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255
테라제의 검을 의심했더라도, 보순 또한 지온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 사람이었다. 고작 말 한마디 잘못해서 이런 처참한 몰골로 세상을 떠날 인물이 아니었다.
엑카시는 창날이 나간 프리즈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이내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풍장의 삼각 편대에서 형용할 수 없는 시커먼 오라가 피어올랐다. 엑카시만이 볼 수 있는 환시였다. 30명의 살기에 노출당한 뇌가 죽음의 착각을 일으킨 것이었다.
‘싸, 싸워야 돼. 보순 선생님을 위해…….’
심장이 굳어 가는 기분이었다. 떨그렁 소리를 내며 프리즈가 떨어지고, 엑카시는 땅바닥에 손을 짚고 속에 있는 것들을 전부 게워 냈다.
“우에엑! 우에에엑!”
풍장은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테라제에게 적당히 하고 돌아오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그들의 잘못은 아니었다. 같잖은 살기에 적당히 응해 줬다. 엑카시의 수준이 예상보다 훨씬 떨어지는 것까지는 자신들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어리석은 녀석.’
보고서에는 카즈라에서 촉망받는 6급 마법사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진급 포인트가 7급에 비해 10배 이상 늘어나는 6급의 특성상 실력의 격차가 가장 큰 것도 6급이었다.
‘그런 점을 감안해도 허약하다. 꼼수가 있었군.’
카즈라는 마법력이 약하니 국가에서 밀어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예를 들어 다른 마법사들과 협력하여 얻은 포인트를 엑카시 1명에게 몰아준다거나.
어쨌거나 전투 마법사로서 엑카시의 여정은 끝이었다. 풍장의 전매특허인 집단 살기 ‘각시’에 중독된 이상 죽음의 공포가 평생을 따라다니게 될 터였다.
보순이 죽고 엑카시마저 무너지자 귀족들은 알아서 몸을 사렸다. 엑카시가 제풀에 쓰러지는 것을 지켜본 개인 경호원들은 함부로 투지조차 드러내지 못했다.
주변 정리가 끝나자 풍장이 다시 움직였다. 개개인이 공기의 입자가 된 듯 나풀거리더니 시로네에게 날아들었다.
시로네를 부축하고 있던 레이나는 검은 폭풍 속에서 두려움에 떨었다. 마치 바람의 속삭임처럼 풍장의 말이 들렸다.
한 사람이 한 음절씩 내뱉는 목소리가 정신을 몽롱하게 했다.
-시로네를 데려가겠다. 대륙 최고의 전문가가 시로네를 치료할 것이다. 내일 아침까지 돌려보내 주마.
귓바퀴 안쪽에서 강풍이 부는 소리를 내며 풍장이 멀어졌다. 그리고 마치 급류를 타듯 그랜드 홀을 크게 우회하더니 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바람의 움직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인과의 수레바퀴 (1)
“후우! 후우!”
아리우스는 내성의 정원을 달렸다. 밤이 깊은 시간이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스피릿 존이라면 풀뿌리에 걸릴 일은 없었다.
하지만 마도7걸이라도 심장은 평범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그는 달리기를 멈추고 플리커를 시전했다.
점멸한 그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전혀 다른 곳에서 나타났다.
중심이 기운 상태로 떨어진 그는 아픈 등을 새우처럼 구부리고 바닥을 굴렀다. 벌써 스무 번째 실패였다.
“젠장! 젠장!”
내성의 시간선이 미묘하게 뒤틀려 있다. 아마도 10만 분의 1초 정도의 오차일 테지만, 고도로 예민한 설계가 필요한 플리커 마법에는 치명적이었다.
‘그 자식이 쫓아오고 있다.’
광안의 아르민.
확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맹인에 시간 계열의 마법사라면 분명 그놈이었다.
이제 남은 방법은 두 가지였다. 달려서 성벽을 넘거나 아르민의 시간 왜곡을 뚫거나.
하지만 후자의 방법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게 된다면 도주로하고 동떨어진 장소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아직 마력 제어장치는 가동되지 않았지만 왕이 거주하는 이곳에는 갖가지 마법 트랩이 설치되어 있다. 5년 전부터 동선을 외워 두었기에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지금의 이 길도 찾지 못했을 터였다.
‘달리자. 귀찮다고 숨 안 쉴 거야?’
아리우스는 몸으로 때우는 방법을 택했다. 아르민을 따돌리는 것은 일단 내성 문에 도착하고 생각할 일이다.
카즈라만 벗어나면 세상은 재밌게 돌아갈 것이다.
아르민은 협정을 어겼다. 이 사실이 퍼지면 미친놈 텃밭인 블랙 라인의 마법사들이라도 단합할 수밖에 없다.
한바탕 피바람이 대륙을 덮을 것이다.
‘그건 그것대로 재미있겠지만…….’
혼탁한 세상보다도 아리우스를 매혹시키는 생각은 거핀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학자들이 전 세계를 뒤져도 찾지 못했던 것이 한 소년의 심층에 있었다.
인과의 수레바퀴 (2)
‘어떻게 된 거지? 대천사 이카엘 그리고 거핀. 둘 사이에 무언가 연관이 있는 걸까? 아니면 단순한 우연의 일치?’
리셋과 관련이 있는 건 확실했다. 왕성을 벗어나면 거기에 대해 연구를 해 봐야겠다.
리셋이 사실이라면 또 다른 사람의 심층에도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닥치는 대로 납치해서 해부할 것이다.
내성 문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부터 속도를 늦췄다. 성벽 위로 횃불을 든 경비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리우스는 조심스럽게 플리커를 시도했다. 파짓 소리를 내며 사라진 그가 30센티미터 앞에 나타났다. 시간 왜곡이 사라졌다.
‘따돌린 것인가?’
아르민은 식품 저장고에서 제법 시간을 보냈으니 자신의 정확한 위치를 찾기는 힘들 터였다. 스피릿 존을 확장시켜 반경 전체를 왜곡시키는 게 유일한 방법.
게다가 그의 시간선이 짧았던 것을 감안하면 이미 벗어났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하지만 왠지 찝찝하단 말이야.”
아리우스는 경비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폈다.
2분 정도 경계망에 공백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플리커로 벽을 뚫고 나가면 모든 게 끝이었다.
‘엿이나 먹어라. 지긋지긋한 카즈라.’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시나?”
아리우스의 달리기가 우뚝 멈췄다.
목소리는 뒤에서 들렸다. 기척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라면 상당한 실력자였다.
‘빌어먹을!’
아리우스는 지루할 정도로 느리게 돌아섰다. 서투르게 무언가를 하려고 했다가는 목이 떨어져 나갈 터였다.
카즈라의 경호대장, 리트니 워커가 장검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야수처럼 웃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군.’
하필이면 저 남자라니.
카즈라는 마법력이 약하지만 검술 수준은 떨어지는 편이 아니다. 더군다나 워커는 대마법사전의 정석에 가장 충실한 검사였다.
검사가 마법사를 상대하는 최고의 전략은 ‘마법을 쓰기 전에 베어라’이다. 그리고 워커는 카즈라에서 그것을 가장 잘 수행하는 검사였다. 그가 집필한 궁중 검술 초급에서 읽은 내용이기 때문이다.
워커는 장검을 땅에 대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돌렸음에도 아리우스는 움직이지 못했다. 마치 워커의 신경이 날아와서 자신을 올가미처럼 묶고 있는 듯했다.
“사람이 돌아다닐 시간은 아닌데 말이지. 이런 날은 술집도 문이 닫거든.”
“하하! 급한 약속이 생겨서요. 그나저나 경호대장님은 무슨 일이시죠? 순찰인가요?”
“크크, 이거 왜 이래, 선수들끼리?”
워커의 눈동자가 야행성 짐승의 것처럼 빛을 뿜었다.
“너, 도굴꾼이지? 마도7걸의 아리우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아리우스라는 이름이 어디 한둘인가요?”
워커는 테라제의 파벌도, 오르캄프의 파벌도 아니었다. 오로지 왕국의 번영을 위해 일하는 자였다.
그는 오래전부터 아리우스를 추적해 왔다.
마도7걸이라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마법력이 약한 카즈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 테니까. 하지만 왕국을 어지럽힌다면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난폭한 왕보다 무서운 게 뭔지 알아? 바로 간신이지. 선택권을 주마. 순순히 붙잡히든가, 내 검에 둘로 쪼개지든가.”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 싶더라니.”
본색을 드러낸 아리우스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고 행동한다면 워커 또한 움직이지 않는다.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얻은 지혜였다.
순간 이동을 장착한 마법사가 검사에게서 도망치지 못하는 이유는 발동까지 걸리는 인간적인 시간 때문이다.
일단 마법이 발동되면 검사는 마법사를 따라잡을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현상만큼은 스키마 고수의 감각이 마법사를 훨씬 상회했다.
전지가 장착되는 순간을 검사가 어떻게 포착하는지는 마법사에게 여전히 미스터리다. 검사의 말을 들어 보면 기질이 변하는 게 느껴진다고 하니 마법사의 입장에서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할 뿐이었다.
아리우스는 워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워커의 입장에서는 일반인이 노려보는 것이나 다를 게 없겠지만, 그래도 하바리 마법사는 아닌지라 나름 얻은 정보가 있었다. 워커의 기세가 마치 폭발 일보 직전의 화산 같다는 것이다.
아리우스는 허탈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짜증 나.”
쾅! 하고 아리우스가 서 있던 자리에 장검이 박혔다. 마치 검보다 늦게 따라온 것처럼 수직 베기의 마무리 자세를 취한 워커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런 염병할……!”
아리우스는 없었다. 반 템포 늦었다.
아니, 그것도 확신할 수 없다. 분명 타이밍은 정확했기 때문이다.
인지의 속도, 감각의 속도, 신경의 속도, 행동의 속도. 모든 게 상대를 초월했다. 단언컨대 아리우스는 자신의 움직임을 보지도 못했다. 아마도 인간이 느끼는 시간과 모기가 느끼는 시간만큼의 격차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도망친 거지?’
우선 이동 계열의 마법은 아니다. 그렇다고 플리커도 아니었다. 그냥 사라져 버렸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투명 마법 인비저빌러티? 설령 그렇더라도 캐스팅 속도가 빨라진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가능성이었기에 워커는 주위를 살폈다.
“대장님! 무슨 일입니까?”
경비들이 파공음을 듣고 달려왔다.
“지금부터 아리우스를 찾는다. 내성 경계 강화하고 대기 병력 전부 집합시켜.”
“아, 아리우스요? 전하의 기술 고문 아닙니까?”
“내란 선동죄다. 시간을 끌면 더 어려워지니 빨리빨리 움직여.”
경비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워커는 부하들의 동선을 관찰하다가 숲으로 들어갔다. 투명 마법을 시전했다면 어딘가에 흔적이 남아 있을 터였다.
모두가 떠난 자리에 플리커 마법이 시전되었다. 마치 유령처럼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르민이었다.
“아포토시스. 합리적인 판단이군.”
아포토시스는 미소 공간의 스케일 마법 중에서도 가장 난이도가 높다고 알려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정신으로 다이빙하는 마법이기 때문이다.
육체가 정신으로 들어가면 생각과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개념체가 되어 버린다. 감정도 없고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아리우스가 자력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아주 희박했다.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분명 죽는 것보다는 낫다.
마법사라면 회심의 기술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법.
실제로 워커의 반응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하지만 아포토시스는 스피릿 존의 되먹임이기에 다른 마법에 비해 캐스팅 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르민이 시간 왜곡을 해제한 이유는 아리우스가 워커에게 붙잡혔을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죽는다면 상관없지만 쓸데없이 붙잡혀서 이런저런 일을 발설하면 상황이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걱정할 필요가 없겠군.’
돌아올 방법조차 없이 아포토시스를 시도했을 리는 없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서 누군가와 협약을 맺었거나, 혹은 어떤 장치를 마련해 두었을 것이다.
1년 혹은 10년. 어쩌면 100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 돌아온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조력자 쪽이 가능성이 높군. 거기서부터 조사를 해 봐야겠어.’
가장 유력한 후보는 마도7걸이었다.
멤버들의 면면을 떠올린 아르민은 인상을 찡그렸다. 아리우스는 점잖은 축에 속할 정도로 정신이 돌아 버린 인간들이었다.
‘슬슬 출발해 볼까.’
아르민은 왕성을 돌아보았다.
조금 더 시로네의 곁을 지켜 주고 싶지만 이제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케이라에게 돌아가야 했다.
플리커 마법을 시전하자 파짓 소리를 내며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공터에 워커의 고함 소리가 아련하게 넘어왔다.
***
제노거는 지하의 비상 탈출구를 달리고 있었다.
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함정이 발동되었다. 바닥이 열리는 함정, 화살이 날아오는 함정, 못을 박은 통나무가 그네처럼 날아오는 함정.
제노거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상태로 함정들을 피해 나갔다. 바닥이 열리면 뛰어넘었고, 못을 박은 통나무는 입에서 뿜어지는 거미줄 그물에 걸려 중간 지점에서 멈추었다.
“하아! 하아!”
지하 미로의 모퉁이에 등을 기댄 그는 짧은 휴식을 취했다. 천장을 올려다보는 그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지온을 살릴 수 없었다. 그렇기에 도망쳤다. 임무에 실패한 암살자를 테라제는 살려 두지 않을 터였다.
자신의 죽음뿐이라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지만, 테라제의 지원에 모든 걸 의지하는 스파투르 일족마저 사라지게 된다.
‘도망쳐야 해. 그리고 의지할 세력을 찾아야 해.’
천 년이나 암살을 해 온 일족이다. 테라제의 성에 차지 않을지는 몰라도 그들을 필요로 하는 세력은 얼마든지 있었다.
제노거는 밑바닥의 기력만을 회복하고 다시 미로를 달렸다. 어떻게든 동이 트기 전까지 성을 빠져나가야 했다.
바닥이 여닫이문처럼 덜컹 아래로 열렸다. 거미의 감각으로 떨어지기 직전에 도약한 그는 천장에 거미줄을 붙이고 포물선으로 비행했다. 동시에 눈앞으로 한 자루의 단도가 날아들었다.
“크윽!”
진자 운동을 하는 중에 허리를 틀어 단도를 피했다.
사람이 던지도록 되어 있는 물건이건만 단도는 마치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가 벽에 박혔다.
바닥에 착지한 제노거는 곧바로 경계 태세를 취했다. 품속이 부풀면서 4개의 팔이 튀어나오고 좌우 관자놀이에 6개의 눈동자가 뜨였다.
“누구냐? 나와라.”
어둠에 가려진 모퉁이에서 아담한 체구의 여성이 돌아섰다.
앞머리가 일자로 정돈된 흑색의 단발머리. 감은 눈을 살며시 찡그린 얼굴이었고, 암살자답지 않게 치마폭이 좁은 일자형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마치 옷이 아니라 사람을 감싸는 포장지 같았다.
다소곳이 모은 두 손은 단도의 칼집과 손잡이를 잡고 있었고 날이 반쯤 빠져나온 상태였다.
“히트맨인가? 누가 사주했지?”
“이승을 떠날 자에게 말해 줄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맑게 하는 청량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제노거의 귀를 속일 수는 없었다. 엄청난 훈련으로 변조된 목소리다.
“크크, 하긴…… 우리 사는 게 다 그렇지.”
제노거의 말이 끝나는 순간 단도가 날아왔다.
천장으로 도약한 제노거는 사방에 거미줄을 뿌렸다. 그렇게 환경을 자신의 것으로 바꾼 다음 손가락 굵기의 강선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여자의 모습이 여러 개로 보이는가 싶더니 마치 레일을 타고 움직이듯 순식간에 그의 등 뒤로 돌아들어 갔다.
‘독특한 보법이군.’
폭이 좁은 일자 치마는 아무리 생각해도 전투에 적합하지 않다. 최대한 다리를 벌려도 정상인의 절반 정도의 보폭밖에 내지 못할 것이다. 발가락 사이에 끼우는 이상한 샌들도 거슬렸다.
하지만 그녀의 걷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빨랐다. 게다가 가속도 구간이 엄청나게 조밀해서, 마치 잔상을 쫓는 것 같은 기묘한 무브먼트였다.
처음에는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지만 짧은 거리가 폭발적으로 더해지면서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참으로 까다롭다. 평범한 가속도 운동이 아니라서 타이밍을 정확히 잴 수가 없었다.
‘리듬감이 완전히 다르군.’
이것으로 먹고사는 놈일 것이다.
분류를 해 보자면 서커스 쪽이었다. 운동 능력을 이용하여 상대를 기만하는 전술을 사용하는 히트맨의 총칭.
언뜻 누구일까라는 호기심이 스쳤지만 찰나의 생각일 뿐이었다. 현역에서 뛰는 암살자가 이름이 알려진다는 것은 볼 장 다 봤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얘기니까.
제노거는 거미줄로 장막을 쳐서 접근을 차단했다. 리듬을 익히자 조금씩 동선이 예측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전세가 역전되었다.
제노거는 거미처럼 벽과 벽 사이를 뛰어다니며 여자에게 접근했다.
엇박자의 리듬으로 단도가 날아왔지만 이제는 흔들리지 않았다. 마지막 단도는 목을 뒤틀면서 입으로 잡아냈다.
“크크크! 서커스치고는 제법이었다.”
여자의 품으로 파고든 제노거는 상단부의 팔을 역관절로 들어 올렸다. 어깨를 타고 넘어온 손으로 여자의 얼굴을 붙잡고 그대로 밀고 들어가 벽에 뒤통수를 처박았다.
쿵 하는 소리에 이어 여자의 얼굴에 쩍 하고 실금이 갔다. 도자기로 만든 피부의 파편이 바닥에 떨어졌다.
제노거는 왼쪽 3개의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한 손으로 그녀의 목을 조이고 아래에 있는 손을 치마 속으로 집어넣었다. 성기는 없었다.
중간에 달린 손이 그녀의 젖가슴을 붙잡고 쥐어뜯었다. 실크 재질의 옷이 뜯겨 나가면서 지방과 흡사한 뭉클한 쿠션의 감촉이 느껴졌다.
맨살이 드러난 그녀의 가슴은 납작했고, 아래로는 앙상한 갈비뼈가 드러나 있었다.
인과의 수레바퀴 (3)
“이럴 줄 알았지.”
여자가 벗어나려는 듯 고개를 내밀자 제노거는 그녀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벽에 처박았다.
둔탁한 소리가 연거푸 터지면서 얼굴을 가린 도자기 피부가 전부 떨어져 나갔다.
흉측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아니, 외관상으로는 성별을 구별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