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49
지금 일어나는 거대한 흐름이 빨리 끝나기만을 빌었고, 부디 이대로 흩어져 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본능만이 전부였다.
“으아아아아!”
생명을 토해 내듯 기합을 넣는 순간 미로의 시공 8개가 찬란하게 빛났다.
여덟 줄기의 섬광이 시로네 쪽으로 쏘아지더니 그를 중심으로 백색의 광구를 이루었다.
빛의 구체는 점점 커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제단을 완전히 뒤덮는 순간…….
“허어어억!”
시로네는 강력한 박탈감에 전율했다.
마치 이모탈 펑션을 처음 열었을 때와 흡사한 기분이었다.
“오, 오오오오!”
빛에 휩싸인 시로네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원주민들이 소리를 질렀다.
시로네는 천장까지 떠올라 있었다.
“…….”
무엇을 보는 것일까?
눈꺼풀조차 깜박이지 않았으나 눈동자는 엄청난 충격에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백색 문신의 남자는 전율했다.
‘오셨는가.’
이모탈 펑션의 정신력을 빨아들인 미로의 시공은 그 힘을 통해 정보를 전달한다.
어떤 정보인지는 그도 모르지만, 8개의 구체가 한계까지 힘을 머금어야만 보여 줄 수 있는 어떤 장면, 혹은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원주민들이 목청이 터져라 소리쳤다.
“라! 앙케! 라!”
동시에 눈이 멀 정도의 광채가 폭발하면서 제단의 방을 가득 채웠다.
원주민들은 고개를 돌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다시 빛이 사라졌을 때, 시로네는 어느새 제단에 내려와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헉! 헉!”
여전히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이곳이 어디인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뭐지? 대체 뭐야?’
자신이 본 것은 무엇인지, 정말로 그런 곳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
‘환상? 아니면 진짜? 도무지 모르겠어. 이게 이모탈 펑션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인기척을 느낀 시로네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제단을 중심으로 몰려온 원주민들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왜, 왜들 이러세요?”
시로네가 손을 저었으나 원주민들은 석상처럼 복종의 자세를 취할 뿐이었다.
백색 문신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라의 의지를 전하시옵소서, 신의 사자시여.”
1. 케르고 자치 구역 (1)
시로네를 성취와 희생의 방으로 보낸 에이미 일행은 동쪽 제단에 도착했다.
지스가 통행증을 보여 주자 원주민이 석문을 열어 주었다.
광차가 도착했다는 말을 지스가 통역했다.
에이미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카니스와 아린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린의 정신감응 능력 중의 하나인 텔레파시로 원주민의 말을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광차를 운용하느라 지하는 깊지 않았다.
화산재로 뒤덮인 흙을 따라 철로가 설치되어 있었고 광차를 대기시킨 원주민이 껌을 씹으며 반겼다.
온화한 표정이었으나 케르고 특유의 강렬한 눈빛은 여전했다. 마치 다른 사람의 눈을 이식한 듯 이질적이었다.
섬뜩한 기분을 느낀 건 지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호객의 프로답게 웃는 얼굴로 다가갔다.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원주민이 받아 주었다.
“루프 담당자가 바뀌었어요. 이번에 새로 연락책이 된 지스예요.”
“지스? 이런 일을 할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
케르고인은 한눈에 기질을 파악했다. 루프 밀매는 경우에 따라 사형까지 받을 수 있는 중범죄다. 반면에 지스는 연락책치고는 순해 보였다.
“팔코아는 어디 있어? 항상 그가 직접 와서 가져갔는데.”
“아, 그 사람은 죽었어요.”
“죽었다고? 사망?”
손날로 목을 치는 시늉을 하자 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주민은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팔코아는 강하다. 또한 케르고의 성향과 닮은 구석이 있는 사내였다. 그런 자를 대신해 들어온 연락책이 지스라는 것에 의심이 들었다.
“통행증은 가지고 있겠지?”
“물론이죠. 자, 여기 봐요.”
미소가 사라진 원주민이 통행증을 낚아챘다.
에이미 일행은 절로 긴장되었다. 통행증만 있으면 끝날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경계심이 심했다.
게다가 자신들은 루프를 사러 온 게 아니었다.
팔코아는 죽었고 더 이상의 루프 거래는 없을 것이다. 만약 이 사실을 원주민이 알게 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는 뻔했다.
통행증은 진짜였다.
원주민의 의심은 눈에 보이는 증거 앞에서 별다른 힘을 내지 못했다.
원주민은 일행을 광차로 안내했다.
여섯 명을 태우고도 남을 만큼 큰 광차였다. 지렛대의 힘으로 광차를 밀어내는 시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원주민은 시소를 붙잡고 광차를 움직였다.
원래는 두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라 리안이 도와주려고 했으나 그가 눈을 부라리는 바람에 머쓱하게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광차를 움직이는 완력은 확실히 대단했다. 하지만 여기서 토아 산까지는 20킬로미터가 넘는다. 도착지까지 힘을 쓰다가는 탈진하고 말 터였다.
철로가 내리막으로 접어들면서 속도가 빨라졌다. 배 속의 공기가 일제히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경사가 완만해지면서 평탄한 길이 나왔으나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미세하게 기울기를 조절하여 중력을 받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확실히 이런 원리라면 마차보다 빠르게 자치 구역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으으으! 이거 엄청나게 빠르잖아.”
“그러게. 잘 잡고 있어야겠어.”
광차의 흔들림이 심했다. 가속이 붙은 상태에서 뒤집어지면 생명을 보장할 수 없었다.
에이미 일행은 슬그머니 주저앉았다. 그러자 원주민이 입술을 이기죽거리며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렸다.
소음이 심해서 들을 수는 없었지만 좋은 말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광차가 커브를 틀면서 한쪽 바퀴가 뜨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는 그리 급한 커브가 아니었으나 가속도가 너무 빠른 탓이었다.
아린은 광차의 턱을 붙잡고 반대편 손으로는 카니스의 옷깃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직선 루트에 들어설 즈음 지스에게 물었다.
“언제쯤 도착하는 거예요?”
“모르겠어. 20분은 더 걸릴 거 같은데. 나도 여기는 처음이라서.”
“하지만 이야기 정도는 들어 봤을 거 아니에요?”
“전혀. 아까 얘기 들었잖아. 이곳은 팔코아가 왕래할 정도로 비밀스러운 루트야. 하바리들은 얼씬도 못할뿐더러 간부들조차 별로 아는 게 없다고.”
아린은 대략 20분 전후를 계산했다. 토아 산에 도착하기 전에 일행에게 능력을 설명할 시간이 필요했다.
텔레파시 마법은 도청과 자백의 경계선에 있다.
정신파로 지배하면 속마음까지 침투할 수 있으나 능력을 들키는 단점이 있었다.
정신 계열 마법의 특성상 능력이 밝혀지면 상대방이 경계를 하기 때문에 효력이 떨어질 수가 있다.
그래서 보통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미약한 정신파를 보내 수면 위로 떠오른 생각을 도청하는 경우가 많다.
그녀는 스피릿 존을 뻗어 원주민의 그림자로 침투했다. 그리고 5개의 촉수를 추가로 뻗어서 지스를 제외한 일행에게 연결시켰다.
준비를 끝낸 아린이 원주민에게 물었다.
“앞으로 얼마나 걸리죠?”
케르고어가 들리자 원주민은 아린을 돌아보았다. 마주 보는 상황이었다면 입 모양과 발음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겠지만 그런 실수를 할 아린이 아니었다. 광차의 소음이나 빠른 속도감도 정신을 분산시키는 데 일조했다.
“10분 정도면 도착할 거다. 하지만 거기서 더 들어가야 한다. 자치 구역 쪽은 경사가 심해서 광차로는 갈 수 없어.”
에이미 일행은 원주민의 언어가 통역이 되자 깜짝 놀랐다. 하지만 표정이 변하는 사람은 없었다. 감정을 얼굴에 드러낼 만큼 미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스의 통역을 들은 그들은 통역 솜씨가 그리 뛰어나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아린의 텔레파시 능력이 뛰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아린, 네가 한 거야?
에이미가 아린을 지목한 이유는 조금 전에 저절로 홍안이 발현되었기 때문이다. 스피릿 존이 침투하는 느낌을 표현하자면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기분 정도가 고작이었다.
만약 자기상 기억이 아니었다면 눈치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생각을 도청당했을 것이다.
-응. 내가 정신 채널을 연결했어.
-설마 내 마음을 읽는 거야?
아린이 아주 사적인 속마음까지 읽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끔찍했다.
다행히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정신 계열의 대마법사라면 졸업반 수준은 손쉽게 지배할 수 있지만 그래도 자기상 기억은 잡아낼 것이다.
아린이 에이미를 어려워하는 이유에는 홍안의 소유자라는 것도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건 일종의 터널 같은 거야. 정신 계열에서는 인간의 정신을 12단계의 심층으로 분류하는데 이건 11단계의 표층 심리에 해당하는 거야. 최종 필터를 거쳐서 나온 생각만 전달되기 때문에 속마음을 알 수는 없어.
-그럼 12단계는 뭐야?
-그건 표층보다 위쪽에 있는 이성의 영역이야. 억지 미소나 가식 같은 것들. 어쨌든 강하게 거부하면 채널은 끊어질 거야. 물론 싫다고 하면 내가 알아서 끊겠지만.
-아니야. 표층 심리만 읽는다면야 굉장히 편한 능력이네. 이 상태를 유지하자.
-고마워. 지스는 제외했어. 현재 다른 사람들의 송신 채널은 막아 놓은 상태야. 이제부터 열게. 대신 내색하면 안 돼.
아린이 송신 채널을 열자 리안과 테스의 생각이 흘러들었다.
-……나도 말하고 싶다니까! 왜 나는 말 못 하게……! 어라? 이제 들리네.
-나도. 테스, 내 목소리 들려?
-어. 들린다, 들려. 우와, 이거 되게 신기하다.
에이미는 아린의 능력이 얼마나 편한 기능인지 깨달았다.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지만 정신 채널에서는 수많은 얘기들이 오가고 있었다.
마법학교에서 접하지 못한 마법이라는 것도 흥미로웠다.
암흑 마법은 비주류다. 뛰어난 응용력이 있는 계열임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어둠의 속성은 빛에 약하다.
게다가 정신 계열은 자신보다 정신력이 높은 상대에게는 시도하기가 까다로운 마법이었다.
하지만 아케인 정도의 수준이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리고 카니스와 아린은 암흑 마법으로 대마법사에 오른 아케인의 직계 제자들이었다.
‘멋지다. 이건 정말 엄청난 도움이 되겠어. 아차!’
에이미는 아린의 눈치를 살폈다. 감정이 격앙되다 보니 속마음이 표층까지 올라오고 말았다.
아린이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에이미의 계산적인 생각에도 그저 기뻤다.
사람의 마음이란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욕망에 치중하고 이기적이다.
평생 그런 감정을 읽으며 살아왔던 아린에게 호의가 담긴 속마음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텔레파시 마법은 위급한 상황이나 심지어는 전투 중에도 탁월한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카니스와 아린의 합류가 더욱 든든한 이유였다.
-호호호! 이거 되게 재밌다! 에이미, 저 원주민 짜증 나지 않아? 아까 은근슬쩍 내 가슴골을 훔쳐보더라니까?
-그랬나? 나는 우리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슬슬 배가 고픈데. 가면 먹을 것 좀 있으려나?
정신 채널이 잡담과 험담, 투덜거림으로 채워졌다.
마법에 생소한 리안과 테스는 필요 없는 생각까지 쥐어짜 내며 어떻게든 채널을 이용하려 들었다.
이런 생각은 엄밀히 말해 생각이라 부를 수 없다. 환경이 정신을 지배한다는 말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시끄러워 죽겠네. 아린, 볼륨 좀 줄여. 아니면 그냥 꺼 버리든가.
카니스가 말하자 정신 채널에 오가는 목소리의 볼륨이 줄어들었다. 마치 귓가에 대고 소곤소곤하는 느낌이었다.
집중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도 않았기에 점차 말수가 줄어들었다.
한창 수다에 재미를 붙이고 있던 테스가 반기를 들었다.
-뭐야, 왜 소리를 줄여? 잘 안 들리잖아. 빨리 키워 줘.
-전략적인 얘기 아니면 정신 채널 이용하지 마. 여기가 여자들 수다방인 줄 알아? 그리고 아린의 능력이야. 네가 뭔데 소리를 키우라 마라야.
테스는 쳇 하고 혀를 찼다. 그래도 표정이 변하지 않은 걸 보니 긴장의 끈을 놓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잡담이 지나가자 아린은 능력을 선보인 이유를 밝혔다.
-알다시피 텔레파시 마법이라는 거야. 지스라는 사람에게는 하지 않았어. 외부인이라서 내 능력이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고, 설령 신뢰할 수 있다고 해도 내 능력에 반응하면 적에게 노출될 위험이 있으니까.
어차피 지스는 원주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니 티만 내지 않는다면 조용히 넘어갈 수 있을 듯했다.
-그런데 이거 진짜 편한 능력이다.
-흥, 동맹의 보상 중의 하나로 알아 둬. 시로네가 시험의 관문을 통과했는지는 모르지만 파티를 맺게 된다면 아린의 능력을 이용하는 건 필수니까.
파트너를 자랑하는 카니스의 모습이 고까웠지만 반박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굳이 아린이 텔레파시를 시전한 이유는 너희에게 밝히지 않은 사실이 있어서야.
-밝히지 않은 사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에이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시로네의 합격이라는 조건이 걸려 있기는 하지만 임시 동맹 관계에서 뒤늦게 변수가 생긴다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별건 아니야. 일부러 감춘 게 아니라 딱히 알릴 필요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어쨌거나 얘기를 하자면, 아린과 내가 시험의 관문을 통과하려던 이유가 하나 더 있어. 너희의 예상과 다르게 케르고의 원주민들은 외부인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거야. 오히려 적대적이지.
확실히 별일은 아니었다. 그들이 박수를 치며 환대해 주리란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으니까.
다만 적대적일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자치 정부와 케르고 부족은 공생 관계를 선택했고 유적지에도 문명의 영향을 받은 원주민들이 꽤나 많았다.
-그들이 외부인에게 적대적인 이유는 갈리앙트 정부가 실수를 했기 때문이야. 100년 전에 섬에 들어왔을 때 그들은 상당한 보수를 약속했어. 원주민들도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 없다는 판단에 협상을 했지. 그렇게 시작된 사업이 관광사업이야. 그거 알아, 처음에는 원주민 자치 구역도 개방되어 있었다는 거? 하지만 지금은 교류가 단절되고 말았지.
-흐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네. 우리 아빠도 식민지에 처음 들어갈 때 반발이 심했거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그런 부분도 있지. 하지만 갈리앙트 정부는 그 정도가 아니었어. 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쳤다고.
1. 케르고 자치 구역 (2)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그래?
-관광사업으로 큰돈을 벌어들인 갈리앙트 정부는 더욱 욕심을 부렸어. 그래서 새로운 사업을 고안해 냈지. 바로 인간 관광이야.
정신 채널에 적막이 흘렀다.
인간 관광이라는 말에서 모두는 예상했다.
특히 테스는 예상 정도가 아니었다. 정치학을 배운 그녀는 갈리앙트 정부와 케르고인들 사이에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 깨닫고 있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을 했구나.
-그래. 갈리앙트 정부는 케르고 유적, 문화를 넘어서 케르고인을 관광 상품으로 취급한 거야. 물론 그 사실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건 훨씬 후의 일이야. 처음에는 마차를 타고 가면서 구경할 수 있도록 원주민을 세워 뒀다고 하더군. 그러다가 소유욕이 발동한 거야. 인간 사냥으로 이어졌지. 용병들이 소년·소녀들을 붙잡아서 비싼 값에 귀족에게 팔았어.
-전쟁이 안 일어난 게 다행이네.
-문명에 뒤처진 자들의 숙명이지. 물론 케르고의 무력은 약하지 않아. 적어도 갈리앙트 정부보다 약하지는 않지. 하지만 정치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어. 아이들이 잡혀가고 있고 그렇다면 범인은 갈리앙트 정부가 분명한데, 증거가 없는 거야. 그 증거를 없애는 데 상당한 돈을 썼겠지만 그래도 남는 장사일 정도로 인간 사냥이 심각했다더군. 속수무책이었어. 심증만으로 싸움을 걸자니 관광 자본에 의지하는 원주민들은 한순간에 길거리에 나앉게 되니까. 결국 협약을 할 수밖에 없었어. 유적지를 개방하는 대신 자치 지구의 출입을 봉쇄한 거야. 그렇게 그들은 문을 닫아 버렸고 지금에까지 오게 된 거지.
에이미는 부족의 아들딸들이 귀족에게 팔려 갔다는 걸 알면서도 유적지를 개방할 수밖에 없는 케르고의 애환이 절절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이 어떻든지 간에 상황은 위험하게 변했다. 그 사실만이 중요했다.
카니스가 말을 꺼낸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원주민 중에도 악당은 있을 거고, 실제로 그런 놈들이 있기에 루프가 밀매되는 거니까. 어쨌든 자치 구역에 있는 원주민은 우리를 좋게 보지 않을 거야. 물리적 충돌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긴장을 풀어서는 안 돼.
-그렇다면 시로네도 위험한 거 아냐?
-아니, 그럴 일은 없어. 케르고가 유적지를 개방한 첫 번째 이유는 돈이지만 반드시 그것 때문만은 아니거든. 그들에게 성취와 희생의 방의 의미는 남달라. 케르고는 오래전부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누구를 기다리는데?
-글쎄. 천사……일까?
-천사?
에이미가 되물었으나 카니스의 대답은 없었다.
아린은 시간이 됐음을 확인하고 정신 채널에 공표했다.
-미안해. 정신력을 아껴 두고 싶어서 채널을 닫을게. 앞으로 다시 접속이 되어도 이제는 당황하지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