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237
“시로네.”
최악의 상황이다.
연회장에서 별다른 위험 요소를 감지하지 못했던 것은 아타락시아 시연의 효과였다. 대부분의 중립파가 오르캄프에게 우호적이 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지온이 진검을 뽑게 만들었다. 금방 들통 날 거짓말까지 하면서 에이미를 떨어뜨려 놓은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한 가지뿐이었다.
오늘 밤 끝장을 볼 생각인 것이다.
‘분위기가 괜찮아서 그냥 넘어갈 줄 알았는데 지온이 직접 움직일 줄이야. 그래서 아무런 첩보도 안 들어왔구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수행원이 이제 막 빈센트의 숙소에서 나왔으니 시로네와 헤어진 시간은 20분이 넘었다고 봐야 했다.
레이나는 스키마 귀의 기술인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를 열었다. 청각이 강화되면서 왕성의 소리들이 사소한 것까지 수집되기 시작했다.
이제 와 시로네의 뒤를 밟아 봤자 늦는다. 어느 쪽에서든 높은 데시벨이 들리면, 그곳이 바로 사건의 중심지였다.
@
에이미는 지온을 따라 지하에 있는 갤러리로 들어갔다.
원래부터 왕성의 지하는 조용한 것인지 지온이 미리 손을 쓴 것인지는 모르지만 개미 새끼 한 마리 지나다니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연회가 밤늦게까지 진행되고 있으니 담당이 아닌 시종들은 잠을 잘 시간이었다.
에이미는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었다.
지온은 왕족이지만 실질적인 무력은 또래의 귀족들 수준이다. 어릴 때부터 엘리트 마법 수업을 받은 자신이라면 기회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적막이 감도는 이 공간은 그녀에게 가장 좋은 상황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지온을 두들겨 팰 수 있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죽이는 것도…….’
사람을 해치는 건 껄끄러운 일이지만 시로네의 부모님이 잡혀 있는 이상 그런 생각은 사치일 뿐이었다.
지온은 신사다운 미소를 지으며 갤러리의 동굴로 들어갔다. 에이미는 문이 이중으로 설치되어 있음을 보고 시로네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
‘문을 부수고 나가려면 최소한 두 발은 아껴 둬야겠는데.’
하지만 그런 생각도 갤러리의 한가로운 풍경을 보자 사라졌다.
온갖 물품들이 수집되어 있는 방이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누군가를 고문하거나 해치기에 좋은 것들은 아니었다.
에이미는 유일하게 무기로 사용될 수 있는 북쪽 진열장을 살폈다.
날을 얼마나 잘 벼렸는지는 전문가가 알겠지만 눈에 비친 한 자루의 검은 스스로 예리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시로네의 부모님은 어디 계시죠?”
지온이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부모님? 글쎄. 내가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하나?”
에이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저를 속인 건가요?”
지온은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부터 1시간 동안이 결행 시간이었다. 암살 시점을 확실히 정해 두지 않은 것은 소수 인원으로 전략을 짰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유동적인 상황은 발생할 수밖에 없지만 한편으로는 변수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1시간이라…….’
갑자기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에이미는 정말로 괜찮은 여자였다. 이런 미녀와 함께라면 1시간은 찰나와도 같은 시간이 아니겠는가?
어쨌거나 여기서 시간을 죽이는 동안 제노거와 아리우스가 일을 끝낼 것이다. 자신은 그저 굴러들어 오는 아타락시아를 받아먹기만 하면 된다.
“거짓말을 한 건 미안하군. 하지만 이해하리라 믿어. 아름다운 여성을 유혹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한 법이잖아?”
에이미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가 먼저 속였으니 어느 정도의 무례는 저질러도 되리라 생각하고 쏘아붙였다.
“돌아가겠습니다. 앞으로 이런 용무는 사양하겠습니다.”
“그래? 과연 이걸 보고도 그럴 수 있을까?”
지온이 주먹을 펼치자 황급 십자가 펜던트가 걸린 목걸이가 주르륵 내려왔다. 세공의 정밀함만 봐도 고가의 물건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에이미는 콧방귀를 뀌었다.
이런 수작에 몇 명이나 넘어왔는지는 모르지만 카르미스 가문도 토르미아 왕국에서는 알아주는 명가다.
설령 다이아몬드를 건네더라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고작 이런 걸로 환심을 살 생각인가요?”
지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고작 그런 거? 자세히 살펴보는 게 어때?”
에이미는 눈을 흘기며 펜던트를 살폈다.
왕족이 합금을 가지고 다닐 일은 없으니 순금일 테고, 대충 살펴보니 대략 500개 정도의 금화를 녹여야 추출할 수 있는 크기였다.
중앙에 진주가 박혀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금속 빛깔을 내는 철색이었다.
천연 진주의 아름다운 빛깔과는 거리가 멀었다.
형태는 완벽했지만 역시나 여자가 미용을 위해 차고 다닐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대체 뭐지? 이게 뭐가 어쨌다는…….’
에이미는 퍼뜩 깨달았다.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났다. 암철색의 빛깔을 지닌 진주. 바로 알칸티라 심해에서 산다는 천왕조개의 진주였다.
지질학자의 조사에 의하면 알칸티라 협곡은 세계에서 가장 깊은 심해를 가지고 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데다 수압마저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어부들은 채취가 불가능하고, 마법사를 동원한 국가적인 공사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다.
심해의 수압을 버티는 조개의 내구력은 금강석보다 단단한 화학물질을 만든다고 알려져 있다.
즉,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 중 하나라는 뜻이다.
또한 형태마저 완벽한 구체라서 산업적으로 쓰임새가 무궁무진했다.
물론 이런 물건을 돈을 주고 구입할 사람은 별로 없을 테지만 책에서 읽은 바로는 천왕조개의 진주는 고대 병기의 볼베어링을 대체할 수 있기에 최소한 하나에 2억을 호가한다고 들었다.
그렇기에 막대한 양의 금화를 운반하기가 여의치 않은 왕국 간의 거래에서는 화폐로도 사용되고 있었다.
‘이게 천왕조개의 진주구나…….’
역사 이전에 들어온 고대 병기가 현존할 수 있는 이유는 천국의 단단한 암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하지만 아무리 고대 병기라도 가동 기관의 부품은 마모될 수밖에 없다. 그 부속품을 대체하려면 최소한 천왕조개의 진주 정도의 내구력은 갖춰야 하는 것이다.
볼베어링 하나에 2억 골드.
고대 병기의 기능을 유지하는 데 왕국이 얼마만큼 예산을 쏟아붓고 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훗. 이것으로 끝났군.’
지온은 그녀가 말이 없는 이유가 갈등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가 건넨 것은 일개 보석이 아니라 국가 간에 거래되는 화폐였다.
“역시 소양이 있군. 대부분의 귀족은 다이아몬드로 결혼 서약을 하지. 그 단단함이 영원히 깨지지 않는 사랑을 의미하니까. 하지만 이것은 그것보다 더 단단한 천왕조개의 진주야. 왕족 중에서도 직계만이 예물로 사용할 수 있는 거라고. 어때, 이것으로 우리의 미래를 약속하는 게?”
지온이 목걸이를 걸 준비를 하며 느끼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가 아무 여성에게나 천왕조개의 진주로 유혹하지는 않는다. 설령 정말로 괜찮은 여자라도 2억 골드를 선뜻 넘겨주는 건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2억 골드가 아닌 이 방의 오브제를 전부 줘 버려도 상관이 없었다.
시로네가 죽으면, 어차피 에이미도 끝이기 때문이다.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한눈에 반했어. 내 마음을 받아 주겠어?”
마침내 지온이 회심의 고백을 날렸다. 에이미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테라제의 혈육이자 카즈라 왕국의 제1왕자가 천왕조개의 진주로 구애를 하는 것은 수많은 귀족 여성들이 꿈으로 상상하던 광경일 것이다. 그렇기에 에이미는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는 자신이 오히려 비정상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정말로 무덤덤했다. 지온의 고백을 듣고 머릿속에 처음 든 생각은 이제 그만 시로네에게 돌아가야겠다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왕자님께서 어여삐 봐 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이런 부담스러운 선물은 받을 수 없습니다.”
지온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천왕조개의 진주를 보고도 이토록 태연한 여자는 처음이었다. 제아무리 귀족이라도 무려 2억이 한 번에 굴러오는 상황이다. 설령 자신에게 관심이 없더라도 어지간하면 내미는 손을 붙잡기 마련이었다.
이대로는 에이미를 붙잡아 둘 수 없다고 생각한 지온은 공수표를 남발한 김에 확실하게 그녀를 홀릴 만한 카드를 제시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이건 어때? 내 아이를 낳게 해 주지. 왕족이 될 수 있는 거야.”
에이미는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귀족들도 정략결혼을 하지만 왕족은 그보다 한술 더 떴다. 마치 자신의 피가 대단한 가치를 갖고 있는 줄 알고 있다.
하긴, 어쩌면 사실일 것이다. 지금도 세상에는 왕자를 잉태하고 싶은 여자들이 줄을 섰으니까.
하지만 에이미는 왕족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온의 말은 모욕에 가까웠다.
“돌아가겠습니다. 왕자님과 더 할 얘기는 없을 것 같네요.”
에이미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문으로 걸어갔다.
“이게……!”
지온은 상처 난 자존심만큼 강하게 에이미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에이미는 황급히 손을 뿌리치고 물러섰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목이 얼얼했다.
‘일국의 왕자가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에이미는 손목을 어루만지며 지온을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말투에 감정이 실렸으나 정작 화난 사람은 지온이었다.
“감히 나를 거부해? 고작 귀족 따위가!”
에이미는 참신한 욕을 들은 기분이었다.
토르미아의 왕족도 카르미스는 한 수 접어준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히려 에이미를 현실적으로 만들었다. 결국 이 자리에 있는 건 일개 왕족이 아닌 테라제의 아들이었다.
4. 테라제의 제안 (4)
“어차피 너도 기대하고 따라온 거 아냐? 내 침실에 들어오는 게 얼마나 큰 영광인지 알아?”
“분명히 싫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흥, 오만하군. 주제를 모르는구나.”
지온은 이를 뿌드득 갈다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웃음기를 되찾았다.
“좋다. 그렇다면 왕족으로서 명령을 내리지. 오늘 밤 내 수청을 들어라.”
“싫습니다. 왕자님이 아무리 왕족이라도 저는 토르미아의 귀족. 타국의 명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그래? 네가 그렇게 잘났다 이거지? 그럼 이건 어떨까? 오늘 밤 내 품에 안기지 않는다면 토르미아와 전쟁을 하겠다.”
에이미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지온을 바라보았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어차피 카즈라는 내 수중에 넘어오게 되어 있어. 내가 왕이 되면 가장 먼저 토르미아부터 정복해 주마. 너로 인해서 나라가 멸망하는 거야.”
아예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었다. 지온이 카즈라의 왕이 되면 테라제는 세력을 확장시킬 수 있도록 원조를 아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에이미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는 것을 체념의 의사로 받아들인 지온이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순간 아래를 내려다보는 에이미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할 수 있으면 해 봐.”
“뭐?”
“전쟁을 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해 보라고.”
“어이가 없군. 이제 막나가자는 건가?”
귀족 따위가 감히 제1왕자에게 경어를 쓰지 않다니. 하지만 전쟁이라도 불사하겠다는 에이미의 말에 비하면 황당한 축에도 들지 못했다.
“설마 내 말이 장난이라고 생각한 거냐? 그렇다면 반드시 후회할 거다.”
에이미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헛소리하고 있네. 네가 왕이 된다고? 잘난 척하지 마. 제1왕자 자리도 흔들리는 주제에.”
“이게 진짜……!”
“그래, 여황 테라제라면 조금 떨리긴 했겠지. 하지만 네가 황제가 될 것도 아니잖아? 너같이 덜떨어진 꼬맹이에게 내가 겁먹을 거 같아?”
지온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태어나서 이토록 무시당하는 건 처음이었다.
생각이 변했다. 에이미는 절대로 죽이지 않는다. 목숨만 건사할 정도로 만들어 놓을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토르미아를 잿더미로 만들어 그녀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는 것을 볼 것이다.
“그 말…… 분명히 책임질 수 있는 거겠지?”
“책임? 아니, 나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 설령 나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말이야. 만약 네가 우리 왕국을 쳐들어온다면…….”
에이미의 홍안이 붉은 빛을 발했다.
“그때는 나도 1명의 국민으로 목숨을 걸고 싸워 주마.”
지온은 에이미의 홍안에서 나오는 살기를 접하고 흠칫했다.
피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연회장에서 얼굴을 붉히던 소녀에게 이런 극한의 정신이 담겨 있을 줄이야.
‘마법사들은 괴팍하다더니…….’
에이미가 눈을 부릅뜨며 다가왔다.
“너,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지? 어째서 나를 이 방으로 데려온 거야?”
여태까지 정황으로 보건대 지온은 단순히 몸을 취할 목적으로 자신을 끌고 온 게 아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시로네의 부모까지 들먹이는 건 그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시로네에게 볼일이 있다는 건데, 대체 무슨…….’
비로소 깨달은 에이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지온이 중요한 게 아니다. 테라제 일파는 오늘 밤 사생결단을 낼 작정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시로네를 찾아야 했다.
스피릿 존으로 들어가자 문의 위치가 공감각을 통해서 전해져 왔다.
‘안에서 열 수 있는 구조였던가?’
열 수는 있지만 문을 잠갔던 것이 기억에 남았다. 부수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에이미는 파이어볼의 전지를 끝마친 상태로 기회를 엿봤다. 그리고 지온의 얼굴이 야수처럼 일그러지는 순간 문으로 달렸다.
“아르망!”
마검이 관성을 무시한 채 날아와 지온의 손에 잡혔다. 지온은 볼 것도 없이 팔을 휘둘러 검을 던졌다.
스피릿 존을 통해 검의 궤적을 느낀 에이미는 몸을 뒤틀었다. 쿵 소리를 내며 아르망이 문에 박혔다. 스피릿 존이 아니었다면 죽었을 것이다.
‘정말로 죽일 생각이군. 끝까지 해보자 이거지…….’
지온의 여유만만한 표정이 거슬렸다. 실력으로 보건대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절호의 기회일 텐데도 급한 표정이 아니었다.
에이미는 곧바로 이유를 깨달았다.
아르망. 문에 박힌 검에서 생전 처음 경험하는 흉흉한 기운이 느껴졌다. 마치 징그러운 것이 문에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가까이 있다는 사실조차 끔찍했다.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알아? 나 또한 우리 왕국에서는 알아주는 사람이야.”
“카르미스 가문이라. 까다롭기는 하지. 하지만 시로네만 죽으면 모든 게 끝날 일이야.”
암살은 권력을 전복시킬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다.
죽은 자가 중요한 가치를 지닌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로네가 죽으면 살아 있는 자들은 수백 가지의 정황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시로네의 영혼은 구천에서 울부짖겠지만 억울함을 호소할 방법은 없는 것이다.
‘어떻게든 나가야 해.’
에이미는 입술을 짓깨물면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빨이 입술 속으로 파묻히면서 피 맛이 나자 혐오스러운 마검의 느낌도 조금은 가셨다.
‘셋을 세고 나가자.’
그렇게 마음속으로 카운트를 하는데 지온이 손을 내밀어 아르망을 되돌렸다.
에이미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미간을 찌푸렸다. 기껏 도주로를 차단해 놓고 다시 되돌리는 건 이상했다. 그렇다고 지온이 검으로 자신과 맞설 수 있으리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에이미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지온을 살폈다.
검을 들고 서 있는 그의 얼굴에서는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남몰래 검술에 매진하기라도 했던 것일까?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에는 그런 고차원적인 반전을 기대할 만한 것이 담겨 있지 않았다.
“안타깝군. 생애 처음으로 짜릿한 밤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알량한 귀족의 자존심 때문에 처녀로 죽게 생겼으니.”
“너한테 죽을 일도 없지만 혹시라도 망령이 되면 맹세코 너부터 죽여 주마. 만약 꿈에서 날 보거든 사후 세계가 있다고 믿어도 좋아.”
지온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마법사들은 입만 산 종자라서 말싸움으로는 본전도 찾기가 힘들다. 결국 무력시위가 특효약인 것이다.
에이미의 처참한 미래를 상상하는 것으로 마음을 달랜 그는 아르망을 몸에 가깝게 수직으로 세우고 읊조렸다.
“금강무장.”
칭! 하고 철이 튕기는 소리가 나면서 아르망의 칼날이 쪼개지더니 거미의 다리처럼 쩍 하고 갈라졌다.
힐트가 빠져나오고 폼멜과 그립이 분리되었다. 마치 건물의 골조를 보는 듯 앙상해진 형태를 따라 생물의 원질과도 같은 붉은 섬유질이 기름처럼 새어 나왔다.
에이미는 스피릿 존으로 느꼈을 때보다 더욱 흉악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붉은 보석을 중심으로 아르망이 거대한 거미를 연상케 하는 형태로 변했다.
이어진 광경은 그보다 더욱 심각했다. 수십 개의 다리로 쪼개진 칼날이 지온을 삼키듯 머리부터 덮어씌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