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25
다른 것도 아닌 폭력 사태까지 덮으려고 할 정도면 보통 비밀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결정을 내린 제이크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제가 에이미를 이곳으로 불러냈습니다. 그녀의 실력이 월등해서 안티매직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정당한 대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전부터 감정의 골이 깊어지다가 결국 자존심 싸움으로 번진 거죠. 흔한 일이잖아요. 게다가 보시면 알겠지만, 심각하게 당한 건 우리 쪽입니다.”
시이나가 말했다.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거니? 그리고 안티매직이라고? 너희들은 가장 중대한 교칙을 어겼어.”
“네. 물론 잘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다만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건 단순한 폭력 사태지 협박이나 납치, 감금 같은 게 아니라는 겁니다. 에이미가 피해자라면 어째서 바로 선생님께 보고를 하지 않았을까요? 저들도 찔리는 게 있으니까 이번 사건을 덮으려고 한 겁니다.”
에이미가 소리쳤다.
“무슨 헛소리야! 우리가 뭘 숨겼다고? 네가 시로네를 납치했다고 협박했잖아!”
“그래서 우리가 정말로 납치를 했나? 더군다나 당사자인 시로네마저 선생님에게 알리지 않고 곧바로 이곳에 왔지. 과연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너, 너 이 자식……!”
에이미는 반박하지 못했다.
납치를 당하지 않은 시로네가 교사에게 보고하지 않은 것은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분명 상식 밖의 일이었다.
제이크는 속으로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이건 시작일 뿐이야. 비밀이 뭔지 밝혀지면 더욱 집요하게 파고들어 가 주지. 돈이 얼마가 들든 상관없어. 결국에는 학교에 발도 못 붙이게 될 거야.’
블랙 매지셔가 늘 하던 일이었으나, 이번에는 스케일을 훨씬 키울 생각이었다.
‘지역 신문사, 왕국 예하 기관, 사교회까지 소문을 퍼트리면 네 가문도 얼굴을 못 들 거다.’
그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보라, 이것이 어른의 싸움이다.
세상은 결국 독하고 더럽고 치사한 놈이 이기게 되어 있는 것이다.
‘크크크, 잘 가라, 에이미. 내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너만은 지옥에 보내 주마.’
“건방 떨지 마라, 제이크.”
시이나가 차가운 냉기를 뿜어내며 걸어왔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2)
“오기 전에 세리엘에게 들었다. 너는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을 거야.”
“단정 짓지 마시죠. 학생 가르치는 선생님이지 운영진은 아니잖아요?”
“뭐야?”
“아르디우스 가문에서 얼마를 내고 있는지는 아실 텐데요? 제1계급 귀족 10명이 내는 지원금보다 많은데, 그런데도 날 자를 수 있을까요?”
귀족 학교라면 어디든 지원금 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나 마법학교는 특히나 돈이 많이 들었다.
최첨단 장비는 성적 향상을 이끌고, 시스템이 낙후된 학교는 경쟁력이 떨어진다.
그렇게 명문 타이틀을 빼앗기면 다시 재능 있는 학생들이 입학을 꺼리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 알페아스 마법학교 출신인 사드였다.
제이크의 집안에서 지원하는 돈이 마르면 분명 재정적 타격이 있을 터였다.
“시이나 선생님, 벌써부터 퇴학을 얘기하는 건 성급하다고 봅니다. 그런 부분은 징계위원회를 열어서 절차에 따라 결정할 일이 아닐까요?”
“아뇨, 퇴학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제이크에게 당x한 학생들을 볼 면목이 없으니까요. 만약 퇴학시킬 수 없다면 제가 교사 옷을 벗겠습니다.”
사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찬바람이 부는 성격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녀의 마법적 자질은 왕국 마법학교 전체에서도 최상위였다.
제이크가 웃었다.
“하하하! 학교를 그만둔다고요? 어디 해 보시죠! 선생님이 나가는지 내가 나가는지.”
시이나의 어깨에서 빙결의 서릿발이 피어오르는 와중에도 제이크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귀족의 지원금이 없으면 교사 월급은 어디서 나오죠? 듣기로는 공인 마법사 월급이 상상을 초월한다던데. 도서관의 책은 어떻게 구입할까요? 훈련장을 개설하는 돈은? 값비싼 마법장치들은? 결국 세상은 돈! 돈이에요! 돈으로 안되는 일은 없다고요!”
그 순간 시이나가 손을 휘두르자 제이크를 중심으로 냉기가 원을 그리며 질주했다.
바람이 급속도로 냉각되더니 을씨년스러운 얼음 가시들이 그를 덮쳤다.
“큭!”
황급히 두 팔로 얼굴을 가린 제이크의 몸을 가시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얼굴, 어깨, 옆구리, 다리 사이로 뻗은 가시에 그는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시로네는 전율했다.
‘대단하다.’
바람을 냉각시키는 아이스 토네이도.
그럼에도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는 것은 분자 단위의 빙결 현상을 통제한다는 뜻이었다.
시이나가 걸음을 옮겼다.
“학생 주제에 교사에게 훈계를 해?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얼마든지 있어.”
제이크의 콧잔등이 일그러졌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건 없다. 눈앞에 황금을 내밀면 아무리 고상한 사람이라도 짐승으로 돌변하는 모습을 수없이 지켜본 그였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거? 대체 그게 뭐죠?”
“재능.”
제이크의 어깨가 움찔했다.
“선을 행하는 품성. 남을 위하는 인격. 물러서지 않는 신념. 세상을 밝히는 지성. 목숨을 나누는 우정. 포기하지 않는 노력. 악을 물리치는 의기.”
제이크는 이빨을 깨물었다.
어째서 이 여자는 자신을 괴롭히는 것일까? 그녀의 입을 막을 수만 있다면 돈이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을 듯했다.
“그런 것 따위가…….”
제이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이나가 손가락을 튕기자, 아이스 토네이도가 터져 나갔다.
“으으으으……!”
얼음 파편에 맞은 것만으로도 공포에 질린 제이크는 눈조차 뜰 수 없었다.
“이제 알겠지, 제이크? 돈으로는 아무것도 살 수 없어. 그래서 너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거야.”
시이나가 제이크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흐윽!”
“착각하지 마라. 학교는 돈을 받는 대가로 너희들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학교야말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가르쳐 주는 유일한 곳이야. 넌 그런 소중한 곳을 제 발로 걷어찬 거야. 학교를 떠나게 되면 아무도 너에게 이런 것들을 가르쳐 주지 않을 거야.”
제이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너는 학교에서 퇴학당한 인간으로 평생 사회에 각인될 거다. 물론 재벌이니 나름 멋지게 살 수는 있겠지. 하지만 패배자라는 자격지심에 시달릴 거고, 네가 이룰 수 있었던 수많은 가능성의 상당수를 포기해야 할 거야. 무슨 뜻인지 알겠니? 네가 이곳에서 꿈꿨던 시간보다 더 멋진 미래는 절대로 펼쳐지지 않는다는 거야.”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반면에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제이크.”
시이나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네 꿈은 여기서 끝이야.”
“어…….”
독기로 가득 차 있던 제이크의 얼굴이 소년의 얼굴을 되찾기 시작했다.
엄청난 좌절감과 두려움에 몸이 떨리고,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아니야.”
왜 몰랐을까?
‘이렇게 망칠 순 없어. 내 인생이…….’
학교의 교칙을 어기며 거드름을 피울 수 있었던 것도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세상으로 쫓겨나 학교를 원망해 봤자 관심을 가져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패배자.’
제이크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잘…….”
왕국에서 인정받는 교사가 직업을 버릴 각오로 자신을 퇴학시키려 하고 있다.
“잘못했어요, 선생님.”
승패는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감정의 둑이 무너진 제이크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땅에 엎드렸다.
“퇴학은 안 돼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정말로 열심히 공부할게요.”
시로네와 에이미도 숙연해졌다.
꿈이 박탈당하는 공포가 어떨지는, 마법학교 학생이라면 직접 겪지 않아도 알 터였다.
시이나가 제이크를 일으켜 세웠다.
“징계위원회가 열리면 진심으로 잘못을 빌어. 모든 걸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면 그만한 각오가 필요할 거야. 나에게 약속하면, 나도 너를 도와주마.”
“네. 네…… 선생님.”
물에 빠진 사람처럼 고개를 주억거리는 제이크의 모습에서 시로네는 깨달았다.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있다.
설령 재벌이라고 해도,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힘으로 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평민이면 어떻고 귀족이면 어떤가.
우리들이 올려다보고 있는 꿈 또한,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일 테니까.
우리들의 마음속에 담고 있는 꿈 또한,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일 테니까.
***
블랙 매지셔는 징벌방에 갇혀 치료를 받았다.
내일쯤 징계위원회가 열릴 예정이었고 시로네 일행은 교사들과 면담했다.
사드가 진술서를 작성하는 가운데, 시로네는 블랙 매지셔를 제압한 방법을 말했다.
예상했던 대로 교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어? 스피릿 존으로 안티매직을 눌렀다고?”
“네. 에텔라 선생님의 수업을 들었거든요. 마법사의 안티매직은 정신적 시소라고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방어형으로 버텨 보려고 한 것 같아요.”
교사들은 충격에 말을 잃었다.
물론 블랙 매지셔는 안티매직의 전공자가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5명의 동시 공격이었다.
이는 시로네의 스피릿 존이 그들 전부를 합한 것보다 훨씬 강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갑자기 표정이 심각해진 시이나가 시로네의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잠시 눈꺼풀을 들어 동공을 관찰한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그러면 안 돼. 안티매직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마법이야. 이번에는 무사히 넘어갔지만 자칫하다가는 마법을 쓸 수 없게 될 수도 있어.”
강심장인 시로네도 시이나에게 직접 그런 얘기를 듣자 가슴이 철렁했다.
확실히 당시에는 에이미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신중하지 못한 감이 있었다.
에이미도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었는지 깨닫고는 슬그머니 시선을 회피했다.
‘괜히 미안해지네.’
학생들이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자 시이나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흐음.”
어쨌거나 안티매직을 제압한 건 대단한 재능이었다.
‘내구력이 뛰어난 것은 입학 테스트부터 알고 있었지.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사드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시이나 앞에서 시로네를 띄워 줄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도 잘한 건 아니었다.
“시로네, 어째서 바로 알리지 않았지? 그런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선생님에게 말했어야지. 자만이든 무모함이든, 너보다 훨씬 클래스가 높은 선배를 혼자 구하러 갔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 돼.”
시이나도 이번에는 동의했다.
심각한 사안인 만큼 의혹은 해결하고 넘어가야 했다.
“그래, 시로네. 대체 왜 그런 거야?”
시로네와 에이미는 시선을 교환했다.
“…….”
서로를 구하기 위한 전투였던 만큼 여태까지 없던 전우애가 느껴졌다.
시이나가 재촉했다.
“빨리 말해. 숨기는 게 있어서는 안 돼. 이번 일로 몇 사람이 다쳤는지는 알지?”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세리엘도 초조하게 기다렸다.
‘대체 무슨 비밀이야?’
에이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요. 사실대로 말씀드릴게요.”
시로네도 그게 좋다고 생각했다. 필요한 말만 편집하려면 당사자의 입이 편할 테니까.
물론 시로네가 평민이라는 게 밝혀지게 될 테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어차피 다 알게 될 일이야. 교장 선생님이 어느 선까지 공표했을지는 모르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사드와 시이나는 모르는 듯했다.
“사실 시로네는…….”
좌중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에이미가 해맑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저랑 사귀는 사이예요.”
“뭐어어어!”
방이 떠나갈 듯 흔들렸다.
물론 소리만 지르지 않았을 뿐,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시로네였다.
사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다그쳤다.
“대체 언제부터? 선생님도 다 알고 있어. 너는 연애에 관심조차 없잖아. 더군다나 시로네는 이제 막 학교에 들어온 신입생이라고.”
“사실 어릴 적에 만난 사이거든요. 그러다가 이곳에서 다시 인연이 이어진 거죠. 하하! 흔한 일이잖아요.”
에이미는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 이걸로 됐어.’
어차피 자신은 졸업반으로 진급할 것이니 시로네와 마주칠 일도 없을 테니까.
한동안 구설수에 휘말리겠지만 귀찮게 쫓아다니는 남학생들도 이제는 없을 것이니 딱히 나쁜 일도 아니었다.
반면 시로네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무슨 생각이야?’
당장의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거짓말이라는 건 알고 있으나 뒷감당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에이미가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렇지, 시로네?”
억지로 웃는 티가 역력했다.
그녀의 성격을 아는 시로네는 섬뜩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맞아요.”
세리엘이 자신의 뺨을 때렸다.
“꺄아악! 어떻게 이런 일이? 나 완전 충격, 아니 감동이야! 그런 거였어?”
그녀의 말이 더욱 빨라졌다.
“호호! 내가 너 처음 시로네 봤을 때부터 그런 줄 알았다니까! 어쩐지 요것이 시로네 일에만 의뭉을 떨더라니. 언제부터 사귄 거야? 고백은 누가 먼저 했는데?”
에이미의 유일한 친구인 세리엘이 정황을 밝히자 교사들도 의심을 거두었다.
연인 사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블랙 매지셔에게 달려간 것도 이해가 되었다.
사드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진술서를 작성했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인 시로네와 에이미는 건, 건전하게 사귀는 사이로…….”
***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알페아스 마법학교에서 시로네와 에이미가 연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학생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