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51
“죄송합니다! 저를 죽여 주십시오! 일행에게 크나큰 무례를 범했습니다!”
“무례요? 무슨 무례요? 설마 폭력을 행사한 건 아니겠죠?”
광신도에 가까운 그들의 행동에서 경계심이 발동한 시로네는 대번에 쏘아붙였다. 혹시라도 친구들에게 손을 댔다면 용서치 않을 생각이었다.
“아, 별일 아니야. 그냥 티격태격 좀 했어. 왜 알잖아, 우리가 흔히 하는 거.”
에이미의 말은 은어에 가까웠다. 충돌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사정이 복잡하니까 넘어갔으면 좋겠다는 뜻이었다.
마하투는 감격스럽게 에이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종족의 위기를 초래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자신을 케르고 부족의 장로 하시드라고 소개한 노인은 시로네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
“미로 님의 전언을 보고 오셨습니까?”
시로네는 성취와 희생의 방에서 보았던 장면을 떠올렸다. 워낙에 빠르게 지나가서 파편으로 떠 있는 정보들이지만 하나하나가 생생했다.
시로네가 고개를 끄덕이자 장로는 지팡이를 짚으며 돌아섰다.
광장에 모인 원주민들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케르고에 신의 사자가 왕림하셨다!”
시로네 일행은 귀를 막았다. 하시드의 말이 떨어지자 원주민들이 전사의 고함 소리를 질러 댔다.
동굴 안이 소리로 가득차서 천장을 터뜨릴 듯했다.
환희의 함성 속에서 울음소리가 간간이 섞였다. 인파 사이로 헐벗은 자들이 다가와 시로네에게 무릎을 꿇었다.
“신의 사자님, 저희 아이가 아파요. 고쳐 주세요.”
아린의 채널이 마하투하고도 연결되어 있기에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픈 아이를 고칠 수 있는 능력은 시로네에게 없었다.
여자의 옆으로 기어 온 노인이 양손을 모아 앞으로 내밀며 애원했다.
“먹을 것을 주십시오! 가족들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저에게 영생을 내려 주십시오!”
“저의 딸 아토레만은 양보해 주세요! 그 아이는 약혼한 남자가 있습니다!”
“여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린은 귀를 막는 것도 모자라 눈까지 감아 버렸다. 초경을 통해 전달되는 광경이 온통 붉은빛이라 마치 들끓는 용암을 보는 듯했다. 사람들의 열망을 더 받아들였다가는 정신이 붕괴될 듯했다.
“카니스! 마음의 소리가 너무 커!”
“채널을 닫아. 상처를 입을지도 모르니까.”
시로네는 인파에 갇혀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아린이 텔레파시를 취소하여 통역이 불가능했지만 감정의 파문은 끝없이 밀려들어 심장을 조였다. 마치 집단 최면에 걸린 듯했다. 키워드는 광기일 것이다.
시로네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하시드와 마하투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슬픈 눈으로 동족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모두 조용하라!”
남자의 고함 소리가 터지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건장한 전사를 좌우에 대동한 젊은 남자가 북쪽의 터널에서 걸어왔다. 덩치는 크지 않았지만 풍선처럼 빵빵한 근육은 경호하는 자들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머리는 길어서 뒤로 넘겼고, 얼굴에는 황금빛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아린은 그제야 감은 눈을 떴다.
초경을 통해 바라본 원주민의 감정은 경외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두려워하고 있다. 철권의 통치자를 대하는 상황에서 흔히 보이는 초경. 남자는 케르고의 수장인 것이 분명했다.
시로네에게 다가온 남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케르고의 족장 카둠이라고 합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시로네는 친구들의 의중을 물었다.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치 구역에서 무언가를 얻으려면 어차피 한 번은 만나야 할 사람이었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지스의 임무였다.
시로네는 아쉬운 감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이제 우리끼리 할게. 위험할 수도 있거든.”
지스는 딱히 기분 나쁜 티를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지 않는다는 게 시로네 일행이 그를 신뢰하는 이유였다.
악수를 나누며 지스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조심해. 자치 구역은 내가 알고 있는 케르고하고 많이 다른 것 같아.”
“응. 별일은 없을 거야. 그리고 통역해 줘서 고마워.”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지. 일이 끝나면 우리 집에 들러. 유나랑 맛있는 음식을 잔뜩 해 놓고 있을 테니까.”
시로네는 카둠에게 지스를 유적까지 데려다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너도나도 시로네의 지시를 따르고 싶어 안내역을 자청했다. 아린이 믿을 만한 사람을 골랐다.
지스는 우람한 전사를 따라 케르고 자치 구역을 떠났다.
카둠은 시로네 일행을 동굴로 안내했다.
20분을 걸어도 목적지는 나오지 않았다. 만약 이 길이 막다른 골목이라면 어떤 여행자도 주저앉고 말 것이다.
복잡한 설계가 들어간 것만이 미로는 아니다. 자치 구역의 미로는 스케일로 압도하고 있었다.
1. 케르고 자치 구역 (4)
다행히 출구는 있었다. 공기의 맛이 달라지면서 사방 계단식 제단의 중턱으로 빠져나왔다.
토아 산의 정글이 발밑으로 수해를 이루고 있었다.
해발 20미터에서 내려다보는 숲은 광활했고 드문드문 케르고의 부락이 보였다.
제단의 반대편으로 돌아가자 황금으로 만든 궁전이 보였다. 케르고의 족장이 기거하는 집이었다. 궁전으로 들어가자 기다란 홀에 테이블이 2열로 깔려 있었다.
시로네가 상석에 앉고 오른편으로 에이미와 리안, 테스, 카니스와 아린의 순서로 자리를 잡았다.
왼편에는 족장 카둠과 장로들이 앉아 있었다. 뿔 나팔을 불었던 하시드는 참석하지 않았다. 말석에는 마하투도 있는 것을 보아 그의 서열이 낮지 않은 듯했다.
음악이 연주되고 케르고 전통 음식이 올라왔다. 맛을 보기도 전에 전사들이 2인 1조로 큼지막한 궤짝을 짊어지고 들어왔다.
전사들이 궤짝의 뚜껑을 개봉했다. 어마어마한 양의 금화와 보석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게 뭐죠?”
“케르고의 약소한 선물입니다. 부디 받아 주십시오.”
개수로 가치를 환산하는 수준은 넘어섰고 무게로 달아야 했다. 5개의 궤짝을 합하면 최소한 1톤은 나갈 듯했다.
에이미가 불쾌한 표정으로 음식을 내려놓았다.
유적지의 수입이 아니다. 루프를 밀매하여 벌어들인 돈이다. 그리고 저 돈이면 부족민 전체를 배불리 먹이고도 남았다.
“시로네, 설마 받을 생각은 아니겠지?”
“이유도 모르고 저런 큰돈을 받을 수는 없지. 그냥 주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야.”
시로네가 해명을 요구하자 카둠의 눈빛이 달라졌다.
어떤 성인군자라도 1톤이 넘는 금화를 보게 되면 호흡부터 달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시로네는 마치 금화가 돌이라도 되는 양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시로네라고 해서 재물에 초탈한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것이 아닌 것에 집착할 만큼 미련하지 않을 뿐이었다.
카둠은 당황하지 않았다. 해명을 하는 대신 박수를 치자 두 번째 공물이 들어왔다.
재물을 거부하는 사람이라도 이것에는 꼼짝하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성취와 희생의 방에 있던 남자처럼 흰색 문신을 얼굴에 새긴 자들이 들어왔다. 시로네는 신관일 것이라 짐작했다.
그들이 좌우로 비켜서자 젊고 아름다운 케르고 여성들 십여 명이 들어왔다.
시로네를 포함한 소년들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들의 나이에서는 접하기 힘든 풍경이었다.
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아리따운 여성들이 관능적인 춤을 추며 다가오고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는 제법 화려한 춤이었으나 눈앞까지 다가오자 음탕하기 짝이 없었다. 여성들의 눈이 흐리멍덩한 것으로 보아 트랜스 상태에 빠진 듯했다.
“어떻습니까? 케르고의 여성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녀입니다. 신의 사자에게 바치는 두 번째 공물이지요. 모쪼록 마음에 드셨으면 합니다.”
시로네는 옆자리가 후끈해짐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에이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카둠의 호의는 역효과였다.
신녀의 군무는 매혹적이었으나 시로네에게는 루프에 취한 여성들의 몸부림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유 없는 호의는 위협으로 느껴지는 법이기에, 카둠의 속내를 분석하는 그의 마음은 차가워져만 갔다.
시로네의 반응이 완고하자 카둠은 비로소 근심이 들었다.
언로커의 정신은 범인보다 지고하지만 그렇다고 성인군자는 아니다. 이모탈 펑션이란 열반을 향한 과정일 뿐이지 해탈을 뜻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욕 칠정에서 자유로운 자라면 처음부터 성취와 희생의 방을 기웃거리지도 않았을 터. 시로네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제가 생각을 잘못했군요. 기뻐하실 줄 알았습니다. 사실 저도 신의 사자를 맞이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전통을 따른 것뿐입니다.”
시로네는 그 말이 더욱 기분 나빴다. 자신과 같은 경지의 언로커들이 얼마나 난잡하게 놀았기에 전통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것인가?
“그들이 이런 걸 좋아하던가요?”
“기록에 의하면 싫어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십시오.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 전통일 뿐입니다. 케르고는 부족사회지만 신관의 힘이 큽니다. 신관은 사제와 전사로 나뉘는데, 사제 중에서도 여성들은 신녀가 됩니다. 케르고의 규율에 의하면 신녀는 아름다워야 하며 평생 동안 순결을 지켜야 하지만, 천사의 아이를 갖기 위해 단 한 번 동침을 할 수 있습니다. 즉, 신녀들은 천사의 후예인 시로네 님을 위해 모든 걸 바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지요.”
“만약 제가 이 여성들을 받아들인다면, 저는 무엇을 해야 하죠?”
족장이 대가 없이 출혈을 감수할 리가 없다. 전통이라는 것도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관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금화의 양은 부족민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다. 게다가 시로네의 선택을 받기 위해 구애의 춤을 추는 여성들도 케르고의 인구를 늘릴 수 있는 미래의 어머니였다. 결국 부족의 재력과 미래를 시로네에게 송두리째 넘긴 셈이었다.
“케르고인은 위대한 라의 자식입니다. 또한 천사의 후예는 케르고 부족과 신을 이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지요. 저희의 믿음을 신에게 전해 주십시오.”
“신이라면 앙케라를 말하는 것인가요?”
“앙케, 라입니다. 영원불멸의 라라는 뜻이지요. 그분은 태초부터 존재하셨고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위대한 권능으로 지금도 저희를 굽어살피고 계십니다.”
종교적인 내용을 걷어 내면 결국 거래를 하자는 얘기였다.
금화와 여성을 대가로 받고 신에게 가서 부족의 뜻을 전한다. 어떤 방법으로 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모탈 펑션과 연관이 있는 건 분명했다.
대가를 받을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로 정신 채널이 바빠졌다.
테스는 불가하다는 입장이었다. 돈도 돈이지만 시로네가 에이미를 두고 다른 여성과 동침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예상을 깨고 에이미는 대가를 받자는 쪽이었다. 그리고 시로네도 찬성이었다.
-시로네! 어쩜 그럴 수 있어? 남자는 다 짐승이라지만 너만은 믿었는데.
-흥분하지 마. 시로네에게 무슨 생각이 있나 보지. 에이미도 그러자고 했잖아.
-웃기시네! 리안 너도 같은 남자라고 편드는 거야? 나는 절대 찬성 못 해. 에이미, 너도 뭐라고 말 좀 해 봐. 솔직히 짜증 나지 않아?
-물론 짜증 나지. 부족민은 굶어 죽는데 잔치를 벌이는 것도 불쾌하고. 하지만 그런 건 시로네가 통제하면 되는 문제잖아. 우선은 정보를 더 캐 보는 게 중요하니까 승낙을 하자.
시로네 일행이 생각을 교환하는 동안 백발의 노인이 들어왔다. 뿔 나팔을 불었던 하시드 장로였다. 먹고 노는 데 정신이 팔려 있는 장로들을 쳐다보던 그의 눈에 핏줄이 섰다.
마하투가 눈치를 보며 일어나 경의를 표했다.
“오셨습니까, 장로님.”
“쯧쯧, 한심하기는. 대체 이게 무슨 난리란 말인가?”
음악이 꺼지자 춤을 추던 소녀들이 탈진해 쓰러졌다.
하시드는 발이 3개인 사람처럼 지팡이를 짚으며 시로네에게 걸어갔다.
카둠이 고압적인 말투로 접근을 막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버지? 신성한 연회를 망치다니요.”
“신성한 연회? 바깥에서는 부족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굶어 죽고 있다. 더 이상 헛한 일에 돈을 썼다가는 정말로 부족이 망하고 말아!”
“케르고의 전 족장이자 고결한 신분인 장로께서 그런 망언을 하다니 놀랍군요. 조금 전의 발언을 회의에서 해도 되겠습니까?”
“그래서는 안 되지. 부족민은 신의 사자의 등장으로 희망에 부풀어 있으니까.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들이 원하는 건 행복이지 신의 사자가 아니라는 것을 왜 모르느냐!”
“일개 장로의 의견은 잘 들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족장은 저입니다. 케르고는 신의 은총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산에 틀어박혀 외부인의 눈치나 보면서 사는 게 아닌, 예전의 찬란했던 문명을 재현할 것이란 말입니다!”
하시드는 수염을 씰룩거리다가 혀를 차고 돌아섰다.
어쨌거나 족장은 카둠이었다.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충돌이 심해지면 500년 전의 내란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장로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고 결국 연회는 끝났다.
카둠은 시로네 일행을 데리고 제단의 꼭대기로 올라갔다. 옥상은 넓었고 북쪽에 7미터 높이의 동상이 서 있었다. 달빛을 받고 있는 거인의 모습에서 위압감이 느껴졌다.
카둠은 동상이 있는 곳에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별들이 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바라보는 별은 하나였다.
“북쪽 하늘에 저 별무리가 보이십니까? 그것을 8자로 연결한 다음 2개의 원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가장 밝은 별을 찾아보십시오.”
보여 줄 것이 있다고 해서 따라왔더니 별자리 강의를 들을 줄이야. 시로네 일행은 내키지 않았지만 시간을 들여 카둠이 가리킨 별을 찾아냈다.
카둠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이 나왔다.
“저 별이 바로 케르고의 고향입니다.”
“네? 고향요?”
시로네가 생각하는 고향은 태어난 곳이었다. 도시로 상경한 젊은이들이 향수에 젖어 그리워하는 곳을 말한다. 멀리 떨어진 밤하늘의 어딘가는 결코 아닌 것이다.
“케르고인은 저곳에 우리를 창조한 신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태어나고 죽지만 영혼은 저 하늘로 날아가지요. 하늘의 나라. 그래서 우리는 저 별을 천국이라고 부릅니다.”
시로네는 난감했다.
천국은 관념적인 장소다. 타지의 여행자에게 관광 명소를 소개하듯 말하는 곳이 아닌 것이다.
“이해가 잘 안 되는데요. 어째서 저기가 천국이라는 거죠?”
“시로네 님은 신을 믿지 않으시는군요.”
시로네는 신을 믿지도, 믿지 않지도 않았다.
마법사의 사고는 분석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시로네에게 신이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존재였다.
“케르고의 창세기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역사 이전의 신화지요. 태초에 거인이 살았고 거인의 피와 살로 인간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최초의 인간은 가록으로, 칠백여든두 살까지 살았습니다. 그들의 자식 데리스는 982년을 살았고 그의 아들 테서스는 1,320년을 살았지요.”
라의 창세기도 다른 종교의 신화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떤 학자에 따르면 역사 이전에 등장하는 인물의 수명은 실제의 수명이 아닌 가문의 지배 기간을 뜻한다고도 한다.
엘자인 1세, 엘자인 2세, 그렇게 13세 정도 가문이 번성하면 신화에는 1천 년을 산 엘자인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듯한 얘기였다.
토르미아 왕국만 해도 국왕의 이름이 대대로 세습되어 오고 있었다. 현재 왕은 아돌프 12세였다.
카둠은 암기 실력을 뽐내듯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자들의 수명을 줄줄이 읊었다.
신화의 시대가 끝나자 이번에는 역사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선각자 하네스가 이곳에 문명을 이룩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라의 품에 안기게 되었지요. 아마도 궁금하셨을 겁니다, 어째서 우리가 화산재에 파묻힌 케르고 유적을 복원시키지 않는지.”
시로네는 에이미의 스나이퍼 모드로도 뚫을 수 없을 만큼 두꺼운 장벽이 유적지의 중간층을 관통하고 있음을 떠올렸다.
“세계에는 수많은 고대 유적이 존재하고 이곳 또한 그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유적지에는 일반인들이 모르는 숨겨진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아주 먼 옛날에 우리의 조상들은 천국을 자유롭게 오갔던 것 같습니다. 유적의 지하 시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요.”
“대체 지하에 무엇이 있기에 그러죠?”
이쯤 되자 시로네도 듣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카둠은 호기심에 사로잡힌 시로네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유적의 지하에는, 천국으로 갈 수 있는 문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망치로 맞은 듯 머리가 띵했다. 천국이라니. 설마하니 북쪽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말하는 것인가?
그곳은 우주에 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절대 갈 수 없는 거리였다.
“신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을 한 건가요?”
“네. 바로 그것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카둠이라는 족장은 광인인가? 아니면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1. 케르고 자치 구역 (5)
친구들의 표정 또한 심상치 않았다. 유일하게 감정의 변화가 없는 건 카니스와 아린이었다.
“케르고 자치 구역을 개방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지하에 있는 문을 열 수 있는 건 오로지 천사의 능력을 이어받은 자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당신을 기다려 온 것입니다.”
천국으로 가는 문.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다. 시로네는 이모탈 펑션을 통해 미로의 시공까지 갔던 경험이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스케일이 달랐다. 마법사가 만든 세계와 천국은 달랐다. 카둠은 신이 있는 곳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천사는 신과 인간을 이어 주는 매개체였습니다. 그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신의 의지를 전하여 왔지요. 언로커는 천사의 힘을 물려받은 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케르고의 영광을 되찾아 주십시오. 그것을 위해 부족은 어떤 희생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시로네는 대답하지 못했다. 신을 만나고 오라니. 하늘에 떠 있는 별에 가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동안 케르고는 수많은 위기를 겪었습니다. 화산 폭발의 재앙이 찾아왔고 내란까지 치렀지요. 외부인에게 갖은 수모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부족은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부족민은 굶주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천사의 후예가 케르고를 부흥시켜 줄 것을 믿고 있습니다.”
에이미가 삿대질을 하며 물었다.
“어째서 식량을 사지 않는 거죠? 충분히 자립할 수 있는 상황에서 신앙에 의지하는 건 생명을 걸고 도박을 하는 것과 같아요. 루프의 밀매 수입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은 우리도 알고 있다고요.”
“케르고의 사정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보다 열악합니다. 갈리앙트 정부와 나누는 유적지의 수입만으로는 2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없습니다. 루프를 팔아서 버틴다고 한들 100년 전처럼 외부인에게 잠식당하고 말 것입니다. 저는 족장으로서 신의 축복이 내려지기를 기도하며 거금을 비축한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돈과 여자라니, 그런 방식으로 신의 사자를 설득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요?”
“거기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기록을 통해 방법을 모색한 것뿐입니다. 케르고의 역사에 의하면 어떤 신의 사자는 천국에 가는 조건으로 1억 골드를 요구했다고 합니다.”
이미 천국에 간 사람이 있단 말을 듣고 시로네는 깜짝 놀랐다. 게다가 장사치도 아니고 1억 골드를 내놓으라고 했다니, 목숨보다 돈이 좋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