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38
***
“으으.”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두통에 정신을 차린 프리먼이 몸을 뒤집었다.
뇌진탕에 하늘이 둘로 보였으나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마르샤.’
애써 몸을 일으켜 보지만 상체를 절반도 들기 전에 다시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크윽!”
당장은 움직이는 것조차 무리인 가운데 프리먼은 힘을 빼고 상태가 호전되기를 기다렸다.
“…….”
여전히 아롱거리는 시야 속에서 어린 시절 마르샤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 프리먼이다. 겁쟁이 프리먼.”
“진짜네? 야, 팔자 눈썹 프리먼! 일로 와 봐. 오늘은 내가 네 전담이다.”
매사에 주눅이 들어 사람의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프리먼은 늘 놀림거리였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겁쟁이인 인간은 없다. 그는 자신의 심각하게 기울어진 팔자 눈썹이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만든 원흉이라고 생각했다.
“하, 하지 마. 아프단 말이야.”
“그러니까 울어 보라고. 널 울리면 마르샤가 오거든. 예쁜 마르샤 말이야.”
몸을 웅크린 와중에도 프리먼이 소리쳤다.
“마르샤는 괴롭히지 마!”
“멍청아, 마르샤가 이 골목의 대장인데 누가 괴롭혀? 게다가 마르샤는 재밌거든. 빨리 울기나 해. 에잇, 에잇.”
“으아아앙! 마르샤!”
프리먼이 울음을 참지 못하고 도망치자 아이들이 깔깔대며 소리쳤다.
“마르샤한테 여기로 오라고 해! 전쟁놀이할 거니까!”
마르샤는 골목의 인기인이었으나 다른 아이들처럼 자주 밖에 나오지 못했다.
그 이유는 프리먼만 알고 있었고, 그녀를 불러낼 수 있는 사람도 그가 유일했다.
눈물을 훔치며 마르샤의 집에 도착한 프리먼은 잠겨 있지 않은 현관으로 들어갔다.
“마르샤.”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쓸쓸한 집이었다.
용병인 아버지는 그 흔한 가구조차 들이지 않았고, 밤새 술을 진탕 퍼먹고 들어와서는 마르샤를 때리기 일쑤였다.
“마르샤, 나 왔어.”
방 끝에 마르샤가 앉아 있었다.
텅 빈 방에 놓인 것은 먹다 남은 빵과 우유뿐이지만 단발의 소녀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녀의 앞에서 프리먼은 또다시 가슴이 뛰었다.
“얼굴은 또 왜 그래?”
“마르샤, 애들이 자꾸 때려.”
이유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울리지 말라고 했잖아. 허구한 날 당하면서 왜 자꾸 그 길로 가는 거야?”
“아니야! 그 녀석들이 매번 찾아낸단 말이야.”
마르샤가 일어섰다.
“알았어. 내가 혼내 줄게. 걔들 어디에 있어?”
프리먼이 고개를 저었다.
“안 가면 안 돼? 아저씨가 올 수도 있잖아. 너 없으면 엄청 화내실 텐데.”
“어차피 밤에 와도 똑같아. 가자. 너 괴롭히면 다시는 안 놀아 줄 거라고 말할게.”
“싫어! 너도 그 자식들하고 놀기 싫으면서 나 때문에 놀아 주는 거잖아. 그런 자식들에게 네가 억지로 웃어 주는 거 싫단 말이야.”
마르샤가 프리먼의 이마를 밀며 말했다.
“어이구, 고마워라. 그러면 좀 강해지든가. 도움받는 주제에 큰소리는.”
“아무튼 싫어! 가지 마.”
“오늘따라 왜 그래? 다른 애들한테도 그렇게 큰소리 좀 쳐 보든가. 아니면 뭐야, 혹시 너 나 좋아하니?”
프리먼의 얼굴이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이 웃긴 마르샤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야, 농담이야, 농담. 하여튼 간은 콩알만 해 가지고…….”
“그래! 너 좋아한다! 어쩔래?”
“응?”
마르샤의 눈이 크게 뜨이고, 프리먼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쏟아 냈다.
“좋아하는 게 뭐 어때서? 내가 너한테 좋아해 달라고 말이라도 했어?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인데 왜 네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야?”
감정 표현에 서툰 것은 알고 있지만, 어떨 때는 그것이 더 무서운 법이었다.
마르샤가 양손을 내밀며 진정시켰다.
“그, 그래. 알았어. 미안해. 좋아하는 거야 당연히 네 자유지. 뭐라고 안 할게.”
“이, 씨! 진짜! 너까지 사람 바보 취급하고!”
프리먼은 왜 화가 나는지 몰랐다. 아니, 알면서도 외면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마르샤가 프리먼을 바닥에 앉혔다.
“바보 취급 안 했으니까 흥분하지 마. 자꾸 감정을 쌓아 두니까 오버하는 거잖아.”
‘난 진짠데.’
여전히 아쉽지만 차라리 이 정도로 정리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마르샤가 넝마 같은 망토를 둘러쓰고 나갈 채비를 하자 프리먼이 물었다.
“진짜로 걔들이랑 놀 거야?”
“아니, 따끔하게 말하고 돌아올게. 금방 올 테니까 기다려. 나랑 놀자.”
프리먼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진짜? 빨리 와야 돼.”
“그래. 배고프면 내 빵 먹어도 돼.”
마르샤가 떠나자 집이 적막에 휩싸였다.
홀로 남은 프리먼은 마르샤의 기분을 이해했다.
‘정말 아무것도 없구나.’
그의 주머니에서 손거울이 나왔다.
선물과 함께 마음을 전하려고 했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으나, 마르샤가 좋아할 것을 생각하니 미소가 지어졌다.
“아저씨도 참 이상하지. 저렇게 예쁜 딸이 있는데 왜 아무것도 안 사 주는 거야? 때리기만 하고.”
손거울을 들여다보자 심각할 정도로 처진 팔자 눈썹을 가진 소년이 보였다.
“에휴.”
이 눈썹 때문에 울보라는 별명을 얻었고, 그렇게 10년을 살다 보니 진짜 울보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이상한가? 이 정도면 괜찮아 보이는데.”
세월이 흘러 프리먼도 열일곱 살이 되었다.
성실히 일한 덕분에 마을에서 평판이 좋은 그였으나 여전히 친구는 마르샤뿐이었다.
철이 들고부터 그녀에 대한 마음은 더욱 깊어졌다. 밤낮으로 일을 하는 이유도 언젠가 자신이 그녀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마르샤의 생각은 다른 듯했으나, 가끔 선물을 받을 때면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언제부턴가 그녀는 웃음을 잃어버렸다.
시기를 명확히 짚을 수는 없지만 마르샤가 커 갈수록 양부의 괴롭힘도 심해져 가는 듯했다.
당시에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가정환경이 비슷해서, 프리먼도 술주정뱅이 아버지에게 매일같이 병신이란 소리를 들으며 살고 있으니까.
어른이 된 프리먼은 생각한다.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몰랐던 이유는, 자신이 둔감해서가 아니라 마르샤가 영악했기 때문이라고.
“마르샤, 집에 있어?”
그날 저녁, 불청객이 될 것을 각오하고 마르샤를 찾아간 것은 운명이었다.
낮에 봤던 그녀의 얼굴이 평소보다 상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나야, 프리먼.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는 그때 프리먼의 불안감은 확신으로 변했다.
‘이건…….’
열린 창문 너머로 피 냄새가 났다.
두 번째 만남(6)
“이 멍청이! 안 돼!”
창문을 뛰어넘은 그는 거실로 달려갔다.
등을 지고 앉아 있는 마르샤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녀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그의 얼굴이 이내 창백해졌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핀 마르샤는 넋을 잃은 듯했고 손에 칼을 쥐고 있었다.
칼날에서 떨어지는 핏물이 바닥에 고인 피 웅덩이로 스며들어 가는 게 보였다.
한 걸음 앞에 양부가 쓰러져 있었다.
시체의 맥을 확인한 프리먼은 입술을 깨물며 물러섰다.
‘죽었어.’
묘하게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해야 될 일의 우선순위를 세울 뿐.
처음으로 자신이 꽤나 차가운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르샤, 어떻게 된 일이야?”
“…….”
그녀는 여전히 정신이 나가 있었다.
어깨를 붙잡고 흔들자 비로소 초점이 되돌아온 그녀가 프리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빠가 날 덮치려고 했어.”
“뭐?”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
비록 양부지만 부모의 이름으로 살아온 세월이 있지 않은가.
“무슨 소리야. 갑자기 아저씨가 왜 너를…….”
프리먼은 말을 멈췄다.
“아.”
갑자기가 아니었을까? 여태까지 곁에서 지켜봤던 마르샤의 삶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그 위태로운 하루하루를 버티며, 마르샤는 얼마나 많은 혼란과 고통을 겪었을까.
분명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테지만 프리먼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마르샤는 스스로를 지옥에서 구했고 그녀가 무사하다는 것에 하늘에 감사했다.
“가자. 여기는 위험해.”
마르샤가 발길을 떼지 못하자 프리먼이 잡아끌었다.
“시간이 없어. 아저씨가 죽은 것을 알면 동료들이 복수하려 들 거야. 떠나야 해.”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라는 말에 마르샤도 정신을 차리고 움직였다.
그때 문득 쓴웃음이 지어졌다.
평생 아무것도 가져 본 적이 없기에, 챙겨야 할 물품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대로 집을 나선 두 사람은 한 번도 쉬지 않고 마을의 입구까지 전력으로 달렸다.
프리먼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일단은 안심이야. 마을만 벗어나면 사람들이 쉽게 추적하지 못할 테니까.”
“그래.”
양부의 동료들은 다를 테지만, 마르샤는 세상 끝까지 도망칠 자신이 있었다.
“고마워, 프리먼.”
“헤헤, 이 정도쯤이야. 빨리 떠나자. 어디로 가든 내가 널 지켜 줄 테니까.”
마르샤의 눈빛이 슬픔에 잠겼다.
장난으로는 충분했지만 이제는 인생이 걸린 일이었다.
“프리먼, 미안해. 떠나는 건 나 혼자야. 너를 데리고 가지는 않을 거야.”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뭐? 무슨 소리야? 바깥세상이 얼마나 위험한 줄 알아? 오늘 일을 보고도 모르겠어?”
“괜찮아. 이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안 돼! 혼자 보낼 수 없어!”
마르샤는 마지막으로 다시 생각했으나 그렇다고 마음이 바뀌지는 않았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무, 무슨 소리야?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
그녀와 함께 떠나야 했기에 프리먼은 필사적으로 사실을 외면했다.
“너는 좋은 친구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하지만 내가 너를 남자로 생각하는 일은 없을 거야. 나를 따라가는 건 너에게도 불행한 삶이 될 거야. 어쩌면 나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할 수도 있어.”
프리먼에게는 잔인한 말이었다.
무엇보다 잔인한 것은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는 점이었다.
“상관없어. 네가 누구를 만나든, 나는 널 지킬 거야. 술주정뱅이 아버지한테 병신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사는 것도 싫어. 이건 내 의지야.”
“멍청아! 왜 말귀를 못 알아들어? 널 좋아하지 않는다니까? 우린 이어질 수 없어!”
“그래서 뭐? 좋아하기 싫으면 하지 마! 나는 그냥 좋아할 테니까! 네가 다른 남자랑 결혼하든 뭘 하든 상관없어! 그냥 내가 좋아하는 거야! 예전에 너도 말했잖아! 그것까지 간섭할 자격은 너한테 없다고!”
이쯤 되자 마르샤도 악에 받쳤다.
“아, 그래? 잘됐네. 어디 평생 나만 쳐다보다가 홀아비로 늙어 죽어라. 사실대로 말해 줄까? 네가 따라오는 건 나한테 짐이야. 개미 새끼 한 마리 못 죽이는 겁쟁이를 내가 언제까지 돌봐 줘야 해? 나만 더 힘들어질 뿐이잖아!”
“난 겁쟁이 아니야! 내가 널 지킬 거야!”
“그러니까 무슨 수로 날 지킬 건데? 네가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어?”
프리먼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더니 바닥의 돌을 집어 들고 자신의 눈썹을 벅벅 긁어내기 시작했다.
놀란 마르샤가 프리먼의 손목을 붙잡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이거 놔!”
마르샤의 손길을 뿌리친 프리먼은 전보다 거칠게 피부를 긁어냈다.
피가 얼굴로 철철 흘러내리기 시작하자 마르샤의 표정이 멍해졌다.
“으으으!”
완전히 눈썹이 떨어져 나간 프리먼이 돌을 던졌을 때 그의 인상은 전과 달라져 있었다.
“어때? 이러니까 나도 무서워 보이지? 내가 겁쟁이였던 건 다 눈썹 때문이야. 이제 누구도 나를 못 건들걸. 그러니까 너한테 짐도 안 될 거야.”
“너…… 미쳤니?”
눈썹이 없는 프리먼의 인상은 확실히 전과 달랐으나 그보다 더 변한 것은 눈빛이었다.
“강해질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강해질 거야. 그러니까 옆에만 있게 해 주면 안 돼? 절대로 좋아해 달라는 말 안 할 테니까, 같이 가게 해 주면 안 돼?”
“너 정말…… 어휴, 이 멍청아.”
마르샤는 고개를 저었다.
냉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조차도 한숨에 밀려 빠져나간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