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259
새가 붉게 빛나면서 허공에 글자를 새겼다. 암호를 실시간으로 해석한 케이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말도 안 돼. 이렇게 빠를 리가 없는데…….”
빨강 새가 불꽃처럼 소멸하는 것을 지켜본 아르민은 창가로 걸어갔다. 카즈라에 가기 전이었다면 케이라와 같은 생각을 했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생각이 바뀌었어. 돌아가자, 케이라. 상부에 보고해야 할 일이 있다.”
단순 변덕으로 고집을 꺾을 사람이 아니다. 케이라는 카즈라에서 있었던 사건과 텔레버드가 전한 사건이 아예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짐작했다.
“당신, 뭔가 알고 있는 거지?”
아르민은 끝까지 함구했다.
시로네가 조금이라도 학창 시절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랐다. 모두가 알게 되는 그날, 세상은 절대로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
‘예상보다 빨리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시로네.’
3분의 1 (1)
카즈라 왕국은 모든 외교 채널을 차단했다.
공식적인 입장 표명은 전무. 카샨 제국에 통치권이 넘어간 상황만을 핫라인으로 전했을 뿐이다.
동맹국들의 불만이 컸으나 테라제가 버티고 있기에 대놓고 알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삼황계의 힘이었고 그렇게 카즈라 왕국은 세관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시로네는 며칠 동안 휴식을 취하고 학교에 복귀했다. 고급반 커리큘럼은 끝났지만 마법학교 최고의 행사인 졸업 시험이 내일로 다가온 상태라 교내의 분위기는 뜨거웠다.
마법학교에 복귀했다는 것은 왕족이 아니라는 뜻이었기에 동급생들이 시로네를 대하는 태도는 여전히 쌀쌀했다. 다만 확실한 것도 아니어서, 예전처럼 폭언을 퍼붓지는 못했다.
학교를 떠나기 전에는 내심 서운했던 시로네지만 카즈라에서 당한 수모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일 뿐이었다. 게다가 근래 고민이 많아져서 다른 사람의 생각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자신의 마음속에 괴물이 잠들어 있다.
어떤 거대한 기억이 존재했었다는, 그런 뇌 속의 허탈감이 느껴진다는 게 증거였다.
처음에는 단순한 느낌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안정을 취하면서 마치 화석이 발굴되듯 윤곽이 드러났다.
어떤 기억은 완전히 상실한 반면에 강한 인상을 받았던 장면들은 점차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마신이 정신을 강제로 확장시켰을 때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아니, 정말로 그랬던 것일까?
사실은 고통의 끝에서 터질 듯한 해방감을 맛보았다. 폭주를 통해 가속하는 기분은 약에 취한 듯 황홀했고, 마법이 발동될 때마다 짜릿한 쾌감이 흘렀다.
‘아니야. 그것은 내가 아니었어.’
내가 아니다. 시로네라는 화신과 마신이 결합된 새로운 존재다. 하지만 생각의 굴레를 이어 가면 결국 그것 또한 자기 자신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뿐이었다.
마신은 지금도 시로네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다. 그리고 봉인을 해제할 열쇠는 여전히 그의 손에 쥐여 있었다.
‘열어서는 안 돼. 나를 통제할 수 없다면, 그 무엇도 내 것이 될 수 없어.’
자신이 약했기에 마신이 주도권을 잡은 것이다. 주종 관계를 역전시키려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시로네는 훈련장을 찾았다. 정규 과정이 끝났기에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1시간 정도 수열식을 행한 그는 차분히 눈을 뜨고 광자를 집중시켰다. 양손으로 공을 쥐는 매지컬 액션을 취하자 손바닥 사이에 광자가 탄생했다.
마신은 금강태의 탄력성이 붕괴되기 직전까지 정신을 확장시켰다. 계산하에 시도되었던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금강태가 아니었다면 이미 폐인이 되어 방구석에 처박혀 있을 터였다.
시로네는 전과 다른 광자의 압축력에 놀랐다.
초자연 심령과학 연구회의 발표회를 준비할 때도 매일같이 정신을 리바운드시켜서 스피릿 존을 강화시킨 바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극단적인 리바운드였다.
신의 입자를 집중시키자 포톤 캐논의 광원이 점차 작아지면서 선명한 테두리를 지닌 백색 구체로 변했다. 마치 햇빛에 타오르는 백금을 보는 듯했다.
여기에서 더욱 압축시키면 밀도가 기하급수로 치솟으면서 암구라는 마법이 탄생하지만 필연적으로 통제력을 잃어버리는 상황이 발생한다.
시로네는 광자를 위아래로 짓눌렀다. 원반처럼 납작해진 광자를 던지자 섬광이 빠르게 휘어지면서 공간을 가르고 되돌아왔다.
그것을 붙잡고 둘로 쪼갠 다음 표창의 형태로 조형했다. 두 손을 내뻗는 순간 표창이 공간을 쭉 찌르더니 역회전을 먹으면서 돌아왔다.
두 차례의 조형을 가했는데도 형태가 붕괴되지 않자 시로네는 더욱 잘게 쪼갰다.
새를 닮은 유선형의 몸체에 초승달 같은 날개가 달린 비도 8개를 조형하여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엑스 자로 교차하듯 양팔을 휘두르자 풍압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8개의 비도가 메뚜기 떼가 날아다니는 소리를 내며 사방을 할퀴었다. 반경 안에 날짐승이라도 뛰어든다면 순식간에 육즙이 되어 버릴 터였다.
시로네는 양력을 잃고 느려지는 비도를 양손으로 4개씩 쓸어 담았다. 밀도가 상당히 약해져있었다. 찰흙을 합치듯 비도를 뭉치는 순간 광자가 폭발하면서 칼날 같은 섬광을 퍼뜨렸다. 꽃잎처럼 반짝이는 빛의 파편이 눈앞을 떠다녔다.
“흐음…….”
광자의 발광성을 통제한 덕분에 프랙탈 전지를 이용하지 않고서도 세밀한 조형이 가능해졌다. 기능이란 형태에서 나오는 법이기에 광자를 이용한 마법의 활용도는 전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시로네는 만족스러운 얼굴이 아니었다.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는 그때 뒤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이루키와 네이드가 턱이 빠질 정도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어라? 너희 언제 왔어?”
네이드는 말문이 막혀 대답하지 못했다.
복귀하자마자 훈련장으로 갔다는 얘기를 듣고 시로네답다고 생각했건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며칠 전의 시로네하고는 완전히 다른 수준의 마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방금 그건 뭐야? 새로 개발한 마법이야? 이름이 뭔데?”
“이름 같은 건 없어. 그냥 이것저것 해 보던 중이었거든. 광자의 발광성을 잡을 수 있게 됐어. 그런데 무기처럼 다루는 건 효율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 조금 더 고민을 해 보려고.”
광자는 속성상 조형에 가장 취약하기 때문에 조형술이 가미된 마법은 정신력이 크게 소모된다. 포톤 캐논보다 월등한 효력이 아니라면 굳이 공격 마법으로 바꿀 이유가 없었다.
이루키가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까 우리가 얼빠지게 놀란 마법이 단순한 실험에 지나지 않았다는 거군.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을, 그런 쓰레기 중의 쓰레기 같은 마법 말이야.”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이루키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통치권이 카샨에 넘어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3분의 1 (2)
시로네는 카즈라에서 겪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에이미의 부탁대로 아르민에 대한 이야기는 뺐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다. 일국의 왕과 설전을 벌이고, 여황의 딸인 우오린과 친구가 되었다. 마법부서의 간부들과 한판 붙었으며, 최고 귀족들 앞에서는 아타락시아를 시연하기도 했다.
친구들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열여덟 살 소년이 겪기에는 너무 황당무계한 스케일이었다. 시로네는 왕성에 다녀온 것이다.
“그래서 칼에 찔렸다고? 너 진짜 죽을 뻔했구나.”
시로네는 옷자락을 들어 상처를 보여 주었다. 꿰맨 자국이 선명했다.
이루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머리는 괜찮은 거야? 충격이 상당했을 텐데.”
“다행히 며칠 쉬었더니 많이 좋아졌어. 배는 아직도 욱신거리지만. 맞다, 오브제도 가지고 왔어. 이따가 내 방으로 와. 보여 줄게.”
“헉! 진짜? 무기는 교내 반입 금지잖아. 너, 칼침 맞더니 엄청 용감해졌구나?”
시로네는 피곤한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아니, 나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는데 사정이 좀 있어서.”
방구석에 처박히는 게 자존심이 상한 아르망은 밤마다 정신파로 시로네를 괴롭혔다. 휴식을 취해도 모자랄 시간에 정신을 쪼아 대니 어쩔 수 없이 데려가겠다는 약속을 하고 말았다. 대부분의 마검이 그렇듯이 아르망의 성격도 상당히 까다로운 모양이다.
“그럼 지금 보러 가자. 빨리 보고 싶단 말이야! 금강무장! 정격조종!”
“나중에. 지금은 갈 데가 있어서.”
“응? 어디를 가는데?”
이루키가 네이드의 옆구리를 쳤다.
“졸업 시험이잖아. 애인하고 마지막 밤을 보내야지.”
시로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거든! 에이미는 카즈라까지 따라와서 나를 도와줬단 말이야. 직접 가서 응원해주고 싶어.”
“그러시겠지. 아무튼 어서 가 봐. 해 떨어지면 강철문 닫히니까. 힘내라고도 전해 주고.”
시로네는 시간을 확인하고 화들짝 놀랐다.
“어? 벌써 이렇게 됐나? 그럼 갔다 올게. 이따가 보자.”
훈련장을 벗어난 시로네는 졸업반 건물로 향했다.
학교에 오자마자 에이미를 찾아가지 못한 이유는 화신의 경험들이 의식의 장막 너머를 떠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에이미에게 질투심을 고백한 어떤 장면이 기습처럼 침투하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정도였다.
사건이 끝나고 바로 대화를 시도했으면 이런 어색함도 없었겠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마차에서 기절하듯 쓰러진 시로네는 집으로 호송됐고 에이미는 졸업 시험을 준비하느라 휴식을 취할 틈도 없이 학교에 복귀했다.
‘하아, 큰일 났네. 에이미 얼굴을 어떻게 보지?’
시로네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털어 냈다.
에이미는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카즈라까지 따라와 주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오늘처럼 멀쩡한 정신으로 마법학교를 다닐 수도 없었을 터였다.
‘그래, 당분간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에이미의 합격이 우선이야.’
열두 살에 입학한 그녀가 6년간의 결실을 맺는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현재 그녀의 졸업반 랭크는 무려 4위. 반년 만에 이룬 성과라고 보기에는 엄청난 성장세였다.
‘결국 약속은 못 지키게 되는 건가? 하긴, 상관없지.’
에이미를 따라잡겠다고 약속한 시로네였다. 하지만 그녀 또한 쉬지 않고 노력해서 도달한 상위 랭크였다. 졸업한다면 기분 좋게 패배를 시인하리라.
졸업반의 상징인 강철문을 지나자 몇몇 선배들이 화단을 걷고 있는 게 보였다.
아무도 시로네를 쳐다보지 않았다. 오늘은 없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온통 내일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정신 통일에 치중하는 선배가 있는가 하면 긴장을 푸는 게 낫다고 생각한 선배들도 있었다. 모닥불에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일단의 무리가 그들이었다.
낯이 익은 선배들이 많았고, 에이미와 세리엘도 그 무리에 섞여 있었다.
“어머, 저기 시로네잖아?”
“어라? 정말이네?”
시로네는 굳은 얼굴로 다가갔다. 에이미가 다른 선배들과 함께 있을 줄은 예상치도 못했다.
“안녕하세…….”
세리엘이 달려와 시로네의 얼굴을 끌어안았다.
“으아앙! 시로네다! 여긴 어쩐 일이야? 나 응원해 주러 온 거야?”
세리엘의 가슴에 파묻힌 시로네는 뺨이 화끈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이 푸르르 떨리는 것을 느끼고 장난이 아님을 깨달았다.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 소리가 들렸다.
‘이것이 졸업반이구나.’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마법사가 되기 위해 인생을 바친 사람들이다. 그리고 내일 시험에 합격하면 꿈에 그리던 마법사가 된다.
확률은 3분의 1.
남의 일로 여겼을 때는 상당히 높은 확률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막상 당사자에 대입해 보니 남은 20명은 또다시 1년 동안 끔찍한 경쟁을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런 생각을 하자 세리엘의 가슴도 부끄럽지 않았다.
시로네는 있는 힘껏 그녀를 안아 주었다. 모두가 열심히 했다. 여기서 누군가가 떨어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가능하면…… 그녀가 합격하기를 바랐다.
“열심히 하세요, 선배님. 저도 응원할게요.”
“응. 고마워, 시로네.”
시로네는 그제야 세리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조차 숭고했다. 그녀가 어떤 노력을 해서 이 자리까지 왔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로네는 에이미를 돌아보았다.
세리엘과 달리 그녀의 얼굴에는 긴장감도, 설렘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이다. 6년 동안의 성장곡선이 완벽하게 내일을 향해 맞춰져 있는 듯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고, 고마웠다. 만약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면 카즈라에 데려간 죄책감에 시달렸을 터였다.
“에이미, 너도 힘내. 내일 나도 열심히 응원할게.”
“응, 고마워. 최선을 다할 거야.”
현재 에이미의 정신은 사념의 물줄기가 하나로 통합되어 흐르는 대하를 방불케 했다. 카즈라의 어색한 상황 같은 건 떠오를 여지가 없었다.
시로네는 선배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리에는 학생회장 아미라도 있었다. 시로네가 미로의 시공에 갇혔을 때 학생회를 선동하여 농성을 벌였던 그녀지만 이제는 추억의 일부분이었다.
“드디어 내일이면 이 지긋지긋한 학교생활도 끝이구나.”
아미라의 말에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을 하루 앞두고 자신이 떨어질 것이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사누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시로네는 그가 에텔라의 시범 조교로 왔을 때를 떠올렸다. 엄청난 초음술로 고급반 학생을 놀라게 했던 선배.
하지만 그런 그도 작년에 졸업 시험에 낙방하고 이번이 두 번째 도전이었다.
마법학교의 통계상 첫 번째 시험에 탈락한 학생이 두 번째 시험에서 합격할 확률은 상당히 낮은 편이기 때문에 긴장하는 건 당연했다.
아미라가 사누엘을 다독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사누엘. 열심히 했잖아. 저번 졸업 시험에서도 아깝게 떨어졌고. 이번에는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그래, 고마워. 너도 꼭 합격해.”
혼자 합격하는 것은 아니기에 경쟁자들끼리 격려를 해 줄 수 있다는 것은 그나마 인간적인 부분이었다.
“여어? 여기들 모여 있었네?”
교내에서 유명한 선배들이 걸어왔다.
연금술의 리차드. 일렉트릭 몬스터 라이컨. 소나의 헤르시.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자는 클래스 원의 서열 1위인 아르디노 페르미였다.
정장을 고수하는 페르미는 마법사라기보다는 회계사에 어울리는 차림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르디노 가문도 유명한 상인 가문이라고 들었다.
“뭐야, 왜들 그렇게 얼굴이 굳어 있어? 너무 긴장하지 마. 6년 동안 졸업 시험을 치르는 나도 있잖아. 하하하!”
페르미가 너스레를 떨었으나 누구도 웃지 않았다.
항상 졸업반의 1등을 독차지하는 그가 여태까지 졸업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알페아스 마법학교의 미스터리였다. 일각에서는 돈을 받고 졸업 시험을 유리하게 몰아주는 브로커라는 애기도 돌았지만 확인된 바는 없었다.
“페르미, 너무 방심하는 거 아냐? 그렇게 태평하게 굴다가는 내년에도 후배들과 함께 시험을 치르게 될걸.”
“하하! 그냥 최선을 다하는 거지 뭐. 이런 건 원래 하늘에 맡기는 거라고.”
페르미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에이미가 당돌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휘유, 우리 꼬마 아가씨는 오늘도 기세가 등등하네? 어때, 컨디션은?”
“최상이야. 그쪽은 어때?”
“나도 뭐…… 그럭저럭.”
“최고의 컨디션으로 시험을 치르길 바랄게. 내일은 내가 마법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는 날이니까.”
“하하하! 정말 너한테는 못 당하겠다. 그래, 제대로 붙어 보자고. 내일만큼은 동급생이 아닌 경쟁자니까 말이야.”
페르미가 일행을 데리고 멀어지자 모닥불에 모인 자들은 경계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일행 모두 최소 네 번 이상 졸업 시험을 치룬 베테랑인 만큼 경험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었다.
분위기를 바꿀 겸 아미라가 말을 꺼냈다.
“저번 방학에 세계기후기구에 다녀왔어. 정말 멋지더라. 전문 마법사들만 천 명이 넘어가더라고.”
“이야, 거기 끗발 엄청 좋지. 기구장은 일국의 왕보다도 권력이 세다던데?”
날씨는 인간의 의식주와 식량 생산, 생태계를 통제하는 강력한 요인이다. 그렇기에 레드 라인에 속한 기후 마법사는 국가고시를 거치지 않으면 마법을 사용하는 자체가 범죄로 간주된다. 또한 국경이 없기 때문에 국제적인 협약이 필요하고 그것을 주관하는 곳이 세계기후기구였다.
“꼭 세계기후기구가 아니라도 엄청난 파워지. 내 친척 중에 한 사람이 천문관측소에서 일하는데 고위 귀족들도 꼼짝을 못한대.”
“하지만 국가고시를 통과해야 하잖아.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10년 동안 합격 못 해서 결국 전공 바꿨다던데.”
아미라가 패기 넘치게 말했다.
“후후! 그래서 도전하는 거야.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 내 신조니까. 합격만 하면 마법사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도전할 수 있는 거잖아.”
“하긴,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나중에 한자리 차지하면 꼭 나한테 연락해라? 하하!”
아미라는 학생회장을 지냈으니 세계기후기구 기구장의 모습도 자연스레 연상되었다.
훗날 사회에 나가서 두 직책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 깨달으면 오늘의 발언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을 테지만, 대수로울 게 무엇이겠는가? 누군가는 그것을 이루고 말기 때문에 꿈인 것이다.
아미라를 시작으로 각자 포부를 밝혔다.
세리엘은 처음에는 보건소에 취직해서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이었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어서 세계보건기구에서 백신 마법을 개발하고 싶다고 했다. 백신 마법이 활성화되면 의약품의 단가가 낮아진다는 지론이었다.
에이미는 여전히 군인이 목표였으나 이번에 카즈라에 다녀온 뒤로 새로운 소명감이 생겼다.
시로네는 그녀의 말을 듣고 지온을 떠올렸다. 토르미아와 전쟁을 하겠다는 식으로 에이미를 협박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그도 피가 끓어올라 군대에 지원하고 싶을 정도였다.
사누엘은 복수 전공을 할 생각이었다. 언령도 중요하지만 정신 계열 마법을 익히기 위해 유학을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하아! 모두 빡 센 인생이구나. 그래, 열심히 해 보자고! 내일 모두 마법사가 되는 거야!”
“좋았어!”
시로네는 꿈을 향한 첫 발걸음을 떼는 선배들을 바라보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진심으로 이 자리의 모두가 합격하기를 바랐다.
***
아침이 밝았다.
졸업 시험을 치를 콜로세움은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의무는 아니지만 전교생이 관람을 신청했고 졸업반의 학부모들도 대부분 학교를 찾았다. 각국의 마법협회에서 나온 스카우트들과 취재를 위해 찾아온 특파원까지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