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214
“너, 설마…….”
알페아스는 고개를 저었다. 올리비아가 실망하리라는 건 알고 있지만, 두 번이나 그녀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30년 전과 다른 것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어쩌면 그랬다.
“오해하지는 마. 그래, 무슨 생각 하는지도 알지만, 솔직히 자신 없어. 죽을 때까지 에리나를 놓아주지 못할 수도 있지. 너에게 아무것도 보장해 줄 수 없어.”
올리비아의 눈이 조금 차가워졌다. 하지만 처음만큼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러는 거야? 죽은 아내는 마음에 품은 채로 나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게 뭔데? 뭐, 육체 같은 거야? 나이 먹으니 외로움이 뼈에 사무치니?”
알페아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 이성적으로 내린 결론은 아니야. 그냥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단지 그뿐이야.”
올리비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알페아스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이건 좀 이기적인가?”
올리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진짜로 이기적인 게 뭔지 알아? 당신이 감정을 솔직하게 말해 준 게 이번이 처음이라는 거야.”
“미안해. 나도 어쩔 수 없었어. 그때는 그랬지. 알고 있잖아, 어쩔 수 없었다는 거.”
올리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날더러 정말 어쩌라는 거야? 이 나이 먹어서 또 매달려 보라는 거야? 그러면 혹시라도 받아 줄 수도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도 아직은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 아무리 세상을 오래 살아도 이런 건 모르겠다고. 하지만 노력할게.”
올리비아는 눈물이 솟구치려는 것을 억지로 참아 냈다.
이기적인 제안에 화가 나야 하는데, 노력해 본다는 말을 듣는 순간 여태까지의 분노가 사라져 가는 것을 느끼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고 비참했다.
올리비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페아스의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솔직히 자신도 이제 와 계산적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제2급의 대마법사. 이룰 걸 다 이룬 마당에 인생에 두려울 게 무엇이 있겠는가?
그저 감정이 움직이는 대로,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면 그만이다. 그래도 되는 나이라고 생각했다.
“서고나 구경시켜 줘. 일단 차부터 마시지 뭐.”
이번에는 알페아스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서고에는 아내가 살고 있다. 어리석은 여자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또다시 모든 걸 내려놓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알페아스의 생각을 읽은 올리비아가 손가락을 저었다.
“착각하지 마. 그렇다고 제안을 받아들인 건 아니니까.”
“그런데 왜 하필 서고야?”
올리비아는 오래전의 일을 떠올렸다. 알페아스가 보는 앞에서 에리나의 초상화를 훼손시켰던 일은 지금도 기억 속에 잊히지 않는 악몽이었다.
“에리나 씨에게는…… 사과할 일도 있고.”
알페아스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번졌다.
“얼마든지. 그럼 갈까?”
알페아스가 먼저 자리를 뜨자 올리비아 또한 다른 교사들의 눈치를 보더니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뒤를 졸졸 따랐다.
교사들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대결이 끝났으니 둘 중 1명은 사달이 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제자들을 죽도록 싸움 붙일 때는 언제고 나란히 서고로 떠나 버리자 어안이 벙벙했다.
한편 단테의 인터뷰로 승승장구해 왔던 킬라인은 절망적이었다. 새로운 스타의 탄생이라고 볼 수 있지만, 문제는 자신의 미래였다.
여태까지 단테라는 스타를 독점해 왔다. 하지만 결국 그는 저물었고 이제는 시로네의 세상이었다.
앞으로 수많은 특파원들이 시로네를 붙잡으려고 난리를 칠 테니 경쟁률이 장난이 아닐 것이다.
또한 그들의 첫 번째 제거 대상은 당연히 자신이었다.
머리를 굴리던 킬라인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렇게 된 이상 한탕 크게 해서 후일의 발판을 깔아 두는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시로네를 붙잡으려고 할 때 자신은 역으로 베팅해서 특종을 노리겠다.
킬라인은 영상 기록관에게 걸어갔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자 영상 기록 장치가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황당하게 지켜보던 그녀가 싸늘한 눈으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이게 쓰러져 있어?”
“어, 그게…… 팔찌가 전부 깨졌잖아요. 영상 기록 장치도 연동되거든요. 그래야 전투를 찍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가 마지막에 펑 하고 쓰러진 거죠.”
영상 기록관이 불가항력이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킬라인은 욕을 한 바가지 퍼부으려다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옵스큐라는 예민한 물건이라 약간의 충격으로도 깨질 위험이 있었다.
“빨리 확인해! 옵스큐라 말이야. 그게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기사로 낼 수 없어.”
“아, 알겠습니다.”
영상 기록관은 본체를 열고 내부를 살폈다.
한참이나 속을 뒤적거리던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요. 옵스큐라는 무사합니다.”
킬라인의 심장박동 수가 비로소 정상 수치로 되돌아왔다.
“후우, 그건 다행이네.”
학생들을 무사히 돌려보낸 시이나가 임무를 끝마치고 다가왔다.
“무슨 일이죠? 뭔가 문제라도?”
영상 기록관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하하, 그게…….”
킬라인이 갑자기 소리쳤다.
“이럴 수가!”
특파원의 본능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영상 기록관과 시이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그녀는 슬픈 표정을 연기했다.
“옵스큐라에 금이 갔어요. 손상된 옵스큐라는 영상을 재생할 수 없어요. 결국 아무것도 담지 못하게 되었네요.”
시이나도 안타까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의 대결은 수많은 학생들에게 교보재가 될 만큼 수준이 높았다.
시로네와 단테의 전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옵스큐라가 깨졌다는 건 개인적인 아쉬움을 떠나서 왕국 전체의 손실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알페아스 교장 선생님이 사드에게 블랙박스를 파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들었다.
물론 옵스큐라에 담긴 건 단순한 영상에 불과하지만 이왕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확실하게 단속을 하는 게 좋았다.
“저런, 안됐네요. 유감이에요.”
시이나는 진심 반 거짓 반으로 위로의 말을 전하고 떠나갔다.
그녀가 멀어지자 영상 기록관이 무슨 짓이냐는 듯 킬라인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교사회 최고의 특파원은 언제까지나 자신일 것이다.
‘후후후! 특종, 특종이다!’
밝혀진 진실 (1)
시로네와 단테의 대결이 끝나고 일주일이 지났다.
올리비아는 여전히 임시 교장직을 수행하고 있었고, 다음 학기부터는 교감으로 다시 부임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학생들에게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올리비아는 제2급의 대마법사.
왕립 마법학교로 돌아간다면 모를까 알페아스의 밑에서 일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소문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신나는 일이다.
인격자인 알페아스를 필두로 왕국 최고의 교사인 올리비아까지 학교에 들어온다면 학교의 인지도는 훌쩍 뛰어오를 것이다.
그래서인지 학기가 한 달밖에 남지 않아 어수선할 시기에도 학생들의 면학 분위기가 좋았다.
올리비아는 알페아스와 자주 산책을 다녔다.
여전히 두 사람은 불과 물처럼 의견이 맞지 않았지만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올리비아는 불처럼 쏘아붙이다가도 알페아스가 무슨 말을 하기만 하면 찬물을 끼얹은 듯 입을 다물었다.
그 사실을 토대로 교사들과 학생들은 올리비아가 알페아스에게 어떤 약점을 잡힌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오늘도 올리비아는 알페아스와 교내를 돌아다니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학기 동안 대부분의 커리큘럼이 수정되었기에 바쁜 건 교사들뿐이었다.
“이쪽에는 장미를 심을 거야.”
올리비아가 화단의 너비를 재듯 두 팔을 벌리면서 말했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그녀를 보고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올리비아 교장 선생님!”
올리비아가 다정한 미소로 그들을 반겼다.
“그래, 수업은 다 끝났니?”
“네. 이제 도서관으로 가려고요.”
“그렇구나. 하지만 실습 기간인데 훈련장은 안 가도 되겠어?”
“아, 오늘 이천번 수업이 있었거든요. 컨디션 조절하려고요. 예전에는 몰랐는데 이천번이 도입되니까 실습 기간하고 맞물려서 힘든 점이 있는 거 같아요.”
“그럴 수도 있겠구나. 교사 회의 때 내가 건의를 해 보마.”
“어? 정말요? 감사합니다!”
학생들은 뛸 듯이 기뻐하며 도서관으로 멀어졌다.
거창한 철학을 고수하기보다는 효율을 높이기 위해 발 빠르게 대응하는 것이 올리비아의 교육 방침이었다.
“교장 선생님!”
사드가 멀리서부터 소리를 치며 달려왔다. 표정을 보아하니 무슨 큰일이라도 난 듯했다.
하지만 산전수전을 다 겪은 알페아스와 올리비아는 미리부터 걱정하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요, 사드 선생님?”
사드는 숨을 헐떡이며 침을 삼키다가 뒤춤에 꽂아 놓은 잡지를 꺼냈다.
교사회에서 출판하는 잡지 이었다.
올리비아는 뒤늦게 사정을 직감했다.
하긴, 왕국 최고의 단테를 무명의 학생이 격파했으니 얼마나 과대 포장을 했을지 보지 않고도 알 것 같았다.
밝혀진 진실 (2)
“그러고 보니 오늘이 출간일이네요. 우리 학교의 이야기도 잘 나왔겠죠?”
올리비아가 잡지를 넘겨받으며 물었다.
그녀의 입에서 우리 학교라는 말이 나오자 알페아스는 흐뭇하게 웃었다.
하지만 좋았던 분위기는 표지를 보는 순간부터 사라졌다.
헤드라인 기사에 충격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전격! 시로네 부모님의 인터뷰!
단테를 꺾은 학생은 산꾼의 자식?
올리비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시로네도 아니고 부모님의 인터뷰라니. 게다가 산꾼의 자식은 뭐란 말인가?
킬라인이 독한 성향이기는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왜곡 기사를 올릴 만큼 어리석은 여자는 아니었다.
알페아스의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왜곡 기사가 아닌 사실이었다.
현재 학교에서 시로네의 출신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물론 킬라인이 신상을 추적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캐내기는 아주 쉬운 일이다. 프로 특파원의 취재 실력이라면 시로네의 부모님이 버텨 낼 재간은 없었다.
올리비아는 잡지를 펼치고 빠르게 글을 읽어 내려갔다.
시로네가 단테를 제압한 과정이 상세히 적혀 있고 사진까지 실렸다.
옵스큐라가 깨졌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거짓말이었던 게 분명했다.
하지만 기사는 거짓이 아니었다.
왜곡도 정도가 있는 것이지, 만약 날조로 이런 기사를 썼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퇴출감이었다.
‘사실이라고? 시로네가…… 산꾼의 자식?’
올리비아는 해명을 요구하듯 알페아스를 돌아보았다.
알페아스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야. 시로네는 산꾼의 자식이지. 하지만 오젠트 가문의 추천으로 특별 전형으로 입학을 시켰어. 교사들조차 몰라. 사드도 모르고 있었지.”
올리비아는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건 상관없어. 왜 나한테까지 숨긴 거야? 적어도 교장인 나는 알고 있어야 하잖아.”
알페아스도 억울한 부분이 있었다.
올리비아가 신중하고 입이 무거운 사람이라는 건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몰랐다는 것이다.
“숨기고 자시고,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지도 않았어. 벌써 1년이 지났고, 아무도 시로네의 출신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으니까.”
알페아스가 울상을 지으며 말하자 올리비아도 원망을 그만두고 생각에 잠겼다.
시로네의 인간상은 확실히 독보적인 구석이 있다. 그와 어울리다 보면 출신에는 그리 관심이 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는 무슨 일이든 벌어지게 마련이다.
“하여튼 순진해 빠져 가지고는. 시로네가 아무리 아군이 많아도 시기하는 학생들은 있게 마련이야. 항상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할 거 아냐. 내가 알았으면 애초부터 이런 일도 없었지.”
알페아스도 이번만큼은 할 말이 없었다.
학생들을 보듬어 주는 데는 탁월하지만 정치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올리비아는 팔짱을 끼고 고심하더니 결정을 내렸다.
“사드 선생님.”
“네, 교장 선생님.”
“지금 당장 킬라인을 호출하세요. 기별을 받는 즉시 나에게 오라고 해요. 24시간 안에 오지 않으면 내가 직접 찾아갈 것이라고 전하세요.”
“알겠습니다.”
사드는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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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네의 출신이 밝혀지자 알페아스 마법학교는 발칵 뒤집혔다.
교사들도 충격을 받았지만 역시나 말이 나오는 쪽은 학생들이었다.
올리비아의 예상은 정확했다.
모두가 시로네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대중의 흐름에 휩쓸려 의견을 내지 못한 소수의 학생들이 엄연히 존재했다. 시로네의 재능을 시기하는 부류였다.
그러다가 이번 사건이 터지자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시로네를 매도하기 시작했다.
수업이 끝난 교내 매점은 학생들로 우글거렸다.
고급반의 실습 시험이 끝났기에 시간이 여유로운 점도 있지만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시로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데에 도서관은 적합하지 않았다.
특히나 구석의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클래스 포의 중위권 그룹은 마치 돈을 받고 움직이는 사람처럼 열성적으로 시로네를 깎아내리고 있었다.
“쳇!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우리가 평민이랑 같이 학교를 다녔다니.”
“평민도 그냥 평민이 아니지. 산꾼이래잖아. 수준 떨어져서 못 다니겠어.”
“어쩐지 가끔씩 아둔한 데가 보이더라니. 출신은 못 속이는 거야. 마법을 배운 것도 1년밖에 되지 않았잖아. 그래서 기본 마법조차 시전하지 못했고.”
물론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런 시로네가 1년 만에 고급반의 최고가 되었다는 점이다. 아니, 왕국 최고였다.
모두 거기에 대한 모순을 느끼고 있지만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시로네가 천재든 아니든 이번 기회를 계기로 완전히 추락시키는 것이다.
매점 자판에 등을 기대고 있던 클로저가 그들의 꼬락서니를 보며 투덜거렸다.
“아주 난리도 아니네. 시로네가 없어도 1등 언저리도 못 가 볼 것들이.”
사비나도 구석에 숨어서 누군가의 험담을 하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그녀에게도 시로네는 좋아할 수 없는 적이다. 하지만 최고의 그룹과 정면으로 겨루었다는 자부심은 저들과의 비교를 거부했다.
“단테, 너는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