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85
인간들도 제법 수집하는 물건인 만큼 수많은 세상을 돌아다닌 마라들이 하나쯤 갖고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어떤 마라가 소유한 흡혈의 오브제는 주위의 피를 빨아들인다고 한다. 또한 증오의 오브제는 분노를 일으켜 살인을 저지르게 만들 수도 있었다.
바알브의 오브제는 수면의 오브제로, 영향권 안에 들어가면 어떤 생물이라도 잠에 빠져들게 하는 물건이었다.
6. 천국 소동 (4)
보석의 회전이 빨라지자 카니스에게까지 영향이 미쳤다.
엄청난 졸음이 밀려들었다. 입술을 깨물며 참아 보지만 이대로 수갑을 절단하다가는 여자들의 손목이 날아가고 만다.
‘안 돼! 아린을 두고 갈 수는 없어!’
짓깨문 입술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에이미와 테스는 어떤 조언도 해 줄 수 없었다.
그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아린뿐이었다.
“카니스, 아직 시간은 있어. 일단 물러서. 이러다가 네가 먼저 쓰러지겠어.”
“제길! 제길!”
물러서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조금만 더 자르면 되는데. 스승님처럼 막강한 힘이 있었다면 지금쯤 수갑을 전부 잘랐을 텐데.
-정보 전송률 50퍼센트.
“반드시 구해 줄게. 조금만 더 기다려.”
카니스는 차마 여자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오브제의 영향권 밖으로 멀어졌다.
거짓말처럼 정신이 돌아왔다. 하지만 당시의 고통은 잊히지 않았다. 수면 마법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제력이었다.
‘맞아, 강제력. 그것이 오브제의 특징.’
오브제는 사물계의 돌연변이다. 어떤 우주적 오류로 인해 사물의 개념 자체가 뒤틀려 버린 것이었다.
따라서 인과율에 위배되지 않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도 오브제의 능력을 막아 내기가 불가능했다.
게다가 시간이 별로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타임 리미트가 걸린 상황에서 수면마를 부른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리안, 물러서 있어. 내가 상대할게.”
카니스가 리안과 자리를 바꾸었다. 정신 능력이 취약한 검사에게 수면의 오브제는 쥐약이나 다름없었다.
페오페가 대세계전의 입구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얘들아! 저기를 봐!”
거인 이미르가 육중한 몸을 이끌고 달려오고 있었다.
리안의 눈동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처음 봤을 때보다는 덩치가 작아진 느낌이 들었지만 분명 그 거인이었다.
냉철한 카니스도 이번만큼은 화를 감추지 못했다.
“제길! 거인까지 오다니!”
“침착해. 거인은 내가 맡을게. 너는 바알브를 해치워.”
상성을 고려하면 옳은 판단이었다. 하지만 리안은 상성을 제외하고라도 직접 상대하고 싶었다.
첫 번째 승부에서는 치명상조차 입히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자신의 장기를 보여 줄 차례였다.
리안이 입구에 도착하자 페오페가 메타게이트를 들고 날아왔다.
“야, 이건 어떡해?”
“나 대신 지켜 줘. 우린 반드시 돌아갈 테니까.”
“뭐? 이런 중요한 걸 내가 어떻게……!”
페오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부담스럽고 과분한 요구였지만 리안의 얼굴을 보고서는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반드시 돌아갈 거라고 말하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위험한 상황에 처한다면…….”
리안은 페오페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딴 건 얼마든지 줘 버리고 도망쳐.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아니니까.”
페오페는 입을 꾹 다물고 미운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어째서 인간들은 하나같이 어리석은 자들밖에 없을까?
“헛소리하지 마! 왜 솔직하게 말하지 못해? 내가 죽더라도 이걸 지켜 주기를 바라잖아! 이게 없으면 너희는 돌아갈 수 없다고!”
리안은 대답이 없었다.
“이 바보야! 상대는 이미르야! 거인의 왕 이미르라고! 싸우면 무조건 죽어!”
리안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름이 이미르였나? 그냥 거인도 아니고 거인의 왕이라.
그렇다면 최후의 상대로는 부족함이 없다.
페오페는 가슴이 먹먹했다. 저것이 인간의 생인가? 요정에 비하면 하루살이만큼이나 짧은 생이기에 필사적으로 불태우려는 것인가?
리안은 입구를 가로막았다. 마치 개기일식처럼 역광을 받고 있는 모습이 이상하게도 커보였다.
“이름…… 이름이…….”
페오페는 목이 잠겨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가다듬었다.
“이름이 뭐야?”
그렇게 리안에게 물었다. 천국에서 이름을 알려 주는 건 위험한 일이지만 페오페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서로를 신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젠트 리안.”
대검을 치켜든 리안이 페오페를 돌아보며 말했다.
“시로네의 검이다.”
쿵!
대검을 바닥에 깊숙이 박아 넣은 리안은 칼날에 등을 기대고 중심을 낮췄다.
이미르가 괴기스럽게 입가를 찢으며 달려왔다.
“크크크! 두 번째로 붙는 건가? 그 정도는 되어야 전사라고 할 수 있지.”
“덤벼라, 거인의 왕.”
이미르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돌진했다.
바윗덩어리가 굴러오는 듯한 위압감을 느끼며, 리안은 받아들일 자세를 취하고 기합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아아!”
몸을 웅크린 이미르의 어깨가 리안의 상체에 처박혔다.
대검이 휘어질듯 구부러지다가 탄성을 받아 되돌아왔다.
우드드득!
리안의 배 속에서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목에서 튀어나온 핏물이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
쇼크웨이브가 이미르의 가슴을 관통했다.
천국 최고의 마검사와 전사의 격돌이 일어났던 전장은 초토화되어 있었다.
그들이 지나갔던 자리마다 함몰된 흔적이 남았고 유리창이 깨진 곳으로부터 바람이 들어왔다.
이미르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웃고 있었다. 충격파의 시그널이 밀려들면서 세포 단위로 몸이 분해되고 있었다.
“크크크, 제법이군. 기분이 어때? 나를 찌른 기분이.”
아슈르는 입맛이 썼다. 육체를 빼앗긴 이미르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쉽게 일 검을 허용할 자가 아니었다.
“……너의 ‘부분’이었나?”
이미르는 전무후무한 일화의 술을 10단계까지 달성한 거인이다. 얼마나 많은 육체를 흡수했는지 아는 사람은 라밖에 없지만 족히 1만은 넘어갈 것이라는 게 정설이었다.
“거인이라고 머리를 쓰지 못하는 건 아니지. 천천히 오라고.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이미르가 스르륵 주저앉자 아슈르의 검이 머리를 가르며 빠져나왔다.
잠시 후 이미르의 몸에서 기포가 부글거리더니 검은 액체로 풀어졌다.
아슈르는 발밑을 적시는 액체를 노려보았다. 손바닥을 펼치자 그의 검이 시그널로 변해 사라졌다.
“제길, 방심했군.”
이미르는 전략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약한 자들의 차선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자존심을 버리고 대세계전으로 가는 것을 택했다.
동물적인 본능? 아니, 초인적인 본능이었다.
이미르는 단순한 것을 좋아하지만 언제나 복잡한 것을 이긴다. 한 가지의 특성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바로 전쟁의 냄새를 맡는 본능이었다.
천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언제나 이미르는 전쟁의 핵심에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대세계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자신의 육체를 찾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늦었을지도 모르겠군.”
성향은 반대지만 이미르의 후각은 신뢰할 만했다.
그런 그가 전투를 포기하고 사라졌다는 건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는 얘기. 생각보다 대세계전의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는 게 분명했다.
아슈르는 바닥을 박차며 전장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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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니스! 물러서! 더 이상은 안 돼!”
아린이 소리쳤다. 오브제의 영역에 들어간 지 벌써 10분이 지났다. 그럼에도 카니스는 물러서기는커녕 마법의 연사 속도를 더욱 높이고 있었다.
바알브는 대응할 가치가 없다는 듯 자리를 피해 버렸다. 이각 마라는 기본적으로 카니스의 능력을 상회하지만, 오브제가 있는 이상 직접 나설 일은 없을 터였다.
수면의 오브제는 생물체를 잠에 빠트리게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거부할 경우였다.
억지로 버틴다면 수면 부족의 피로가 누적되어 결국 사망에 이르기 때문이다.
현재 카니스의 정신은 대략 8일 동안 잠을 자지 않은 것과 맞먹는 상태였다.
“인간치고는 제법이군. 하지만 언제까지 버틸 것인가? 숙면을 취하지 않으면 죽음이다.”
카니스는 정신을 차렸다.
조금 전에 바알브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듣지 못했다. 눈으로 보는 풍경이 뇌로 전달되지 않고 있었다.
-카니스! 정신 차려!
하비스트가 정신 채널을 통해 소리쳤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정신이 마비되기 시작했는지 대답조차 돌아오지 않았다.
“주인이 꽤나 신경 쓰이나 보군. 하긴 생명을 공유하고 있으니 당연한가?”
카리엘의 말에 하비스트가 돌아보았다. 현재 대천사는 지상으로 내려와 상황을 관조하고 있었다. 하비스트의 힘이 약화되었음을 간파한 게 분명했다.
“어둠을 유지하려면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하지. 그것을 인간의 생명으로 보충하는 것인가? 재밌는 발상이지만 힘을 분산시킬 뿐이야.”
카니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엎드려 있었다는 사실을 조금 전에 알았다. 심지어는 입가에 침이 흐르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아린, 모두가 살아서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안 돼! 카니스! 그건 절대로 안 돼!”
아린의 머릿속에 무서운 생각이 떠올랐다.
스승님의 성격을 닮은 카니스가 이런 상황에 시도할 방법이라면 아케인이 죽음 직전에 꺼냈던 카드밖에 없었다.
하비스트도 같은 판단을 내렸다.
-카니스, 설마 어비스 메모리냐? 하지만 너는 아케인과 달라. 버티지 못할 수도 있어.
카니스는 고개를 저었다. 겨우 그 정도의 각오로는 이각 마라를 해치울 수 없었다.
-아니. 전에 말했던 것을 해 볼 거야. 네 힘이 필요해, 하비스트. 도와줄 수 있겠지?
-안 돼. 그건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마법이다. 실험을 해 본 적도 없잖아. 최소한 빛과 어둠의 서를 해석하고 난 뒤에 시도해 봐야 해.
-하비스트, 우리 중에 누군가 살아야 한다면 그건 아린이야. 너도 알고 있잖아.
하비스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기에 카니스의 말을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그것은 자신의 소멸을 의미했다.
-알았다. 내 힘을 주지.
하비스트의 몸이 카니스의 그림자로 흡수되었다.
조금이나마 의식을 되찾은 카니스는 죽음을 각오했다.
딱히 어떤 상황에서 죽어야겠다고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그저 영원한 무의 세계로 기꺼이 들어갈 뿐이었다.
“심연의 한계(리미트 오브 어비스).”
이론으로만 설계한 마법이 발동됐다.
순간적으로 정신의 피로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는 아케인처럼 기억을 지운 것이 아니었다.
그가 지운 것은 한계였다.
카니스는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었다. 아마도 시로네처럼 지고의 경지에 오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한계를 뛰어넘었다.
불을 모르는 아이들은 기꺼이 불꽃에 손을 집어넣고, 고승들은 스스로 몸을 불태워 좌탈입망으로 들어간다.
무지와 돈오의 차이는 현격하지만, 스스로 불에 뛰어드는 정신적 크기는 같다.
카니스는 깨닫는 고승이 될 수 없다면 무지한 아이가 되기를 선택했다.
그 결과로 얻은 것은 일시적인 이모탈 펑션 상태였다.
물론 실제로 열반에 이른 것은 아니다. 다만 전투에 있어서만큼은 충분히 유사한 정신력을 얻을 수 있었다.
“간다!”
심연의 한계의 지속 시간이 끝나기 전까지는 어떤 피로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쌩쌩 날아다니는 카니스의 모습이 아린에게는 지옥이었다.
“카니스! 안 돼! 제발 그러지 마!”
아린이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카니스와 하비스트가 없이는 세상을 살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카니스는 누구의 목소리도 듣지 못했다. 처음으로 성공시킨 마법에 약간의 희열까지 느끼며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마법을 시전했다.
‘어둠의 권속.’
마법사의 정신을 물리력으로 변환시키는 마법. 아케인은 다크 골렘이었지만 카니스의 권속은 전혀 다른 형태였다.
바닥에 수면처럼 그림자가 퍼지더니 웜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지렁이가 솟구쳤다.
“스승님…….”
이모탈 펑션에 준하는 정신력을 얻을 수 있다면 어둠의 권속은 가장 궁합이 잘 맞는 마법이었다.
‘칭찬해 주실 거죠?’
10미터 길이의 지렁이가 포물선을 그리며 수직으로 떨어졌다.
바알브는 긴장하지 않았다. 팔짱을 풀지 않은 채로 무심히 멀어질 뿐이었다.
“제법이군. 이번 것은 칭찬해 주…….”
바알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닥에서 또 한 마리의 다크 웜이 솟구쳤다.
역류하는 폭포가 바알브를 삼킨 채로 천장까지 치솟았다.
오브제가 퍼석 깨지고 바알브의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기괴하게 뒤틀린 바알브의 시체가 떨어졌다.
6. 천국 소동 (5)
카니스는 숨을 몰아쉬었다. 머리가 어지럽다 못해 뇌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편해질 수 없었다. 최후의 순간까지 아린을 위해 싸워야 했다.
“바알브, 꼴이 말이 아니구나.”
카리엘의 음성에 바알브의 몸이 움찔거렸다.
“죄송합니다, 카리엘 님.”
카니스의 얼굴이 멍해졌다. 분명 온몸의 뼈를 다 부숴 놓았는데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니, 단순히 살아 있는 게 아니었다.
각각의 신체 기관이 이상한 형질로 변하고 있었다.
갑각으로 둘러싸인 곤충의 다리가 튀어나오고 연체동물과 흡사한 촉수가 뻗어 나왔다.
“악마각성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알브의 덩치가 산처럼 커지자 모두 고개를 수직으로 쳐들었다.
온갖 생물이 잡탕으로 뒤섞인 거대한 생물체였다.
잡탕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문어와 바퀴벌레, 파리, 구더기, 뱀 같은 것들을 솥단지에 넣고 끓인 다음 물기를 말리면 정확하게 저런 형태가 나올 것 같았다.
“키키키! 각성을 한 것은 2천 년 만이군.”
“이젠…… 끝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