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47
“크크크! 오랜만이야, 언니. 불같은 성격은 여전하군.”
거대한 그림자가 지면 위로 솟아오르자 관광객들이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저게 뭐야!”
순식간에 인파가 흩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시로네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법에 익숙한 귀족들에게도 하비스트는 차원이 다른 기괴함이었다.
테스 또한 넋이 나가 있었다.
“세상에. 그림자가 일어나서 말을 하잖아? 리안, 너 저런 거 본 적 있어?”
작은 얼굴에 엄청나게 넓은 어깨, 범처럼 가는 허리, 사람의 형상이지만 팔은 인간보다 두 배는 길었고 손바닥은 방패처럼 커다랬다.
“아니, 처음이야. 하지만 시로네는 구면인가 본데?”
넓적한 손바닥으로 카니스의 몸통 대부분을 가로막은 하비스트가 말했다.
“피차 접근은 조심하자고. 이런 곳에서 피를 보기는 싫으니까.”
하수로 보는 말투에 에이미가 다시 다가가려는 그때 시로네가 마법을 시전했다.
육체의 표면을 따라 붉은빛이 감돌기 시작하자 하비스트도 갑자기 말이 사라졌다.
‘레이저.’
건널 수 없는 다리의 전투에서 저것으로 폭사당한 기억이 여전히 생생했다.
시로네가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에이미에게 사과해. 다른 사람의 상처를 들추는 건 안 좋은 짓이야.”
카니스도 지지 않았다.
“상처? 고작 그 정도 말을 들었다고 상처라고? 하여튼 귀족들의 어리광이란.”
“그런 건 상처를 받은 사람이 정하는 거야. 아픈 기억을 상기시켰으면 사과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잖아. 너야말로 언제까지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볼 거야?”
“헛소리 작작 해. 한 번 이겼다고 가르치려 들지 말라고. 예전의 내가 아니니까.”
하비스트의 상체가 더욱 부풀어 오르자 시로네 또한 적색 빛을 강하게 불태웠다.
아린이 행동에 나섰다.
‘미안해, 시로네.’
적의는 없지만 싸워야 한다면 카니스의 편이었다.
촉수형의 스피릿 존이 시로네에게 흘러들어 가는 그때 에이미가 곧바로 앞을 가로막았다.
홍안이 정신 계열의 마법을 차단했다.
“어딜 넘보려고?”
“…….”
마도 생물체, 레이저, 정신 지배, 홍안이 서로의 꼬리를 무는 상태로 전선이 고착되었다.
누구 하나 먼저 움직일 수 없는 이유는 동료의 위험까지 책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어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리안이 나서려는 그때 테스가 황급히 끌어당겼다.
“제발 눈치 좀 있어라. 너까지 그러면 어떡해?”
기껏 유지하고 있는 전투 밸런스가 깨지면 누가 됐든 부상자가 나올 터였다.
“으읍! 놔! 시로네! 우읍!”
필사적으로 몸싸움을 벌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대치한 자들은 허탈감을 느꼈다.
-그만하자, 카니스.
하비스트가 크기를 줄이자 시로네가 레이저의 빛을 소멸시켰다. 아린의 스피릿 존이 사라지고 에이미의 홍안도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카니스가 말했다.
“쓸데없는 소모전은 그만두자. 너희하고 싸우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니까.”
“그래. 우리끼리 싸워서 뭐 하냐? 피차 바쁜데.”
그렇게 일단락이 지어지자, 카니스가 처음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너희들 탈락한 거 맞지? 그런데도 다시 도전한다는 건, 통과할 방법을 찾았다는 건가?”
“아, 사실 그게…….”
시로네가 말하려는 순간 에이미가 팔을 들어 말렸다.
“우리가 왜 가르쳐 줘야 하지?”
이번에는 시비가 아니었다.
어떤 의미로는 목숨을 걸고 얻어 낸 정보인 만큼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상대에게 함부로 발설할 사안이 아니었다.
“너무 경계할 거 없어. 자치 구역에 들어가는 방법 정도는 우리도 알고 있으니까. 아마도 루프 밀매 루트를 타려는 생각이겠지?”
“…….”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에이미는 놀랐다. 설마 앵무 용병단의 루프 밀매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잠깐, 그런데 왜 굳이 시험을 치르려는 거지? 역시 성취와 희생의 방에 뭔가 있는 거야.’
카니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군. 궁금하면 내가 알려 줄까, 시험의 의미가 뭔지?”
“흥! 누가 궁금하대? 그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거든!”
“아하, 그래? 아린, 어때?”
카니스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딴생각을 하고 있던 아린이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응? 아, 거짓말이야. 되게 궁금해하고 있어. 막 퐁당퐁당 뛰고 있거든.”
에이미는 분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퐁당퐁당이 뭔지는 모르지만 초경을 보는 아린에게 감정을 숨기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하하, 이제 알겠지? 아쉬운 건 너희들 쪽…….”
꼬르르르륵.
그 순간 들린 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내린 아린의 얼굴이 홍시처럼 빨개졌다.
위험한 거래(4)
카니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는 눈빛으로 그가 물었다.
“아린, 괜찮아?”
“응, 미안해. 이 정도 굶은 것쯤이야, 뭐. 예전 라둠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카니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알페아스의 지원을 거부하고 자신의 힘만으로 살아남으려 했으나 여비는 턱없이 부족해서 벌써 3일째 굶은 상태였다.
자신은 굶어도 되지만 아린은 아니었다.
10년 동안 라둠에서 그녀를 지켰던 관성은 여전했고, 카니스는 자존심을 버리고 시로네에게 말했다.
“혹시 너희, 먹을 것 좀 있냐? 아린이 며칠째 굶었어. 나는 괜찮으니까 어떻게 안 되겠어?”
시로네는 그제야 카니스의 행색을 살폈다.
길에서 자고 먹은 행적이 고스란히 옷에 드러나 있었다.
‘아케인의 유산을 전부 빼앗겼다고 그랬지…….’
정신 박동 테스트 때 본 이후로 카니스와 아린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아무런 연고도 없는 그들에게는 먹고사는 게 큰 문제였을 터였다.
마법이 있으니 몇 가지 의뢰를 해서 돈을 모을 수도 있을 테지만, 정식 자격증이 없는 사람에게 들어오는 내용은 대부분 청부였다.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시로네는 희망을 보았다.
‘그래도 조금은 변했구나.’
물론 카니스에게 딱히 없던 정의감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양지에서 승부를 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에이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 뭐라도 좀 먹어야겠다. 우리가 전에 갔던 술집이 있으니까 가자. 거기 국수 맛있어.”
“아니야! 난 정말 괜찮아!”
아린이 손을 내저었다.
솔직히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지만 카니스의 자존심을 짓밟고 싶지 않았다.
에이미가 아린의 손목을 강제로 붙잡고 끌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배 속에서 천둥이 치는데. 체력이 있어야 싸우든 말든 할 거 아니야. 카니스, 너도 따라와.”
“나는 됐어. 아린만 가면 돼.”
“시끄럽고. 따라오라면 따라와. 백인백색이라도 배고픈 건 누구나 똑같으니까.”
시로네가 거들었다.
“그래, 카니스. 일단 들어가자. 너에게 묻고 싶은 것도 있고. 먹으면서 얘기해.”
은근한 협상 제안이었으나 카니스에게는 그보다 더 좋은 명분이 없었다.
“쳇! 운 좋은 녀석.”
카니스가 마지못해 따라나서자 일행은 술집으로 들어갔다.
6명이 자리를 잡고 앉자 시로네는 일단 카니스와 아린을 리안에게 소개했다.
대마법사의 제자라는 말에 리안은 조금 놀랐지만, 시로네에게 졌다는 에이미의 친절한 설명에 태연함을 되찾았다.
우선은 배를 채우는 게 급선무였다.
카니스와 아린은 정말로 배가 고팠는지 허겁지겁 국수 두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후우, 이제 좀 살겠네.”
배를 채운 카니스가 상체를 젖히며 숨을 토해 냈다. 그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내뱉었다.
“그래, 덕분에 잘 먹었다.”
무언가를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여느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중요한 시그널이다.
전보다 가까워진 분위기 속에서 시로네도 말을 편하게 할 기회를 잡았다.
“우리도 그렇고 너희도 생각이 많겠지만, 어느 정도는 털어놓고 얘기하자. 여기 왜 온 거야?”
아린이 말했다.
“카니스는 예전부터 고고학자가 되는 게 꿈이었거든. 그래서 유적 탐사를 하는 중이야.”
“아, 카니스의 꿈이 고고학자였어?”
“쳇, 쓸데없는 말은.”
퉁명스럽게 대꾸한 카니스였으나 아린에게 그만두라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비록 사회성은 떨어지지만 물어본다고 넙죽 대답할 만큼 아린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잘했어.’
진실에 가까운 정보를 최대한 감추면서 상황을 돌릴 수 있는 좋은 대답이었던 것이다.
‘우린 반드시 들어가야 해.’
사실 두 사람이 섬에 온 이유는 단순히 고고학의 낭만을 쫓아서가 아니었다.
확고한 목적이 있었고, 그것은 분명 생명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관문의 커트라인이 너무 높은 게 문제야.’
제단을 나오기 전까지는 암담했던 게 사실이었으나 이제는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시로네, 이 녀석이 필요해.’
속마음을 감춘 채 카니스가 물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묻지. 너희들은 여기에 왜 온 거야?”
에이미 또한 심리전이라면 보통은 넘었기에 아린의 초경에 걸리지 않는 범위에서 답했다.
“당연히 케르고 자치 구역에 들어가려고 온 거지. 너희처럼 말이야.”
카니스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거기에 뭐가 있는 줄 알고?”
“흐음, 글쎄, 뭐가 있을까나? 그러고 보니 너는 꼭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후후, 허세는.”
에이미의 눈이 갈매기처럼 휘어졌으나 속에서는 불이 끓어 미칠 지경이었다.
‘알고 있다. 이 자식, 분명 알고 있어.’
대화의 진전이 없고 오히려 꼬여 가자 시로네가 나섰다.
“카니스, 그냥 알고 있는 것들을 얘기해 주면 안 돼?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정보가 별로 없어.”
“시로네.”
“괜찮아. 사실이잖아.”
에이미의 의도는 알지만 결국 패가 높은 건 카니스 쪽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차라리 무장을 해제하고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편이 좋았다.
예상과 달리 카니스는 담백하게 승낙했다.
“좋아. 대신 먼저 확인할 게 있어.”
“뭐든지 물어봐. 아는 거라면 대답해 줄게.”
“우선 너희가 자치 구역으로 가려는 이유. 미로의 시공에 대해 알고 싶기 때문인 거지?”
“…….”
시로네는 잠시 말을 잃었다.
짐작은 했지만 막상 귀로 듣자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그걸? 미로에 대해 알아? 아니, 케르고 유적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시로네가 다급하게 물어 왔으나 카니스는 오히려 신중한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글쎄. 적어도 너희보다는 많이 알고 있다고 봐야겠지.”
시로네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과연 가능한가?’
케르고에 대해 직접 조사한 결과 카니스의 수준에서 접근할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었다.
그것도 불과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아.’
시로네는 카니스의 발밑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고 퍼뜩 떠올렸다.
아케인의 모든 지식을 물려받은 마도 생물체.
“아케인은 알고 있었던 거야?”
시로네의 말을 들은 에이미의 눈빛도 달라졌다.
세상을 호령했던 빌토르 아케인. 비공인 3급의 대마법사라면 케르고 유적에 대해 깊이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시로네와 에이미가 확신을 담은 시선을 쏘아 보냈으나 카니스의 태도는 여전히 어중간했다.
“흠, 내 생각을 말하자면,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반반이라고? 무슨 뜻이야?”
카니스는 말을 아꼈다.
뜸을 들이려는 것보다는, 케르고 유적지에 얽힌 비밀이 시로네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에이미가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올 거야? 어차피 말해야 할 거면 지금 당장 하란 말이야.”
“이해할 수 없군.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설마 밥값 타령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그것도 포함되지. 하지만 다른 이유로도 너는 털어놓을 수밖에 없을걸. 너에게는 우리가 필요하니까. 안 그러면 이렇게 자리에 남아 있을 이유도 없잖아?”
카니스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멍청한 녀석들이 아니니 이렇게 되리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다만 타이밍이 중요한 상황이었다.
“좋아. 솔직히 말하면 나도 너희에게 원하는 게 있어. 그런 점에서 우리는 서로가 필요한 걸 가지고 있지.”
시로네가 물었다.
“원하는 게 뭔데? 통행증을 말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