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22
창백한 피부에 눈 밑에 드리운 다크서클, 흑발의 머리가 뺨을 가리고 있었다.
에이미의 인상이 대번이 구겨졌다.
‘아르디우스 제이크.’
귀족 서열 제2계급 가문으로, 가주는 왕성의 재정 집행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왕실의 재정을 관리하는 특수성 때문인지 가문의 권력은 제1계급 못지않다고 알려져 있었다.
거만한 성격의 제이크를 좋아할 사람은 없을 테지만, 에이미가 그를 정말로 싫어하는 이유는 블랙 매지셔라는 연구회의 회장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블랙 매지셔의 연구 분야는 잘난 학생 끌어내리기였다.
공식 연구회가 아니라 지원비조차 나오지 않지만 사비를 들여서까지 학생들을 끌어모은다는 소문이었다.
주로 하는 것은 여론 조작이며, 폭력과 협박으로 상위권 학생들에게 스트레스를 주어 성적을 떨어뜨리는 일도 전문적으로 하는 듯했다.
“에이미, 오늘은 일찍 끝났네? 자정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네가 날 왜 기다려? 그렇게 할 일이 없니?”
“너무 그러지 마. 네 소문 들었어. 시로네라는 허접한 놈이 자꾸 달라붙는다지?”
에이미는 안 좋은 소문에 반드시 블랙 매지셔가 연루된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경고하는데, 무슨 짓을 하든 하지 마. 한 번만 더 내 이름이 들리면 턱을 부숴 버릴 테니까.”
“하하! 오해하고 있군. 이번 일은 나도 모르는 일이야. 생각해 봐. 왜 남 좋은 짓을 하겠어?”
제이크가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내밀었다.
“너를 좋아하는 건 난데 말이야.”
여전히 온기를 머금은 커피의 향은 에이미도 알고 있는 사향고양이의 커피였다.
“학교에서는 구할 수 없는 최고급 커피야. 천하의 에이미라면 이 정도 대접은 받아야지.”
“무슨 수작이야?”
“수작이라니. 이건 정식으로 구애하는 거야. 우리 가문의 권력은 너도 알 것이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도 왕성의 재정을 담당하게 될 거야. 이 학교에서 너에게 어울리는 남자는 오직 나뿐이라고.”
“미안한데, 나는 도서관에서 사적인 잡담은 절대 하지 않아. 그러니까 너는 장소도 틀렸고 시기도 틀렸어. 아, 가장 중요한 걸 빼먹었는데, 사람도 틀렸다는 거야. 난 네가 싫어. 그러니까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서로 조심하자.”
에이미가 몸을 틀어 계단을 내려가려고 하자 제이크가 벽을 짚으며 길목을 막았다.
제이크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너무 부드럽게 대했나 보군. 나에게도 가문의 명예라는 게 있는데 이런 식으로 거절하면 곤란하지. 너도 마찬가지잖아? 카르미스라는 가문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 아득바득 공부하는 거고. 우린 같은 고민을 안고 있어.”
“너, 생각한 것보다 더 한심하구나?”
“뭐, 뭐?”
제이크의 눈에 적의가 돌았다.
하지만 고작 그런 것에 겁을 먹을 에이미가 아니었다.
“같은 고민? 우리 가족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잘 살고 있거든? 가문의 명예, 물론 중요하지. 하지만 나는 너처럼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아. 꿈도 뭣도 없이 그저 돈만 밝히는 너하고는 다르다고.”
“이게……!”
제이크는 가면을 벗었다.
제1계급이라도 자신에게 이런 대우를 하면 안 된다. 더군다나 우리 아버지는 왕실 재정 집행관이란 말이다.
세상만사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건 없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네가 그렇게 잘났냐? 말로만 제1계급이지 현역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지? 우리 가문의 힘이면 카르미스는 돈으로 말려 죽일 수 있어. 어때? 못 믿겠으면 한번 해 볼까?”
제이크의 탁한 눈빛을 본 에이미는 오싹한 전율을 느끼며 한 가지를 깨달았다.
“후우, 고마워. 사실 오늘 하루 종일 심란했는데 네 덕분에 알게 되었어.”
“뭐야?”
에이미는 비로소 안심했다.
시로네는 아마도 자신의 비밀을 지켜 줄 것이다.
“그래, 이게 바로 악당의 눈빛이지. 네 눈은 시로네와 달리 완전히 썩어 있거든.”
제이크는 반쯤 이성을 잃었다.
“지금 내가 그 허접보다 못하다는 거야? 지금 당장 쫓아가서 죽여 버릴 수도 있어.”
“뭔가 하고 싶어 죽겠나 본데, 할 거면 빨리 좀 해. 시간 아깝게 나불대지 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주제에 눈에 힘이나 주고 있으면 내가 겁먹을 것 같아?”
에이미가 제이크의 팔을 치자 떨어진 머그잔이 깨지면서 커피가 쏟아졌다.
차가운 소년과 뜨거운 소녀(3)
“이런 건방진 계집애가……! 큭!”
살의의 스피릿 존을 전개한 제이크가 황급히 깨닫고 화를 가라앉혔다.
‘이런 씨…….’
에이미의 스피릿 존이 느껴졌다.
“건방진 계집애? 말만 번지르르한 주제에 내가 우습게 보여? 열 받으면 덤벼 봐. 지금 당장 얼굴을 불로 태워 버릴 테니까.”
제이크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성적만 좋은 모범생으로 생각한 것이 패착이었다.
‘전투 경험이 많아.’
에이미 또한 뒷골목에서 비열한 전투를 수도 없이 겪은 실전파였다.
제이크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흥! 여기서 마법 사용은 규정 위반이야.”
“마법은 네가 먼저 사용했을 텐데? 저 사향고양이인지 뭔지를 데우는 동안 말이야.”
“미친! 그것과 공격 마법이 같다고 생각……!”
“하하.”
에이미는 비웃었다.
고작 이런 소인배였다. 막상 전부를 걸고 덤비면 겁에 질리는 뒷골목 부랑자들처럼.
“대놓고 덤비지도 못하는 주제에 시로네를 어쩐다고? 장담하건대 그 녀석은 6개월 안에 너 같은 놈은 눈에도 안 보일 정도로 성장할 거야. 너하고는 달리 생각이라는 걸 좀 하는 것 같거든.”
단순히 학교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 심부름을 했다면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그 녀석은 이미 결론을 내린 거야.’
불합리함을 머리로 이해하고 최선의 선택을 하는 사람이라면 신뢰할 여지가 있었다.
“내가 시로네보다 못하다고?”
두 번이나 신입생과 비교를 당한 제이크의 열등감이 이성을 잃게 만들었다.
“하하! 그래, 유망한 놈이지. 하지만 알잖아? 그런 놈들 밟는 게 내 특기인 거. 6개월이고 뭐고, 내일 당장 마법을 못 쓰게 만들어 주지.”
“제이크.”
에이미의 동공이 붉은 빛을 발했다.
“죽을래?”
“큭.”
제이크는 확신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카르미스 가문의 홍안.
완전히 열린 동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날 죽이면 너도…….”
“상관없어. 못 믿겠으면 더 입을 놀려 보든가.”
“…….”
사실일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드는 눈빛 앞에서 제이크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정면 대결은 승산이 없다.’
클래스 포의 1등이라면 거의 절대적인 확률로 자신을 불태울 수 있을 터였다.
“두고 보자, 건방진 계집!”
제이크가 거칠게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에이미는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야 홍안을 잠재웠다.
“후우.”
잠시 현기증을 느낀 그녀가 손으로 벽을 짚고 다른 손으로 눈을 문질렀다.
‘나도 모르게 흥분했네.’
시로네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협박에 그녀 또한 순간 이성을 잃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책임감? 제3자가 정보에 접근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것도 아니라면…….
에이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 몰라! 오늘 진짜 엉망진창이네.”
계단을 내려가던 에이미는 바닥에 흐른 커피를 보고 낮의 일을 떠올렸다.
‘커피는 그냥 받을걸.’
내일부터 시로네가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조금 서운해지는 그녀였다.
***
에이미에게서 해방되고 가장 기쁜 점은 공부에 1시간을 더 투자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학생들의 시선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막상 도서관 안에서는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물론 관심이 없는 건 아니다.
학교에서 최고로 콧대가 높은 미녀와 스캔들을 터트린 장본인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었고, 그들은 모두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야말로 알페아스 마법학교를 명문으로 만든 원동력일 터였다.
오늘도 수업을 끝마친 시로네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도서관으로 가는 길이었다.
교사들 숙소가 있는 건물 앞에 에이미의 친구인 세리엘이 서 있었다.
‘이상하다. 늘 같이 다니더니?’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 시로네는 발길을 돌렸다.
통합 수업에서 만날 때 인사를 나누는 정도지만 시로네는 그녀가 괜찮았다.
자신만 보면 으르렁거리는 에이미와 달리 항상 응원한다고 해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무엇을 응원한다는 것인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모르게 되었지만.
“안녕하세요, 선배님.”
세리엘은 다가오는 시로네를 발견하고 유령이라도 본 듯 화들짝 놀랐다.
“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네?”
“어째서 여기 있는 거냐고! 이러면 에이미를 보내지 않아도 됐잖아!”
“무슨 일인데 그래요?”
“이것 좀 읽어 봐. 너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세리엘이 건넨 쪽지를 펼쳐 보니 블랙 매지셔라는 발신인이 쓴 짧은 경고문이었다.
‘블랙…… 매지셔?’
지금으로부터 30분 전.
도서관으로 향하는 에이미와 세리엘의 앞을 강퍅한 인상의 남자가 가로막았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여전히 잘나가고 계시네요.”
클래스 파이브 학생으로, 스물세 살이 넘은 장기 유급생이었다.
1년 전만 해도 같은 클래스였기에 에이미도 이름은 알고 있으나 음침한 성격이라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바쁘니까 비키세요. 할 얘기 없습니다.”
“에이, 그러시면 안 되죠. 그래도 한때는 동급생이었는데, 잠시 시간 좀 내주시죠.”
“당신에게 동급생이 나 하난가요? 클래스 파이브를 거친 학생만 수백 명은 될 테니까 다른 사람 찾아보세요.”
나이를 고려해 존대를 해 주고는 있지만 마음속의 가시까지 숨길 생각은 없었다.
‘정말 싫어, 이 사람.’
클래스 파이브라면 재능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건만 그는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적당한 위치에 안주하면서 여자 후배들이나 건드리고 다니더니 결국 여기까지 추락한 것이다.
“하하! 싸가지없는 건 여전하군, 에이미.”
“뭐야? 당신 지금 뭐라 그랬어?”
본색을 드러내자 에이미도 참지 않았으나 남자는 믿는 구석이 있는 듯했다.
“보스께서 좀 보자고 하시는군.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게 좋을 거야. 네 남자를 망가트리고 싶지 않으면.”
“내 남자? 무슨 소리야?”
에이미는 남자가 건넨 쪽지를 빼앗아 읽었다.
시로네를 데리고 있다. 남자구실 못하게 만들어 버리기 전에 6시까지 14훈련장으로 와라. 선생에게 알리면 평생 후회할 일이 벌어질 테니 알아서 하도록.
-블랙 매지셔
에이미는 쪽지를 구겼다.
“어쩌라고? 뭔가 오해하나 본데 시로네는 나랑 아무 관계도 아니야. 설령 상관이 있다고 해도 내가 너희들 말에 따를 거 같아?”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난 그저 보스가 보낸 전령일 뿐이라고.”
임무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남자가 유유자적 멀어지자 에이미는 쪽지를 바닥에 던졌다.
그것을 주워 든 세리엘 또한 내용을 읽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블랙 매지셔.
실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학생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한 불량 서클이었다.
“에이미, 어떡하지? 이것들 진짜 악질이야. 저번 달에 타이라가 자퇴한 이유도 얘들 때문이라는 말이 있던데.”
“타이라가?”
클래스 포의 동급생 타이라는 졸업반 수준은 아니지만 중간 이상의 성적을 유지하는 실력자였다.
그런 그녀를 협박했다면 다수가 덤볐거나 비겁한 수를 쓴 게 틀림없었다.
“일단은 가 봐야겠어. 나 때문에 붙잡힌 거니까.”
남자 앞에서는 강하게 받아쳤지만 시로네가 걱정되는 건 사실이었다.
“차라리 선생님에게 말씀드리자. 시로네도 그렇지만 너까지 위험해질지도 몰라.”
“선생님이라. 흐음…….”
에이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일 테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간단하지 않았다.
에이미에게는 밝히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고, 그것은 시로네도 마찬가지였다.
‘학교에서 시로네가 평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없어. 오직 나밖에는…….’
가능하면 조용히 처리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에이미가 말했다.
“내가 먼저 가 볼게. 만약 7시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그때는 선생님에게 알려.”
서로의 비밀에 대해 모르는 세리엘이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당장 알려야 된다니까!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거야?”
“미안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 돌아오면 다 말해 줄 테니까, 응?”
어떤 문제든 당당히 부딪치던 에이미가 이런 식으로 부탁하자 세리엘은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심지어 그녀가 자신에게 부탁을 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럼 나하고 같이 가. 몇 명이 있을지 모르잖아?”
“너라도 남아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줘야지. 걱정 마. 어차피 리더는 제이크니까. 그런 인간 10명이 덤벼도 나한테는 안되는 거 알잖아.”
에이미의 실력은 세리엘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클래스 포라는 범위에 함께 묶여 있을 뿐이지 상위권에서는 등수 하나에서 벽이 존재했다.
“알았어. 정확히 1시간이야. 7시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무조건 선생님에게 말한다.”
“응. 그럼 너만 믿고 갔다 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