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6
클럼프의 제안은 한마디로 자식을 넘기라는 얘기였으나 실상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사냥꾼의 아들과 오젠트 가문의 아들 중에 무엇이 더 나은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다름 아닌 핏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빈센트는 시로네를 살폈다.
조금은 얄밉게도, 아들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당연히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인지,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비쇼프가 말을 이었다.
“가족끼리 회의를 해 보았으나 이게 최선이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사촌 중에 아직 자식이 없는 철부지 놈이 하나 있습니다. 그쪽으로 호적을 등록하면 시로네 또한 귀족이 되는 것이니 얼마든지 학교에 입학이 가능할 겁니다. 물론 아드님을 빼앗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단지 서류상의 문제이니 변하는 건 없을 겁니다.”
단지 서류상의 문제라. 그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을까?
세상 모든 게 서류상의 문제였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다른 집의 아들로 호적이 등록된 시로네를 보고 서운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시로네, 뭐라고 말 좀 해 다오. 이 애비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느냐? 네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빈센트는 비참한 심정으로 아들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시로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대답을 못 하고 있는 모습이 답답하기 때문이라는 걸 빈센트는 직감했다.
예민한 사안인 만큼 모두가 말을 아끼는 가운데 레이나가 나서서 물어보았다.
“시로네, 네 생각은 어떠니? 그냥 서류만 등록하는 거야. 귀족이 될 수 있고 네 꿈을 이룰 수 있어. 물론 우리는 어디까지나 지금 부모님을 너의 부모님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달라질 건 없는 거야.”
시로네의 미간이 더욱 구겨졌다. 그러고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알페아스 마법학교(3)
“당연히 말도 안 됩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에요. 다른 분의 양자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시, 시로네.”
빈센트는 감격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말이었고 오히려 불쾌하다는 투였다.
가문의 사람들도 적잖이 당황한 가운데 클럼프가 차갑게 물었다.
“정말로 괜찮겠느냐? 귀족이 될 수 있는 기회다. 누구에게나 오는 행운이 아니야.”
“아버지를 바꾸어야 한다면 차라리 평민으로 살겠습니다.”
“평민은 마법학교에 입학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마법학교에 입학하지 않겠습니다.”
“마법학교에 입학하지 않는다면, 마법사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마법사가 되지 않겠습니다.”
“시로네!”
클럼프가 벌떡 일어섰다.
시로네의 강직한 태도가 답답했기 때문이다.
다른 때는 머리가 핑핑 잘도 돌아가는 녀석이거늘, 어째서 이토록 쉬운 문제에 고집을 부리는 것일까?
“죄책감 때문이냐?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아. 성공을 위해서라면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다. 그게 아니라면 너의 꿈은 그토록 하찮은 것이었더냐?”
거구의 클럼프는 올려다보는 것만으로 위압감이 들었으나 시로네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뭐라?”
“저의 꿈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그 또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부모님은 저라는 열매에 양분을 공급하고 꿈을 꿀 수 있게 해 준 뿌리입니다. 제가 지금 오젠트 가문에서 기회를 잡은 것도, 그 전에 집사로 들어올 수 있게 된 것도, 그 전에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부모님이라는 뿌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지금 저에게 주어진 한 번의 기회는 지금까지 부모님이 물려주신 무한한 기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뿌리를 부정하고 다른 뿌리의 양분을 받아 나아가라는 것은, 저에게 말라 죽으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거실은 고요했다.
단순히 시로네의 말에 감명을 받아서가 아니라 본질적인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클럼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죄책감이 아니야. 이 녀석은 인과의 본질을 감각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눈앞의 기회를 놓친다고 해도 살아가며 새로운 기회는 얼마든지 올 수 있다.
하지만 여태까지 자신이 이룬 것을 부정하는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문득 그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설령 누군가의 도움이 없더라도, 이 아이는 결국 마법사가 되지 않을까?
‘리안, 운이 좋은 건 너였는지도 모르겠다.’
오젠트 가문의 명예조차 이 아이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한 번의 기회일 뿐이라면.
‘누구도 이 아이를 잡을 수 없어.’
시로네가 먼저 손을 내밀어 주기 전까지는.
한참이 지나도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자 그제야 시로네는 미소를 지었다.
“제안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지금 이 자리에 계시는 두 분뿐입니다.”
빈센트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부끄럽다. 당장이라도 의자 아래로 기어들어 가고 싶다.
그깟 서류 따위가 뭐라고 서운함을 느낀단 말인가? 이렇게 아들이 자신을 믿고 있는데.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는 부모가 고작 그따위에 서운함을 느끼려고 했다니.
“시로네를…… 오젠트 가문의 양자로 받아 주십시오.”
“아버지.”
빈센트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시로네를 양자로 받아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못난 부모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 또한 가족이 있었으니까.
다만 우긴다고 되는 일은 아니었다.
“심정은 이해하네만 어쩔 수 없네. 시로네의 마음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나.”
“시로네는…… 시로네는 사실 제 아이가 아닙니다.”
“여보!”
빈센트의 발언에 사람들의 눈이 크게 뜨였으나, 누구보다 놀란 건 시로네였다.
출생의 비밀 때문은 아니었다. 실상 여기 있는 누구라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생김새와 체구만 보더라도 시로네와 부모는 완전히 딴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서류 문제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자식을 위해 빈센트는 정말로 모든 걸 포기할 각오였다.
“우리 부부는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시로네는 우연한 계기로 얻게 된 아이입니다. 지내보셔서 아시겠지만 분명 귀족의 아이일 겁니다. 저에게는 과분한 아들이죠. 귀족의 양자가 된다면 오히려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니 결코 뿌리를 부정하는 게 아닐 겁니다.”
일리가 있기에 좌중은 고심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을 깨트리듯 시로네가 잔뜩 서운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아빠!”
“시, 시로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그런 얘기를 상의도 없이 하시다니! 여태까지 그런 말씀 없으셨잖아요!”
“미안하다, 시로네. 하지만 너도 컸으니 어느 정도…….”
“제가 물어보지 않은 이유가 뭔지 아세요? 누구에게나 아버지는 한 분이기 때문이에요. 어머니도 한 분이고요. 대체 저에게 부모를 얼마나 만들어 주려는 거예요? 아버지 때문에 벌써 여섯 분이나 생길 지경이라고요.”
빈센트는 멍했다.
양자로 들어갈 2명과 자신들 2명, 그리고 시로네를 버린 2명 하면, 도합 6명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식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네가 나 때문에 꿈을 포기하는 게 슬퍼서…….”
“누가 꿈을 포기해요? 열심히 하다 보면 기회는 얼마든지 온다고요! 부모님에게 두 번이나 버림받는 제 기분이 어떤지나 아세요?”
시로네의 눈가에 그렁거리는 눈물을 본 순간 빈센트는 잘못을 깨달았다.
똑똑하고 생각이 깊지만, 자신의 아들이 이제 고작 열여섯 살이라는 사실을.
“시로네, 미안하다! 이 아빠가 무슨 짓을 한 거냐! 절대로 널 남에게 맡기지 않을 거야. 내가 반드시 네 꿈을 이루게 해 줄 거야!”
“아빠!”
빈센트가 끌어안자 시로네는 그제야 눈물을 훔치며 품으로 파고들었다.
얼마나 서러웠을까, 내색조차 하지 못하는 속 깊은 아이가.
오젠트 가족들이 흐뭇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특히나 마음이 흔들린 사람은 비쇼프였다.
그 또한 아내를 일찍 떠나보내고 4명의 아들딸을 홀로 키워 낸 아빠였다.
비쇼크가 클럼프에게 조용히 일렀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가 힘을 써 주셔야겠습니다.”
“늙어 빠진 영감탱이에게 별걸 다 주문하는구나. 어떻게 힘을 써? 잔머리에 빠삭한 학자 집안도 알페아스의 옹고집에는 혀를 내두르는구먼.”
앓는 소리를 내는 클럼프였으나 믿는 구석이 있기는 한 모양인지 표정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주로서 지시를 좀 내려야겠군요. 특별 전형이라는 거 한번 뚫어 보시죠. 제가 듣기로 오래된 빚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흥! 알페아스 그 녀석이 나한테 빚진 게 어디 한둘이야? 그렇다고 원칙을 꺾을 놈이 아니라는 게 문제지.”
“절대로 안 되는 겁니까?”
“크크, 글쎄다? 본래 원칙 따지는 놈에게는 막무가내 전법이 특효약 아니더냐?”
비쇼프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 막무가내 전법 때문에 강제로 가주를 떠맡게 된 자신의 처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
시로네는 리안이 검술학교로 떠나는 날까지 오젠트 가문에서 지냈다.
시로네 또한 특별 전형을 통과할지는 미지수지만 어차피 통과를 해도 내년 초에 입학하기 때문에 부모님과 보낼 시간은 6개월이나 남아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정문에서 고풍스러운 마차가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식구들을 왕성으로 데려가는 마차였다.
라이는 이미 탑승해 있었고 클럼프는 알페아스를 만난 뒤에 중간 지점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시로네와 헤어지기 싫은 리안은 마차 앞에서 참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였다.
마법학교든 검술학교든 이수 기간은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았다.
졸업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몇 년이고 학교를 다녀야 하기 때문에, 이번에 헤어지면 언제 재회하게 될지 기약이 없었다.
리안이 시로네의 어깨를 잡았다.
“시로네, 반드시 마법사가 돼라! 편지할게!”
“알았어. 앞으로 못 만나는 것도 아니고, 가끔씩은 돌아올 수 있잖아. 그만 좀 울어.”
“넌 반드시 졸업할 수 있을 거야! 내가 보증해!”
레이나가 동생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제발 너 졸업할 생각이나 해! 네가 제일 걱정이야!”
“우이, 씨! 나도 열심히 할 거라고! 반드시 최강의 기사가 돼서 시로네의 검이 될 테니까.”
시로네는 그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리안은 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라이와 같은 천재성은 없지만, 라이가 갖지 못한 수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으니까.
레이나가 시로네를 돌아보며 웃었다.
“시로네, 걱정하지 말고 당분간 가족이랑 즐겁게 보내. 반드시 할아버지가 너를 입학시켜 주실 거야. 허튼소리는 안 하시는 분이니까.”
“네. 그리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시로네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리안과 친구라고 해도 레이나의 조력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일이 좋게 풀리지는 않았을 터였다.
레이나는 시로네를 빤히 살폈다.
‘정말 특이한 애야.’
처음에는 네 살 어린 동생일 뿐이었으나 이번 사건을 통해 생각이 바뀌었다.
몸은 다 자라지 않았을지 몰라도 정신만큼은 존경을 받을 만한 인격자였다.
무엇보다 시로네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살이 중요했다.
“시로네, 혹시…….”
뭔가 말을 꺼내려던 레이나는 얼마나 황당한 생각을 했는지 깨닫고 웃어 버렸다.
‘이제 열여섯 살. 미래가 얼마나 창창한데.’
마법학교에 입학하게 된다면 지금까지의 삶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재인을 만나게 될 테고, 시로네의 눈도 지금과는 달라질 것이다.
“아니야. 우리 서로 열심히 하자. 내 생각에도 너는 마법사가 될 수 있을 거야.”
“네. 리안을 잘 부탁드릴게요.”
“후후, 걱정하지 마. 기사 서약까지 했으니 이제 잔소리 안 해도 열심히 할 테니까.”
레이나는 마지막으로 시로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고 마차에 올라탔다.
네 마리의 말이 발을 구르며 나가는 순간 리안이 창문을 열고 얼굴을 빼냈다.
“시로네! 넌 최고야! 마법학교에 들어가면 전부 박살을 내 버려!”
시로네는 크게 손을 흔들었다.
“너도! 꼭 졸업해라!”
이렇게 1년 6개월의 집사 생활이 마무리되었다.
“후우.”
막상 끝났다고 생각하자 마치 집을 떠나는 것처럼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처음 도착했을 때 주눅 들게 했던 오젠트 가문의 대직도도 이제는 무운을 빌어 주는 영광처럼 느껴졌다.
“도련님, 가시지요. 집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마차가 대기하고 있는 것을 보자 시로네는 비로소 실감이 들었다.
정말로 집에 돌아가는 것이었다.
시로네는 오젠트 가문의 저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
알페아스 마법학교.
수업이 한창인 정오 무렵, 교장실에 두 노인이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커다란 체구를 자랑하는 청발의 남자와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창밖을 바라보는 남자.
50년지기 친구인 미르히 알페아스와 오젠트 클럼프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30분 전부터 끊겨 있었다.
정확히는, 클럼프가 알페아스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걸리든 상관없다.
알페아스가 대답을 해야 할 차례이기 때문에 클럼프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자네라도 그런 부탁을 들어줄 수는 없네.”
30분 만에 나온 대답치고는 맥 빠지는 말이었으나 클럼프는 씩 웃었다.
마치 어려운 결정을 내린 듯 시간을 끌었지만, 사실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가 아는 알페아스는 그런 장난꾸러기였으니까.
“아무리 자네라도? 내가 젊을 적에 네놈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아?”
“껄껄! 자네 입에서 공치사가 나오다니, 꽤나 급한 모양이구먼. 하지만 귀족들의 개구멍이 되고자 특별 전형을 만든 게 아닐세. 매년 수많은 청탁이 들어오지만 특별 전형에도 나름의 조건이 있는 게야.”
“크크, 그거 재밌는 소리군. 귀족들의 개구멍이라.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걸.”
알페아스는 살짝 불안해졌다.
우직한 클럼프의 눈에 장난기가 가득 담겨 있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대체 뭔데?”
“개차반 같은 놈을 받아 달라는 게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지. 막내 손자의 친구 놈이 있는데 재주가 아주 뛰어나. 젊은 시절 자네를 보는 것 같다고.”
수십 년이 지난 얘기에 알페아스의 눈빛이 아련하게 변했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다.
“막내 손자라. 철없고 막무가내인 리안 말인가? 딱 젊은 시절 자네 같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