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88
테스의 살기 어린 눈을 무심하게 쳐다보던 이미르는 무릎을 꿇고 있는 리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천장으로 고개를 쳐들고 있는 리안의 얼굴은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오른손은 뼈밖에 남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대검을 쥐고 있었다.
정신과 육체가 통합되어버린 화신술의 무서움이었다.
“1승 1무 1패. 오늘은 비긴 걸로 할까?”
“…….”
“크크, 이렇게 약해서야. 본체랑 싸울 때는 뼈라도 남아나겠나?”
이미르는 잘려나간 오른팔을 들었다. 리안의 입에 쑤셔 넣자 검은 액체로 풀어지더니 목구멍 속으로 흘러들었다.
“데려가라. 그리고 소중히 해라. 만약 살아남는다면 인간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나에게도 재밌는 전쟁이 되겠군.”
이미르가 집어 던진 리안이 바닥을 미끄러지자 테스는 황급히 안아들었다.
뼈만 남은 팔을 본 순간 눈물이 핑 돌았지만 일단은 집으로 돌아가야 치료를 할 수 있었다.
드론이 날아와 테스의 팔에 건틀렛으로 장착되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이미르를 노려보다가 몸을 돌려 아린에게 달려갔다.
다리부터 녹아내리는 이미르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리안이 살아남기를 바랐다. 인간은 더 강해져야 한다. 거인의 왕을 부활시킬 수밖에 없을 만큼.
강력해진 인간을 파괴하는 것이 자신의 숙명이었다.
‘다시 싸울 날이 오겠지. 그때까지 잠이나 자 볼까.’
이미르는 시커먼 액체로 풀어졌다. 더 이상 천국에 남은 ‘부분’은 없었다. 그는 영원히 녹지 않은 얼음에서 언젠가 닥쳐올 최후의 전쟁을 기다리며 오랜 잠에 빠져들 것이다.
-시로네, 준비 끝났어!
시로네의 머릿속에 아린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탈출하고 싶지만 메타게이트가 작동하는 시간은 30초였다. 탈출할 타이밍이 생사를 결정짓는 상황이었다.
시로네는 완벽한 상태로 돌아온 카리엘을 두고 모두가 탈출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최소한 1명이라도 남아 친구들이 대피할 시간을 벌어 주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린. 지금 메타게이트를 열어. 그리고 무조건 빠져나가.
-너는 어쩌려고?
-카리엘을 막을 거야. 1초만 접근을 지체시킨다면 빠져나가는 건 충분해.
-하지만 시로네! 우리 중 누구도 그런 건……!
-부탁할게. 에이미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줘.
비밀로 해 달라는 얘기였다. 시로네가 남는다는 사실을 알면 에이미는 절대로 이곳을 떠나려 하지 않을 테니까.
아린은 시로네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다.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라도 누군가는 살아야 한다.
카니스가 그랬듯이, 리안이 그랬듯이, 시로네도 소중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선택을 한 것뿐이었다.
-알았어, 시로네. 준비가 되면 신호해 줘.
시로네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자신은 어떻게 될까? 생사도 모르는 사람을 구하러 친구들이 천국에 찾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곧바로 죽는다면 괜찮겠지만, 카리엘에게 붙잡혀 온갖 실험을 당할지도 모른다.
두려웠다.
모두가 떠나고 자신만 남게 되는 것이다.
‘죄송해요, 교장 선생님. 교장 선생님의 말이 옳았어요.’
시로네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이내 매서운 눈빛으로 카리엘을 노려보았다.
돌진해야 한다. 메타게이트를 열고 들어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1초. 어떻게든 1초만 카리엘의 주의를 끌면 된다.
지금쯤이면 아린이 친구들에게 작전을 설명했을까? 자신이 여기에 남는다는 것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시로네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작별의 순간이었다.
-아린! 지금이야!
아린이 메타게이트를 여는 것과 동시에 시로네는 카리엘에게 달려들었다.
에이미가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째서? 시로네?’
들었던 작전과 달랐다. 동시에 몸을 던지고 결과는 운에 맡기는 게 가장 공평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린의 슬픈 표정에서 순식간에 상황을 깨달아 버린 에이미가 눈물을 터뜨리며 손을 내밀었다.
“안 돼! 시로……!”
아린은 에이미의 허리를 끌어안고 메타게이트의 포탈로 뛰어들었다. 카니스와 리안을 붙잡은 테스 또한 포탈로 몸을 날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시로네, 부디…… 다시 볼 수 있기를.’
시로네는 고개를 쳐들고 눈동자로 눈물을 받았다. 환희와 슬픔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카리엘이 친구들의 상황에 신경 쓰지 않는 건 다행이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자신만을 노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차라리 홀가분했다.
친구들을 구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붙잡혀 주리라.
-그러지 마, 시로네.
갑작스러운 정신공명에 옆을 돌아보았다. 눈웃음을 짓고 있는 페오페가 나란히 날고 있었다.
-페오페, 왜 아직도 여기 있어?
페오페의 생각이 빠른 속도로 침투해 들어왔다.
-인간이란 이상한 종족이로구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 말이야. 그것을 위해서라면 죽음마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거겠지.
-갑자기 무슨 얘기야?
시로네는 덜컥 불안해졌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어쩌면 아린이 작전을 승낙한 이유는…….
‘아니, 그럴 리가 없어. 그래서는 안 돼.’
이 작은 요정은 우리를 도와주었다. 천국에 혼자 남게 되었어도 나락까지 떨어진 기분이 들지 않는 이유는 그래도 페오페가 곁에 있어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소멸이라는 것은 무서운 일이야. 하지만 나는 너희를 보면서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인간. 나에게는 그게 참으로 멋지더구나.
-페오페, 안 돼.
-친구들에게 돌아가. 그리고…….
페오페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사랑해, 시로네.
페오페는 정신감응을 차단하고 카리엘에게 쇄도했다.
시로네는 그녀가 멀어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시 후 의지와 상관없이 다리가 멈추고, 몸이 메타게이트가 있는 쪽을 향해 돌아섰다.
“흐윽! 흑!”
시로네는 메타게이트를 향해 뛰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물에 잠긴 것처럼 세상이 부해 보였다. 기적과도 같은 기회 앞에서 그는 한없이 나약했다.
돌아갈 수 있다.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서 모두와 다시 만날 수 있다.
‘엄마, 아빠, 제가 갈게요. 반드시 돌아가서…….’
시로네는 우뚝 멈춰 섰다. 서로 다른 마음이 같은 무게로 싸우고 있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페오페와 했던 한 가지 약속이었다.
-만약 내가 잡혀가도 구하러 와 줄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친구라면 말이야.
-당연하지.
“당연하지…… 페오페.”
시로네는 울먹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정신력으로 순간 이동을 시전했다.
사랑한다고 말한 그녀의 말이 환청처럼 맴돌았다.
한 살짜리 요정에게 사랑이란 그토록 거대한 개념이었다. 남녀 간의 사랑도, 친구와의 사랑도, 부모의 사랑도 아닌 그저 유일한 사랑.
페오페는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요정이었다.
그런 친구를 내버려 두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죽음보다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페오페! 제발! 제발 기다려!’
죽음을 목전에 둔 페오페는 겁에 질려 있었다. 이것이 소멸인가? 모든 것이 무섭고 생소하기만 했다.
순간순간마다 미지의 세상이 펼쳐지고 그에 따라 마음도 극과 극을 오가고 있었다.
과연 옳은 선택이었을까? 아린에게 했던 이야기는 온전한 진심이었을까?
-나 페오페야. 누군가 남아야 한다면 전부 떠나. 내가 카리엘을 막을게.
-하지만…… 너는 어쩌고?
-난 어차피 천국을 떠날 수 없어. 게다가 이건 신민의 내정관인 내가 해야 할 일이야.
페오페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나는 나선의 요정. 아무리 흔들려도 똑바로 나아가고 있는 거니까.’
이제는 진가를 인정해준 이기린도 만날 수 없지만 생의 마지막에서 깨달았기에 만족할 수 있었다.
일화의 술이 위대한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위대한 것은 기꺼이 일화의 술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희생이었다.
시로네가 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건방진 요정이로구나.”
카리엘이 콧방귀를 뀌며 손을 내밀었다. 그의 능력이라면 요정쯤이야 순식간에 소멸시킬 수 있을 터였다.
죽음을 직감한 페오페의 입술이 삐죽 내려갔다.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양손을 내밀며 사력을 다해 나선의 힘을 쏘아 보냈다.
“페오페! 그만둬!”
예상치도 못한 시로네의 목소리에 페오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카리엘이 스쳐지나갔다. 천사의 가느다란 손이 시로네의 목덜미를 노리고 들어왔다.
‘놓치지 않는다. 너만은!’
연구할 것이다. 어떤 잔혹한 방법을 써서라도 아타락시아의 기재를 해부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것이다.
카아아아앙!
그 순간 보랏빛 장검이 카리엘의 손가락 사이에 박혔다. 어느새 흑발의 남자가 시로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카엘의 수하인 삼각 마라 아슈르였다.
“아슈르…… 너까지 나를 방해할 셈이냐?”
“이카엘 님의 전언입니다.”
카리엘의 눈에 분노가 담겼다.
삼각 마라 따위가 다짜고짜 용무를 대다니. 아직도 이카엘이 천국을 호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물론 한때는 이카엘을 존경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천국의 수치 따위가 나에게 전언을 보내?”
“말을 가려서 하시죠.”
“틀린 말은 아니지. 천사장까지 오른 고결한 천사가 하찮은 인간의 씨를…….”
“카-리-엘- 님!”
아슈르는 악귀처럼 눈을 부릅떴다.
“제가 분. 명. 히. 이카엘 님의 전언이라고 했습니다.”
카리엘은 입을 다물었다. 이카엘의 전언이었다.
“이 소년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결코 좋은 감정으로 당신을 대할 수 없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카리엘의 콧잔등이 구겨졌다. 도저히 그녀의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카엘은 추해졌다. 몰락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카엘이라는 생각 정도는 하고 있었다. 사모했던 천사에게 남은 마지막 회한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천사의 수장까지 오른 그녀가 한낱 인간에게 이다지도 정성을 들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카리엘은 침묵으로 자존심을 세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아슈르가 시로네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라. 페오페는 무사할 것이다. 이카엘 님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순간 이동으로 모든 정신력을 소모한 시로네는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슈르의 말이 흘러들어오자 희미하게 미소가 번졌다.
이카엘이라면 믿을 수 있다. 자신에게 모든 것을 전해 준 사람이니까.
“잘 가, 시로네.”
나선의 힘을 발동한 페오페가 시로네를 메타게이트로 날려 보내며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시로네가 천국에서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다음 권으로 이어집니다
1. 갈리앙트의 추억 (1)
케르고 자치 지구.
시로네 일행이 머물렀던 방은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정숙한 공기로 채워진 공간에 검은 구체가 탄생했다. 구체는 2차원의 구멍처럼 보였고, 그곳에서 다섯 사람이 내뱉어졌다.
바닥을 구른 에이미는 포탈로 기어가 시로네를 불렀다.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테스와 아린이 포탈로 들어가려는 그녀를 붙잡았다.
에이미는 말리는 두 사람도 미웠다. 시로네를 내버려 두고 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놔! 전부 비켜! 시로네를 구하러 갈 거야!”
“에이미! 들어가면 못 돌아와! 지금은 기다려야 해!”
“뭘 기다려? 너희가 시로네를 사지에 남겨 두고 왔잖아!”
“아니야! 페오페가……!”
아린은 말을 멈추고 포탈을 바라보았다. 공간의 저편에서 시로네가 회전하며 날아오고 있었다.
에이미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두 팔을 벌려 시로네를 받은 그녀는 나선의 힘에 바닥을 뒹굴었다. 너무나 기뻐서 고통조차 느낄 수 없었다.
아린은 메타게이트의 포탈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천국에 남은 한 요정을 떠올렸다.
‘고마워, 페오페.’
포탈이 열린 곳은 케르고 족장이 내준 방이었다.
천국은 먼 거리지만 거핀의 문을 통해 다녀왔으니 시간의 상대성은 발생하지 않는다. 태양력의 차이를 계산하면 3일 정도가 지난 것 같았다.
“리안! 리안…….”
테스의 눈물이 리안의 얼굴에 떨어졌다. 살아 돌아왔지만 기쁘지 않았다. 세계 최고의 검사가 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가 팔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리안의 오른팔은 뼈만 남은 상태였다. 대검을 빼내려고 해 봤지만 손가락이 펴지지 않았다.
테스는 기가 찼다. 근육이 없는데, 인대조차 끊어져서 덜렁거리는데 어떻게 검을 쥐고 있단 말인가?
그 순간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케르고인이 들어왔다.
파트너를 끌어안고 경계의 눈빛을 보내는 여자들을 멍하니 지켜보던 그가 출구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돌아왔다! 그들이 돌아왔다!”
아린은 케르고인의 초경에서 적대감을 읽었다. 울고만 있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한 에이미가 물었다.
“아린, 무슨 일이야?”
“모르겠어. 하지만 빨리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아. 분명 호의적인 감정은 아니었어.”
에이미 일행은 부상자를 데리고 방을 빠져나왔다. 토굴의 구조는 복잡했지만 출구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문제는 일방통행이라는 점이었다.
동굴 저편에서 발소리가 밀려들더니 수십 명의 전사들이 출구를 가로막았다.
“어디를 도망치려 하느냐, 이 배신자들아!”
아린이 정신 공명으로 언어를 해석했다.
“케르고를 능멸한 죄는 죽음으로도 갚을 수 없다! 3일 낮 3일 밤 동안 살을 발라내고 태양 아래에서 말려 죽일 테다!”
통역을 거쳐서 들어오는 언어임에도 섬뜩했다.
에이미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카둠의 의뢰를 성사시키지 못했지만 처음부터 계약 같은 것은 아니었다.
전사들 사이에 낯이 익은 노인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얼굴에 주름살이 자글자글했고 아직 근육이 덜 빠진 덩어리들이 늘어져 있었다.
“당신……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