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223
은빛 검을 찬 병사가 마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시로네는 들어가기도 전에 놀랐다. 빛을 내뿜는 수정구가 천장에 붙어 있어서 마차의 내부는 대낮처럼 밝았다. 게다가 침대는 물론 요기를 할 수 있는 장비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귀하신 분들이니 성에 차지 않으시겠지만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금방 왕성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시로네는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침대에 누워 보았다. 날마다 드러눕는 침대지만 마차 안이라는 이유만으로 생소했다.
“하하! 에이미, 이거 정말 재밌다.”
에이미도 반대편 침대에 앉아 미소를 지었다.
“집 마차라고 하는 거야. 충격을 흡수하는 장치까지 되어 있어서 10시간 정도의 여정은 끄떡없이 버틸 수 있어. 유지비가 엄청나게 들어간다는데, 역시나 왕족은 다른 모양이야.”
레이나가 말했다.
“하지만 이동속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지. 오히려 빠르게 도착하는 편이 안전할 것 같기도 한데. 어쨌든 우리 쪽도 만반의 준비를 해야겠어.”
에이미가 손을 들었다.
“제가 불침번을 설게요. 마법사들은 하루 정도 깨어 있어도 괜찮아요.”
시로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나랑 같이 번갈아 가면서 서자.”
“됐어. 너는 도착하자마자 정신없을 테니까 지금이라도 좀 쉬어 둬.”
호위대가 있다고 해도 방심은 금물. 누군가는 일행을 지켜야 했다. 에이미가 생각하기에는 자신이 적임자였다. 그렇다고 시로네 부모님이 날을 새운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레이나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무시하는 거야? 나도 스키마 정도는 할 수 있거든! 도제 수업 받을 때는 며칠 밤을 새우기도 했어. 차라리 3명이서 돌아가면서 하자. 왕성의 상황을 모르니 1명이 먼저 지치는 건 좋지 않을 거야.”
에이미가 생각하기에도 그 말이 정론이라 군소리 없이 따랐다. 빈센트와 올리나가 자신들도 포함시켜 달라고 말했지만 일반인이 24시간 동안 마차를 타면서 날까지 새울 수는 없었다.
“푹 쉬세요. 벌써부터 지치면 그게 더 손해예요.”
빈센트와 올리나는 할 수 없이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피곤을 이길 장사는 없는지 금세 잠이 들었다.
남은 침대 한 자리는 세 사람이 돌아가면서 쓰기로 했다.
레이나와 에이미는 같이 잘 수 있지만 시로네는 여자들과 동침을 할 수 없기에 벽에 기대어 잠을 청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레이나가 불침번을 서는 걸 보고 잠이 들었건만 어느새 에이미가 다가와 깨웠다.
“시로네, 피곤하면 내가 더 서 줄까?”
시로네는 예비 동작조차 없이 반짝하고 눈을 떴다. 자신의 차례라는 것은 4시간이 지났다는 뜻이다.
정신은 전에 없이 맑았고 몸도 피곤하지 않았다. 귀족들이 비싼 돈을 주고서 고급스러운 마차를 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니. 괜찮아. 너도 좀 더 자. 별일은 없었지?”
“응. 불안할 정도로 조용해. 병사들이 무슨 얘기라도 하면 들어 볼 수 있을 텐데, 스키마를 경계해서인지 한마디도 하지를 않네.”
시로네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의 중앙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 고마워, 에이미.”
“고맙기는.”
에이미는 짧게나마 눈을 붙이기 위해 레이나의 옆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 엎드린 자세로 시로네를 돌아보았다.
시로네는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그녀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왜? 잠이 안 와?”
“어, 그렇기도 하고…….”
에이미는 말꼬리를 흐렸다.
카즈라 왕국의 사신이 찾아온 이후로 늘 마음속에 걸렸던 부분이 있었다.
“시로네, 만약 왕족이 되면…….”
에이미는 결심을 내린 듯 물었다.
“마법 같은 건 배우지 않겠지?”
“응?”
“그렇잖아. 그때부터는 제1왕자가 될 테니까. 당연히 후계자 수업을 받아야 할 테고, 그러다 보면 마법을 배울 시간도 없을 거 아냐.”
시로네는 피식 웃었다.
여태까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하긴, 근래 자신을 돌아보기에도 벅차서 다른 사람의 생각 같은 건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에이미, 나는 왕자가 되지 않을 거야.”
에이미의 눈이 커졌다.
“무슨 소리야? 설마 도망이라도 치겠다는 거야?”
“그게 최후의 수단이라면, 도망쳐야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되도록 설득할 거야. 설령 나를 낳아 주신 분들이라도, 나에게 부모님은 오직 두 분밖에 없어. 내가 왕성에 가는 이유는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야. 내 뜻을 전하기 위해서지.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올 거고, 마법학교에 다닐 거야. 그리고…….”
시로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너랑 했던 약속도 반드시 지킬 테니까.”
“시로네…….”
에이미는 뭉클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여태까지 시로네는 자신의 신념대로 인생을 헤쳐 나갔고 또 그것이 통했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달랐다.
왕족은 시로네의 생각처럼 이성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감정에 흔들리지도 않는다.
왕족은 직관적인 존재다.
세상을 손에 쥐고 흔드는 자들이 생각하는 일은 무언가를 하느냐 마느냐의 단순한 판단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왕의 수준이 되면 탁월하게 진화하기 마련이어서, 그 단순한 선택이 역사를 진보시키기도 하고 퇴보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사고방식을 말로써 되돌리기란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에이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로네가 마지막에 남긴 말의 여운을 가능한 오랫동안 마차 안에 가두어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따 봐, 시로네.”
에이미는 레이나의 옆에 누워 짧은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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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나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모두를 깨웠다.
“일어나세요. 왕성에 도착한 것 같아요.”
에이미는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섰다. 창밖의 틈새를 통해서 살펴보니 아직 동이 트기 전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마차는 흔들리지 않았고 돌로 포장된 길을 달리는지 말발굽 소리도 또렷했다.
시로네는 창문을 열고 밖을 살폈다. 어두워서 자세히는 보이지 않으나 건물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도시에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불이 켜진 집은 한 군데도 없었다.
말을 탄 병사가 다가와 시로네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야간 시찰 중이라 밖을 보실 수 없습니다. 창문을 닫겠습니다.”
경비가 탁 소리를 내며 창문을 닫았다.
시로네는 입맛을 다시며 뒤를 돌아보았다. 레이나와 에이미도 황당한 표정이었다.
에이미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치! 왕성에 들어오니까 갑자기 사람이 바뀌네.”
“단정 지을 수는 없지. 저 사람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건 처음이잖아. 신중하게 판단할 문제야.”
시로네도 레이나의 사고방식이 옳다고 보았다.
이제부터는 외줄 타기다. 사소한 착각이나 오해가 모두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었다.
내성으로 들어갈 무렵 동이 텄다. 호위대 병사가 마차를 두드리더니 마음껏 구경해도 된다고 알렸다.
시로네는 타국의 이질감을 느꼈다. 밤에는 바깥을 나가는 것은 물론 염탐하는 것조차 허가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토르미아보다는 경직되어 있구나. 항상 생각하고 있어야겠다.’
마차는 왕성을 휘감고 있는 커다란 해자를 지나 내성으로 들어갔다.
카즈라 왕성은 천국의 건물처럼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다리를 절반쯤 지나갈 무렵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군악대가 등장하고, 왕성의 하급 관리들이 모두 나와서 박수를 치며 맞이했다.
예상과 다른 환대에 시로네는 레이나를 돌아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그러게. 대놓고 환영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레이나가 생각하기에도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테라제의 비호 아래에서 성장한 카즈라 왕국이라면 시로네라는 존재는 여황의 파벌에게 눈엣가시일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암살은커녕 별다른 사건도 없었다. 게다가 이 정도의 환대…….’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정도였다.
오르캄프 쪽에서도 이번 시로네의 일에 사활을 걸고 있거나, 오히려 테라제 쪽에서는 콧방귀도 뀌지 않거나.
전자와 후자 모두 가능성이 있기에 어느 쪽이 더 확실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시로네의 표정을 살폈으나 그는 담담했다.
누구보다 이 상황이 긴장될 텐데도 일단 왕성에 도착하자 출발할 때의 불안감이 완전히 사라진 모습이었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레이나가 감탄했던 시로네의 강점이었다.
오젠트 가문에서도 그랬다. 평소에는 여느 또래처럼 순진한 소년이지만 위험이 닥쳤을 때는 거짓말처럼 냉정해진다.
‘하긴…… 이제는 왕국 최고의 마법사 지망생이지.’
시로네의 본질은 그대로지만 그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전과 달랐다. 스피릿 잡지에서 시로네의 기사를 접한 레이나는 알고 지내는 마법사에게 언로커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정신 상태라고 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만나니 예전처럼 시로네를 어리게만 볼 수도 없게 되었다.
카즈라 성은 약 2만 평에 달하는 건물로, 상주 인원은 대략 1천 명이었다.
화려함보다는 전투적인 디자인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여느 성보다 입구는 좁았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자 왕성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거대한 그랜드 홀이 펼쳐졌다.
고위 관리들이 연공서열에 따라 서 있는 붉은 양탄자를 지나서 계단 위에 왕좌가 있었고 그곳에 오르캄프 4세가 앉아 있었다.
왕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건 예의가 아니지만 시로네 일행은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시로네와 같은 금발이었고, 일국의 지배자라고 믿기 힘든 유려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의 몸에서 뿜어지는 기운은 예사롭지 않았다.
아무리 왕이라도 하늘 아래 같은 사람일 뿐이지만, 수백만의 생명을 쥐고 있는 사람은 확실히 무언가 달랐다.
‘저 사람이…….’
오르캄프와 시로네를 나란히 놓고 보면 충분히 부자지간으로 생각할 법했다.
판에 박힌 느낌은 아니었지만 18년이나 떨어져 있었으니 환경의 차이도 생각해야 했다.
시로네 일행은 법도에 따라 예식을 올렸다.
하지만 오르캄프는 반응조차 보이지 않고 오로지 시로네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라.”
시로네는 오르캄프와 눈을 마주쳤다.
왕의 눈빛이 빨려 들어와 심금을 뒤흔들었다. 검사나 마법사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군주의 기운이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다잡고 침착한 상태로 되돌아왔다. 타인의 의지에 흔들리지 않는 금강태의 경지였다.
그러자 오르캄프가 의외라는 듯 눈을 빛냈다.
‘과연 나의 아들인가…….’
카즈라 왕국 (5)
오르캄프는 손을 들어 그들을 환영했다.
“먼 길을 오느라 고생이 많았구나. 시로네, 네가 이곳에 온 이유는 알고 있겠지?”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 자세한 이야기는 따로 자리를 마련해서 하자꾸나. 힘든 여정이었을 터, 저들에게 방을 내주고 음식을 대접하라.”
왕성의 소사를 관장하는 시종장이 고개를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전하.”
시로네는 다시 고개를 들어 오르캄프를 바라보았다.
18년 만에 이루어진 부자간의 상봉이었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어떤 사적인 말도 들을 수 없었다.
이것이 왕이라는 것인가? 왕이라는 직책을 달게 되면 개인의 감정조차 드러낼 수가 없는 것인가?
어쩌면 이미 버린 아들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없을 수도 있었다.
정말로 자식을 사랑했다면, 설령 어떤 난관이 닥쳐도 버릴 리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버렸고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다.
무슨 연유로 자신을 부른 것인지는 모르지만 굳이 찾지 않아도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시로네 일행은 허무한 마음으로 시종장을 따라 그랜드 홀을 벗어났다.
손님들이 기거하는 그레이트 체임버는 2인 1실이었다.
빈센트 부부가 한방을 쓰고 에이미와 레이나가 또 하나의 방을 썼다.
하지만 시종장은 시로네의 방은 내주지 않았다.
“시로네 님은 내실에서 전하의 가족분들과 함께 머물게 될 것입니다.”
에이미가 놀란 표정으로 나섰다.
“저희는 그런 얘기 못 들었는데요?”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왕성에서 시로네를 따로 두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시종장은 오히려 에이미를 이상한 듯 쳐다보았다.
“그거야 당연하지요. 시로네 님은 왕족이 되실 분이니까요.”
“아직 확실하게 결론이 난 것도 아니잖아요.”
시종장은 미간을 구겼다.
그런 사정이야 일개 시종이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제1왕자에 대한 검증은 형식상의 절차에 불과하다 하던데 어째서 이러는지 모르겠다.
또한 시로네는 평민이라고 들었다. 만약 자신에게 이런 축복이 내렸다면 신에게 엎드려 감사했을 터였다.
그런데 이들의 표정에는 좋은 감정은커녕 왠지 모를 껄끄러움마저 느껴졌다.
“무슨 일인가?”
행정집무관 오르도스가 걸어왔다.
시종장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시로네 일행의 불만을 이야기했다.
오르도스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특이한 상황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도 머리가 있으면 카즈라의 정세에 대해서 파악하고 왔을 것이다.
오르도스는 시로네를 돌아보며 말했다.
“왕궁에는 법도가 있습니다. 왕족의 방을 교체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소란이 일지요. 하지만 그렇게 불편하시다면 제가 건의를 하겠습니다.”
왕성에 들어온 직후부터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은 시로네는 고개를 저었다.
위험한 상황을 경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그는 친부모가 자신을 해칠 리는 없다고 믿고 싶었다.
그마저도 아니라면…… 그들이 설령 같은 피가 흐른다고 해도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알겠어요. 내실로 갈게요. 식사 시간에는 모두 볼 수 있는 거죠?”
오르도스는 고개를 저었다.
“식사 시간에는 따로 자리를 갖게 될 것입니다. 평민이 왕족의 식사 시간에 끼어들 수는 없는 법입니다.”
시로네는 인상을 구겼다.
빈센트와 올리나는 18년 동안 키워 준 은인이자 유일한 부모였다.
설령 자신이 왕가의 핏줄이라고 해도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아직까지 카즈라 쪽 사람들이 빈센트와 올리나에게 고마움을 표한 적은 없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식을 버린 게 아니라 잠시 맡겨 두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왕이 명하면 신하는 따르듯이, 빈센트와 올리나의 선행 또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게 분명했다.
시로네는 그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다.
만약 부모님이 이런 식으로 천대받는다면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가도 상관없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함께 식사하게 해 주세요.”
“시, 시로네…… 우리는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