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258
지온은 시로네의 심층 1단계에 도달한 몇 안 되는 인간이다. 이미 많은 것을 그의 입을 통해 들었지만 언젠가는 쓸모가 있을지 모른다.
“네가 본 것, 들은 것, 겪은 것. 어떠한 것도 발설해서는 안 될 것이야. 만약 무언가를 떠올린다면 너의 뇌를 망가뜨리겠다.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면, 너의 사지를 망가뜨리겠다.”
지온은 우오린의 싸늘한 말투에서 깨달았다. 흡사 어머니의 차가운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인과의 수레바퀴 (6)
본능적으로 드는 생각은,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금강무장을 발동하려면 검을 쥐어야 한다. 하지만 아르망의 손잡이는 너무 멀었다.
‘정격조종……!’
지온의 정신파를 받은 아르망이 물소리를 내며 검집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지온의 손에 닿기 전에 우오린이 탁 하고 왼손으로 손잡이를 붙잡았다.
지온은 표독스럽게 우오린을 노려보았다.
그가 알고 있던 여동생이 아니다. 위치를 살피지도 않고 아르망의 손잡이를 붙잡은 것도 그렇지만, 정격조종 상태의 아르망을 힘으로 고정시키고 있는 완력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오린은 아르망을 역수로 쥐고 있는 팔을 천천히 움직였다. 지온이 재차 명령을 내렸지만 아르망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부르르 진동할 뿐이었다.
칼날이 지온의 목으로 다가오자 진동음이 선명하게 들렸다. 소매 밖으로 빠져나온 여동생의 손목은 평범한 소녀처럼 가늘었다. 검술을 익혔다는 이야기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힘을?’
우오린의 얼굴은 힘을 주고 있다는 느낌조차 없이 담담했다.
다만 머릿속에서는 강력한 의지의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천국에서는 화신술이라 칭하는 기술. 또한 이 세계의 검사들은 이러한 현상을 일컬어 신적초월이라 불렀다.
우오린은 지온의 목을 향해 천천히 검을 움직였다. 신적초월이라고 해도 육체가 받쳐 주지 않으면 효력이 떨어지기 마련이지만, 지온의 나약한 정신력쯤이야 문제가 없었다.
“너는 이 검의 주인이 될 자격이 없어.”
아르망이 의식과 반대로 움직이자 지온은 정신이 몽롱해졌다.
마침내 칼날이 목에 닿았다. 진동이 더욱 강해지면서 피부가 벌어졌다.
“계약을 해지해라. 그러지 않으면 목이 잘릴 것이다.”
날이 닿는 곳이 빙수가 흐르는 듯 차가웠다. 그러다가 이내 불이 붙은 듯 뜨거워지자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계, 계약 해제!”
지온의 외침과 동시에 아르망의 진동이 멈췄다.
우오린은 그제야 지온의 목을 풀어 주고 아르망을 검집에 꽂았다.
“너에게 주기에는 아까운 검이다. 좋은 곳에 쓰도록 하마.”
벽에 처박힌 지온이 손바닥 자국이 남은 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 도대체 누구야?”
“내 말을 새겨듣는 게 좋을 것이다, 필멸의 존재여.”
그 말을 남겨 두고 우오린은 감옥을 나섰다.
문은 열려 있었으나 지온은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가 모습을 감추자 비로소 현실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그녀가 풀어 주기 전까지는 영원히 지하 감옥에서 썩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대한 막막함이 닥치면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다가 천천히 옆으로 쓰러지더니, 구석에 머리를 처박고 오들오들 떨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
우오린은 아르망을 검집에 넣고 지하 감옥을 빠져나왔다.
전투적인 은빛 검집은 미리부터 장인에게 지시해 구비해 둔 것이다. 멋스럽기는 황금이 최고지만 실전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선택지에서 배제했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성문을 나서자 우오린의 얼굴에서 테라제의 흔적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어느새 풋풋한 14세의 소녀로 돌아간 그녀는 활짝 웃으며 마차를 향해 달려갔다.
“시로네 오빠!”
마치에 짐을 싣고 있던 시로네는 고개를 돌렸다. 우오린이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문득 머릿속의 신경이 어떤 지점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하지만 묘하게도 텅 비어있는 공간에 불과했다. 잠시 눈을 깜박이던 그는 홀가분한 미소를 지었다. 오르캄프와는 칼같이 연을 끊고 나오는 길이지만 그녀는 한 번쯤 다시 만나고 싶었다.
테라제의 직속 호위군 풍장이 나타나 의식을 잃은 자신을 데려갔다고 들었다. 물어볼 것도 없이 우오린이 힘을 써 준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준 가 아니었다면 제노거의 일격을 피하지 못하고 이미 시체가 되어 있을 터였다.
“지금 출발하는 거예요?”
“응. 그동안 고마웠어. 사실 인사도 못 하고 떠나는 것 같아서 마음에 걸렸는데.”
“헤헤, 우리 사이에 인사는요. 그래도 언젠가 다시 볼 수 있겠죠?”
시로네는 난감한 듯 눈썹을 긁었다.
조금 전까지 중태에 빠져 있었지만 다행히도 정신에 크게 이상은 없었다. 마법사의 인생을 계속 이어 나간다면 우오린은 피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간절히 원하던 자유를 얻은 지금으로서는 다시 얽히는 일은 없었으면 싶었다.
“아직도 저에게 서운한 거예요?”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우린 너무 달라.”
우오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왕성에서 그런 일을 겪었다면 누구라도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하지만 미래의 낭군으로 점찍은 사람에게 들으니 서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친구라고 생각하시죠?”
“물론이지. 아니, 은인이야. 내 목숨을 구해 줬잖아.”
“그러면 됐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를 귀찮게 하는 일은 다시는 없을 테니까.”
시로네는 말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있었다. 그것 또한 우오린이 가르쳐 준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 주는 배려만큼은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너도 잘 지내.”
“아! 그리고 이거…….”
우오린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내밀었다.
한눈에도 아르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영문을 몰라서 멀뚱히 쳐다보는데 우오린이 말했다.
“오빠에게 선물로 줄게요. 지온 오빠는 오랫동안 감옥에서 나오지 못할 테니까요.”
지온이 살아 있다는 건 레이나를 통해 들었다. 자초지종은 모르지만 혈족의 권위를 더럽힌 죄로 여황 테라제가 직접 감옥에 처넣었다고 한다.
지온의 갤러리에서 봤을 때처럼 아르망이 유혹의 빛을 발산했다. 하지만 시로네는 선뜻 받을 수 없었다. 두 번 다시 왕족에게 빚을 지는 일은 없었으면 싶었다.
에이미라고 그 심정을 모르지 않았다. 테라제, 아니 카즈라라는 말만 들어도 골이 아팠다. 하지만 다른 물건도 아닌 S급 오브제가 아닌가.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걸 마다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시로네, 주는 걸 거부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거야.”
시로네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돌아보자 에이미는 혀를 내밀고 한 걸음 물러섰다.
우오린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검을 시로네의 가슴으로 떠넘겼다.
“받아도 돼요. 카즈라 왕국을 대표해서 보답을 하는 거예요. 왕성의 사정 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으니까요. 절대로 빚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게요.”
우오린도 이번만큼은 진심이었다. 이것은 빚이 아니다. 일종의 혼수라고 생각해 두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여전히 갈등이 되는 건 너무 과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S급 오브제는 왕족들조차 손에 쥐기 힘든 물건이다. 게다가 아르망이라면 단순히 유희에 그치는 게 아니라 전투에 특화되어 있는 물건이 아닌가? 경매에 내놓아도 시가가 얼마나 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정말 받아도 될지 모르겠어. 무엇보다 나는 검사가 아닌걸. 나보다는 이 물건이 더 필요한 사람에게 가는 게 좋지 않을까?”
“후후, 아르망의 진가를 아직 모르네요. 일단 계약을 해 보세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해제할 수 있으니까요.”
시로네는 그제야 아르망을 받았다. 하지만 계약식 오브제를 처음 접해 본지라 어떤 식으로 계약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거 뭐…… 어떻게 하는 거지?”
“마검을 양손으로 잡고 수직으로 세운 다음 이렇게 말하면 돼요. 나 위대한 마법사 시로네가 명하노니 아르망은 내 명을 받들라.”
시로네는 황당한 표정으로 우오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머쓱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냥 이라고 말하면 돼요.”
시로네는 아르망을 뽑아 들고 이라고 외쳤다. 보석이 빛을 발하자 웅장한 떨림이 손바닥으로 전달되었다.
“그런데 계약이 된 건가?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은 사용자와 의식을 공유한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시로네는 조금 전과 별다른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아직 아르망을 개시하지 않아서 그래요. 정격조종은 금강무장으로 사용자의 뇌를 카피해야 가능하거든요. 금강무장이라고 말해 보세요.”
금강무장의 상태를 눈앞에서 지켜본 적이 있는 에이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칼날이 분해되어 사용자를 집어삼키는 박력도 대단하지만 검이라고는 다뤄 보지도 못한 지온을 일순 전사로 바꾼 능력치 상승도 주목할 만했다.
“금강무장.”
아르망의 칼날이 을씨년스러운 골조로 열리면서 시로네를 얼굴부터 집어삼켰다. 지온의 경우 순식간에 변신이 되었지만 최초 사용자에게만큼은 시간이 제법 걸렸다.
금속 뼈대가 근육 라인을 타고 나선형으로 달라붙었다. 그렇게 골조만 완성된 상태에서 시로네의 중추신경으로 가느다란 침이 들어갔다.
“헉!”
-신규 사용자 대뇌 스캔. 분석. 정신 활동 특화. 언어적 인지능력 활성화.
금관을 타고 전해지는 듯한 웅장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이어서 시로네의 몸을 단단하게 조이고 있는 골조에서 유기질이 풍만하게 새어 나왔다.
보고 있던 에이미는 아르망이 갑옷이 아닌 로브로 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가벼운 뼈 재질의 계단식 건틀렛이 양쪽 손목에 착용되고 후드로 변한 유기질이 얼굴을 덮어씌웠다. 마지막으로 망토가 물줄기처럼 퍼져 나와 펄럭거렸다.
-신경 네트워크 활성화. 집중점 감지. 베타파 이완. 세타파 극대화. 시간 분할 섹션 탐색 중. 활용 가능. 물체화 가능성 제안. 승인. 엑소브레인 생성. 개념어 검색. 외外.
오른쪽 건틀렛의 가죽에 압박감이 전해졌다. 손바닥을 들여다보자 볼록한 반구형의 유리가 박혀 있었다. 그곳에서 빛이 뿜어지면서 허공에 유리질이 모였다.
완성된 보랏빛의 수정구가 시로네의 주위를 빠르게 한 바퀴 휘돌았다. 시로네의 시분할 능력을 특화시킨 또 하나의 두뇌, 외外라는 수정구였다.
“우와…….”
시로네를 지켜보던 사람들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후드를 둘러쓴 시로네는 완벽한 프로 마법사였다. 로브를 이루는 유기질이 사막 색상을 띠고 있어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오히려 강해 보이는 건 이쪽이었다.
자신의 외모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는 시로네는 그저 체내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놀라고 있었다. 육체 능력도 상승했지만 머리가 상쾌하게 맑았다. 가장 컨디션이 좋았을 때보다 최소 2배 이상의 청량감이었다.
무엇보다 마도 무구 외가 마음에 쏙 들었다. 똑같은 뇌가 복제된 것이라서 슬롯은 여전히 하나지만, 시분할의 속도는 비약적으로 상승할 수 있었다. 게다가 패시브 마법을 운용할 때만큼은 더블 스피릿 존과 같다고 해도 무방했다.
“정말 대단하다…….”
우오린이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망은 사용자의 정보를 토대로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극대화시켜요. 이제 금강무장을 해제하고 정격조종을 해 보세요.”
시로네가 해제를 떠올리자 금강무장이 해체되었다.
매끈한 검으로 돌아온 아르망이 시로네의 생각에 따라 허공을 비행했다. 이미 금강무장을 통해 정신 통합을 이루었기에 의식을 공유하는 느낌이 이질적이지 않았다.
아르망은 저공을 비행하다가 땅에 떨어진 검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시로네의 옆구리로 날아와 마치 허리끈을 맨 것처럼 고정되었다. 이 또한 마법사의 몸에 일말의 무게도 싣지 않으려는 아르망의 안배였다.
“고마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과분한데. S급 오브제잖아.”
“어휴, 오빠는 정말 못 말리겠네요. 하긴, 그래서 좋아하는 것이지만.”
우오린이 살짝 떠보았으나 시로네는 특별한 의미를 못 느낀 듯했다.
아직은 무리인가? 하지만 언젠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시로네의 팔을 붙잡고 부담을 덜어 주었다.
“괜찮아요. 오브제라는 건 능력의 효율만큼 주인도 잘 만나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앞으로 오빠가 잘 관리해 주세요. 그럼 다음에 또 봐요.”
우오린은 그렇게 말하고 먼저 몸을 돌려 멀어져 갔다. 시로네의 성격상 매몰차게 돌아서지 않으면 하루가 지나도록 떠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시로네는 마지막까지 배려해 준 우오린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마차에 탔다.
말들이 울음소리를 내며 출발하자 시로네 일행은 환호성을 질렀다.
집으로 돌아가는 게 꿈만 같았다.
한동안은 시끌벅적했다. 카즈라 귀족들의 험담을 신나게 늘어놓기도 하고 에 대해 이것저것 추리해 보기도 했다.
그렇게 1시간이 지나고, 집처럼 꾸며진 마차 안은 평화로운 정적에 잠겼다.
인과의 수레바퀴 (7)
아직 정신적 충격이 가시지 않은 시로네는 침대에 누워 잠에 빠졌다. 반대편 침대에는 빈센트와 올리나가 앉아 있었고 에이미는 바닥에 앉아 창밖 경치를 구경하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레이나가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후우, 정말 길었던 4일이었어.”
기분 좋게 바람을 쐬던 에이미가 돌아앉았다.
“그러게요. 그나저나 정말 놀랐어요. 오르캄프가 친부모가 아니었다니.”
빈센트는 당시를 회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였지. 아내가 그랜드 홀에 들어갔을 때는 꼼짝없이 여기에서 뼈를 묻어야겠다고 생각했으니.”
레이나는 올리나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어떡하실 거예요? 시로네에게 사실대로 말하실 건가요?”
“생각해 봤는데,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차피 알게 될 일이긴 하지만.”
에이미가 물었다.
“어째서요? 기껏 엘리자 여왕이 친자가 아니라는 공문까지 전해 줬는데. 시로네에게 그런 여자는 절대 친엄마가 아니라고 확실히 알려 줘야죠.”
“시로네가 그랜드 홀에 들어왔을 때 눈빛을 봤어요. 어쩌면 시로네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라요. 그들이 친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을요.”
레이나가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하긴, 똑똑하고 눈치가 빠르니까요. 시로네가 말했죠, 두 분을 제외하고 어떤 부모도 없다고. 그건 다른 친부모가 찾아올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꺼낸 얘기가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해 보니 앞뒤가 맞아떨어졌다. 처음에는 배신감에 내뱉은 말인 줄 알았으나 그런 어리광을 부릴 시로네가 아니었다.
“착한 아이예요. 여왕님 앞에서는 큰소리를 쳤지만 사실 과분한 아들이죠.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아들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요.”
레이나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들이 아들을 버린 지역과 시간도 일치했고, 당시에 아이가 버려진 사건도 유일했으니까요.”
“잠깐만요!”
에이미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손을 내밀었다.
아들을 버린 시녀는 분명 여명의 골짜기에 있는 마구간에 아들을 놓고 왔다고 했다. 그렇기에 시로네가 유력한 후보로 왕성에 초청된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을 깨고 부자지간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시로네는 누구예요?”
물음에 담긴 의미를 깨달은 모두는 침묵했다.
오르캄프의 자식도 아니라면, 시로네는 대체 누구에게 버려진 아이일까?
빈센트는 지금도 생생한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잠을 자던 중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마구간으로 향했다. 하지만 마구간에는 누군가 들어왔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어째서 오르캄프의 자식은 찾을 수가 없는 것일까? 시로네는 대체 무엇을 깨달았기에 오르캄프에게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
수많은 해답을 심층에 담아 둔 채 시로네는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
아르민은 토슈카 마을에 도착했다. 시로네가 무사하다는 소식은 돌아오는 길에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의 문제가 남았다. 블랙 라인의 마법사와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상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괜찮겠지. 확실히 이야기해 두었으니까.’
에이미에게 복면을 쓴 이유를 설명했으니 약속을 지킬 것이다.
설령 지키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신뢰의 기본이니까.
마음을 내려놓은 아르민은 시간 역장으로 둘러싸인 집을 올려다보았다. 죽은 듯 고요했다.
한숨을 내쉬며 플리커 마법을 시전하자 방 안의 풍경이 그를 맞이했다.
스톱 마법을 시전했던 자리에 도착하는 순간 시간의 흐름이 되돌아오면서 꽃병이 와장창 깨졌다.
케이라는 아르민을 노려보았다. 추락하던 꽃병에 시선을 빼앗겼기에 아르민의 위치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확인이 불가능했다.
“며칠이나…… 지났지?”
“글쎄. 4일 정도…….”
케이라는 입술을 짓이기며 울분을 삭혔다.
“결국 다녀온 거야? 내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속일 생각 하지 마! 그렇지 않다면 시간 역장을 걸 이유도 없잖아!”
아르민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잠시 화가 났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야.”
케이라는 코웃음을 쳤다. 어느 누가 그 소리를 믿어 주겠는가?
하지만 울화통이 터지는 이유는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토록 당당하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결국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는 얘기. 따라서 상황의 주도권은 여전히 그가 쥐고 있었다.
“후우, 알았어. 상부에 잘 말해 줄게. 일단 나에게 보고해 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았어.”
케이라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조직에 들어왔을 때부터 쇠고집으로 유명한 아르민이었으니 일단 입을 다물면 어떤 방법으로도 그의 입을 열게 할 수 없었다.
그때 붉은 빛으로 이루어진 작은 새 한 마리가 벽을 투과해 들어왔다. 상부에서 보낸 텔레버드였다.
광자조형술의 수준도 그렇지만 무려 7만 8천 킬로미터를 날아 정보를 전달하는 일은 정보 마법의 극한에 도달한 마법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적색 빛을 내는 텔레버드는 제1급 위기 상황임을 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