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254
그랜드 홀의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연락을 받고 출동한 주둔군이 무장을 갖추고 쳐들어왔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결사의 표정은 황당함으로 변했다.
“뭐, 뭐야, 이게?”
상상을 초월하는 광경이었다. 왕성의 심장부인 그랜드 홀이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을 경악하게 만든 것은 오르캄프를 포함한 모두가 무릎을 꿇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이다!’
시로네의 시선이 잠시 병사들 쪽으로 움직이는 순간 보순이 순간 이동을 시전했다.
시로네에게 접근했을 때에는 이미 소매에서 꺼낸 단도를 뽑아 들고 있었다.
‘마지막 기회다! 심장을 찔러야 해!’
시로네는 달려드는 보순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보순은 이미 각오를 끝낸 듯 거침없이 단도를 들이밀었다.
푸욱 소리를 내며 살의 탄력을 뚫고 단도가 박혔다.
보순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로기 상태일 것이라 생각한 시로네의 반응이 예상보다 기민했다. 사력을 다해 몸을 뒤튼 바람에 심장이 아닌 옆구리 쪽에 칼날이 박혔다.
“빌어먹을.”
시로네는 지금 느끼는 감정을 분석할 수 없었다.
이성이 날아가고 짐승의 광포함이 들어찼다. 몸으로 쳐들어온 이물감은 고통도 고통이지만 엄청난 수치심을 불러일으켰다.
시로네의 눈빛을 보자마자 보순은 어스 스킨을 시전했다.
그의 피부에 빠르게 흙이 쌓이기 시작했다. 공인 4급의 식물 마법사가 시전하는 어스 스킨의 내구력은 암석의 강도였다.
포톤 캐논이 어스 스킨을 강타했다. 토벽에 수천 개의 금이 가면서 산산조각 터져 나갔다.
경악에 찬 보순의 얼굴이 드러났다. 충격이 관통했는지 입에서 핏물이 뿜어졌다.
“으아아아아!”
시로네는 배를 부여잡고 고통에 몸부림쳤다.
머리 위에서는 포톤 캐논이 엄청난 속도로 커지고 있었다. 직경 1미터에 달하는 광자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압축력을 포기한 대가로 얻은 크기는 이미 포톤 캐논이라고 부를 성질이 아니었다. 그래비티 캐논. 사람이 아닌 건물을 목표로 잡은 대물 대포였다.
그랜드 홀은 완벽하게 혼란했다. 귀족들은 사색이 되어 비명을 질렀고 경비들은 좌우를 둘러보는 의미 없는 행동으로 무력함을 달랬다.
“레이나 아가씨!”
주둔군에 이어 오젠트 가문의 수행원들이 무장을 갖추고 쳐들어왔다. 하지만 그들도 예상을 깨는 광경을 접하고 넋을 잃었다.
“귀족들을 제압해요! 지금 당장!”
레이나가 수행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랜드 홀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이 계속 전해졌으니 성내는 초비상이 걸린 상태일 것이다. 지금 귀족들을 제압해 두지 않으면 결정적인 상황에 퇴로마저 잃게 된다.
수행원들이 고위 귀족들에게 다가가 목에 칼을 걸었다.
레이나의 예상대로 지휘 통제하에 있는 각 부서의 병력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고위 장교들도 복장을 갖추지도 못한 채 헐레벌떡 뛰어왔다.
비명 소리, 울부짖는 소리, 시로네를 죽이라는 소리, 레이나가 지시를 내리는 소리, 모든 소리들이 한데 엉켜서 결국에는 아무 소리도 아니었다.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의미를 전달하지 못했고, 그저 악을 지르고 있을 뿐이었다.
에이미에게는 마치 그들이 웃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 또한 웃음이 나왔다.
감당할 수 없는 사건에 직면하자 놀랍게도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것이 끝이라면, 정말로 화려한 마지막이구나.’
그랜드 홀을 채운 아비규환의 소음을 뚫고 다정한 목소리가 시로네에게 전해졌다.
“시로네.”
거짓말처럼 정적이 찾아왔다.
모두가 그랜드 홀의 입구를 돌아보았다. 빈센트의 팔을 붙잡은 올리나가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핏물로 범벅인 데다가 옆구리에 단도가 박혀 있는 시로네의 모습을 눈에 담은 올리나는 현기증이 일어 비틀거렸다.
빈센트가 부축했으나 그녀는 남편을 밀어내고 혼자서 걸음을 옮겨 그랜드 홀로 들어왔다.
사람들이 길을 열어 주었다. 시로네에게 다가가는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가지 마세요.”
엘리자의 말에 올리나가 걸음을 멈췄다.
“시로네는 미쳤어요. 가면 죽어요.”
엘리자는 올리나가 시로네에게 가지 않기를 바랐다.
시로네는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 만약 올리나에게 다른 결과가 나온다면 핏줄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하아아아.”
길게 숨을 내쉰 올리나는 똑바로 방향을 틀어 엘리자에게 걸어갔다. 폭격이라도 당한 듯 넋이 나간 그녀의 얼굴을 보자 속에서 불길이 치솟고 앞이 캄캄해졌다.
철썩! 올리나의 손바닥이 엘리자의 뺨을 치고 나갔다.
귀족들은 지금 벌어진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식의 배에 칼이 꽂힌 것을 보고 이성적일 부모는 세상에 없을 테지만, 그녀가 때린 사람은 다른 아닌 카즈라의 여왕이었다.
엘리자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맞은 얼굴을 되돌리자 올리나가 울고 있었다. 그것도 이상했다. 어째서 맞은 사람이 아니라 때린 사람이 울고 있을까?
“내 아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고통이 뒤늦게 밀려들며 엘리자는 눈물이 핑 돌았다. 너무 아팠다.
그리고 그것은 올리나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아도 되는 주요한 변명거리가 되어 주었다.
오르캄프는 올리나를 질책하지 않았다. 아니, 다음 기회로 미뤄 두었다.
시로네의 폭주를 멈추게 한 당사자임에는 틀림이 없다. 지금은 그녀에게 희망을 걸어 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 시로네를 말리시오. 카즈라의 명맥이 끊어지는 일은…….”
올리나는 벼락에 감전된 듯 전율하며 스파크가 튀는 눈으로 오르캄프를 돌아보았다.
따귀가 날아오는 착시에 오르캄프의 눈이 질끈 감겼다. 하지만 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일은 끝내 벌어지지 않았다.
눈을 뜨자 올리나가 자신의 손목을 붙잡고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다가 차갑게 돌아서더니 다시 시로네에게 발걸음을 옮겼다.
“시로네.”
시로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올리나의 얼굴을 보자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모든 게 무서웠다. 회복 불가능한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부모를 실망시키는 게 가장 무서운, 어쩔 수 없는 자식의 본능이었다.
어릴 때는 올리나의 매서운 눈초리를 본 적도 몇 번인가 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누구보다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시로네는 그래서 더 가슴이 아팠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시로네, 네가 아이였을 때 얼마나 예뻤는지 아니? 웃는 모습이 꼭 여자아이처럼 귀여웠지. 그럴 때마다 아빠는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곤 했단다. 그러면 네가 더 크게 웃었거든.”
올리나는 옛날이야기를 해 주었다.
“참으로 순한 아이였어.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표현도 잘 못하고 남을 다치게 하지도 못해서, 친구들이 화내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가 집에 와서 끙끙 앓기도 했지.”
올리나의 눈이 아련해졌다. 그래, 그런 시절이 있었지.
그런데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렀다. 축복처럼 다가온 갓난아이가 이렇게 장성한 소년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걱정하지 않았단다. 남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안다는 건 참으로 고결한 거야. 네가 착하게 자라 주어서 엄마는 얼마나 기쁜지 몰라.”
올리나는 두 손으로 시로네의 뺨을 쓰다듬었다. 잘생긴 아들의 모습이 오늘따라 너무 힘들어 보였다.
“너무나 마음이 여리고 착해서, 화를 내는 방법도 모르지. 너무 화가 나는데도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없어서, 자신을 학대하는 것으로 알릴 수밖에 없는 거야.”
올리나는 시로네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이렇게 심하게 다친 걸 보니, 오늘 우리 아들이 정말로 화가 많이 난 모양이구나.”
시로네는 눈앞이 부예졌다. 여태까지 흘렸던 피눈물과는 다른 짜고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동자가 무지근하게 아파 왔다. 턱 끝까지 차오른 독극물이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벅차서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모든 감정이 눈으로 몰리면서 쥐어짜듯 말이 새어 나왔다.
“엄머어…….”
마치 길을 잃은 어린아이가 낯선 곳에서 애타게 엄마를 부를 때의 목소리였다.
울컥 눈물이 터진 올리나는 시로네의 얼굴을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었다.
“그래, 우리 아들. 엄마랑 집으로 가자. 엄마가 집에 데려다줄게. 아무 걱정 하지 말고 가자.”
“엄마…… 엄마…….”
서러움이 북받친 시로네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엄마를 죽이려고 했어요. 저 사람들이…… 엄마를…….”
“괜찮아, 시로네. 네가 지켜 주었잖니. 엄마는 하나도 두렵지 않아. 너를 위해서라면 죽는 것도 두렵지 않아.”
어린아이처럼 훌쩍이는 시로네의 양팔을 붙잡고 올리나는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시로네, 자식은 부모의 미래란다. 그렇기 때문에 너를 위해서라면 엄마는 뭐든지 할 수 있어.”
여태까지 시로네를 지배했던 거대한 분노가 붕괴되는 건물처럼 빠르게 밑바닥을 향해 가라앉기 시작했다. 증오의 기운이 10단계, 9단계, 8단계로 끝없이 내려갔다.
심층 1단계의 봉마진이 복구되었다.
대천사의 조각상에 시로네의 화신이 밝은 빛으로 떠올랐다. 거기에서 베히모스가 빠져나오면서 봉마진으로 되돌아갔다. 빛의 기둥이 사라지면서 거핀의 보안장치가 해제되었다.
시로네는 순수한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현실의 육체가 급격한 후폭풍을 맞이했다.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의식이 날아갔다. 스르륵 눈이 감기자 스피릿 존이 소멸하면서 아타락시아가 사라졌다.
올리나는 쓰러지는 아들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자식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그녀지만, 자식을 살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식을 죽이려고 했던 원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아들을 살려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카즈라에 몸담은 어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에이미와 레이나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우선 시로네가 숨이 붙어 있음을 확인했다. 뇌사 상태일지도 모르지만 가장 큰 문제는 출혈이었다. 당장 수혈을 받지 않으면 1시간도 버티지 못할 듯했다.
“에이미, 내가 시로네를 데리고 갈게. 너는 수행원이랑 미리 가서 수술 준비를 도와줘. 수혈부터 해야 하니까 어머니도 동행해서 의사에게 혈액형을 말해 주세요.”
화신의 주인 (7)
지시를 내린 레이나는 시로네의 팔을 어깨에 걸고 일어섰다.
아타락시아가 사라졌기에 귀족들은 들고일어날 터였다. 하지만 최고 귀족들이 수행원들에게 제압당한 상태라 아직까지 큰 소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시로네의 배에 칼을 꽂은 보순이었다.
레이나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전투는 끝났습니다. 물러서지 않으면 우리가 붙잡은 귀족들의 목을 베겠습니다.”
“보, 보순! 빨리 물러서게. 일단 보내 주라고!”
“그래! 어서 물러서! 물러서란 말일세!”
목에 칼이 걸린 귀족들이 보순을 다그쳤다.
하지만 보순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 자리의 귀족들이 전부 죽더라도 시로네가 살아나게 둘 수는 없었다.
세상은 무력과 지력으로 양분되고, 인간은 늑대와 양으로 구분된다.
시로네가 순한 양이었다면 지력의 궁극인 대천사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얼마든지 살려 두고 이용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시로네는 양이 아니었다. 우발적인 상황이었다고 해도 왕성을 통째로 날려 버릴 각오를 할 수 있는 자라면 훗날이 더 위험하다.
‘오늘의 사건으로 왕성의 파벌은 확실히 갈라졌다. 지온이 왕이 되지 않으면 모두 끝장이다.’
카즈라 내부의 테라제 일파라고 해도 우오린 외에는 대부분 지온의 수하들이었다. 패배한 왕자에게 테라제가 선처를 베풀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지 말고 협상을 하는 게 어떻겠소?”
에이미는 보순의 뻔뻔함에 기가 막혔다. 조금 전에도 협상 운운하면서 가장 먼저 칼을 빼 든 자가 누구던가?
“어떻게 당신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수가 있지? 빨리 비켜!”
보순도 그들이 응할 것이란 생각을 하고 물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을 끌 필요가 있었다.
이미 시로네의 상태는 반쯤 죽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분초를 다투는 상황이라면 가장 무서운 무기는 시간이었다.
레이나는 보순의 전략을 간파했다. 하지만 단호하게 귀족들의 목을 베라고 지시를 내릴 수 없었다.
이미 보순은 시로네를 사상 최강의 적으로 상정했다. 그렇기에 귀족들을 죽이면, 시로네도 죽는다. 반드시 시로네를 살려야 하는 그녀의 입장에서는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나와 보순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와중에 그랜드 홀의 입구에서 강풍이 밀려들었다. 마치 불이 타는 듯한 소리를 내며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박쥐 떼처럼 날아들었다.
30명의 인영이 그랜드 홀의 중앙에 착지했다. 모두 올빼미 가면을 쓰고 있었고 허리춤에는 똑같은 길이, 똑같은 규격의 칼을 차고 있었다.
옷깃에 달린 역삼각형의 배지를 본 귀족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저, 저건……?”
여황 테라제의 직속 호위군, 풍장이었다.
테라제와 기사 서약을 맺은 무려 100명의 검사들. 전 인원이 움직이는 경우는 드물지만 일단 그들이 나타나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고 알려져 있다.
“풍장이 어째서 이곳에?”
풍장은 군대가 아니다. 테라제의 검인 그들은 여황의 지시 없이는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게다가 아무리 그들이 빨라도, 오늘의 사건을 염두에 두고 왔다고 보기에는 카샨과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삼각 편대를 이루고 있는 풍장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로 똑같이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편대의 중심부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현 시간부로 시로네의 신병을 인수한다. 또한 카즈라 왕국의 내정에 관련한 모든 결정권을 박탈한다. 이를 어길 시에는 카샨 제국과의 전쟁임을 명심하도록 하라.”
귀족들이 수군거렸다.
내정 권한을 박탈한다는 것은 이 자리의 모든 귀족들의 권한을 박탈한다는 뜻이었다. 누군가가 반대표를 던지거나 혹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까 싶어 기다렸으나, 정적만 이어졌다.
아무도 나설 용기가 없음을 깨달은 귀족들은 이심전심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카샨의 지배자가 내린 결정에 반대할 수는 없었다.
풍장은 테라제의 검. 그들이 왔다는 것만으로도 테라제의 지령이 단순한 협박에 그치지 않을 것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정말로 그것이 여황님의 결정이란 말씀이십니까?”
보순이 이의를 제기했다.
물론 다른 귀족과 마찬가지로 테라제가 내린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지온은 아직 패하지 않았다. 시로네는 생사를 헤매고 있고, 조금만 시간을 끌면 알아서 죽는다. 카즈라를 손쉽게 차지할 수 있는 방법을 두고 초를 친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무엇보다 24시간 여황의 곁을 지키는 풍장이 이토록 빨리 카즈라에 도착할 리가 없었다.
“들은 바에 의하면 풍장은 올빼미 가면을 쓰고 있고 역삼각형의 배지를 왼쪽 가슴에 차고 있다고 하더군요.”
풍장의 누군가가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사칭하기 쉽다는 얘기지요. 통치권을 넘기는 건 왕국의 중대사입니다. 여황 폐하의 지시를 받았다면 공문을 가져오셨을 겁니다. 확인시켜 줄 수 있겠습니까?”
귀족들은 풍장을 돌아보았다.
듣고 보니 보순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테라제를 따르는 건 당연하지만 그게 정말로 테라제인지는 검증을 해야 할 게 아닌가?
“공문 같은 건 없다. 지령이 내려올 것이다.”
“흐음, 그렇다면 더욱 이상하군요. 저희가 어떻게 믿고 통치권을 넘기겠습니까? 혹시 신원을 확인할 증표 같은 건 가지고 계십니까?”
“그런 거라면 있지.”
“실례가 안 된다면 확인해 볼 수 있겠습니까?”
풍장의 삼각 편대가 중심으로 모여들어 일자진을 형성했다. 마치 30명이 1명에게 흡수된 듯한 광경이었다.
그 1명이 다시 수백 명으로 분신한 듯 잔상을 일으키며 날아들었다. 보순을 중심으로 회전하자 검은 폭풍이 일어났다.
“컥!”
첫 번째 검이 보순의 아래턱으로 들어와 얼굴을 수직으로 쳐올렸다. 안면부가 하늘로 떠오르자 서른 자루의 검이 한 번의 충돌도 없이 보순의 몸을 난도질했다.
베기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벌이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공기가 진동했다.
초당 1천 회에 가까운 베기를 가한 풍장은 순차적으로 몸을 날려 처음의 장소에 정확히 착지했다. 진열은 일말의 오차도 없는 삼각 편대였다.
귀족들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보순을 바라보았다. 아니, 저것을 보순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의 육체가 손톱보다 작은 크기로 분해되어 있었다. 다져진 고깃덩어리 밑으로 천천히 핏물이 새어 나왔다. 공중에서 떨어진 무언가가 철떡 소리를 내며 달라붙었다.
보순의 안면부였다.
눈동자는 없었지만 경악의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건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입을 크게 벌린 상태의 안면부가 핏물에 젖으면서 쪼그라들었다.
“풍장을 사칭할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없다.”
귀족들은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지금의 실력이야말로 그들이 풍장이라는 완벽한 증거였다.
실제로 풍장의 전술은 모방이 불가능하다. 바람의 움직임을 그대로 모사해야 하기 때문에 개개인의 실력이 최고가 아니면 흉내조차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으로 유체역학을 구현하는 자들.
그러한 실력자 100명이 한 줄기 바람이 되어 완벽한 전술을 구사하는 게 바로 지상 최강의 검술 집단 풍장이었다.
“보순 선생님!”
엑카시가 핏대를 세우며 달려갔다.
다진 고기가 되어 버린 보순의 앞에 무릎을 꿇은 그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 껍데기를 만지려다가 풍장을 노려보았다.
“이 자식들이……!”
어찌 이리도 잔인할 수가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