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246
“콜록! 콜록!”
시로네 일행은 기침을 터뜨리며 7단계로 나가는 문을 빠져나왔다. 쓰레기 매립지에서 맡았던 악취가 뇌리에 각인되어서 아직도 냄새가 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곳이라고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시로네 일행은 문 앞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광장의 바닥에 머리가 터진 시체들이 즐비했다. 마치 비가 내리는 것처럼 사람들이 옥상에서 추락하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시민들끼리 시비가 붙어서 서로를 죽일 듯이 두들겨 패고 있었다. 현실이 아니라고 해도 이토록 참혹한 풍경은 처음이었다.
아르민은 심각한 얼굴로 사태를 주시했다.
투사체들의 행동이 극으로 치달을 정도라면 제노거의 강선이 예상보다 빠르게 목을 조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슬픈 눈으로 자신의 세계가 망가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시로네는 갑자기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앞에 서 있는 에이미의 머리채를 짓궂게 잡아당겼다.
“아야!”
에이미는 황당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가리지 마. 안 보이잖아.”
에이미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현실과 다름없이 친절한 시로네가 자신에게만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다. 성질 같아서는 한 대 쥐어박아 주고 싶지만 화신을 만나기 전에 각오한 바가 있으니 마음을 다스렸다.
“그래, 미안하다, 뭐.”
에이미가 어깨를 으쓱하고 돌아서자 시로네는 오히려 혼란에 빠졌다.
그녀는 좋은 사람이고 자신의 편이다. 그런데 어째서 기분이 나쁜 것일까?
“왜 나를 구하러 온 거야?”
에이미는 등 뒤에서 날아든 질문에 움찔했다. 하지만 돌아보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짧은 대답을 내놓았다.
“친구니까.”
시로네는 그 얘기에서 현실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악몽처럼 무서운 기억이었다.
세상이 거꾸로 뒤집혀 있고 몸이 불타는 듯 아팠다. 반대편 벽에 고치처럼 묶인 상태의 에이미가 보였다. 어떤 상황인지는 짐작할 수는 없지만 극도의 불쾌감이었다.
“하지만 넌…… 나를 구하지 못했잖아.”
에이미는 슬픈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역시나 그런 것인가?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자신의 나약함을 시로네는 혐오하고 있는 것인가?
“시로네, 그건…….”
에이미가 해명하려고 돌아서는 순간 눈앞에 에고이스트가 솟아올랐다. 황급히 물러서자 아리우스와 레이나도 거리를 벌렸다.
머리가 터진 투사체들이 하나둘씩 에고이스트로 변해 시로네의 주위를 벽처럼 둘러싸기 시작했다.
레이나가 아르민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피해요!”
에이미가 레이나의 허리를 끌어안고 7단계의 출입구로 몸을 날렸다. 고개를 돌린 레이나의 눈에 하늘을 가득 채운 화살 비가 보였다.
아르민이 플리커 마법으로 반경을 벗어났다.
시로네의 주변으로 에고이스트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거기까지 확인한 에이미는 문을 닫았다.
따다닥! 따다닥!
수십 발의 화살이 문에 박히면서 문고리를 쥐고 있는 손바닥이 얼얼했다.
화살 비가 그치자마자 문을 열고 시로네부터 살폈다. 공의 형태로 뭉친 에고이스트에게 징그러울 정도로 많은 화살이 박혀 있었다.
“시로네! 괜찮아?”
에고이스트가 각기 분리되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처음과 똑같은 자세로 서 있는 시로네가 보였다. 더욱 많은 에고이스트들이 음습한 자세로 다가와 그를 지켰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에이미는 시로네가 바라보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무리의 군대가 밀려들고 있었다. 궁수 부대가 좌우로 갈라서면서 중장기병 부대가 선두로 나섰다.
“대체 뭐죠, 저 군대는?”
“안티테제일 겁니다. 에고이스트는 자아를 합리화시키고, 안티테제는 비판하죠. 슈퍼에고가 강할수록 도덕적이라면 시로네의 안티테제는 상당히 강할 겁니다. 긴장을 늦추지 마세요.”
에이미는 기병 부대의 지휘관을 보고 깜짝 놀랐다. 거대한 도끼를 등에 차고 있는 중년의 남성이었는데, 멀리서 봤을 때도 중량감이 남달랐다.
“빈센트 아저씨?”
덩치가 1.5배 정도 크고 얼굴에 흉터가 있는 것을 제외하면 마치 빈센트가 분장을 하고 나타났다고 해도 믿을 만큼 흡사한 외모였다.
“나는 이 도시의 지배자 이그나이트다!”
이그나이트의 고함 소리가 광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신경이 예민해진 시민들조차 정신이 번쩍 든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체중보다 무거운 대형 도끼를 수평으로 내민 이그나이트가 시로네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시로네! 너의 이기심으로 모두가 고통받고 있다. 천민으로 무엇을 꿈꾸느냐! 너의 힘은 너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제 내가 너의 죽음으로 모든 고통을 끝내겠다!”
에이미는 황당한 표정으로 아리우스를 돌아보았다.
“저게 시로네의 비판적 의식이라고요? 저건 그냥 전형적인 패배자의 논리잖아요?”
“그렇군요. 아리우스가 슈퍼에고를 조작한 것 같습니다. 인간은 삶에 대한 의욕만큼이나 죽음에 대한 열망도 강하죠. 아무래도 우리, 심각하게 물린 것 같군요.”
“시로네! 대답하라! 너는 정당한가? 수많은 고통을 낳아 놓고 아직도 살고자 하는가?”
인간이 극심한 공포나 고통에 노출되면 차라리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싹튼다. 아리우스는 시로네의 세계가 병들었다는 것을 이용해 손쉽게 이그나이트를 조작할 수 있었다.
이그나이트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시로네는 몸을 떨었다.
에고에게 슈퍼에고의 메시지는 종교인에게 바이블과도 같은 강력한 울림이었다.
“옳소! 이 세계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시로네 때문이야!”
“시로네를 죽이는 것만이 평온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다!”
“죽이자! 시로네를 죽이자!”
광장의 투사체들이 이그나이트에게 동조하여 반역의 기치를 세웠다.
그들 모두가 안티테제였고, 숫자가 불어날수록 시로네의 화신은 더욱 나약해졌다.
“준비하세요! 이쪽으로 옵니다!”
아르민이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중장갑 보병이 땅을 울리며 쳐들어왔다. 궁수들이 광장의 좌우에서 활시위를 당겼고, 시민들 또한 성난 군중이 되어 달려들었다.
“너만 없으면 편해질 수 있어!”
각목을 부여잡은 시민이 시로네의 앞에서 풀스윙의 자세를 취했다.
그와 동시에 에고이스트가 그를 끌어안고 바닥에 쓰러뜨렸다. 전신을 이빨로 변화시켜 씹어 대자 안티테제가 비명을 지르며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하지만 이그나이트의 부하들은 그렇게 쉽게 처리할 수 없었다. 오히려 에고이스트를 압도하는 완력으로 무기를 휘둘러 대고 있었다.
안티테제에게 당한 에고이스트들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분해되었다.
“시로네를 죽여라! 모두 시로네에게 돌격하라!”
죽은 투사체들이 에고이스트로 변해 시로네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반면에 시민들은 모조리 안티테제가 되었다.
욕망과 이성이 광장의 중앙에서 충돌했다.
박빙의 승부에서 변수를 만드는 것은 단연 이그나이트의 존재였다.
그는 어떤 에고이스트보다 강했고, 다른 안티테제들의 무력을 훨씬 초월했다. 그가 대형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에고이스트들이 먼지처럼 분파되어 터져 나갔다.
“시로네! 너의 것이 아니다! 그만 놓아주어라!”
전투를 지켜보는 아르민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성이 욕망을 이기고 있다.
그만큼 신념이 강하다는 뜻이지만, 상황을 고려하면 강해도 터무니없이 강했다. 나라를 위해 죽는 군인조차도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는 살고자 하는 욕망이 더 강해지는 법이다.
‘그런데 욕망이 진단 말인가? 현실에서 목이 잘려 나가고 있는데? 이게 정말 열여덟 살 소년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리우스도 안티테제의 승리를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그나이트가 시로네를 붙잡으면 그들도 아타락시아를 손에 넣을 수 없을 테니까.
시로네의 신념은 인간의 것을 초월하고 있다.
마치 역사 속의 선지자들처럼, 시로네도 신념을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인간이었다.
“안 되겠습니다. 우리도 참전하죠.”
아르민이 플리커를 시전해 전장에 침투했다.
어쨌거나 지금은 시로네를 살리는 게 급선무다. 화신이 당하게 되면 더 이상 아리우스를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에이미는 파이어 미스트로 자신을 방어하고 파이어 월을 시전했다.
에고이스트와 안티테제의 경계선에 불의 장벽을 질주시키자 인파가 둘로 갈라졌다.
정신을 집중하자 파이어 월의 높이가 치솟았다. 중장갑 보병들은 달구어진 갑옷을 벗지 못한 채 악을 지르며 괴로워했다.
레이나는 지붕 위로 올라가 궁수 부대를 저격했다. 네이드의 투사체에게 구입한 화살은 관통력이 현실의 몇 배나 강해서 한 발로도 사람 두셋은 우습게 꿰뚫었다.
“비켜라! 내가 직접 처단하겠다!”
파이어 월의 장벽 너머에서 이그나이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바로 불의 장벽을 헤치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대형 도끼를 어깨에 걸치고 스윙의 자세를 취한 그가 첫 번째로 노린 타깃은 에이미였다. 수많은 에고이스트들이 그를 습격했으나 도끼질 한 방에 흩어져 버렸다.
“에이미! 위험해!”
레이나가 허벅지에 단 화살통에서 4대의 화살을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찰나의 시간에 4연발이 쏘아졌다. 게다가 노리는 부위도 각각 어깨, 손목, 허벅지, 심장으로 달랐다.
이그나이트는 에이미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도 포커스 밖의 화살을 인지하고 대형 도끼를 양손으로 잡고 휘돌렸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강풍 소리가 휘몰아쳤다.
캉! 캉! 캉! 캉!
관통력이 강한 화살은 도끼날에 부딪치고서도 튕기지 않았다. 하지만 화살대가 90도로 꺾이면서 힘을 잃고 땅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어리석은 소녀여!”
이그나이트는 대형 도끼를 현란하게 휘두르며 돌진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에이미의 눈앞에서 도끼날을 등 뒤로 넘겼다.
그의 상체가 세워지자 에이미는 눈앞에 벽이 생긴 기분이었다. 파이어 월을 취소하고 다른 마법을 발동할 시간이 없었다.
의식의 지배자 (3)
“우리의 평화를 위협하지 말라!”
정수리를 향해 내려오는 대형 도끼의 속도는 눈으로 좇기도 힘들 정도였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에이미는 이곳이 자신의 종착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안녕, 시로네…….’
배드엔딩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정도면 괜찮은 마무리가 아닐까 싶었다. 이곳은 시로네의 정신세계니까. 그의 품에서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크아아아아아아!”
에이미의 귓가에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광포한 괴성이 들렸다. 동시에 눈앞에서 시커먼 것이 빠르게 지나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그나이트가 10미터나 날아간 상태였다.
에이미는 등 뒤의 기척을 느끼고 돌아섰다.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하늘까지 쳐들어야 했다.
온몸이 가시 같은 돌기로 뒤덮여 있는 에고이스트였다. 신장은 6미터 이상이었고, 사족 보행과 이족 보행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것 같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전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에고이스트는 화신의 욕망을 빌려 특정 형태로 발현된다. 그 과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광장에 있는 모든 에고이스트가 시커먼 연기로 화해서 빨려 들었다. 더 이상 키가 커지지는 않았지만 몸통의 가시들이 비정상적으로 길어졌다.
“크아아아아앙!”
에고이스트-분노화.
거대한 그림자 괴물이 괴성을 지르며 에이미를 뛰어넘었다.
눈앞을 막던 물체가 사라지자 무섭게 인상을 쓰고 있는 시로네가 보였다.
‘시로네가……?’
시로네는 욕망보다 이성이 강한 성향이다. 하지만 지금의 에고이스트는 여태까지 경함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형태로 강함을 발산하고 있었다.
‘설마 나를 구하려고?’
시로네의 화신이 품고 있는 적대감을 알고 있는 에이미는 성급한 결론을 피했다.
하지만 가슴이 뭉클한 기대감은 어쩔 수 없었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위험한 상황이 닥칠 때마다 시로네는 언제나 자신을 지켜 주었다.
에고이스트(분노화)는 수백 명의 안티테제를 찢어발기고도 여전히 힘이 넘쳤다. 병장기를 갖춘 이그나이트의 수하들조차 한 번의 발길질에 날아가 버렸다.
“시로네! 끝까지 치졸한 삶을 꿈꾸느냐!”
목에서 피를 토하며 일어선 이그나이트가 대형 도끼를 움켜쥐고 괴물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높게 뛰어올라 도끼를 뒤로 넘겼다.
활처럼 허리를 편 그가 스프링처럼 몸을 튕기며 도끼를 내리찍었다. 에고이스트의 머리통이 반으로 쪼개졌다.
이그나이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으나 기대했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손잡이를 통해 전해지는 에고이스트의 상태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고, 부글거렸으며, 폭발할 듯했다.
이그나이트가 정색하는 순간 분노화의 손 갈퀴가 얼굴을 후려쳤다.
얼굴 반쪽이 사라진 그가 땅으로 추락하자 기둥보다 두꺼운 다리가 그를 짓밟았다.
쿠우우우웅!
땅이 울리면서 전투가 종결되었다.
“으아아! 도, 도망쳐!”
안티테제들이 아연실색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에고이스트는 괴성을 지르며 1명이라도 더 소멸시키기 위해 그들을 뒤쫓았다.
시로네 일행만 남은 광장은 시체 한 구 없이 깨끗했다.
죽음 직전까지 갔던 에이미가 털썩 주저앉았다. 시로네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고개를 돌린 에이미는 시로네가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는 화가 풀린 것일까? 예전의 다정한 시로네로 돌아온 것일까?
“시로네,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너, 열 받아.”
시로네는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땅을 보며 말했다.
“정말로 열 받는단 말이야.”
그러고는 차갑게 몸을 돌려 멀어져 갔다.
지금 생각해도 어째서 에이미를 구했는지 알 수 없었다.
대형 도끼가 그녀의 머리를 쪼개기 직전,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다음 순간부터는 울분이 폭발하여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에이미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내심 두 사람의 화해를 기대하고 있었던 레이나가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너무 실망하지 마. 시로네를 살리기만 하면 모든 오해가…….”
레이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에이미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예상과 달리 밝은 얼굴이었다. 한편으로는 홀가분해 보이기까지 했다.
“괜찮아요. 어쨌거나 시로네가 구해 줬잖아요. 아마도 뼛속까지 저를 증오하는 건 아닌 모양이에요. 그럼 됐죠, 뭐. 하하!”
말은 그렇게 해도 에이미의 상실감이 얼마나 클지 레이나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오로지 시로네를 살리기 위해.
“그래, 우리 조금만 더 힘내자.”
레이나는 아르민을 돌아보았다. 안티테제의 진영 깊숙한 곳에서 적군을 교란하고 다녔던 그였기에 옷이 땀에 젖어 있었다.
“이제 안티테제는 사라진 건가요?”
“사라진 건 아닙니다. 하지만 조작당한 안티테제는 더 이상 없겠죠. 그렇다고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됩니다. 기본적으로 시로네를 비판하는 정신체니까요.”
광장에서 짧은 휴식을 끝낸 그들은 시로네의 안내에 따라 성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그나이트가 머물고 있었지만 더 이상 투사체는 보이지 않았다.
시로네는 지하실로 내려갔다. 그리고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길을 한 번의 막힘도 없이 걸어갔다.
창고의 문을 열자 또다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지하 1층에서 횃불을 뽑아 든 아르민은 시로네와 나란히 내려갔다. 그리고 오래된 나무 문 앞에서 일행을 정지시키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 문을 통해 들어가면 꿈의 세계, 렘 영역이 나옵니다.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전달할 사항이 있습니다. 모두 꿈을 꿔 봤겠지만 이곳에서는 현실과는 다른 물리법칙이 적용됩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포커스라고 할 수 있죠.”
“집중 같은 건가요?”
“비슷합니다. 현실은 집중과 이완의 연속이죠. 평범한 삶이라면 이완의 구간이 압도적으로 깁니다. 하지만 꿈은 오로지 집중밖에 없어요. 마치 연극의 극적 구성을 따르는 것과 같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게 되고, 여타의 상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포커스를 잃게 되면 자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를 릴핀이라고 부르죠.”
아르민은 손가락 5개를 펼쳤다.
“릴핀은 크게 다섯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부유감. 둘째, 의미 없는 중얼거림. 셋째, 동일 구간의 반복. 넷째, 시점 이탈. 다섯째, 불안의 현실화.”
에이미는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녀 또한 꿈을 꾸면서 자주 경험했던 일들이었다.
“꿈은 중력을 모방할 뿐 실제로 중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발이 땅에 붙어 있다는 느낌을 계속 확인하세요. 부유감을 느끼는 순간 끝없이 떠오를 테니까요. 그리고 확신이 없는 말을 내뱉으면 안 됩니다.”
“대화에도 포커스가 있어야 한다는 거군요. 마치 연극의 대본처럼.”
“그렇습니다. 습관적인 속어도 안 됩니다. 언어의 포커스를 잃어버리면 의미 없는 말을 되풀이하게 될 테니까요.”
“그렇다면 동일 구간의 반복이란 공간의 포커스인가요?”
“네. 아무 생각 없이 뒤를 돌아보거나 도망쳐서는 안 됩니다. 포커스가 사라져서 같은 구간만 반복되죠. 네 번째로, 주위 상황에 집중하면 자신을 잃고 관찰자의 입장으로 빠져 버립니다. 마지막으로, 불안한 생각을 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