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94
기만전술일까? 그럴 성격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강력한 경쟁자 1명이 포기해 준다면 나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아무튼 열심히 해 보자. 이루키, 네이드. 너희도 잘 부탁해.”
“그래, 뭐……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루키가 귀찮다는 투로 말했다. 학생들은 세 사람 모두 졸업반에 진급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아무 이유 없이 그런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자신들도 생각을 다시 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시로네 일행과 가장 먼저 인사를 나눈 사람이 클래스 포의 1인자인 보일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 또한 클래스 포의 파워 게임이었다.
그런 만큼 서열 2위인 아젤리오 판도라는 기분이 나빴다.
에이미라는 1인자가 있었을 때는 모든 학생이 2인자에 불과했기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현재 1등과 2등인 보일과 판도라의 점수 차는 1점밖에 되지 않았다.
보일의 대화가 얼추 끝나가자 판도라가 슬그머니 시로네에게 다가가 손을 들었다.
“안녕?”
네이드가 윽 소리를 냈다. 만인의 친구인 그가 질색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
고급반에서는 유명한 괴짜였다.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소녀였다.
시로네도 그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친구 하나 없이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외롭게 보이기도 했다.
“안녕, 판도라. 이제 같은 클래스가 됐네. 좀 이상하다.”
“후후, 나 같은 미모의 여인과 같이 수업을 받는 기분이 어때?”
판도라가 상체를 기울이며 추파를 보냈다. 이런 경우에는 시로네라도 안면을 몰수할 수밖에 없었다.
딱히 외모가 미운 건 아니지만 화장이 야해서 부담스러웠다. 분 냄새만 맡아도 심장이 이상했다. 판도라의 특기가 향기 마법인 것과 관련이 있을 터였다.
“어머, 얼굴 빨개진 것 좀 봐. 부끄러워할 거 없어.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작정하고 접근했는지 판도라의 블라우스는 단추가 평소보다 2개나 덜 채워져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몸을 숙이자 눈을 감아야 할지 그냥 보고 있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어느 쪽도 실례되는 행동일 것 같았다.
“어허, 이거 왜 이러시나? 시로네는 이미 임자가 있다고.”
네이드가 시로네의 눈을 가렸다. 그리고 앞이 안 보이는 친구를 위해 판도라의 블라우스 안을 대신 훔쳐보았다.
판도라는 남학생들의 시선에 신경 쓸 수도 없을 만큼 짜증이 났다.
시로네의 임자란 다름 아닌 카르미스 에이미였다.
그녀가 고급반에 있었을 때는 어떤 학생들도 잘났다는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성적이면 성적, 외모면 외모, 모두 그녀가 우월했다. 시로네에게 추파를 던진 이유도 기회만 주어지면 얼마든지 자신의 남자로 만들 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흥, 에이미 선배님하고 사귀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어차피 만나지도 못하잖아. 게다가 이번 졸업 시험에 통과해서 학교를 떠날 테고. 시로네에게는 새로운 여자가 필요해. 세련되고 지적인 나 같은 여자 말이야.”
판도라는 보물처럼 아끼는 가슴을 은근슬쩍 모았다.
“아무튼 라인을 잘 타는 게 좋을 거야. 조만간 내가 보일을 따라잡을 거거든. 너희도 내 라인에 서면 잘 봐줄게.”
시로네를 끌어당긴 이루키가 손가락을 흔들었다.
“너무 무시하는 거 아냐? 우린 시로네 라인이라고.”
“호호호! 처음이니까 마음껏 즐겨. 클래스 포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테니까. 그럼, 시로네. 이따 봐.”
판도라는 손으로 키스를 보내며 자리로 돌아갔다. 시로네는 첫 수업이 시작하기 전부터 정신이 혼미했다. 하지만 덕분에 클래스 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보일과 판도라, 서열 1,2위가 졸업반을 노리고 있고 그 아래로 다른 학생들이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시로네는 이번에 졸업반을 포기한 게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쟁을 피할 생각은 없지만 선착순으로 정해지는 좁은 틈을 두고 친구들과 감정싸움을 하기는 싫었다.
올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끌어 낸다면 내년에는 에이미처럼 가장 먼저 신청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3교시까지 무난하게 지나가고 4교시 정신론 수업을 기다리는데 교사가 3명의 전학생을 데리고 들어왔다.
잡지를 정기 구독하는 학생들이 그들을 알아보고 웅성거렸다.
빅터 사비나.
보니파르 클로저.
에어하인 단테.
수도 바슈카의 왕립 마법학교 출신으로 현재 왕국에서 가장 이슈가 되는 학생들이었다.
특히나 에어하인 단테는 현직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차세대 대마법사라고 불릴 만큼 재능이 출중한 천재 중의 천재였다.
“자, 자! 모두 조용. 오늘부터 클래스 포에서 수업을 받게 된 전학생들이다. 자기소개를 할 테니 반갑게 맞이해 주도록.”
교단으로 올라간 단테는 학생들을 돌아보았다. 첫인상은 ‘구리다’였다. 수도에서 최첨단 유행을 향유하던 그의 눈에는 모든 게 촌스러워 보였다.
단테는 보일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딱 봐도 마마보이가 분명한 차림새였는데 소름이 돋을 만큼 당당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애가 시로네인가? 설마, 아니겠지.’
올리비아에게 들은 시로네의 느낌과는 달랐다. 외모는 모르지만 최소한 저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한편에서는 화장을 떡칠한 소녀가 추파를 날리고 있었는데 얼굴은 곱상하지만 말도 안 되는 진한 화장은 차마 눈 뜨고 봐 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수도에서 저러고 다녔다가는 술집 여자라는 오명을 쓰기 딱 좋았다.
“단테, 뭐 하고 있니? 자기소개를 해야지.”
단테는 생각을 접고 입을 열었다.
“반갑다. 에어하인 단테라고 한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
자기소개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3. 시로네 어디 있어? (3)
만약 다른 학생이 자기소개를 이렇게 했다면 야유가 나올 테지만 단테만큼은 예외였다.
이미 잡지를 통해 알 만큼 아는데 무슨 소개가 필요하냐는 자부심에 학생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사비나와 클로저까지 소개가 끝나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정신론 교사는 공인 8급의 마법사 자격증을 취득한 카르만이라는 60대 철학자였다.
크레아스에서는 나름대로 평판이 좋지만 사실 수업 자체는 지루한 편이었다.
“오늘은 개성과 아집을 구분하는 알고리듬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남들과 다르기를 바라죠. 하지만 단순히 남과 다르다는 게 개성은 아닐 것입니다.”
단테 일행은 시작부터 심드렁했다. 왕립 마법학교에서 서열 400위권에서 끝나는 과목이었다.
불량스럽게 의자를 젖히고 앉아 있던 클로저가 말했다.
“수업 더럽게 진부하네. 개성이면 어떻고 아집이면 어때? 생긴 대로 사는 거지. 나이가 몇 살인데 정신론이야.”
단테 또한 수업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보다 호기심이 드는 건 시로네라는 학생이었다.
아침부터 올리비아와 면담을 했던 단테는 그녀에게서 시로네라는 아이를 꺾으라는 특명을 받았다.
자신의 전공이었기에 단테는 흔쾌히 수락했다.
시로네가 누군지는 몰라도 여태까지는 콧대를 빳빳이 세우고 다녔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고개조차 들지 못하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희한하네. 어째서 1등이 아니지?’
제2급 대마법사가 직접 짓밟으라고 특명을 내린 존재라면 고급반 정도에서는 당연히 1등을 차지해야 한다. 하지만 1등이라는 자는 마마보이 소년이었다.
그렇다면 시로네는 대체 누구인가?
단테의 눈빛이 학생들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다가 1명의 소년에게 시선이 고정되었다.
메르코다인 이루키였다.
‘그래, 저 자식도 있었지.’
왕립 마법학교에 다닐 무렵만 해도 라이벌 구도가 형성될 뻔했으나 그가 전학을 가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시간이 흘러 자신은 왕국 최고가 되었고 이루키는 잡지에조차 실리지 않으니 격차는 벌어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니, 사실은 이곳의 모든 학생이 왕립 마법학교 학생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왕립 마법학교는 클래스의 구분이 없다. 오직 1등부터 꼴등까지의 순위만이 있을 뿐이었다.
마의 장벽이라고 불리는 30등부터 졸업 시험을 치를 자격이 주어지는데 현재 단테 일행의 등수는 31, 32, 33등이었다.
단테는 지금 당장 졸업 시험을 치른다고 해도 통과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목표는 오로지 1등이었다.
30위권 내에는 32세의 학생도 있다. 실력은 떨어져도 20년 넘게 학교에 다닌 경험은 무시할 수 없을 테니 확실하게 준비해서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할 생각이었다.
5대 명문 학교에 들어가면 마법협회에서 열 장의 졸업 티켓을 준다. 그 티켓을 받아 알페아스 마법학교도 매년 1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왕립 마법학교는 기존 열 장에 왕국 최고의 학교라는 특혜로 열 장이 더 추가된다.
수도의 인구가 워낙에 많은 데다가 졸업 시험에서 3분의 2가 통과할 수 있다는 메리트까지 더해졌으니 왕국에서 내로라하는 마법사 지망생들이 몰리는 것은 당연했다.
결국 알페아스 마법학교의 졸업반 30명과 왕립 마법학교의 상위 30명은 수준이 달랐다.
단순히 30명의 커트라인으로 클래스 포에 배정된 것부터가 단테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우선은 시로네라는 소년이 누구인지 봐 둘 필요가 있었다. 도무지 특별해 보이는 학생이 없자 단테는 옆자리의 소녀에게 물었다.
“야, 시로네가 누구냐?”
“어? 시, 시로네? 저기 맨 끝에 앉아 있는 애야. 그런데 시로네는 왜?”
단테는 대꾸조차하지 않고 시로네에게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이루키 옆에 앉아 있는 소년이었다. 또한 절대로 저 아이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 중의 1명이었다.
“흠, 공부는 잘하게 생겼네. 하지만 딱히 강해 보이지는 않는데?”
클로저와 사비나도 시로네를 살펴보던 참이었다.
“크크, 볼 것도 없이 범생이겠지. 시골 학교라 그런지 책만 파는 모양이야. 벌써부터 따분해 죽겠네. 이래 가지고 실전 연습은 언제 하는 거야?”
“패션은 구려도 잘생기기는 했네. 성격도 차분해 보이는 게 전형적인 언로커잖아.”
“흥, 이모탈 펑션으로 비벼 볼 거면 산에 들어가서 도나 닦을 일이지 마법학교에서 뭐 하는 거야?”
이모탈 펑션은 분명 희귀하지만 마법의 수준을 측정하는 절대적인 척도는 아니었다.
국가 공인 1급 마법사 5명 중에서 언로커는 1명뿐이라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카르만의 정신론 수업이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여러분이 어떤 생각을 떠올렸을 때 그 생각을 실천하는 난이도가 어려울수록 개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타인의 수긍을 쉽게 끌어낸다면 신념이라 할 수 있죠. 문제는 난이도가 낮으면서 수긍도 끌어낼 수 없는 경우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아집이라고 부릅니다.”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단테는 꾸벅꾸벅 졸았다.
“앞으로 여러분은 수많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개성도 좋고 신념도 좋습니다. 하지만 아집에 빠지지 마세요. 남들이 할 수 없는 것, 그렇지만 수긍을 이끌어 내는 것. 만약 그런 발상이 떠올랐다면 그 생각은 옳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학생들은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박수를 쳤고 카르만은 만족스럽게 떠났다.
“얘들아, 나 그럼 다녀올게.”
시로네는 부랴부랴 가방을 챙겼다. 알페아스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점심시간뿐이었기에 시간이 촉박했다.
“괜찮겠어? 밥도 안 먹고?”
“굶는 게 하루 이틀인가. 혹시 알아, 교장 선생님이 맛있는 거 사 주실지?”
“그래. 아무튼 잘하고 와.”
“혹시 늦을지도 모르니까 선생님에게 대신 말해 줘.”
학생들이 식당으로 갈 채비를 하는 동안 클로저는 두 팔을 치켜들고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후아, 이제 끝났나? 젠장. 수업 하나 들었는데도 이렇게 지루하다니. 여기서 반년을 어떻게 버티라는 거야?”
“그래도 오후에는 실습을 한다니까 좀 괜찮을지도. 단테, 단테. 일어나. 점심시간이야.”
잠에서 깨어난 단테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아우, 무슨 놈의 수업이 수면제야. 아무튼 시작하자. 놈의 텃밭에 왔으니 인사부터 하는 게 예의겠지.”
단테는 예리한 눈초리로 시로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어디를 둘러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뭐야? 어디 갔어?”
단테가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보일과 판도라가 앞을 가로막았다. 시로네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보일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 명성은 익히 들었다. 나는 크리스 보일이야.”
“보일이라. 너는 몇 등이지?”
보일은 기다렸다는 듯 어깨를 펴고 말했다.
“1등이다. 고급반에서는 내가 제일 높지.”
예상했던 대로 시로네는 1등이 아니었다. 스승님은 어째서 보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으셨을까? 단테라는 맹수를 풀어 놓았으면 최소한 1등은 물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럼 시로네는 몇 등이지?”
보일은 왕국 최고의 스타가 신경 쓰는 사람이 시로네라는 사실에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감정을 드러내면 지는 것이란 생각에 미소를 지었다.
“시로네는 이번 학기에 올라와서 아직 순위는 없어. 하지만 유망주인 것은 확실하지. 내 라이벌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나는 졸업반으로 갈 거 같아서.”
단테는 여전히 내밀고 있는 보일의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네 이름은 못 들어 봤거든. 한마디로 어째서 너하고 악수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거지. 고급반 1등이니까 알아서 꿇어라 이거냐?”
보일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비슷한 상황을 기대했던 게 사실이었다.
“나, 나는 동급생이니까. 친하게 지내자는 의미로…….”
“동급생? 그러니까 지금 너랑 나랑 급이 같다는 거네?”
단테에게서 서늘한 한기를 느낀 보일은 한 걸음 물러섰다. 클래스 포의 1위까지 오르면서 수많은 경쟁을 치렀지만 이런 식의 저급한 도발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너, 전공이 뭐냐?”
보일은 더 이상 무시당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소환 마법.”
“푸하하하!”
폭소를 터뜨린 클로저가 순간 다가와 보일의 복부를 가격했다. 두 발이 한 뼘이나 떠오른 보일이 쿵 하고 무릎을 찍으며 추락했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 상태에서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었다.
“교, 교내 폭행은……. 큭!”
클로저의 사커킥이 보일의 배를 걷어찼다. 마법사답지 않게 격투를 즐기는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때리는 게 미안해질 정도였다.
열일곱 살이나 먹은 놈이 한 대 맞았다고 세상 끝날 것 같은 표정을 짓다니. 촌구석 아니랄까 봐 하나같이 심심한 애들뿐이었다.
단테는 침을 게워 내는 보일을 아래로 깔아 보았다.
“일단 기다리고 있어. 조만간 내 밑으로 전부 세워 줄 테니까.”
강의실의 공기가 냉랭해졌다. 1시간 만에 본색을 드러낸 단테 일행에게 누구도 덤빌 생각을 하지 못했다.
사비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판도라에게 다가가 노골적으로 외모를 품평했다.
“너는 무슨 화장이 그러니? 역시 촌이라 다르네. 혹시 밤에 술집 나가니?”
판도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당돌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녀지만 이런 식의 모욕은 처음이었다.
사비나의 손이 판도라의 뺨을 어루만졌다.
“후후, 움직이지 않는 게 좋아. 내 손은 날카롭거든.”
판도라는 꼼짝할 수 없었다. 사비나의 손은 부드러웠지만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차가운 한기가 맴돌고 있었다.
“어디 보자. 요 앙칼진 것을 어떻게 해야…….”
지켜보고 있던 이루키가 끼어들었다.
“그만둬라. 애들도 아니고.”
사비나가 인상을 찡그리며 돌아섰다. 하지만 그녀가 말을 하기도 전에 단테가 걸어갔다.
“오랜만이다, 이루키.”
“뭐야, 네가 날 어떻게 알아?”
단테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당시에도 마주 보고 대화했던 사이는 아니지만 라이벌 구도로 한창 떠들썩했다.
이루키라고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주제도 모르고 자신을 무시하는 게 분명했다.
네이드가 끼어들어 분위기를 풀었다.
“와하하하! 싸우지 말자고. 학기 첫날부터 싸우면 쓰나? 이제부터 함께 공부할 사인데 친하게 지내야지. 안 그래?”
단테의 입장에서도 이루키와 척을 져서는 좋을 게 없다. 친하게 지낼 마음은 없지만 용뢰의 가문이었다.
단테는 이루키에게 신경을 끄고 네이드를 돌아보았다.
“시로네 어디 있어?”
시로네는 알페아스에게 갔다. 하지만 단테의 의중을 모르는 이상 순순히 말해 줄 네이드가 아니었다.
“시로네? 아하, 시로네 유명하지! 하지만 나도 제법 인기인이라고. 그러지 말고 우리 친구 할래? 내가 회장으로 있는 초자연 심령과학 연구회가 있는데…….”
시간을 끄는 수작에 클로저가 곧바로 튀어나와 주먹을 휘둘렀다. 네이드의 상체가 젖혀지면서 아슬아슬하게 주먹이 스쳐 지나갔다.
마치 합을 맞춘 것처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호오, 이 자식 봐라?’
클로저의 눈썹이 올라갔다. 간발의 차이로 피하면서도 눈조차 깜박이지 않는다는 건 싸움에 익숙하다는 증거였다.
단테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웃는 것치고 몸은 전투태세 만만이군.”
“으아아, 놀랐잖아.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네이드는 조금 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흥, 됐어. 무슨 꿍꿍인지는 몰라도 너 같은 겁쟁이한테는 볼일 없으니까.”
단테는 할 수 없이 이루키에게 물었다.
“어이, 너는 알지? 시로네 어디 있어?”
“시로네는 왜 찾는데?”
“인사나 해 두려고. 이제부터 학교생활이 고달파질 테니까. 설마 저 겁쟁이처럼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천하의 메르코다인이 말이야.”
“물론이지. 시로네는 이쪽에 있다.”
이루키는 자신의 발밑을 가리켰다. 바닥을 살펴보던 단테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