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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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쁜 자식!”
에이미가 카리엘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테스와 아린의 얼굴 또한 일그러져 있었다.
머리에 심은 패널에서 정보가 침투하자 마치 술을 진탕 퍼마신 것처럼 정신이 어지러웠다.
“걱정할 것 없다. 생명의 술에 적합한 상태로 호르몬이 조절되는 것이니까.”
무심하게 여자들의 상태를 살피던 카리엘은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딱히 변하는 건 없어. 생명의 술이 끝난 뒤부터는 다르겠지만. 어차피 상관없지 않나? 생물이라면 어떤 존재든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일이다.”
“닥쳐! 그걸 왜 네가 정하는 거야! 바라는 대로 해 줄 것 같아? 이런 짓을 당하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어 버리겠어!”
카리엘은 혐오스러운 것을 본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해할 수가 없군. 너희는 벌을 받는 게 아니다. 네피림을 잉태하는 고결한 임무에 당첨된 것이야. 여태까지 생명의 술을 거부한 여성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영생을 얻고 싶지 않은 것이냐?”
“영생 따위 받고 싶지 않아! 내일 죽는다고 해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죽을 거라고!”
“말이 통하지 않는군. 어쨌거나 변하는 건 없다. 패널에 담긴 정보가 전부 전송되면 돌이키는 건 불가능하니까.”
-생명의 술 진행률 20퍼센트.
천장에서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10퍼센트마다 안내를 하는 것 같았다. 실험당하는 입장에서 들으니 감정 없는 목소리가 더욱 으스스했다.
에이미는 수갑에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썼다.
손만 빠져나온다면 이마에 심긴 패널을 붙잡아 뽑아 버릴 생각이었다.
설령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삶을 살 것이다.
“테스! 에이미! 아린!”
대세계전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리안과 카니스가 경주를 하듯 동시에 들어왔다.
다리를 건너는 것까지 지켜보았던 테스가 소리쳤다.
“리안! 여기야! 빨리 이것 좀 풀어 줘!”
리안은 걸음을 내딛다 말고 움찔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대세계전의 크기에 압도당한 탓이었다.
규모만이 아니라 기물과 기재도 생소했다.
한쪽에서는 행성이 회전하고 있고 반대편의 탑에서는 온갖 빛이 요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젠장! 여기는 뭐야?”
카리엘은 인간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높이까지 날아올랐다.
“여자들을 따라온 건가? 이것도 무지한 인간의 어리석음이겠지.”
“네가 주범이냐? 내 친구에게 이런 짓을 했으니 무사히 끝날 거란 생각은 마라.”
리안은 바짝 경계하며 검을 치켜들었다.
강하게 쏘아붙인 것과 달리 행동은 신중했다. 타락천사 이카사의 힘을 눈으로 봤던 리안은 대천사의 무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6. 천국 소동 (3)
리안이 슬금슬금 간격을 좁히며 공격의 기회를 엿보자 테스가 답답한 듯 소리쳤다.
“이 곰탱아! 싸우는 건 나중에 하고, 우리부터 풀어 달라니까!”
“제길! 그러고 싶어도……!”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대천사가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아린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카니스, 이미 생명의 술이 시작됐어. 이마에 붙은 걸 패널을 떼어 내야 해. 그러지 않으면 우리 모두 네피림을 잉태하게 될 거야.”
카니스가 대답하기도 전에 리안이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뭐? 그걸 먼저 말해 줬어야지!”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이 멍청아!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빨리 수갑부터 풀어!”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어쩌니 해도 리안과 테스는 성향이 비슷했다. 승산이 생길 때까지 상황을 파악하는 마법사와 다르게 리안은 패널부터 떼어 내자는 생각으로 달려갔다.
그 순간 눈앞에 충격파가 발생했다. 찌릿한 고통을 받으며 물러선 리안이 시선을 치켜올렸다. 허공에 떠 있는 카리엘이 언짢은 표정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뭐지? 별거 아닌데?’
빈 공간에 충격파가 터지는 건 놀라운 일이었지만 예상보다 파괴력이 세지는 않았다.
대천사라는 직함에 주눅이 들어 있던 리안은 새로운 희망을 안고 대검을 움켜쥐었다.
카니스 또한 리안이 얻어 낸 정보에 주목하고 있었다.
-대천사의 능력이 예상보다 떨어지는군. 우리에게는 기회가 되겠어.
-생명의 술인지 뭔지 때문이겠지. 인간을 만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거 아냐?
-그렇겠지. 하지만 의외인데? 우리가 왔는데도 이대로 가겠다는 건가?
천사는 강하지만 전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대천사 이카엘의 능력은 전투와 상관이 없어 보이는 활성화였다.
하지만 그 개념이 너무나 거대하기에 어떤 마라도, 심지어는 천사들조차도 벌벌 떠는 것이다.
카리엘 또한 탄생이라는 거대한 개념을 지니고 있었다.
폭발, 발화, 기계, 약물 등.
기존의 것을 조합하여 탄생시킬 수 있는 가짓수는 무한대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카리엘이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생명이었다.
어떤 물체를 만들어 내든 탄생 그 자체에 집중되는 에너지는 어마어마하다.
특히나 생물을 탄생시키는 생물의 술이라면 제아무리 대천사라도 대부분의 정신력을 들이부어야 하는 것이다.
“감히 대천사의 소명을 방해하다니.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들이 건방지구나.”
카니스는 아무도 몰래 하비스트를 어둠 속으로 흘려보냈다. 시간을 끌다가 카리엘을 기습하면 그 틈에 여자들을 구출하는 작전이었다.
“천사의 소명? 네피림을 만들어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언로커는 우리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고.”
에이미가 입을 열었다. 시간을 끄는 카니스의 작전을 간파한 것이었다.
“천국은 네피림을 이용해서 인간 세상을 공격하려고 하고 있어. 우리 쪽 세계에 언로커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힘의 균형을 맞추려는 거야.”
“정복? 전쟁이라도 한다는 건가?”
“그래. 네피림은 신의 사도 같은 게 아니야. 점령지에 파견되는 첩자였다고.”
카리엘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찮은 인간의 생각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라는 위대하고 천사는 우월하다. 대천사가 행하는 일에 인간의 개념이 간섭할 여지는 없었다.
“너희에게 감사해야 하겠지. 덕분에 최후의 전쟁을 치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에이미 일행의 시선이 카리엘에게 쏠렸다. 최후의 전쟁이라는 말도 불안하지만, 그것을 치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최후의 전쟁이라니?”
“말 그대로다. 인간들의 세계는 조만간 멸망할 것이다. 여태까지 가증스러운 미로가 종말을 막고 있었지만 너희로 인해 전쟁의 서막이 열렸다.”
카니스는 당혹스러웠다. 시로네가 찾던 여자가 종말을 막고 있었다니.
그러다가 아케인의 대응이 떠올랐다. 인류의 멸망이 걸린 일이라면 스승님이 기억을 지운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왜 우리 덕분이라는 거지? 우리가 뭘 어쨌기에?”
“미로라는 여자는 천국과 인간 세상의 통로를 차단하고 있다. 하지만 너희가 가져온 메타게이트를 통해 새로운 길이 열렸다. 조만간 천국의 군대가 인간들을 무참히 불태울 것이다.”
모두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카리엘의 말이 사실이라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른 셈이다. 인류의 멸망이 자신들로 인해 앞당겨지게 되는 것이다.
카리엘이 기계장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자, 보아라! 이카사가 가져온 메타게이트다! 생명의 술이 끝나면 좌표를 분석해 주마. 새로운 포탈이 열리는 순간 너희의 세계는 멸망하는 것이다!”
에이미 일행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
대세계전이 고요해졌다.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예상했던 반응이 나오지 않자 의아해진 카리엘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어서 그도 같은 표정이 되었다.
“…….”
메타게이트를 끌어안은 요정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리엘은 뭔가 말을 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요정이 왜 여기 있단 말인가. 율법과도 다르고, 설령 율법이 아니더라도 인과를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침묵이 어색했는지 페오페가 먼저 말을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카리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최소한 미친 것은 아니다. 부디 이번의 질문으로 적당한 개연성을 찾기를 바라며 말을 건넸다.
“너는 누구냐?”
“페오페인데요.”
카리엘은 울컥했다. 하지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격이 떨어지는 행위였기에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그래, 페오페. 어째서 네가 여기에 있지?”
“아, 메타게이트를 찾아가려고요.”
“……그렇군. 그렇다면 어째서…… 하아, 그러니까 어째서 너 따위가 그것을 찾아가려는 거지?”
“그거야 전쟁이 나면 안 되니까요.”
그 순간 카리엘의 인내심이 끊어졌다. 오로지 눈앞의 날파리를 폭사시키겠다는 생각으로 손을 내밀었다.
한 방에, 화려하게 터뜨린다.
“죽어라.”
-하비스트! 지금이야!
대세계전의 어둠 속에서 하비스트가 튀어나왔다.
칼날처럼 예리한 그림자를 휘두르는 순간 카리엘이 천장까지 날아올랐다.
그 틈을 노린 카니스가 여자들에게 달려가며 소리쳤다.
“리안! 페오페를 지켜! 절대로 빼앗기면 안 돼!”
리안은 곧장 방향을 틀어 페오페 쪽으로 달렸다. 당장이라도 테스를 구출하고 싶지만 급박한 상황에서는 마법사의 말을 듣는 게 좋았다.
“페오페! 이쪽으로 와!”
갑작스러운 전투에 당황하던 페오페가 리안의 목소리를 듣고 날아왔다.
카리엘이 하비스트의 추격을 따돌리며 페오페를 노렸다. 하지만 리안이 먼저 검을 잡고 자리를 지키자 급격히 방향을 틀어 다시 천장으로 날아갔다.
한시름을 놓은 리안이 페오페를 돌아보았다.
“후우, 괜찮아?”
“몰라!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빨리 이거나 받아!”
페오페의 얼굴이 수프처럼 창백했다. 무려 대천사를 도발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받아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리안은 메타게이트를 건네받았다. 아무리 목석같은 그라도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당장 메타게이트를 발동하면 적어도 자신은 집에 돌아갈 수 있다.
물론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상황이 얼마나 호전되었는지를 떠올리면 용기가 불끈 솟았다.
“고마워, 페오페.”
“착각하지 마! 나는 도와주려고 한 게 아니라……!”
페오페는 말을 멈췄다. 너무나 명백한 상황이라 속마음을 감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천사의 명을 거역하고 인간을 도왔다. 율법을 어긴 게 아니라 완전히 불태워 버린 행동이었다.
변명을 포기한 페오페가 볼멘소리를 냈다.
“그,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이제 나는 끝장인데.”
“같이 가자.”
“뭐?”
“우리랑 같이 가자. 저쪽 세상에도 재밌는 것들이 많아. 네가 우리를 구했으니, 우리도 너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
페오페는 황급히 돌아섰다. 솔직히 이건 좀 감동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인간들의 세상으로 가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런 것을 바라고 행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됐어, 이 바보야! 친구들을 구한 다음에나 생각해!”
리안은 주위를 경계하는 한편 카니스의 진척 상황을 살폈다. 현재 카니스는 여자들의 수갑을 어둠의 권능으로 절단하고 있는 중이었다.
-생명의 술 진행률 40퍼센트.
천장에서 음성이 들리자 에이미가 소리쳤다.
“빨리! 시간이 없단 말이야!”
“조용히 좀 있어, 이 호박아! 정신이 흔들리면 손목까지 절단된다고!”
카니스는 칼날처럼 예리한 그림자를 회전시켜 세 사람의 수갑을 자르고 있었다. 여자들의 살과 완전히 맞닿아 있었기에 정밀한 작업을 요했다.
하비스트를 피해 움직이는 카리엘은 슬슬 짜증이 났다. 차라리 생명의 술을 취소하고 이들을 몰살시켜 버리는 게 어떤가 싶기도 했다.
탄생의 능력으로 죽이는 방법이 아마도 5만 가지는 될 것이다.
하지만 생명의 술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정보 전송률이 40퍼센트를 넘어가는데도 어떤 여자에게서도 양성반응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최고의 소재들이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지.’
카리엘은 궁여지책으로 포탈을 열었다.
남아 있는 정신력이라면 제법 괜찮은 마라를 소환할 수 있고 게다가 상황에 딱 맞는 적임자까지 떠올랐다.
“부름에 응답하라, 바알브.”
새로운 마라가 등장하자 대세계전이 불길한 색으로 물들었다. 카니스를 제외한 모두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뿔의 개수부터 확인했다.
이각 마라였다.
“수면마 바알브. 카리엘 님의 명을 받듭니다.”
멋스럽게 늙은 중년 남성이었다. 머리는 기름을 발라 뒤로 넘겼고 드러난 귀가 쫑긋했다.
키는 천사와 맞먹을 만큼 컸는데 머리보다 높은 깃의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인간을 제압해라. 생명의 술이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확실히 저의 전공이로군요. 알겠습니다.”
바알브가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지상에 착지했다.
“페오페, 잠시만 맡아 줘.”
페오페에게 메타게이트를 맡긴 리안이 바알브에게 돌진했다. 하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돌진했음에도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바알브에게 다가가는 순간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뭐지? 갑자기 졸음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상황에서 졸음이 온다는 건 미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분명 어떤 능력이다.
거기까지 깨달은 리안은 황급히 물러섰다.
비가시적인 영역을 벗어나자 의식이 되돌아왔다. 하지만 수면 부족의 피로는 고스란히 육체에 남아 있었다.
울화통이 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젠장,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이야?”
거인에서 요정, 마라에서 천사까지,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천국에 와서 친구들의 짐만 됐다는 생각에 수치심마저 들었다.
바알브가 점잖은 자태로 몸을 돌렸다.
“소용없소. 당신은 나에게 검을 휘두를 수조차 없을 테니.”
붉은 보석이 바알브의 주위를 천천히 맴돌고 있었다. 어쩌면 저것이 문제인가?
검도의 자세를 갖추고 천천히 간격을 좁혔다. 예상대로 일정 경계선을 지나자 붉은 보석이 빛을 발하더니 다시금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젠장. 역시 저거였군. 도대체 뭐지?’
누구도 보석의 정체를 알지 못했지만 마도 생물체 하비스트만큼은 특유의 파장을 읽어 냈다.
-카니스, 안 좋은 상황이다. 일단 물러서는 게 좋겠어. 오브제다.
-오브제? 저게 오브제라고?
카니스 또한 아케인에게 얘기만 들었을 뿐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오브제는 사물이다.
보통의 사물과 다른 점이라면 외부 세계에 이상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어떤 오브제는 인간에게도 친숙하다.
저주받은 블루 다이아몬드랄지, 하늘을 나는 양탄자 같은 것들이 이에 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