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261
“한 대 치고 싶은 얼굴이군. 하지만 오늘은 좀 봐주라. 저 꼬마 아가씨 때문에 삭신이 쑤셔 죽겠거든. 상위권끼리 초반에 붙으면 항상 이런다니까. 내 인생도 더럽게 꼬였어.”
페르미는 미리부터 방어막을 쳐 두고 시로네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시로네의 입에서는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페르미는 다시 에이미에게 발길을 돌렸다.
“하하! 아무튼 에이미, 어떡할…….”
시로네가 다시 페르미를 가로막았다.
이번만큼은 페르미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순간이지만 눈빛이 차가워지더니 시로네를 고압적으로 내려다보았다.
시로네는 그 눈빛마저도 담담하게 흘려버렸다. 어떤 말을 해도 에이미에게 상처가 될 뿐이다. 그가 에이미에게 다가오지 않기를 바랐다.
“애인이란 좋은 거군. 그래, 뭐…… 둘이서 좋은 시간 보내라고.”
페르미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멀어졌다. 일행과 합류한 그가 어깨동무를 하며 세상이 떠나갈 듯 소리쳤다.
“가자! 술이나 먹자고, 이 한심한 인생들아!”
“푸하하하! 그래! 오늘은 죽도록 마셔 보자!”
시로네는 에이미를 돌아보았다. 애초부터 관심도 없었는지 몸을 돌리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자, 에이미. 바래다줄게.”
“……응.”
졸업반 기숙사로 향하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땅만 보고 걷고 있던 에이미가 인상을 찡그리며 시로네를 돌아보았다.
“후우, 진짜 못해 먹겠네. 야!”
“응?”
“아까부터 왜 그렇게 풀이 죽어 있어? 그러니까 나까지 이상해지잖아. 할 얘기가 있으면 하든가,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
“하지만 딱히 할 얘기가 없는걸.”
“바로 그거야. 나는 졸업 시험에서 떨어진 것뿐이라고. 세상에서 나만 떨어진 것도 아니고, 나만 떨어졌다고 해도 내 인생이 끝장난 것도 아니야. 그런데 왜 그렇게 분위기를 잡고 있냐는 거야.”
에이미가 그렇게 말해 주자 시로네도 용기가 생겼다.
“하하! 그렇기는 하지. 어쨌거나 나한테도 다시 기회가 생긴 건가?”
“흥, 고맙게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앞으로 이런 실수는 절대로 하지 않을 테니까.”
“한 번의 실수는 발전의 밑거름, 두 번의 실수는 가문의 수치?”
“당연하지. 그리고 네 바보 친구들에게도 똑똑히 전해. 내년 졸업반은 엄청나게 살벌할 테니까. 아주 초장부터 기를 죽여 놓아야지.”
시로네에게는 에이미의 말이 이렇게 들렸다. 실망시켜서 미안하다고 전해 줘.
하지만 그녀가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네이드와 이루키는 에이미가 재기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기숙사에 도착했다. 비록 시험에는 탈락했지만 1년 동안 쌓여 있던 긴장감이 사라진 것은 홀가분했다.
“하아, 피곤해. 빨리 들어가서 씻고 자야겠다.”
“그래, 오늘은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쉬어.”
“응. 너도 내일 봐. 바래다줘서 고마워.”
피곤한 얼굴로 시로네와 작별한 에이미는 기숙사로 들어갔다. 복도의 공기가 아침과 사뭇 달랐다. 어딘가 모르게 한기마저 느껴졌다.
방으로 들어온 에이미는 문을 닫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땀을 많이 흘렸으니 씻어야 했다.
하지만 샤워실로 향하던 그녀의 발걸음은 결국 멈춰 서고 말았다.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흑! 흐윽……!”
분했다.
너무나 분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어째서 나일까? 3분의 1이나 합격하는데, 함께 공부했던 10명은 지금 마법사가 되었는데, 어째서 나만 안 되는 거지?
컨디션도 최고였는데, 왜 아직도 나는 학교에 남아 있는 거지? 어째서 이 지옥 같은 1년을 다시 겪어야 하지?
침대에 쓰러진 에이미는 이불을 움켜쥐었다. 울상으로 변하는 얼굴을 막을 수가 없었다.
“으아아아…… 으아아아앙!”
시로네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벽에 등을 기댔다. 오늘은 더 이상 그녀를 만날 수 없을 듯했다.
“으아아…… 으아아아앙…….”
에이미의 울음소리는 숨이 멎을 듯 거칠었다.
“…….”
하지만 시로네는 그저 깊은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
소등 시간이 한참 지난 시각에도 알페아스의 별채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성난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창문 밖으로 새어 나왔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대체 학생들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알페아스 마법학교의 졸업 시험을 처음으로 감독했던 올리비아는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시험이 끝나자마자 자료실에서 학생들의 신상명세를 샅샅이 조사했다.
“여기 있는 이 아이들 말이야!”
올리비아는 신상명세서를 흔들다가 알페아스가 있는 테이블에 던졌다.
착 달라붙은 종이가 좌우로 퍼지면서 몇몇 학생들의 이름이 드러났다.
페르미 패거리였다.
알페아스는 잠시 프로필에 시선을 두었다가 관심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침착해. 이미 시험은 끝났어. 번복할 수 없는 일이고, 번복을 해야 할 이유도 없어.”
“왜 이유가 없어? 참가자들이 담합을 했잖아?”
“담합 또한 전술의 일부분이야. 상황 판단 능력 또한 전투에서는 중요한 요소잖아.”
“누가 그걸 몰라? 문제는 전술적 흐름과는 별개의 담합이라는 거야. 시험을 치르기도 전에 이미 편을 가르고 들어온 거라고. 도대체 왜?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뭔데?”
알페아스도 거기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페르미가 졸업반에 들어온 이후부터 매년 벌어지는 일이었다.
배틀 로열 방식에서 특정 대상을 떨어뜨린다고 딱히 이득이 되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결국에는 그들마저 탈락한다는 점이다.
“졸업 시험은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야. 국가 자격증을 취득하는 시험이지. 전술적 흐름이라는 것도 그래. 고작 교사 개인의 판단으로 합격의 기준을 달리할 수는 없는 거야.”
올리비아는 코웃음을 쳤다.
“내 눈이 썩은 동태눈인 줄 알아? 페르미는 이번 시험에서 실력의 반도 드러내지 않았어. 이미 프로가 되고도 남을 아이란 말이야. 왕립 마법학교에 갖다 놔도 곧바로 졸업할 수 있는 애가 6년 동안 합격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게 말이 돼?”
“그러면 어떻게 할까? 그냥 페르미를 졸업시킬까? 그렇다면 도대체 졸업 시험이 왜 필요하지? 그런 방식은 시험에 참가하는 학생들에게 반발만 일으킬 뿐이야.”
올리비아는 답답한 마음에 방을 돌아다니다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해할 수가 없네. 도대체 왜 졸업을 안 하는 거야? 학교에 남아서 좋을 게 뭔데?”
“전에 물어본 적이 있지. 이곳이 돈이 된다는 식으로 말하더군.”
올리비아의 상체가 튕기듯 올라왔다.
“그건 졸업장 브로커잖아? 돈을 받고 졸업을 시켜 준다면 학교 수준의 징계로 끝날 일이 아니야. 국가를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는 거라고.”
“뒷조사를 해 봤는데 아무것도 없었어. 땡전 한 푼 나오지 않았다고.”
올리비아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로비를 받은 기록이 없다면 무혐의겠지만, 심증에 근거해서 생각해 보자면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페르미는…… 규정외식자지?”
알페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어떤 식으로 돈이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규정외식이라면 파헤칠 수가 없지. 페르미가 시전하지 않는 이상에는. 하지만 일곱 번의 졸업 시험 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렇다면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돈을 받든 마법을 이용해서 대가를 받든, 마찬가지야. 아무도 없으니까 하는 얘기지만 솔직히 사누엘의 움직임은 오늘 좋지 않았어. 하지만 합격했지. 원래 그 자리에는 에이미가 들어갔어야 해.”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기는 했지. 하지만 아무도 없으니까 할 수 있는 얘기일 뿐이야. 확실한 증거가 없이는 불가능해. 만약 조사에 착수했다가 아니라면? 자식이 범죄자로 몰렸는데 가만히 있을 귀족이 있을까?”
올리비아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뜨거워진 머리를 손바닥으로 식혔다.
“그래서 어떡할 거야? 생각해 둔 방법이라도 있어?”
“없어. 매년 그랬듯이 졸업 시험을 치렀고, 합격자는 마법사가 되는 거야. 로비가 있든 없든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하지만 정확하게 실력을 측정했다고는 볼 수 없어.”
“과연 그럴까?”
올리비아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무슨 소리야?”
3분의 1 (5)
“대가를 받고 누군가를 도와줬다면 불법이지. 하지만 상황 자체는 똑같아. 페르미가 그저 기분에 따라 누군가를 도와주었다면 어떡할 텐가? 그것도 불공평하다고 할 수 있을까?”
올리비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졸업 시험 대상자는 1등에서 30등까지. 하지만 학생들의 격차가 매년 일정한 것은 아니야. 어떤 해에는 비슷한 수준이 맞붙지만, 어떤 해에는 독보적인 재능이 나타나서 혼자 휩쓸어 버리기도 하지. 페르미의 경우도 다르게 생각할 것은 없어.”
“그렇다고 해도 일부러 탈락한 것은 문제가 있어. 졸업 시험의 취지에도 어긋난다고.”
알페아스는 고개를 저었다.
“클래스 포의 시로네를 생각해 봐. 아마도 내년에 졸업반으로 올라올 거야. 시로네가 지금 당장 프로로 나간다면, 어느 정도 수준이라고 생각하지?”
올리비아는 입술에 손가락을 얹고 생각에 잠겼다.
“흐음, 전투 능력에만 국한한다면 8급까지는 충분히 비벼 볼 수 있지 않을까? 사실 6급 밑으로는 다 거기서 거기잖아. 서로 엎치락뒤치락하고 말이야.”
“우리야 위에서 내려다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지. 학생들 입장에서는 10급 마법사조차 엄청나게 높은 벽이야. 그리고 그게 당연한 거고. 하지만 학생 수준을 초월한 학생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야. 그런 아이들이 몇 명 포함되어 있다고 형평성을 논할 수는 없어.”
“그거야 그렇지만…….”
“경쟁의 난이도로 따지면 내년 졸업반이 훨씬 심하지. 다음 학기에 졸업반으로 올라가는 아이들의 스쿼드는 역대 최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렇다고 그들이 다른 해보다 경쟁이 심하다는 이유로 불만을 가질까?”
“하지만 그 아이들은 일부러 탈락하지 않을 거잖아.”
“그건 모르는 일이야. 일부러 탈락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이런 일에는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기가 어렵다는 거야. 로비가 있든 없든, 자유경쟁 체제라는 건 변하지 않아.”
올리비아는 턱을 괴고 끙 하고 신음 소리를 냈다.
현재로서는 페르미의 독재 체제를 전복시킬 어떠한 수단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프로급의 실력, 그것도 규정외식이 의심스러운 마법사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저지르는 것일까?
“결국 에이미를 구제할 방법은 없는 거네. 안타까운 일이야.”
“담합이 없었다면 에이미가 100퍼센트 합격할 수 있었다고 장담하는 건가?”
알페아스의 유도신문에 올리비아의 눈이 샐쭉해졌다.
“재능만 놓고 보자면 그렇다는 얘기야.”
“카르미스의 홍안은 대륙에서도 알아주지. 무엇을 가르쳐 주든 스펀지처럼 흡수해 버리거든. 팔방미인이라고 할까? 물론 실제로도 미인이지만.”
올리비아는 싸늘한 눈으로 알페아스를 흘겼다. 하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기에 턱을 괴고 콧김을 내쉬었다.
“……너무 예쁜 것도 탈이지.”
“열두 살 때부터 지켜본 아이야. 잘 이겨 낼 수 있을 거야.”
두 사람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1년 동안 수많은 사건이 일어났던 학교는 공연이 끝난 무대처럼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다.
그렇게 마법학교의 1년이 막을 내렸다.
찰나의 균열 (1)
천국 제6천 제불.
천사의 도시 제불에는 두 가지 메카 시스템이 존재한다.
하나는 아카식 레코드가 있는 잉그리스, 또 하나는 대천사 카리엘의 연구실인 대세계전이었다.
시로네의 포톤 캐논으로 초토화되었던 대세계전은 말끔하게 복구되어 있었다.
거대한 기둥 형태의 중앙 제어 시스템은 대세계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었다. 오색 빛을 내는 기둥 옆에는 별들의 운행을 관측하는 은하경이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대세계전은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하지만 천국은 그렇지 않았다.
시로네가 떠나간 이후 제1천 샤마인에 변혁의 바람이 불었다. 신민들은 더 이상 일화의 술이 옳다고만 생각하지 않았고, 개중에는 과격분자들도 생겨났다.
그럴수록 천사들은 미로의 시공을 돌파하기 위해 가진 역량을 총동원했다.
그 선봉장에 대천사 카리엘이 있었다.
타락천사 이카사에게 잡혀온 에이미, 테스, 아린에게 생명의 술을 시전하려고 했던 탄생의 대천사.
천사 중에서 가장 지성이 뛰어난 그는 시로네가 원래의 세계로 되돌아가면서 남겨둔 메타 게이트를 분석했다.
그리고 마침내 땅의 나라로 가는 좌표를 찾아냈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미로의 시공을 돌파해야만 했다.
“좌표를 알아도 뚫는 수밖에 없지. 그런데 이게 참 애매하단 말이야.”
“그렇다면 좌표를 복구한 의미가 없는 게 아닌가?”
웅장한 목소리에 카리엘이 돌아섰다.
목소리의 정체를 깨달은 그가 미소를 지었다. 또 1명의 대천사 유리엘이 순백의 중장갑을 걸치고 허공에 떠 있었다.
천사들은 인간보다 키가 크지만 유리엘의 키는 천사들 중에서도 가장 커서, 3미터에 달했다. 높이만큼이나 두께도 엄청난지라 가슴 장갑이 턱 끝에 닿을 정도였다.
카리엘은 빛의 날개를 한차례 펄럭이는 것으로 중앙 연산 시스템의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40미터 높이에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고 수많은 숫자들이 돌아다녔다.
“꼭 그렇지만도 않지. 이제는 땅의 나라에도 네피림의 개체 수가 상당하거든. 미로의 시공을 부숴도 방화벽 정도는 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좌표가 있으면 무시할 수 있지.”
“미로의 시공을 부순다? 그 전략은 오래전에 기각되지 않았던가?”
대천사의 제안을 기각할 수 있는 존재라면 앙케 라밖에 없었다. 실제로 앙케 라는 최후의 전쟁이 미로에 의해 차단당하자 땅의 나라를 조사하는 행위를 금지시켰다.
대천사들은 이유를 몰랐으나 아카식 레코드를 주관하는 앙케 라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카리엘은 포기하지 않았다.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시로네의 등장이었다. 그의 존재가 신민들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그 변화는 시간이 갈수록 빠르게 증폭되고 있었다.
“나도 라의 의지를 거스를 생각은 없어. 말하자면 예방 차원이지. 땅의 나라는 언젠가 정복되어야 할 거야. 그때 가서 이것저것 만들려면 늦을 수도 있잖아?”
“그렇다면…… 이번 실험도 확신은 없는 거로군.”
카리엘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여태까지 확신이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다만 시도를 할 때마다 미로가 기민하게 대응해서 막아 냈을 뿐이다. 이제는 마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녀와 게임이라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녀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로의 시공이 뚫린다. 앙케 라는 원하지 않지만…… 어쩌겠는가? 그 또한 운명일 뿐이었다.
카리엘은 은하경을 지나 서쪽의 벽으로 날아갔다. 유리엘이 잠시 지켜보더니 무시무시한 강풍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그를 따라잡았다.
“자, 이게 오늘 소개할 내 작품이지.”
“…….”
유리엘은 감상평을 내놓지 못했다.
카리엘의 역작은 거대한 대세계전의 4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거대했다. 폭 40미터, 높이 70미터에 달하는 직사각형의 벽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장의 재림처럼 보이던 유리엘의 덩치가 벽 앞에서는 갑자기 초라하게 느껴졌다.
“상당히 크군.”
유리엘이 인정하자 카리엘은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우리가 왜 미로의 시공을 돌파하지 못하는가 생각해 봤지. 차원의 벽이라는 게 애초부터 부술 수 없는 성질이기 때문이야. 하지만 이 천폭이라면 가능하지. 부술 수 없는 액체라도 얼려 버리면 깨지는 것과 마찬가지야. 미로의 시공에 직격을 날리는 거지.”
“직격이라. 요컨대 이 천폭이 미로의 시공이라는 건가?”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상당히 잘못 짚었지만 단순히 생각하면 옳은 의견이었다.
뭐, 아무려면 어떤가? 오늘 유리엘을 부른 건 그의 머리가 아닌 팔이 필요해서였다.
“천폭이 부서질 정도라면 미로의 시공도 깨지겠지. 증폭회로를 더하고 싶었는데, 이카엘의 도움 없이는 무리야.”
유리엘은 대꾸를 회피했다.
이카엘은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고 수감된 것도 그렇지만, 시로네가 저지른 사건으로 인해 그녀가 인간의 편을 들고 있다는 심증이 더욱 확실해졌다.
카리엘이 천폭을 두드리며 말했다.
“어때, 도전해 보는 게?”
유리엘은 과연 이것을 부숴야 하는지 고민했다.
천폭이 부서지면 미로의 시공도 깨진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앙케 라의 의지에 반하는 일이었다.
‘아니, 라의 의지에 거스를 수 있는 자는 없다. 그가 강해서가 아니라 전체이기 때문이다.’
어떤 미래가 오든 라는 그저 라일 뿐이다. 카리엘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무모한 짓을 하고 있을 터였다.
유리엘은 솔직해지기로 했다. 처음부터 거슬리는 건 라가 아닌 이카엘이 아니던가?
‘어째서…… 이카엘은 우리를 버린 것일까?’
천사들은 고대로부터 땅의 나라에 신의 의지를 전하고 또한 멸하는 일을 맡아 왔다. 그중에서도 유리엘은 멸하는 일에 혁혁한 공을 세운 대천사였다. 그의 힘은 대지를 뒤집었고, 바다를 둘로 쪼갰다.
하지만 맹목적으로 인간을 학살했던 유리엘도 이카엘이 인간의 편에 섰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는 자신이 옳은 것인가 자문하게 되었다.
이카엘은 언제나 옳다.
아니,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설령 옳지 않더라도 그녀를 따르고 싶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본성이라면 그른 일이라도 신념을 다할 것이다.
아마도 카리엘 또한 그런 생각으로 평생을 존재해 왔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