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257
어쨌거나 일단 목숨을 건졌으니 이제부터는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해야 했다. 당장이라도 짐을 싸서 돌아가고 싶지만 현재 카즈라는 행정 통치권이 카샨에 넘어간 상태였다.
내정간섭은 국치에 해당하는 일이다. 그런 만큼 귀족들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지만 허울뿐인 관계라도 일단 테라제가 오르캄프의 부인이었기에 대놓고 반기를 들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결국 친자 확인이 끝나는 내일까지는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고작 하루 차이지만 적국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건 정말이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카즈라의 귀족들은 더 이상 행동하지 못할 것이라고 카샨의 의료진이 귀띔해 주었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엘리자가 이대로 참을 것인가가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올리나는 여왕의 뺨을 때렸다. 평민이 왕족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을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올리나는 시간을 되돌려도 똑같이 했을 테지만, 무사히 풀려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여느 때보다 길었던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밤을 새서 시로네를 지킨 오젠트 가문의 수행원들은 하나같이 눈 밑이 퀭했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카샨의 의료진이 그냥 한 소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시로네의 친자 확인 검사가 나오는 날이기에 카즈라의 귀족들의 시선은 재판부로 쏠렸다.
내성 정원에 전시된 금고가 회수되었다. 공개 감시 체제를 채택했기에 전시 기간 중에 금고에 접근한 사람은 없었다.
연금술사들이 깔끔하게 맞물린 캐스피를 개봉했다. 누군가 장난을 칠 생각이라면 지금이 유일한 기회겠지만 카샨에 통제권이 넘어간 이상 어느 누구도 접근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연금술사들은 결과를 확인하고 카샨의 대신에게 검사를 맡은 다음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공표에 앞서 왕의 아파트로 미리 서신을 보냈다.
엘리자는 이틀 동안 침대에서 몸살을 앓았다.
시로네가 그녀를 죽이려고 했던 일은 충격이었다. 게다가 올리나에게 맞은 뺨은 아직도 아팠다. 간밤에는 열이 40도까지 올라서 한숨도 자지 못한 상태였다.
아내를 돌보는 오르캄프의 정신도 정상은 아니었다.
내정간섭에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고, 유일한 희망이었던 시로네는 테라제의 비호 아래에 있다. 이제 믿을 건 검사 결과뿐이었다. 시로네가 친자식인 것만 확인된다면 나름의 발언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시로네가 필요해. 시로네가 필요하단 말이야.’
때마침 내무대신이 연금술부서에서 올라온 결재 서류를 들고 찾아왔다.
“전하, 결과가 나왔습니다.”
오르캄프보다 엘리자가 먼저 달려가 서류를 낚아챘다. 긴장한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침대에 주저앉은 그녀는 서류철을 개봉했다. 연금술부서의 인장이 찍힌 한 장의 공문이 담겨 있었다.
엘리자의 손에 닿은 종이가 푸들푸들 떨리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공문에 적힌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마침내 결과가 눈에 들어왔을 때, 그녀의 뺨을 타고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공문을 구겨지도록 끌어안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아, 우리 아들…….”
***
올리나는 밤을 새워 시로네를 간호했다. 정성이 통했는지 밤새 들끓던 열이 아침이 되자 조금 잡혔다. 에이미는 안쓰럽게 시로네를 쳐다보았다.
카샨의 의료진은 24시간 안에 깨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하지만 하루가 넘어가면 그다음부터는 언제 의식을 차릴지 짐작할 수 없다고 했다.
하루나 이틀 정도 기다리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에서는 1년 이상 식물인간으로 지내야 할 수도 있다.
‘하긴, 말도 안 되는 마법을 시전했으니.’
심층 1단계의 괴물이 시로네의 정신을 할퀴고, 찢고, 뜯어내 버렸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의 이불을 찢어 성인의 몸을 덮은 것과 흡사했다. 시로네의 빠른 성장 속도를 감안하더라도 최소 5년 이상은 단련을 해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였다.
정신에 얼마나 큰 충격이 가해졌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회복할 수 있을까?
정신의 내구력이 되돌아올 탄성력을 잃어버렸다면 영원히 폐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아,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시로네가 그럴 리가 없어. 시로네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레이나가 문을 열어 주자 엘리자의 시녀가 고개를 숙였다.
에이미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했다.
“여왕님께서 올리나 씨를 찾으십니다.”
올리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로네의 이마의 물수건을 새것으로 갈아 준 그녀는 아들의 볼에 입맞춤을 하고 나서야 나설 채비를 했다.
“가죠. 안내하세요.”
빈센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따라왔다.
“여보, 나랑 같이 갑시다.”
“아뇨. 여왕님이 부른 사람은 저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다녀올게요.”
올리나에게도 엘리자를 독대해야 하는 이유는 있었다.
왕족폭행죄가 성립된다면 그녀만 사형을 당하지는 않을 터였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담판을 지어야 했다.
그랜드 홀에는 여전히 사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건물 쓰레기는 치워졌으나 붕괴된 바닥은 판자를 깔아서 임시로 보수했고, 끊어진 기둥들은 손쓸 방도조차 찾지 못한 듯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왕과 왕비의 의복은 어느 때보다 화려했다. 카샨에 통치권을 빼앗긴 굴욕을 감추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라는 것을 올리나는 느낄 수 있었다.
거만하게 올리나를 내려다보던 엘리자는 그녀가 시선을 피하지 않자 당혹감에 휩싸였다.
처음 만났을 때는 겁에 질려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던 여인이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일국의 여왕에게 눈을 부라리는 것인가? 어머니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입장이 바뀌었다면…… 나도 그녀처럼 할 수 있을까?’
세상 모든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으면서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모순적인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나에게 한 짓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올리나는 아주 작게 코웃음을 쳤다.
오르캄프는 코에 먼지가 들어갔나 했지만, 여자인 엘리자는 코웃음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내 생에 가장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당신의 따귀를 한 대밖에 때리지 못한 일이오.
“내가 한심한 어머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감히 남을 평가할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제 자식이 잘못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올리나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여자들 사이에서 오가는 고밀도의 신경전을 오르캄프는 감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엘리자는 시로네가 폭주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그래요. 무서웠던 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시로네는 나를 공격했어요. 가까이 갔다면 죽었을지도 모르죠. 당신은 마치 나보다 더 대단한 일을 해낸 것처럼 행동하는데, 만약 나와 같은 상황이었으면 어땠을 것 같나요?”
“그래도 시로네에게 갔을 겁니다.”
“왜요? 당신이 어머니라서?”
“제 아이가 칼에 찔려 있었으니까요.”
인과의 수레바퀴 (5)
엘리자의 비소가 얼어붙었다.
“여왕님, 저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다만 유일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은 피투성이 아들의 배에 꽂힌 칼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고, 결국 여왕님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결례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엘리자는 의자 팔걸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흥! 뻔뻔하군요! 하긴, 평민들은 당신이 옳다고 할지도 모르죠! 그들이 가진 거라고는 감정뿐이니까! 하지만 내 생각은 다릅니다! 당신은 아들을 패륜아로 만들 뻔했어요!”
“시로네가 선택한 일이라면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받아들여야 한다? 참으로 편리한 사고방식이로군요. 아니, 비겁해요. 시로네는 저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시로네를 비판할 권리조차 없다는 말입니까?”
“부모에게 그럴 권리는 없습니다.”
엘리자가 이를 뿌드득 갈며 일어섰다. 당장이라도 참수형을 내릴 기세였다.
올리나는 개의치 않고 시선을 내리깐 채로 말을 이어 나갔다.
“부모에게는, 자식이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도록 가르칠 십수 년의 시간이 있을 뿐입니다.”
엘리자의 머리가 멍해졌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싶지만 그저 백지처럼 하얘진 생각으로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여왕님, 저는 18년이나 시로네의 곁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와 아들이 무슨 짓을 저지른다고 해도 모든 게 저의 불찰일 뿐입니다. 부디 저를 벌해 주십시오.”
부모는 자식의 결정을 거부할 권리가 없다. 하지만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수없이 많은 시간을 부여받는다.
엘리자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에게는 없었다. 자식을 버리는 순간, 그 소중한 시간도 함께 사라졌다.
그랜드 홀의 정적을 깨고 근위기사가 일렀다.
“전하, 시로네가 알현을 청합니다.”
올리나가 놀란 표정으로 문을 돌아보았다.
오르캄프도 시로네의 의식이 언제 회복될지는 모른다고 들었던 참이다. 무언가를 생각하던 그가 근엄하게 지시를 내렸다.
“들라 하라.”
초췌한 얼굴의 시로네가 붉은 카펫을 따라 들어왔다. 뒤편에는 에이미와 레이나, 빈센트가 따라붙었다. 올리나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빈센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무슨 일이냐?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구나. 급한 일이 아니라면 휴식을 취한 다음에 얘기를 나누어도 될 것이다.”
시로네는 대답을 아꼈다. 의식이 깨어나자마자 달려온 참이라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오르캄프에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간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지금 당장…… 왕성을 떠나겠습니다.”
에이미와 레이나, 부모님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을 뜨자마자 오르캄프를 만나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을 때도 이렇게 빨리 귀향 통보를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곳에 와서 깨달은 게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이후로, 제 옆에 계신 부모님 외에 어떤 부모도 저에게는 없습니다.”
시로네가 평생을 걸고 다짐하는 약속이었다. 또한 카즈라와의 모든 인연을 끊겠다는 선포이기도 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오르캄프가 입을 열었다.
“허락한다.”
이번에는 모두의 시선이 오르캄프에게 향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시로네와 눈을 맞추고 있을 뿐이었다.
“레이나 누나, 마차를 준비해 줘요. 저는 방으로 돌아가서 짐부터 챙길게요.”
그랜드 홀을 빠져나가는 동안 시로네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이곳을 지긋지긋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레이나는 엘리자의 눈치를 보았다. 오르캄프의 허락이 떨어진 김에 올리나 건도 우야무야 넘겨 볼 생각이었다.
간드러진 눈웃음으로 작별 인사를 한 그녀가 일행을 데리고 돌아서려는데 엘리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등을 찔렀다.
“어딜 가죠? 아직 우리끼리는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걸로 아는데요.”
올리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솔직히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지만 이제 와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당신을 부른 이유는 어떤 형벌을 내릴지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사형을 시키려고 했는데, 그래서는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더군요. 그래서 처음에는 눈알을 뽑아서 장님을 만들거나 혓바닥을 뽑아서 벙어리로 만들려고 했어요.”
빈센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만약 그런 짓을 한다면 이곳에서 뼈를 묻는 한이 있어도 올리나를 데리고 도망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흡족하지는 않더군요. 그래서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문득 떠올랐어요. 그건 정말로 완벽한 형벌이었죠. 바로…….”
모두 침을 꿀꺽 삼키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엘리자는 졸린 눈으로 그들의 반응을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그냥 보내 주는 거예요.”
“……네?”
에이미가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다른 사람도 의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해코지를 한다면 시로네는 평생 당신만을 바라보겠죠. 그게 찝찝했어요. 그래서 보내 주려고 했죠. 당신과, 일국의 왕비인 친엄마를 평생 저울질하며 살아가라고. 죽기 직전까지 나를 부러워하고, 질투하라고.”
모두 할 말을 잃었다. 형벌의 경중을 떠나서 표독스러운 사고방식이었다.
무시무시한 살의를 뿜어내던 엘리자는 금세 허탈한 표정을 짓더니 품속을 뒤졌다.
“하지만 만의 하나, 정말 그럴 리는 없겠지만, 당신이 나를 설득시킨다면 이것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당신이 이겼네요.”
구겨진 종이가 엘리자의 손을 떠나 바닥을 굴렀다.
올리나는 그것을 들고 천천히 펼쳤다. 오르캄프와 시로네의 친자 확인 검사 결과가 나온 공문이었다. 시로네에게 글을 가르친 그녀였기에 어려운 용어를 빼면 대부분 읽을 수 있었다.
복잡한 실험 내용은 빠르게 넘기고 가장 중요한 결과에 눈길을 돌렸다. 기다릴 수 없는 답답함에 모두의 시선이 공문으로 향했다.
의뢰인1과 2의 혈액 샘플을 옥스타민에 녹여 3일 동안 진공상태로 보관한 결과 색, 농도, 침전물에 대한 변화가 발견되지 않음. 따라서 의뢰인1(오르캄프)과 의뢰인2(시로네)는 옥스타민 음성반응 결과에 따라 생물학적으로 부자 관계가 아님을 근거함.
“세상에…….”
오르캄프와 시로네는 부자 관계가 아니었다. 생물학적으로 완벽한 남남이었던 것이다.
에이미는 오르캄프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그가 심드렁했던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나도 모르지. 알 필요도 없고. 조작되었을 가능성은 0퍼센트니 안심해도 좋다. 어쨌거나 내 아들이 아니니 공문은 가져가도록 하라. 필요할지는 모르겠지만.”
엘리자가 덧붙였다.
“시로네는 아직 몰라요. 진실을 말해 주든 말든 당신의 판단에 맡길게요. 이틀 전의 무례를 생각하면 영원히 시로네의 친엄마로 남아 버리고 싶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을 당신이 대신했다고 생각하고 이번만 용서하겠습니다.”
올리나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한순간 엘리자가 미소를 지은 것 같았다.
“그만 돌아가세요. 시로네는 당신의 아들입니다.”
***
카즈라 왕성의 지하 3층은 내정이 혼란스러웠을 당시 수많은 정치범들이 끌려 들어온 지하 감옥이었다. 그들은 수십 년째 햇빛을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떤 귀족은 자신을 고문한 인간과 결혼했다. 성별은 중요하지 않았다. 성의 장벽을 뛰어넘은 사랑이었고, 생물체 간의 순수한 결합이었다. 적어도 그들의 생각에는.
문제 될 게 무엇이겠는가? 그들에게 세상의 끝은 지하 감옥의 벽일 뿐이다. 그리고 이곳은 인간 사회와 완벽하게 격리된 또 다른 사회였다.
우오린은 고름 냄새로 가득한 흙바닥을 걸었다. 수많은 지하 생물이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좌우로 갈라졌다. 격리된 자들의 일용할 양식이었다.
“우으으으. 우으으으.”
벽에 설치된 문마다 이상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고통 같기도 하고 쾌락 같기도 했다. 울음소리처럼 들리면서도, 왠지 웃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즈라 왕국은 5년째 이곳을 방치하고 있다.
지금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생명으로 전락했지만 누군가는 고문을 이겨 내고 폭탄처럼 위험한 정보를 담은 채 때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괜히 표면으로 끄집어내서 긁어 부스럼을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저 이대로 영원히 썩어 가도록 내버려 두는 게 상책이었다.
우오린은 80년 전에 선대가 읽었던 소설의 내용을 떠올렸다.
주인공은 무려 70년이나 방치된 지하 감옥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그 소설에서는 지하 감옥을 마치 개미 사회처럼 묘사하고 있었다. 여성은 자식을 낳는 역할로 중히 여겼고,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식량으로 쓰이거나 노예가 되어 평생 동안 일을 해야 했다.
주인공은 식량141번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지하 감옥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의 도움으로 노예가 될 수 있었다.
노인은 70년 전 최고 귀족으로, 유일하게 바깥세상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주인공에게 모든 지식을 전해 주었다.
주인공이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왕국에 내란이 발생했다. 지하 감옥이 85년 만에 개방되었고, 세상으로 탈출한 주인공이 내란을 수습하고 왕이 되는 이야기였다.
우오린은 입꼬리를 올렸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지만, 어찌 알겠는가? 지온에게도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생겨서 이곳을 나갈 날이 올지.
식품 저장고에서 지온을 발견했을 당시 그는 아르망의 회복 프로그램에 의지하여 명을 이어 가고 있던 상태였다.
그냥 내버려 두었으면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편이 더 행복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온은 모를 것이다. 자신을 살린 사람이 누구인지. 의식을 되찾자마자 고문을 지시한 사람이 누구인지. 시로네의 정신에서 벌어진 일을 실토하자마자 지하 감옥에 처넣어 버린 사람이 누구인지.
지온은 나무로 얼기설기 짜인 감옥에 주저앉아 있었다.
지하 감옥이 얼마나 비참한 곳인지는 그도 알고 있었다. 밤새도록 울었는지 눈두덩이 부었고,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한 표정이었다.
발소리를 들은 그는 본능적으로 사지를 오므렸다. 그러다가 약한 횃불에 비친 우오린의 얼굴을 보고 금세 화색을 드러내며 목창에 달라붙었다.
“우오린! 여기, 여기야! 나 좀 꺼내 줘!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어떤 이상한 자식들이 나를 고문하더니 이곳에 처넣었어!”
젖 달라는 아이처럼 앵앵거리는 지온의 모습을 보고도 우오린은 일말의 모성애조차 느끼지 못했다.
아들에게는 테라제의 능력이 발현되지 않는다. 자기 복제로 존재하는 그녀에게 아들은 외모만 흡사한 껍데기에 불과했다.
고문을 당한 지온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얻어맞은 부위에 피딱지가 앉았고 눈은 시퍼렇게 멍들었다. 갈비뼈가 부러져서 칭칭 붕대를 감고 있었다.
거동조차 힘든 와중에서도 발악을 하는 걸 보면 지하 감옥이 무섭기는 한 모양이었다.
“꼴이 말이 아니네. 잘나가던 오빠가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야?”
지온은 우오린이 차고 있는 검을 보고 눈을 빛냈다.
검집에 들어간 상태였지만 손잡이 부분은 확실히 이었다. 자신을 탈옥시키려고 가지고 온 게 분명했다.
“제길! 그 자식, 가만 두지 않겠어. 시로네는 아직 왕성에 있겠지? 아니, 상관없어. 내가 찾아가서 죽여 버릴 테니까.”
지온은 아르망을 붙잡기 위해 목창 밖으로 손을 뻗었다.
우오린이 한 걸음을 물러섰다. 지온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싱긋 웃으며 감옥 열쇠를 보여 주었다.
“뭐야? 이미 석방 판결 난 거야? 빨리 말해 줬어야지.”
지온은 자물쇠가 풀리자 기다렸다는 듯 목창을 박차고 감옥을 나섰다. 동시에 우오린이 그의 목을 붙잡고 다시 감옥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컥……!”
벽에 뒤통수를 처박은 지온은 그 상태로 주저앉았다. 우오린이 여전히 목을 조인 채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되느냐, 한심한 인간아.”
“우, 우오린……! 왜 그래……!”
“내가 왜 너를 죽이지 않았는지 알고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