실체 없는 미담으로만 세상을 떠돌던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오젠트 가문의 이름이 너에게는 가벼웠나 보군. 시로네, 가주로서 너를 처형하겠다. 처음부터 그런 계약을 하고 들어왔으니 나름의 각오는 있었겠지.”
레이나가 나섰다.
“아빠! 잠깐만 얘기를 들어 보세요! 발언권을 준다고 하셨잖아요!”
“그것도 판단의 여지가 있을 때의 얘기지. 이미 자백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건 무의미한 짓이야. 집사장.”
“네, 가주님.”
“일을 진행해라. 또한 이 일은 절대로 바깥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레이나는 다급해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차분한 시로네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 막을 수 있을까?
여태까지 비쇼프가 가주의 이름을 걸고 내린 결정이 번복된 적은 없었다.
“누구 마음대로!”
리안이 저택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단지 그가 등장한 것만으로 내부의 공기가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누가 내 친구를 허락도 안 받고 처형한다는 거야?”
비쇼프가 딱 잘라 말했다.
“나다.”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친구가 됐을 뿐이잖아!”
“죽을죄를 지어야만 죽는 건 아니다. 귀족의 사정이란 네 생각보다 훨씬 복잡해. 그 복잡한 사정을 가문이 감당해 내고 있기에, 너 또한 귀족의 아들로서 특혜를 받으며 자란 것이야.”
“친구를 버리면서까지 얻어야 하는 특혜라면 내 쪽에서 사양하겠어.”
“철이 없구나, 리안. 친구란 나눌 수 있는 것이 확실한 관계다. 저 아이가 너를 친구라고 생각할까? 그걸 어떻게 믿지? 예를 들어 돈을 노리고 접근했다고 쳐 보자. 그렇더라도 너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을 테지. 그런데도 너는 저 아이를 믿을 수 있다는 거냐?”
“시로네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아.”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믿냐는 거다. 시로네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를 제시해.”
레이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완전히 말려들었어.’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는 없기에 진실한 친구라는 증거도 없는 것이다.
아버지의 말에서 한기를 느낀 리안은 진검의 손잡이를 가만히 움켜쥐었다.
가슴속에 뜨거운 것이 밀려들었다.
‘그렇군요, 스승님.’
카이트의 말을 이해한 리안이 폭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하!”
부자지간에 기 싸움이나 하려고 온 자리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진검 승부였다.
“역시 아빠는 못 당하겠어.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잖아. 친구라는 증거? 내가 믿고 있어. 설령 시로네가 날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믿고 있는 한 시로네는 내 친구야. 이것이야말로 명백한 증거라고!”
이번에는 비쇼프의 머리가 뜨거워졌다.
어쨌거나 리안의 말 또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가주의 말에 거역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아버지와 자식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도 수많은 귀족이 몰락하고 있고, 나에게는 오젠트를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어. 자식이라고 해도 파문시킬 수도 있다.”
비쇼프는 배수의 진을 쳤다.
아들을 쫓아내다니.
집사들은 물론이고 식구들마저 이번 발언에는 당황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리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쇼프와 벽을 세우듯이 전에 없는 예의를 갖추어 정중히 답했다.
“그것이 친구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 웃으며 나가겠습니다.”
쾅!
비쇼프는 구둣발로 바닥을 쳤다.
용납할 수 없다. 고작 열여섯 살짜리가 파문을 감수한다고?
어리광이다. 싸가지없는 행동이다. 부모라는 약점을 이용해 강짜를 부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검을 뽑아라. 파문을 감수한다는 건 가족조차 버리겠다는 뜻이겠지? 정말로 친구를 위한다면 이 자리에서 목숨을 걸어라.”
리안은 묵묵히 검을 뽑았다. 그 행동이 비쇼프를 더욱 화나게 했다.
“정녕 애비에게 칼까지 들이대는 것이냐?”
“아버지를 향한 게 아닙니다. 제 진심을 믿지 못하시니 이렇게라도 하는 수밖에요. 제가 검을 뽑은 이유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언제부터 네가 친구를 소중히 여겼지? 넌 또래의 귀족들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들이 빛나 보였기 때문이지. 너는 너보다 못한 평민을 곁에 두고 위안을 얻는 거야.”
“이번만큼은 아버지가 틀렸습니다. 시로네는 저보다 빛나는 친구입니다. 저는 시로네가 더 높은 곳에서 빛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습니다.”
비쇼프는 허탈했다.
무슨 말로 현혹을 시켰기에 단순하기 짝이 없는 아들이 홀라당 넘어간 것일까?
“너냐? 네가 리안을 저렇게 만들었느냐? 평민과 귀족이 친구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설득했느냐?”
시로네가 말했다.
“설득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그런 말을 한 적도 있겠지요.”
리안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시로네, 가만히 있어. 내가 처리할게. 무슨 일이 있어도 너한테는…….”
“리안.”
전에 듣지 못한 차가운 말투에 돌아보자 시로네가 차분히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네가 책임져야 할 일은 네가 책임져라.”
비쇼프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냉정한 말에 가족은 물론 리안마저 한기를 느꼈다.
“어? 그, 그래. 당연하지.”
“하지만 책임져야 하지 않을 일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어. 이 사태는 우리 둘이 함께 만든 거니까. 앞으로도 함께 헤쳐 나가면 되는 거야.”
리안을 돌아본 시로네가 눈웃음을 지었다.
“설령 이 자리에서 죽는다고 해도, 나는 너와 친구가 된 것을 후회하지 않아.”
정적이 이어졌다.
집사들은 물론이고 오젠트의 식구들조차 이 순간에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리안에게는 가뜩이나 타오르고 있는 불꽃에 연료를 들이부은 격이었다.
“그래! 내 말이 바로 그거야! 설령 내가 파문당한다고 해도 우린 친구라고!”
집사들이 술렁거렸다.
처음에는 냉소적이던 그들도 이제는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손등으로 턱을 받친 레이나가 미소 지었다.
‘대단하구나, 시로네.’
부정할 수 없는 논리로 어른들을 침묵시켰다.
시로네의 말에 반박할 수 없는 이유는, 모두 감정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다.
‘한때는 누구나 그런 친구가 있었고, 또 그런 친구를 만나기 바랐기 때문에.’
오젠트 가문이 내세운 철의 논리도 한낱 인간의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영리해. 어떤 의미로는 아빠와 닮았을지도.’
그럼에도 시로네가 밉지 않은 이유는 계산보다는 진심이 앞서기 때문이다.
‘글쎄. 사실 알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진심이라고 믿고 싶게 만드는, 그런 힘이 있어. 저 아이 말이야.’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시로네의 가장 큰 무기가 아닐까 하고, 레이나는 생각했다.
꿈을 향한 첫걸음 (6)
그때 2층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푸하하하! 이거 아주 걸작이로구만! 말년에 이런 구경을 하게 될 줄이야! 역시 청춘이 최고지!”
놀란 시녀들이 비명을 지른 반면 가족들은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푸른빛이 감도는 까까머리의 노인이 2층 발코니에 기대어 서 있었다.
시로네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리안의 최종 진화형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거구에 팔뚝이 터질 듯 꿈틀거렸다.
리안의 할아버지 오젠트 클럼프였다.
“할아버지!”
레이나가 천군만마를 얻은 표정으로 일어섰다.
자신과 리안만으로는 냉정한 흑발의 가주를 설득시키기에 힘에 부치던 차였다.
‘됐어. 할아버지라면…….’
딸의 표정을 외면하고 비쇼프가 물었다.
“오셨습니까, 아버님. 레이나에게 듣기로는 며칠 걸린다고 하던데요.”
“껄껄! 친구 놈이 젊은 색시 끼고 도망쳐 버리는 바람에 일찍 왔지. 그나저나 이곳은 여전히 시끌벅적하구나. 청춘이란 역시 좋은 것이야.”
“딱히 좋은 일은 아닙니다. 가문의 체면이 땅에 떨어졌으니까요.”
“글쎄다.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자니 모두 할 말이 많은 것 같은데, 체면이 떨어졌는지 어쩐지는 각자의 의견을 들어 본 다음에 결정하는 게 어떻겠냐?”
레이나는 속으로 ‘할아버지 최고!’라고 외쳤다.
가주의 자리는 아들에게 물려준 클럼프지만 공인 3급 검사의 발언권은 여전히 막강했다.
용기를 얻은 레이나가 일어섰다.
“제가 먼저 말할게요. 저는 시로네를 어제 처음 만났지만 영특하고 재능이 있는 아이였습니다. 또한 시로네는 계약직으로서 모든 계약을 완수했고, 오늘이면 가문을 떠나기로 되어 있는 상태였죠. 이러한 정황을 봤을 때 시로네가 리안에게 딱히 어두운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는 보기 어렵고, 그렇기에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확신이 넘치는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그녀는 당당하게 자리에 앉았다.
물론 이제야 겨우 양자의 균형을 맞추었을 뿐 전세가 역전된 것은 아니었다.
청발의 유대감이 흑발보다 좋다고 하지만 전대 가주였던 클럼프는 공정했다.
반대파가 분명한 라이에게도 발언권을 주었다.
“우리 둘째 손자의 생각은 어떠한고?”
라이가 예의 냉정한 말투로 답했다.
“난 저 아이가 싫어.”
다름 아닌 가문 최고 유망주의 발언에 집사들의 여론도 다시 흔들렸다.
“하지만 신경 쓰고 싶지 않아.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야.”
비쇼프가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저 아이가 싫다면서 신경 쓰고 싶지는 않다니?”
“말 그대로야. 난 저 아이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하지만 단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경 쓰기 싫은 내 마음까지 위증하고 싶지 않아. 신경 쓰고 싶지 않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한 거야. 리안이 누구랑 친구로 지내든, 나는 빨리 이 안건을 끝내고 왕궁에 가고 싶을 뿐이야.”
레이나는 혀를 내둘렀다.
비록 자신의 동생이기는 해도 뼛속까지 자기중심적인 성격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성격이 리안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듯했다.
클럼프는 소년처럼 키득거렸다.
저마다 개성 있는 식구들을 보는 게 즐거웠고, 이것이야말로 두 가지 혈통을 가진 오젠트의 강점이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시로네라는 소년을 가장 오랫동안 관찰했을 부집사의 의견을 들어 보지.”
테무란이 한 걸음 나서자 루이스가 곁눈질로 흘기는 시선을 보냈다.
줄을 잘 서야 한다는 의미였다.
식구끼리야 무슨 말인들 못 하겠는가. 하지만 집사에게 중요한 건 고용주의 의중이었다.
“시로네는 1년 6개월 동안 제가 지시한 일을 완벽하게 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