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57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방인들도 싸울 의사는 없는 듯했다.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독각귀를 물리친 실력이라면 충분히 자신을 제압할 수 있었을 테니까.
“일단 따라와. 여기부터 벗어난 다음에 얘기하자.”
카냐는 팔에 찬 건틀렛을 벌레의 형태로 되돌려 하늘로 날려 보냈다. 독각귀의 위치를 확인한 그녀는 방위를 결정하고 숲으로 들어갔다.
시로네 일행은 군소리 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에이미가 도시와 멀어지는 방향이라고 말했다.
4. 율법의 역전 (1)
카냐는 정글과 암석 지대가 뒤섞인 계곡으로 들어갔다.
주위가 절벽에 가로막혀 오직 하늘만 볼 수 있었다. V 자 계곡의 밑바닥을 지나는 시로네는 이 세계가 얼마나 오랫동안 존재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걸어가면서 카냐 일행과 통성명을 했다.
카냐는 아직 그들을 믿을 수 없었지만 최소한 싸울 의사가 없다는 건 받아들인 듯했다.
“이곳은 소용돌이 뱀의 계곡이야. 율법이 다르니 위험한 일은 없을 거야.”
“가장 위험한 일은 시로네가 그 이상한 무기에 맞는 거겠지.”
리안이 농담에 카냐의 눈매가 샐쭉해졌다. 숲에서 있었던 일을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은데 울화통이 터지는 쪽을 꼽으라면 오히려 자신이었다.
시로네가 리더라는 걸 짐작한 그녀가 삿대질을 하며 물었다.
“너희 진짜 정체가 뭐야?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게 말이나 돼?”
“하지만 사실인걸.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그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어. 이번엔 네가 설명해 봐. 이 세계는 어떤 곳이야? 아까 쓰러뜨린 거인도 그렇고.”
“거인? 방금 거인이라고 그랬어?”
“응, 거인.”
“그러니까 거인을 죽였단 말이야!”
“아니, 죽이진 않았는데. 어떻게 된 거냐면…….”
시로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냐가 멱살을 붙잡고 소리쳤다.
“거인을 죽이면 어떡해, 이 멍청아! 거인은 율법을 지키는 자야! 결국 너희였어. 거인을 죽여서 독각귀들이 설친 거였다고!”
에이미가 카냐의 손을 뿌리쳤다. 여태까지 정보를 얻기 위해 성질을 죽이고 있었지만 친구를 함부로 대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안 죽였다고 했잖아! 그리고 거인이 먼저 공격했단 말이야!”
“당연하지! 율법을 어긴 건 우리니까! 속된 자들의 숲은 인간이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란 말이야!”
으르렁대는 두 여성의 사이를 시로네가 파고들었다.
“그렇게 말해도 우린 무슨 말인지 몰라. 알겠어? 우린 정말로 다른 곳에서 왔단 말이야.”
카냐는 멍해졌다. 시로네가 하는 어떤 말도 자신을 설득시키지 못했지만, 그렇기에 사실일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너희 설마…… 정말로 다른 곳에서 온 거야?”
“여태까지 말했잖아. 그렇다니까?”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음…….”
카냐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어릴 적에 들은 일화에 불과하지만 분명 있었다, 천국의 지배를 받는 땅의 나라의 인간들이.
그들은 신민의 후예지만 신의 존재를 느낄 수 없는 불쌍한 자들이다. 그렇기에 영생을 누리지 못하고 수명이 다할 동안 필멸자의 고통에서 허우적댄다고 들었다.
4. 율법의 역전 (2)
“좋아, 설명해 줄게. 이곳은 천외지옥이라 불리는 곳이야. 연옥이라고도 하지.”
“연옥? 여기가?”
“응, 땅의 감옥. 율법을 거부한 이단들이 사는 곳이거든. 이제야 알겠어. 너희는 땅의 나라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한 거야. 그래서 이곳에 떨어진 거고.”
시로네는 그녀의 착각을 바로잡지 않았다. 설명을 해도 이해하지 못할 테고 딱히 틀린 얘기도 아니었다. 일행 중에 앙케 라를 믿는 자는 없었으니까.
“마법을 쓰는 걸 보니 노르족의 후예인 모양인데 불쌍하게 됐군. 연옥에 떨어진 이상 너희에게 남은 건 죽음밖에 없어. 결국 죽게 될 거야.”
“맞아, 결국 죽게 되겠지. 하지만 너도 마찬가지잖아.”
카냐는 조금 우쭐해진 듯 턱을 치켜들었다.
“천만에. 나는 신에게 선택받은 신민이야. 그래서 영생을 보장받을 수 있지.”
시로네는 케르고의 신화를 떠올렸다. 누군가에게 영생을 줄 수 있다면 확실히 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와 닿지가 않았다.
생물은 노화하고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 사망을 막는 건 마법의 힘으로도 불가능했다.
시로네 일행의 정체를 깨달은 카냐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이단은 싫지만 이들은 신의 권능을 영접할 기회조차 받지 못한 불쌍한 자들이었다.
“할 수 없지. 너희 운이 좋은 거야. 나를 따라와. 지낼 곳을 소개해 줄게.”
“갑자기 왜 잘해 주는 거야? 네가 신민이고 우리가 이단이라면 오히려 나쁘게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니야?”
카냐는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돌아섰다.
“의심이 많은 거 보니 노르족의 후예가 맞네. 천국이라면 내쫓았겠지만 이곳은 괜찮아. 연옥에서는 어떤 율법도 신민을 지켜 주지 못하니까. 너희와 나는 같은 처지라는 거야. 아무튼 빨리 가야 해. 해가 지면 위험해지니까.”
계곡으로 들어갈수록 절벽의 높이가 치솟았다. 날벌레 한 마리 존재하지 않는 쓸쓸한 곳이었다. 약간의 습기 그리고 메아리. 거대한 자연에 그들의 발소리만 들렸다.
“설마 또 이상한 게 나오는 건 아니겠지?”
“걱정하지 마. 소용돌이 뱀의 계곡은 강력한 하나의 율법이 존재하는 곳이라 독각귀처럼 위험한 마물은 살고 있지 않아.”
“어떤 율법인데?”
“소용돌이 뱀. 1만 년 이상 이곳에 산다고 알려진 마물이야. 하지만 지금은 자고 있을 거야. 낮에는 돌아다니지 않거든. 그래서 빨리 가자는 거야.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 노르의 쉼터에 가야 해.”
“아까 우리가 노르의 후예라고 했지? 그럼 노르는 신민이 아니야?”
“당연히 신민이지.”
“그런데 왜 연옥에 노르의 쉼터가 있는 거야?”
카냐는 답답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떠올리고 설명을 덧붙였다.
“천국에 거주하는 신민은 세 종족이야. 노르인도 그중의 하나고. 신민들은 태어날 때부터 수명이 정해져 있는데, 수명이 다하면 영생을 얻어. 하지만 노르의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나 봐. 그래서 연옥으로 탈출해서 독립적인 사회를 만든 거야.”
시로네는 태어날 때부터 수명이 정해진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일단은 넘어갔다. 적어도 영생을 얻는다는 말보다는 신기하지 않았으니까.
그보다는 카냐의 배려가 고마웠다. 시로네가 노르인의 후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노르족의 사회로 안내를 해 주는 것이었다.
“고마워, 카냐. 친절하구나.”
“무슨 소리야! 이단에게 친절한 신민은 없어. 어차피 우리도 필요한 게 있어서 가는 거니까 괜한 오해는 하지 마. 노르의 쉼터에 도착하면 그때부터는 알은척도 하지 말라고.”
매몰차게 말한 것과 달리 그녀는 시로네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카냐의 내숭에 레나가 볼을 부풀리더니 한마디를 더했다.
“맞아요. 언니는 정말로 필요한 게 있어서 가는 거예요. 하지만 저는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어서 가는 거고요.”
“하하! 그래, 고마워. 레나는 자상하네.”
시로네의 칭찬에 레나의 뺨이 붉어졌다.
카냐가 걸음을 멈췄다. 감수성이 예민할 시기이니 이방인에게 끌리는 건 이해가 되지만 율법의 지배를 받는 신민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레나의 손목을 잡고 절벽이 있는 곳까지 끌고 갔다. 시로네 일행이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는 가운데 그녀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다그쳤다.
“레나, 너 대체 왜 그래? 너도 알잖아, 이단하고는 절대 이어질 수 없다는 거. 그런 마음을 품는 것조차 불경이라고.”
“나도 알아. 하지만 저 오빠는…….”
“안 된다면 안 돼!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잘생긴 게 다가 아니야. 그런 식으로 남자를 고르면 큰일 난다고.”
“그걸 언니가 어떻게 알아? 언니도 남자 친구 없잖아.”
“크면 다 알게 되어 있어. 아무튼 언니 말 들어, 알았지? 앞으로 저 남자에게 쌀쌀맞게 대하란 말이야.”
“시로네 오빠가 잘생겨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다정해서 좋아하는 거야.”
“다정해? 저 애가?”
카냐는 황당한 표정으로 레나를 바라보았다. 동생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확실히 독특하기는 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런 느낌을 받는 이유도 이단이기 때문이다. 자유분방함은 타락을 낳는다. 그런 의미에서 시로네와 어울리는 건 위험했다.
“너, 확실히 말해 봐. 잘생긴 사람이 좋은 거야, 다정한 사람이 좋은 거야?”
레나도 열네 살이니 사랑의 감정을 느낄 나이다. 조만간 엄마 노릇까지 해야 하는 그녀는 동생의 사고방식을 바꿔 줄 필요성을 느꼈다.
“당연히 둘 다지. 잘생겨야 되지만, 또 다정해야 된다고.”
“후우, 너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괜찮아, 언니. 하루밖에 안 본 사람과 사랑에 빠지진 않을 테니까. 그리고…… 어차피 우리도 지금은 저 사람들과 다르지 않잖아.”
신민이 무단으로 연옥을 출입하는 건 율법 위반이었다. 어쩌면 벌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동생을 데리고 나온 것은 후회가 들었다.
아무리 레나가 자신보다 수명이 많다고 해도, 언니로서 책임감이 부족한 판단이었다.
“미안해, 레나. 나는…….”
“알아, 언니. 게다가 내가 가겠다고 졸랐잖아. 언니만 위험한 일을 도맡을 필요는 없어. 나도 엄마에게 꼭 선물해 주고 싶단 말이야.”
카냐는 레나를 쓰다듬었다. 젖 달라고 울던 아이가 벌써 이렇게 컸다. 그녀가 신의 은총을 받아 영생을 누리기를 바랐다.
사랑스러운 아이니까, 분명 라께서 그렇게 해 줄 것이다.
“그래, 알았어. 빨리 가자.”
계곡은 이제 미로화되어 가고 있었다. 좁은 갈림길에 얕은 물이 흐르고 있어 공기마저 축축했다.
에이미는 홍안을 이용해 카냐의 동선이 뒤죽박죽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전형적인 길을 잃은 자의 동선이었다.
“꽤나 머네. 노르의 쉼터는 아직 멀었어?”
“거기로 가는 거 아냐. 우리도 노르의 쉼터가 어디 있는지 모르니까.”
“뭐? 아까 노르의 쉼터로 간다고 그랬잖아.”
“거긴 목적지야. 천국에서 도망친 노르인이 만들어 놓은 곳을 신민인 우리가 알 수 있을 턱이 없잖아.”
에이미의 황당한 시선을 느낀 카냐가 말을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 그래도 방법은 있으니까.”
“어떤 방법인데?”
“드론을 이용하는 거지. 노르의 쉼터는 누구든 갈 수 있는 열려 있는 시장이야. 시장에서 파견된 안내인이 소용돌이 뱀의 계곡에서 기다리고 있어. 그 사람을 찾으면 돼. 그래서 지금 사람이 머물 만한 장소를 드론으로 수색 중이야.”
시로네는 두 기의 드론이 창공을 비행하는 걸 올려다보았다.
저 비행 물체 또한 원래의 세계에서는 고대 유물이라고 불리는 종류일 것이다. 하지만 말만 고대지 기술력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첨단이었다.
문득 네이드에게 보여 준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해졌다.
“저 기계가 정찰을 하는 건 알겠는데, 그걸 우리가 어떻게 볼 수 있는 거야?”
카냐가 관자놀이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내 머리와 연결되어 있거든. 주파수라고 부르지.”
“주파수?”
“음,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신호 같은 거야. 소리와 비슷한 개념이랄까? 망막 비전이라는 기술인데, 드론에서 내 주파수에 전파를 쏘면 눈동자에 상이 맺혀. 내 왼쪽 눈을 자세히 봐.”
카냐의 동공에 전기장 같은 필드가 어리더니 계곡의 조감도가 빠르게 전개되었다. 동공보다 작은 크기임에도 해상도가 높아서 어떤 풍경이 펼쳐지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게 드론이 내려다보는 시점에서 관찰한 계곡이야. 너에게는 자세히 안 보이겠지만 실상은 내 시야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어. 망막에 직접 맺히는 화면이니까.”
“엄청난 기술이구나.”
테스는 부러운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원래부터 고대 유물에 빠져 있는 그녀지만 특히나 드론은 첩보전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이런 건 어디서 구할 수 있는 거야?”
“이건 구하는 게 아니라 보급받는 거야. 메카족에게만 지급되는 물건인데 열두 살이 되면 드론을 받을 수 있어.”
“그럼 하나 구해서 줄 수도 있는 거야?”
“아니. 수량이 철저히 관리되기 때문에 몰래 빼돌렸다가 걸리면 중징계를 받아.”
“그렇구나. 나도 갖고 싶은데…….”
“다른 신민들도 부러워하는 게 드론이야. 하지만 어차피 개인 암호가 걸려 있어서 다른 사람은 사용할 수 없어. 주인이 바뀌면 곧바로 신호음이 울리면서 잠들어 버리거든.”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물건이라는 것에 테스는 더욱 속이 상했다. 가지고 싶다. 하지만 국가에서 지급하는 물건이라면 돈을 주고 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질투가 난 테스는 그때부터 입을 다물었다.
“노르인이 머물 만한 곳을 찾았어. 여기서 멀지 않아.”
카냐는 그때부터 달리기 시작하여 동굴 앞에 도착했다.
드론이 카냐의 손등에 내려앉아 건틀렛으로 변했다.
표면에 최종 포착 지점의 풍경이 떠올랐다. 눈으로 보는 것과 사진을 비교한 카냐는 이곳이 확실하다고 말하며 동굴로 접근했다.
그 순간 테스가 손을 들어 그녀를 말렸다.
“잠깐 기다려. 피 냄새가 나.”
“피 냄새? 나는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후후, 당연하지. 나는 어릴 때부터 훈련했으니까. 그 기계도 냄새까지는 못 맡나 보지?”
“무슨 소리야? 메카족의 기술은 14만 가지의 냄새를 구별할 수 있어. 다만 드론에 그런 기능이 없을 뿐이지.”
일행은 그제야 테스와 드론 사이에 알게 모르게 신경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긴, 드론의 정찰 능력은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압권이었다. 하지만 리안은 고작 철 덩어리에게 질투를 느끼는 테스가 한심할 뿐이었다.
“됐으니까 빨리 해 봐. 괜히 이상한 것에 열등감 느끼지 말고.”
리안이 이상한 것이라 말해 주자 기분이 풀린 테스는 감각계 스키마로 피의 잔향을 추적했다.
동굴로 한 발짝 들어가서 내부를 살핀 다음 한참이나 바깥을 두리번거렸다.
분석을 끝낸 그녀가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동굴 안쪽에서 피 냄새가 나고 있어. 누군가가 있는 것은 확실한데 동굴 밖으로 나가지는 않은 것 같아.”
“왜? 밖에서는 피 냄새가 안 나?”
“아니. 오히려 피 냄새가 안쪽에서 진하게 나기 때문에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추측하는 거야.”
“그런데 바깥을 더 오래 확인했잖아?”
“일종의 매뉴얼이야. 만약 밖에서도 피 냄새가 난다면 동굴은 함정일 확률이 높으니까.”
“그럼 일단 함정은 아니란 얘기네. 들어가 보자.”
시로네는 조명 마법 샤이닝을 시전했다.
빛의 구체가 손바닥 위로 떠오르자 카냐와 레나는 기겁했다. 노르인이 마법을 다루는 종족이기는 하지만 천국에서 이런 마법은 본 적이 없었다.
“언니, 저거 보여? 몸에서 빛을 만들었어.”
“그래. 땅의 나라 사람들은 이상한 마법을 사용하는구나.”
“응. 그런데 저거…… 꼭 그거 닮지 않았어?”
“레나! 그런 생각은 불경한 거야. 빨리 마음속으로 잘못했다고 빌어.”
레나의 표정이 부루퉁해졌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알아차렸다는 건 언니 또한 같은 생각을 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불경은 죄악이었으니 그녀는 마음속으로 라에게 용서를 구했다.
4. 율법의 역전 (3)
10미터를 전진하자 피 냄새가 더욱 진하게 났다.
긴장감이 치솟은 테스가 시로네에게 속도를 늦추자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동굴이 흔들리더니 벽에서 뭉툭한 기둥들이 튀어나왔다. 속도도 속도지만 크기 또한 인간을 압사시키기에 충분했다.
시로네 일행은 반사적으로 물러섰다.
거리를 두고 살펴보니 더욱 기괴했다. 동굴의 벽면에서 튀어나온 수십 개의 기둥들이 교차해 있었다.
“괜찮아? 다친 사람은 없어?”
시로네가 소리치자 에이미의 대답이 들렸다.
“응. 없는 거 같아. 시로네 너는?”
“나도 괜찮아. 설마 함정이었던 거야?”
“아니. 동굴에 인위적으로 개조된 흔적은 없어. 게다가 함정치고는 발동 시점이 너무 빠르잖아.”
테스의 말이 옳았다. 정말로 죽이려고 했다면 피할 수 없는 지점까지 유인해서 함정을 발동시켰을 터였다. 하지만 기둥은 접근을 억제하는 게 목적인 것처럼 앞에서 튀어나왔다.
“함정이 아니라면 뭐지?”
동굴 끝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체를 밝혀! 이번에는 빗맞히지 않을 테니까!”
시로네는 샤이닝을 내밀어 안쪽을 밝혔다.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 쪼그려 앉아 양손을 바닥에 대고 있었다. 뒤편에는 강인한 인상의 털보가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있었는데, 배를 가린 손가락 틈 사이로 핏물이 보였다.
노르의 쉼터 안내인인 가드락이었다.
시로네 일행을 살펴보던 가드락이 제자에게 말했다.
“클로브, 동굴에서는 대지의 마법을 사용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천장이라도 무너지면 우리까지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