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48
“흥, 그런 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어. 정신계 마법을 이용하면 종이만 건네도 돼. 아린의 능력은 언어의 영역까지 지배할 수 있으니까.”
그런 방법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시로네는 카니스와 아린이 통역관 없이 제단이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에이미가 물었다.
“그런데 왜 밀수 루트를 선택하지 않았지? 역시 시험의 관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거지?”
이번에는 카니스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장 좋지. 물론 두 번째 루트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해. 어쨌든 우리 중의 누군가는 반드시 시험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지. 하지만 알다시피 나와 아린은 실패했고, 그래서 도움을 빌리려는 거야. 그런 의미로 협상을 하고 싶어.”
“흐음.”
에이미는 카니스의 말을 분석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엉뚱한 호기심이 생겼다.
“근데 너는 몇 점 나왔어?”
“응?”
예상치 못한 질문에 카니스가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시선이 돌아갔다.
“말하고 싶지 않아.”
“어머, 왜? 얼마나 나왔는데? 응?”
“내가 왜 말해 줘야 되지? 그렇게 알고 싶다면 그쪽부터 말해 보시지? 몇 점이야?”
“아니, 너부터 말해. 그럼 나도 말해 줄게.”
“싫어. 네가 말해.”
시로네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는 것을 포기하고 중간에 끼어들었다.
“됐고,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자.”
서로 쫄리는 상황인 것은 마찬가지인지 에이미와 카니스는 냉큼 입을 다물었다.
카니스가 전보다 피곤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내가 제안하고 싶은 건 이거야. 시험의 관문. 즉 성취와 희생의 방을 너희들 중에 1명이 통과하면, 그때 다시 나랑 이야기하자는 거지.”
에이미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건 좀 이상하잖아?”
“뭐가?”
“너도 통과하지 못해서 이러는 거 아냐? 만약 우리가 통과한다면 굳이 너를 데리고 들어가야 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 네가 무엇을 알고 있든 우리도 알게 될 테니까. 그 이상의 것을 줘야 거래가 성립하는 거 아니냐고.”
아쉬운 소리를 했던 쪽이 이제 와 동등한 거래를 하자는 게 뻔뻔했지만 카니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만큼 그가 가지고 있는 카드는 강력했다.
“지금 당장은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내 말을 믿는 게 좋아. 절대로 너희에게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닐 테니까.”
“그렇다면 그걸 증명해 봐. 핵심을 밝히지 않아도 증명은 할 수 있잖아. 그러지 않으면 이 거래는 무효야. 속사정도 모르고 너에게 이용당할 수는 없어.”
카니스는 아린을 돌아보며 의중을 살폈다. 혼자만의 생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린이 말했다.
“말해 주자, 카니스. 신뢰를 쌓는 것도 중요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밥도 사 줬잖아.”
국수 몇 그릇이 그리 비싼 건 아니지만, 굶주린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했다.
그녀의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달은 카니스가 쳇 하고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이렇게 말해 주지. 너희들, 미로에 대해 알기 위해 자치 구역에 간다고 했었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꼭 가야겠어? 거기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시로네는 단호했다.
“응. 우리는 미로에 대해 꼭 알고 싶어.”
“그렇다면…….”
의자에 등을 기댄 카니스가 팔짱을 끼더니 신중한 표정으로 내뱉었다.
“내가 너희들을 살려 줄 수 있을지도 몰라.”
정적이 흘렀다.
아직 아무것도 명확히 밝혀진 게 없음에도 시로네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살려 준다고? 우리를?’
케르고 자치 구역에 어떤 비밀이 존재하기에 이런 말까지 나오는 것일까?
위험한 거래(5)
“분명히 말하는데, 내 정보가 없이 비밀에 접근하면 너희들은 100퍼센트에 근접한 확률로 죽을 거야. 하지만 나랑 함께한다면 살 수 있을지도 몰라. 한마디로 나는 너희들의 목숨을 담보로 거래를 하는 거야.”
“그…….”
에이미가 벌떡 일어섰다.
“그런 협박이 통할 거 같아? 이건 증명이 아니야. 겁을 주려는 것뿐이잖아. 프리먼 조직도 들락거렸던 곳에서 죽고 살고 할 문제가 어디 있어?”
“말했잖아. 자치 지구에는 별다른 위험이 없어. 두 번째 루트로 가도 달라질 것은 없다고. 다만 비밀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험의 관문을 지나야 해. 그리고 시로네.”
카니스는 시로네를 돌아보았다.
“네가 성취와 희생의 방에서 시도하려는 게 뭔지도 알아. 너, 이모탈 펑션을 개방할 생각이지?”
친구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시로네가 입을 열었다.
“맞아. 돌이켜 보면 그곳의 구조가 독특했거든. 전사의 위력을 시험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미로의 시공이 8개일 필요가 없을 테니까. 그래서 혹시나 한 거야. 천사의 눈이 심판하는 건 무력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카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써는 그 방법이 맞기를 바랄 수밖에 없지.”
“응? 너도 확신하지 못하는 거야?”
“말했잖아, 반반이라고. 하지만 나도 이모탈 펑션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짐작은 했어.”
거기까지 들은 에이미가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정리하지. 나는 시로네의 이모탈 펑션을 빌리고 싶다. 시험의 관문을 통과하면, 그 대가로 너희들의 생존 확률을 높여 줄 거야. 어때?”
“좋아. 하지만 조건이 있어. 성취와 희생의 방은 나 혼자 갈 거야. 너희들은 통행증을 이용해서 자치 구역으로 먼저 가 있어. 여기까지도 문제없지?”
목숨이 걸린 일이라는 말을 들은 이상 친구들을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에이미와 리안, 테스가 반대하고 나섰으나 시로네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그의 성격을 질리도록 겪은 카니스도 마지못해 승낙했다.
“좋아. 일단은 통과하는 게 중요하니까.”
술집을 나선 일행은 두 패로 나뉘었다.
에이미 일행과 카니스 일행이 합류했고, 시로네는 홀로 제단으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에이미가 말했다.
“시로네, 너무 무리하지 마. 절대로 이모탈 펑션을 무리하게 개방하면 안 돼.”
유적지의 비밀보다 걱정스러웠다.
“응. 해 보다가 안되면 그냥 포기할게. 너야말로 조심해. 통행증이 있어도 밀수 루트는 불법이니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어.”
“우리야 뭐…….”
에이미는 파티원을 확인했다.
근력의 리안, 민첩의 테스, 암흑 마법의 카니스와 정신 계열의 아린.
“딱히 별일은 없을 것 같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시로네도 피식 웃었다.
“그럼 이따 보자.”
시로네가 제단이 있는 곳으로 향하자 에이미 일행도 발길을 돌렸다.
후미에서 걷고 있던 카니스가 몸을 돌렸다.
“뭐 해? 빨리 가자.”
아린이 여전히 자리에 남은 채 시로네가 사라진 자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상한 느낌에 카니스가 다가갔다.
“왜 그래?”
“저기, 카니스……. 혹시 시로네는 금발이야?”
“응?”
아린이 사물을 받아들이는 형태는 평범한 인간과 다르다.
특정 사물의 형태와 이름을 결합시키지 못하기에, 무엇이 진짜 형태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금발을 본 적이 없는 셈이었고, 그런데도 금발이냐고 묻는 것은 분명 특이했다.
“그래, 금발이야. 너는 어떻게 보이는데?”
“…….”
아린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아니, 딱히 이상한 건 아니야. 얼른 가자.”
혼자만의 생각에 심취한 그녀가 앞장서자 카니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뒤따랐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깨달은 그녀가 빠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렇구나. 시로네는…….’
이미 시로네는 자리에 없었지만 아린은 한참이나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서쪽 제단의 입구에 도착한 시로네는 원주민에게 다가가 암호를 말했다.
“케르티아, 로 호이마. 아크라시아, 위드미아 벤젠.”
원주민이 기관 장치를 작동시켰다.
시커먼 입구로 몸을 들이밀자 횃불로 밝힌 나선형의 계단이 나왔다.
전에 왔던 곳이지만 혼자여서인지 느껴지는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계단 끝에 예의 통로가 기다렸고, 원주민들이 무언가 말을 건네며 시로네를 안내했다.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어떤 내용인지는 경험과 눈치로 알 수 있었다.
어차피 의례의 규율을 설명하는 것이었기에 따로 소통을 할 필요는 없었다.
철문을 넘어가는 것으로 여정이 끝났다.
팔각형으로 떠 있는 8개의 구체, 천사의 눈동자라 불리는 미로의 시공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지키는 자들은 교체되었지만, 백색 문신을 한 남자는 예전과 똑같았다.
“시험을 치를 수 있을까요?”
백색 문신의 남자가 말했다.
“여기는 성취와 희생의 방이다. 천사의 여덟 눈동자가 너희를 판단할 것이다. 케르고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미로의 시공을 통과해야 한다.”
소리만 듣고서도 전과 비슷한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자리를 지킨 시로네는 설명이 끝난 즉시 제단으로 올라갔다.
‘저번에 하지 못한 것부터 시도해 볼까? 어차피 도전 횟수는 상관없으니까.’
이모탈 펑션을 개방하기 전에 레이저로 미로의 시공을 타격할 생각이었다.
아무도 없다는 점에서 마음이 편했다.
마음껏 질러 보기로 결심한 시로네의 몸을 따라 붉은 빛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우우…….”
흉흉한 빛을 본 문지기들이 전과 달리 살짝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오직 백색 문신의 남자만이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서 있을 뿐이었다.
‘간다!’
시로네는 미로의 시공에 에너지를 누적시켰다.
계속해서 충격이 들어오고 있기 때문인지 전보다 숫자가 뜨는 시간이 늦었다.
몇 초가 지나자 200이라는 숫자가 보였다. 그러더니 초 단위로 바뀌면서 자릿수가 끝도 없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400에서 782. 1,311에서 2,643. 급기야는 4,874를 지나 6,822까지 치솟았다.
“으으으으!”
희망을 발견한 시로네는 주먹을 움켜쥐고 사력을 다해 에너지를 퍼부었다.
하지만 그 순간, 숫자가 초기화되더니 다시 72부터 올라가기 시작했다.
‘시간제한이 걸려 있구나.’
아쉬운 마음에 시로네는 마법을 해제하지 않고 다시 밀어붙였다.
한편으로는 확실한 룰을 알기 위한 실험이기도 했다.
그렇게 집계 사이클이 두 바퀴를 돌고 난 뒤의 최대치는 6,822점이었다.
“후우.”
마법을 해제하자 구슬이 적색 광체를 뿜으며 방 안 곳곳에 불합격 판정을 알렸다.
‘역시…… 무리였어.’
레이저는 분명 효과가 있었으나, 미로는 에너지 누적에 대한 꼼수조차 예상하고 제약을 걸어 놓은 게 분명했다.
가장 분한 건 개인 최고 점수임에도 합격 판정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대체 몇 점을 요구하는 거야?’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던 카니스의 말이 새삼 피부로 스며들었다.
대체 교장 선생님은 어디까지 예상하고 유적 탐사를 허락하신 것일까?
백색 문신의 남자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갈 것인가, 남을 것인가? 실력을 입증하고 싶다면 미로의 시공을 통과해라.”
시로네는 힘차게 허리를 폈다.
레이저는 실패했지만 아직 한 번의 시도는 남아 있었다.
“다시 해 볼게요.”
남자는 팔짱을 낀 채로 말이 없었다.
허락으로 받아들인 시로네는 제단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다.
이모탈 펑션.
이것으로도 안된다면 더 이상은 방법이 없다.
카니스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친구들의 목숨이 걸린 이상 포기할 생각이었다.
스피릿 존을 펼친 시로네는 사방식의 방어형으로 미로의 시공 8개를 전부 집어삼켰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마지막 과정을 앞두고 정신을 가다듬은 그가 눈을 번쩍 뜨며 이모탈 펑션을 개방했다.
“허억!”
그러자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정신력이 흘러 나가더니 미로의 시공으로 모조리 빨려드는 것이었다.
‘이, 이런…….’
흡수 속도는 엄청났다.
정산적인 상태였다면 순식간에 스피릿 존이 쪼그라들었을 테지만, 흡수되는 양만큼이나 무한의 영역에서 힘이 밀려들면서 아슬아슬하게 형태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히려 시로네는 그것이 더 두려웠다.
통제 불능.
마치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고, 그저 이쪽과 저쪽의 경계선이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안 돼! 정신을 차려야 돼!’
이 상태라면 전과 똑같이 의식이 완전히 해체되어 버리고 만다.
당시에는 미로의 도움으로 재구성되었지만 그런 행운은 다시는 없을 터였다.
“으으으으으!”
시로네는 방어형의 프레임을 최대치로 구조해 스피릿 존을 바짝 당겼다.
단단한 지탱감이 느껴졌지만 정신적 방출이 워낙에 강했기에 형태는 그대로였다.
‘버텨. 버티는 거야.’
금강불괴의 정신력으로 지탱하고 있는 시로네는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