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77
역시나 인간의 가공품이라기에는 섬뜩할 정도로 깨끗했다. 인간 세상에서 말하는 성물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이카엘이 보이지 않았다. 페오페는 분명 그녀가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설마 자신을 속인 것일까?
무서운 생각이 든 시로네는 정신없이 방을 돌아다녔다. 역시나 아무도 없다. 모든 물건은 깨끗하다. 공포에 가까운 완벽함이었다.
갑자기 아름다운 선율이 귓가에 맴돌았다. 시로네는 걸음을 멈추고 5미터 높이에 있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하프처럼 맑은 울림이 그곳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천사의 바이브레이션.
마치 홀린 듯이 그는 창문 아래로 다가갔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햇살이 형태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1명의 여성이 창문턱에 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화가도 그릴 수 없는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시로네는 그녀의 머리 위에 성광체가 떠 있는 것을 확인했다. 타락천사 이카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밝고 따스한 느낌이었다.
그녀의 모습이 드러나면서 빛의 날개가 돋아났다. 거대하게 펼쳐진 빛의 날개가 시로네의 눈에 쾌감을 주었다.
“어서 오세요, 시로네.”
시로네는 확신했다.
그녀야말로 대천사 이카엘이었다.
인과율 제1개체. 그중에서도 신이 가장 아낀다는 고결의 상징. 그런 존재가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이카엘은 사뿐히 바닥에 착지했다.
2미터가 넘는 키가 위압적이었지만 그런 신체적인 특징이 그녀의 따스한 느낌을 가리지는 못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이었다.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조차 그녀를 비난하는 것 같았다.
선함이 형태로 나타났을 때의 모습이 이럴까? 미로의 시공에서 진을 깨달았다면 이카엘은 선이었다.
이카엘은 성숙한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앉을 자리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디도 여의치 않았는지 그대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시로네는 이카엘의 치마폭이 서서히 내려앉는 광경을 황당하게 쳐다보았다. 그러자 다소곳이 종아리를 붙이고 앉은 이카엘이 바닥을 두드리며 시로네를 불렀다.
“자, 이쪽으로 와요.”
시로네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느끼며 그녀에게 바싹 달라붙었다.
서로의 살이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어쩌면 그녀는 가장 가까이서 보고 싶었기에 바닥을 권한 것인지도 모른다.
예상대로 이카엘은 얼굴을 들이밀었다. 시로네를 빤히 바라보는 그녀의 입꼬리가 점차 올라갔다.
시로네가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자 그녀가 마침내 말을 꺼냈다.
“당신을 만나고 싶었어요, 시로네.”
“네? 저를 아세요?”
이카엘은 난감한 듯 눈썹을 긁적였다.
그녀의 행동은 인간을 닮아 있었다. 타락천사 이카사조차 오만의 극치에 달했던 것을 생각하면 꽤나 충격적이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얼마나 알고 있느냐가 중요하죠. 하지만 알다시피,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시로네는 용기를 내어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서로가 서로의 눈빛을 빨아들이자 일체감이 몸에 전기를 통하게 했다.
이어서 고개를 들어 성광체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머리 위에 빛이 떠 있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광경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는 생각에 시로네는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아, 죄송해요.”
이카엘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성광체는 천사의 정신이에요. 인간은 집중을 통해 스피릿 존에 들어가지만 천사의 존은 바깥에 있죠. 이것을 오버 스피릿이라고 불러요.”
설명을 들은 시로네는 새삼 성광체가 달라 보였다. 사방식의 이탈형을 항시 유지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말 그대로 천사의 정신이다.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
역시나 조금 부끄러웠는지 이카엘이 말을 보탰다.
“원래는 지금보다 더 밝았답니다. 하지만 잘못을 저지르는 바람에 라께서 빛의 힘을 제어하셨죠.”
“어떤 죄를 지었는데요?”
시로네는 질문을 던지자마자 황급히 사과했다.
“아, 죄송해요. 제가 괜한 걸…….”
“괜찮아요. 비록 잘못을 저질렀지만, 지금도 그 일에 대해서 후회하지는 않는답니다.”
시로네는 왠지 안심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모르지만 당사자가 후회하지 않는다면 부끄러운 행동은 아니지 않았을까?
“저기…….”
시로네는 말을 머뭇거렸다.
사실은 말도 안 되는 부탁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생각이 그렇게 흘러가 버리자 도저히 체념할 수가 없었다.
“말해 보세요. 무슨 말이든 해도 돼요.”
“한 번만…….”
“네?”
“한 번만 만져 봐도 돼요?”
이카엘은 눈을 깜박이더니 비로소 이해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예상치 못한 요청이기는 했다.
대천사 이카엘의 성광체를 만져 보겠다고 하는 존재는 천국을 통틀어 1명도 없을 것이다.
“그래요. 만져 보세요.”
“저기, 실례되는 건 아니죠? 혹시라도…….”
이카엘은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시로네는 그제야 안심하고 손을 내밀었다.
직접 만져 본 성광체는 빛이자 에너지였다. 기분 좋은 감각이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따듯하네요.”
“그건 시로네가 따듯한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헤헤.”
천국에 와서 처음으로 누리는 안락함이었다. 그녀와 함께라면 세상에 어떤 고민도 할 필요가 없을 듯했다.
영원히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 순간 이카엘의 손이 다가왔다. 깜짝 놀란 시로네가 물러서자 그녀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변명했다.
“아…… 머리카락이 헝클어져서.”
“하하, 열심히 뛰어왔더니. 사실 많은 일이 있었거든요.”
시로네는 너스레를 떨며 머리를 털었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몸이 닿을 것 같아 놀랐을 뿐이다.
그 순간 시로네의 눈이 크게 뜨였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았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차! 에이미!”
시로네는 벌떡 일어났다.
이제야 친구들이 생각나다니. 그만큼 이카엘과의 만남이 인상적이었다는 얘기였다.
“도와주세요! 친구들이 잡혀갔어요! 생명의 술인지 뭔지, 그걸로 네피림을 낳게 한다고 했어요.”
“저런. 큰일이군요.”
“이단이니 뭐니 그런 식으로 취급하지만, 절대로 나쁜 애들은 아니에요. 아니,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붙잡아 가는 건 납득할 수 없어요.”
이카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시로네, 친구들을 좋아하나요? 목숨을 걸 수 있을 만큼?”
“네! 물론이죠!”
이카엘은 그것으로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하지만 시로네, 친구들을 구하고 싶다면 반드시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어요.”
지금 상황에서 들어야 할 이야기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대천사 이카엘의 말이었으니 차마 거절을 하기도 어려웠다. 무엇보다 ‘친구들을 구출하고 싶다면’이라는 말이 결정적이었다.
“제가 들어야 할 이야기요? 그게 뭐죠?”
“천국에 대해. 그리고 미로라는 여자에 대해.”
시로네는 화들짝 놀랐다. 이카엘의 입에서까지 그녀의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아드리아스 미로.
처음 천국에 왔을 때는 그녀 또한 수많은 언로커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해 알아 갈수록 천국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알고 싶었다, 대체 그녀는 어떤 사람인지.
“미로를 아세요?”
“네. 만난 적이 있죠. 저는 그녀를 좋아한답니다. 물론 그녀는 저를 싫어하겠지만요.”
시로네는 충격을 받았다. 이카엘과 미로가 만난 적이 있다니. 특히나 미로가 이카엘을 싫어한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가 겪어보기로 이카엘은 좋은 천사였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잠시만 시로네의 머리를 빗을 수 있게 해 주시겠어요?”
이카엘의 성광체가 고리의 형태로 퍼졌다.
강렬한 빛이 고리를 타고 회전하자 그녀의 손에 빛으로 만든 빗이 탄생했다.
광자 조형술.
그것도 빛처럼 섬세한 도구를 순식간에 만들어 낸 것이다.
천사가 얼마나 강력한 정신력을 지녔든 빛의 특성이 변하지는 않는다.
샤이닝 체인과는 비교도 안 되는 복잡한 전지를 통해서만 만들어 낼 수 있는 도구였다.
시로네는 모든 해답이 성광체에 있음을 깨달았다.
이카사에게서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느꼈을 때도 성광체가 고리의 형태로 퍼져 나갔던 순간이었다.
“어떻게 광자를 조형한 거죠? 성광체가 변한 것과 관련이 있나요?”
“광륜은 수많은 정보를 빠르게 처리할 수 있죠. 이것을 헤일로라고 불러요. 이를테면 인간들이 사용하는 마법진과 같아요. 광륜이 빛의 속도로 회전하면서 수많은 개념을 조립하는 거예요.”
이카엘은 마법진을 예시로 들었지만 막상 듣고 보니 비교하는 것조차 무례한 일이었다.
말 그대로 빛의 속도로 개념을 조립하는 방식이었다.
수십 명의 마법사가 달려든다고 해도 해일로 하나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는 얘기였다.
“그럼 시작하죠. 이리 누우세요, 시로네.”
이카엘은 자신의 무릎을 가리켰다. 머리를 빗겨 주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시로네는 이번에도 어떤 뜻이 있으리라 여기고 그녀가 시키는 대로 누웠다.
따지고 보면 이런 호강이 어디 있을까?
대천사의 무릎에 드러누워 천상을 올려다보자 이카엘이 빗을 들어 머릿결을 쓸어내렸다.
‘어라?’
시로네는 의식이 몽롱해짐을 느꼈다.
빗질이 이어질수록 의식이 덩어리째 뽑혀 나가는 기분이었다. 기절하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이 잡혀 있다. 시간의 흐름을 놓치게 되면 끝장이었다.
‘안 돼. 안…….’
시로네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이카엘은 잠에 빠져든 시로네의 얼굴을 살피다가 슬픈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많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빗을 통해 시로네의 정신에 스며들었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듯, 이카엘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주 먼 옛날…….”
4. 천국의 진실 (1)
제불에 있는 대세계전은 카리엘의 연구실이자 세계의 운행을 관장하는 천문대였다.
메카 시스템의 특별한 함수로 공간을 지워 버렸기 때문에 보안장치가 가동되는 한 출입은커녕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전殿 자가 붙은 곳답게 알페아스 마법학교를 담을 수도 있을 만큼 광활한 공간이었다.
전체적인 색감은 기계적인 남색이었고 반구형의 천장에는 수만 개의 전기신호가 반짝이고 있었다.
서북쪽의 공간에 별들이 모여 있는 구상성단의 홀로그램이 느리게 확장하고 있었다.
중심에는 지름 30미터가 넘는 거대한 강철 구체가 떠 있었는데 2개의 띠가 공전과 자전 궤도를 따라 회전하고 있었다.
에이미 일행은 강철 수갑으로 손목이 묶인 채 구상성단 근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여자들을 납치한 이카사는 천사의 복직을 기대했으나 카리엘의 침묵 속에 제2천으로 되돌아갔을 뿐이다.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에이미 일행이 유일하게 즐거웠던 순간이 바로 그때였다.
반대로 말하면 그것 외에는 모든 상황이 좋지 않았다.
설마하니 대천사 정도 되는 작자가 수갑까지 채울 줄은 몰랐던 것이다.
4. 천국의 진실 (2)
수갑에는 노르의 쉼터에서 본 헤나라는 것과 비슷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공간에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고 마법조차 발동할 수가 없었다.
고작 인간이 무서워서 이런 방법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에이미는 실험실에 붙잡힌 개구리를 떠올렸다.
해부하기 전에 사지를 묶는 이유는 개구리가 무서워서가 아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소름이 돋았다.
최소한 발버둥을 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였다.
같은 생각인지 테스와 아린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마치 소리를 내지 않으면 지금의 팽팽한 긴장감이 영원히 유지될 것이라는 듯이.
그나마 유일한 위안은 테스의 손목에 드론이 없다는 점이었다.
제불에 도착한 그녀는 이카사가 눈치 못 채게 드론을 날려 보냈다.
간자의 교육을 받은 자의 기지였다.
‘어떻게 된 거야? 어째서 아무것도 안 보이지?’
하지만 그녀의 노력도 지금 당장은 소용이 없었다.
드론은 시로네 일행이 최대한 빨리 도착하도록 길 안내를 해 줄 수 있지만 망막 스크린에는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메카의 함수로 공간 자체가 격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카리엘은 구상성단에서 70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서 기계를 점검했다.
천장까지 닿아 있는 거대한 기둥이었는데 수천 개의 패널이 각양각색의 빛을 내고 있었다.
카리엘은 10미터 높이에 떠서 팔짱을 끼고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은 에이미 일행이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기호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에이미는 카리엘의 광륜을 살폈다.
이카사의 것은 갖다 댈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하고 선명한 고리였다.
경계선 안쪽으로 도식과 수식이 잔상처럼 나타났다 사라졌고, 그럴 때마다 기계장치의 화면도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시스템 점검 완료. 생명의 술을 시작합니다. 유전물질의 분자구조를 입력해 주십시오.
천장에서 섬뜩한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기계의 음성은 아린조차 분석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카리엘에게 정신감응을 시도하는 건 미친 짓이었다.
한동안 화면을 응시하던 카리엘이 여자들에게 날아왔다.
콘트라베이스처럼 낮은 저음의 바이브레이션이 들렸다.
그는 미청년이었다. 2미터 30센티미터의 장신이었고 흰색 법의를 입고 있었다. 성광체는 너무나 밝아서 공간에 구멍이 뚫린 듯한 느낌이었다.
에이미는 용기를 쥐어짜 내 그를 노려보았다.
만약 어떤 일을 당해야 한다면 자신이 첫 번째로 나설 생각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붙잡힌 상황에서 테스나 아린이 먼저 고통을 받았으면 따위의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천사라는 자가 부끄럽지도 않아? 빨리 이 수갑 안 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