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215
“뭐가?”
단테는 시로네의 험담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자판 위에 있는 메뉴판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로네 말이야. 사실 충격적이기는 하잖아. 귀족이 아니었다니.”
단테는 눈을 깜박이더니 친구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야, 너희는 뭐 마실래?”
사비나가 손을 들고 말했다.
“나는 오렌지 주스. 요즘 피부가 푸석해서 비타민을 좀 섭취해 줘야겠어.”
“그래? 그럼 난 목 마르니까 아이스커피. 클로저 너는?”
클로저는 단테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천번 대결에서 패한 다음 날 단테는 수업에도 들어오지 않고 휴식을 취했다. 안티매직이 제대로 들어갔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배려를 해 준 것이지만, 사실 다친 곳은 정신이 아닌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단테는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들의 시선이 집중된 것은 당연했으나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와 똑같은 태도로 수업을 들었다.
‘단테, 너 정말 괜찮은 거냐?’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복수를 계획한다면 매치를 준비할 것이고 시로네를 인정한다면 그만 학교를 떠나는 게 옳았다. 어차피 학기가 끝나가고 있으니 슬슬 짐을 꾸려야 할 시기였다.
하지만 단테는 차후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저기, 단테 선배님…….”
클래스 파이브의 소녀가 홍조를 띤 얼굴로 단테에게 다가왔다.
“응?”
단테는 아이스커피에 꽂힌 빨대를 물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저기, 이번 대결 정말 인상 깊게 봤어요.”
클로저와 사비나는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눈치가 없어도 정도껏이지, 당사자도 함구하고 있는 일을 내뱉다니.
하지만 철없는 소녀는 진심이면 무슨 말이든 해도 된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저는 단테 선배님이 졌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왜, 그런 게 있잖아요, 영원한 라이벌이라는 거. 다음 대결에서는 단테 선배님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거예요.”
사비나는 슬그머니 단테의 눈치를 살폈다.
예상과 달리 단테는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눈을 깜박거리다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래, 고마워.”
단테의 친구들은 충격을 받았다.
한 번의 패배는 곧 죽음이라고 생각했던 단테다. 이런 담담한 반응은 오히려 비정상적이었다.
‘설마, 패배의 충격으로 머리가 이상해진 건 아니겠지?’
단테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은 소녀는 흥분한 얼굴로 후다닥 친구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모든 학생들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말소리가 어느새 끊겼고 매점은 고요했다.
단테는 시선이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다는 걸 깨닫고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무슨 상관이냐는 듯 빈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홀짝였다.
클로저가 단테가 주문한 것과 같은 커피를 들고 와 테이블에 탁 하고 내리쳤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 속삭이는 말투로 물었다.
“너 도대체 왜 그래?”
“뭐가?”
“시로네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건 이상하잖아.”
“그럼 무슨 얘기를 해?”
“시로네야 그렇다고 쳐. 하지만 대결이 끝났으니 뭔가 언급이 있어야 할 거 아냐. 너, 정말로 이대로 주저앉을 거야? 왕국 최고의 학생이라는 칭호를 되찾아야 할 거 아냐.”
단테는 피식 웃었다.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왕국 최고의 학생? 글쎄…….”
미지근한 단테의 반응이 답답한 클로저는 가슴을 두드렸다.
아무래도 심각한 슬럼프에 빠진 게 분명했다.
시로네에게 패한 충격이 너무나 커서 의욕도 열정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너 진짜……!”
참다못한 클로저가 언성을 높이려는 순간 매점의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공교롭게도 네이드와 이루키였다.
학생들의 시선은 자연히 그쪽으로 집중되었다.
3주간의 치열한 대결을 펼쳤던 당사자들이 재회한 상황이었다.
시로네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아쉬웠지만 한편으로는 무슨 낯짝으로 고개를 들고 다니겠는가 싶었다.
학교의 모든 학생들이 시로네보다 직위가 높다.
그들은 귀족이었고, 시로네는 평민이다.
사회 규범에 따르면 발가락을 핥으라고 해도 군소리 없이 핥아야 하는 사람이 바로 시로네였다.
물론 지성인인 이상 그것이 딱히 옳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태어날 때부터 얻은 이점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매점의 분위기가 이상하여 둘러보던 이루키는 단테를 발견했다.
단테도 피하지 않고 눈을 마주쳤다.
학생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두 사람의 조우를 기다렸으나 예상과 달리 이루키가 내뱉은 말은 싱거웠다.
“왔냐? 별일이네. 매점 같은 곳은 안 다닐 줄 알았더니.”
단테는 커피를 들어 보였다.
“목이 말라서. 너야말로 무슨 일이냐?”
이루키는 어릴 때부터 취향이 유별나서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음식을 사 먹지 않았다. 뇌의 기능을 저하시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나이가 어렸기에 동급생들은 그런 이루키를 이상한 듯 쳐다보았으나 단테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이루키의 식성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루키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판으로 걸어갔다.
“시로네가 저녁을 안 먹어서. 뭐라도 좀 사다 주려고.”
단테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로네는 좀 어때?”
“뭐…… 그냥저냥. 그래도 조금 충격은 받은 모양이던데.”
“그래? 그건 의외네.”
단테는 진심이었다.
이천번 대결에서 초고속의 정보를 교환하면서 그의 생각의 크기가 얼마나 거대한지 몸소 체험한 그였다. 고작 이런 일로 두문불출할 성격은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게…… 시로네는 가족이라면 끔찍하게 생각하거든. 킬라인이 허락도 없이 부모님의 인터뷰를 딴 것에 화가 난 모양이야.”
단테는 킬라인을 떠올렸다.
그녀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는 사실을 알면 부모님의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시로네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최대한 빨리 이 상황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야, 이루키, 너 이런 상황에서 시로네랑 어울릴 거야?”
시로네를 험담하던 소년 중의 1명인 제임스가 벌떡 일어나 이루키를 가리켰다.
중위권 그룹은 단테와 시로네의 파가 대립하기를 원했다. 소모적인 쟁이 끝까지 이어져서 그들끼리 자멸하면 자신들에게도 치고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대했던 충돌이 일어나지 않자 직접 나서서 이루키를 자극하기로 마음먹었다.
“메르코다인이라면 왕국에서 최고의 가문이잖아. 배신감도 안 느껴? 시로네는 너희보다 훨씬 아래인데도 같은 급으로 위장한 거야. 그런데 너는 그 자식 빵 심부름이나 하고 있다는 게 말이 돼?”
이루키는 오히려 자랑스럽다는 듯 손가락을 저었다.
“왜 말이 안 되는데? 우선, 시로네는 내 친구야. 그리고 현재 배가 고픈 상태고. 무엇보다 우리는 이미 시로네의 출신을 알고 있었어. 친구니까 당연한 거 아냐?”
“뭐, 뭐?”
제임스는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벙끗거렸다.
매일같이 붙어 다니는 삼총사이니 시로네가 말을 했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그걸 알고서도 어떻게 친구로 지낼 수가 있단 말인가?
밝혀진 진실 (3)
네이드가 나섰다. 모든 학생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지만 시로네가 이런 상황이 되었으니 편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너희도 이제 그만해. 물론 시로네가 평민이라는 건 충격적이겠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속인 것도 아니잖아. 만약 물어봤다면 솔직히 말했을 거야. 시로네는 그런 성격이니까. 같은 학교 학생끼리 경쟁 외적인 일로 공격하는 건 좋지 않아.”
“경쟁? 헛소리하지 마. 평민이라고, 평민! 너는 바깥에서 평민하고 친구 하냐? 아니잖아! 너도 가문에서는 수많은 평민에게 수발을 받는 입장이면서 어떻게 시로네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거야?”
네이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백날 설득해 봐야 헛수고였다.
물론 제임스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고, 그들의 심정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시로네는 가장 소중한 친구였고, 그가 슬퍼하는 모습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다.
제임스는 이루키와 네이드가 이미 시로네에게 콩깍지가 씌었다고 생각하고 단테로 목표를 바꿨다.
“단테! 네가 말 좀 해 봐. 이 중에서 가장 열 받는 사람이 너잖아. 평민 따위에게 그런 굴욕을 당했으니까!”
단테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열 받는데 평민 귀족이 따로 있나? 졌으니까 그냥 진 거지.”
처음으로 대결에 대한 감정을 털어놓은 그였으나 그조차도 담백했다.
제임스는 비로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았다.
단테 일행이고 시로네 일행이고, 중위권 그룹과 얽히고 싶지 않은 것이다.
마치 시로네를 험담하면 자신과 같은 급이 될 것만 같아서 현실을 외면하는 게 분명했다.
제임스는 고개를 숙이고 부들거리다가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결국 그런 거였냐? 너희 모두 시로네에게 빌붙고 싶은 거야? 이제 학교에서 시로네를 이길 사람은 없으니까! 시로네 편을 들면 너희도 엄청 대단해 보인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너나 나나 다를 건 없어. 결국 똑같은 패배자일 뿐이라고!”
단테가 아이스커피의 얼음을 빙빙 돌리며 말했다.
“그건 좀 너무 나갔는데. 진 건 난데 왜 네가 흥분하는 거야?”
“너야말로 가식 떨지 마! 솔직히 분해서 견딜 수가 없잖아. 그렇게 비참하게 져 놓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게 말이 돼? 말해 봐. 시로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기절까지 했잖아.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거야?”
“이 자식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클로저가 참지 못하고 나섰다. 단테가 패하기 전만 해도 눈도 못 마주쳤던 아이들이 기가 살아서 마음대로 날뛰고 있었다.
“됐어. 그만둬.”
클로저를 말린 단테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한참이나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 오토마톤의 설계를 조금 더 단순화시켰다면 어땠을까?”
뜬금없는 소리에 제임스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뭐?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파스칼의 회로가 조금 더 직관적이어야 했어. 예를 들면 공격이면 공격, 수비면 수비, 이런 식으로 역할을 분산시켰으면 더 좋았을 텐데. 기본 마법의 종류가 너무 많았던 것은 아닌가? 파이어볼을 빼고 윈드 커터만 운용했다면 기동력이 올라갔을 거야.”
단테의 쉬지 않고 이어지는 말에 학생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루키와 네이드는 진지하게 경청했다.
확실히 그런 식으로 전개했다면 경기 양상도 조금은 바뀌었을 것이다.
반면에 제임스는 입을 굳게 다물고 분노에 몸을 떨고 있었다.
커피를 들고 일어선 단테가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고 묻는다면, 내 머릿속에는 온통 마법에 대한 생각밖에 없어. 마법학교에 다니고 있으니까. 그러는 너야말로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거냐? 시로네가 평민이든 귀족이든, 그게 네 마법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제임스의 얼굴이 홍시처럼 빨개졌다.
수치심이 밀물처럼 밀려들면서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후배들이 보는 앞에서 그런 추태를 보일 수는 없었다.
논리에서 밀린 그가 이번에는 억지를 부렸다.
“닥, 닥쳐! 그러는 너는 어떻고? 시로네에게 무릎도 안 꿇었잖아. 차라리 죽이라느니 어쩌느니 큰소리치더니, 아직까지 잘도 살아 있군그래!”
클로저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제임스, 너 죽고 싶냐?”
제임스는 겁에 질려 흠칫했으나 이미 말은 나온 마당이었다.
게다가 클로저는 이루키에게 두들겨 맞은 장본인이었으니 이 자리에서 무력행사는 할 수 없을 터였다.
“사실이잖아! 말해 봐! 너야말로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이 아니면 뭐야?”
단테는 잠시 말이 없었다.
딱히 깊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머릿속에 들리는 시로네의 음성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게…….”
단테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못 죽겠더라고. 죽는 건 무섭잖아.”
“뭐, 뭐야?”
이루키가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단테를 비웃는 게 아니다.
죽는 건 당연히 누구에게나 무섭다. 시로네의 말대로 그저 인간이기 때문이다.
단테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의 오토마톤처럼 딱 떨어지는 성격은 마음에 들었다.
“정말로 죽을 각오로 싸우기는 했는데,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못 죽겠더라고. 그게 전부야. 그렇다고 무릎을 꿇기는 싫고.”
제임스는 이성을 잃었다.
단테 일행도 시로네 일행도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눈에는 모두가 정신병자로 보였다.
“하하! 그래, 이제 알겠어. 이 패배자 녀석! 결국 시로네에게 꼬랑지를 내린 거지. 넌 처음부터 죽을 용기도 없는 자식이었어! 얼른 그 잘난 왕립 마법학교로 돌아가는 게 어때?”
클로저는 제임스를 묵사발 내 버리기로 진지하게 결심했다.
여태까지는 패배의 여파로 의기소침해서 누군가를 두들겨 패는 것도 면이 안 섰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단테를 모욕한 놈을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단테, 이제는 말리지 마라.”
클로저가 주먹을 어루만지며 제임스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단테는 클로저를 말렸다.
“됐어. 이것도 패배자의 숙명이지. 증명할 수도 없는 거잖아.”
클로저는 억울해서 미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단테…….”
하지만 단테는 정말로 괜찮았다.
제임스의 소리는 그저 노이즈였다. 아무런 의미도 담기지 않은 말들.
자신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남의 일에 열변을 토하는 아이들이 싫어서 어린 날 학교를 그만둔 것이 아니던가?
단테는 흥분한 제임스에게 미소로 답했다.
“그리고 제임스, 나는 왕립 마법학교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알페아스 마법학교를 계속 다닐 거고, 이곳에서 졸업할 거다.”
클로저는 조금 전의 분함도 잊고 놀란 눈을 치켜떴다.
앞으로의 거취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던 것치고는 갑작스러운 발언이었다.
사비나가 믿기지 않는 듯 되물었다.
“단테, 정말이야? 아직 올리비아 스승님도 교감직을 수락하실지 확답이 없으셨는데.”
“스승님과는 상관없어. 이곳에 시로네가 있다면 당연히 나도 남아야겠지.”
클로저의 눈에 환희의 빛이 차올랐다.
“복수전을 치르겠다는 거로군? 좋아! 언제 할 건데?”
“그건 내가 정하는 게 아니야. 이미 패했는데 억지를 부리고 싶지는 않고. 하지만 나에게도 만회할 기회가 한 번은 남았지. 그 기회를 포기하고 전학을 갈 수는 없지 않겠어?”
“응? 기회라고?”
단테는 이루키를 돌아보며 말했다.
“졸업 시험. 마법학교 학생이라면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관문이지. 물론 시로네도 졸업 시험을 치를 거고.”
이루키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단테는 비로소 홀가분해졌다.
아직 몇 가지 고려할 변수가 남아 있는 상태였지만 상황의 흐름에 따라 선언을 해 버리니 차라리 속이 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