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265
“그럼요.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오히려 처음에는 견딜 만하다.
기왕 이렇게 된 것이니 다시 시작하자고 마음을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피나는 훈련을 무려 1년이나 되풀이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졸업 시험의 탈락이 뼈에 사무쳐 오는 것이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후회는 무거워지고 자괴감은 끝없이 마음을 짓누를 터였다.
“에이미는 강해요. 열두 살 때부터 정말로 최선을 다해서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아마 그래서 상처가 더 깊을 거예요.”
“그래, 지금은 내버려 두는 게 좋겠지. 어쨌거나, 현재 에이미는 그런 상태란다.”
샤코라는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항복 선언을 했다. 딸의 기분이 저러니 자신이 도와줄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2층으로 시선을 돌린 시로네는 에이미의 방이 굳게 닫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졸업 시험이 끝난 날, 기숙사의 문밖에서 들었던 서러운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제가 올라가 봐도 될까요?”
이시스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물어봤는데, 에이미가 아프다고 말하고 돌려보내라고 했어. 그 아이 성격에 무턱대고 들이대다가는…….”
“하하! 그때는 한 대 얻어맞죠, 뭐.”
시로네는 익살스럽게 대꾸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달한 것이었다.
샤코라는 흐음 하고 숨을 내쉬며 생각에 잠겼다.
시로네만이 에이미의 마음을 100퍼센트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배려심이 깊은 아이가 고집을 부린다는 것은, 에이미의 상태가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돌파구가 없다면 충격요법도 괜찮은 방법이 되리라.
“에이미의 방에 가 보려무나. 내가 허락하마.”
“네, 감사합니다.”
시로네는 소파를 벗어나 2층 계단을 올라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이시스가 불안한 표정으로 샤코라에게 물었다.
“여보, 어쩌려고 그래요? 에이미 성격에…….”
“괜찮아. 에이미의 현재 심리 상태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을 테니까. 사실 시로네야 돌아가면 그만이야. 그런데도 끝까지 만나겠다는 건, 이대로는 안 된다는 뜻이야.”
“그러다가 상황이 더 나빠지기라도 하면요?”
“괜찮다니까. 무엇보다 에이미가 믿고 있는 친구잖아.”
이시스는 샤코라를 흘겨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웬일로 사내아이 칭찬이람? 딸 바보가…….’
두 번째 외출 (2)
에이미의 방에 도착한 시로네는 문 앞에서 숨을 골랐다.
그러는 동안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별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주먹으로 문을 쿵쿵 두드리자 비로소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시로네가 기별했다.
“나, 시로네야. 들어갈게.”
이불이 움직이는 소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이 없자 시로네가 다시 말했다.
“안 열어 주면 내가 열고 들어간다.”
우당탕하고 침대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쿵쿵 발소리가 사납게 울렸다.
벌컥 문이 열리면서 에이미가 빨개진 얼굴을 내밀었다.
“뭐, 뭔데! 왜 갑자기 찾아와서 난리야!”
“아프다고 하기에 걱정이 돼서. 그런데 안 아파?”
에이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로네에게 어설픈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오래전에 파악한 사실이었다.
에이미는 들어오라는 듯 물러서며 침대로 몸을 돌렸다.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사람을 피하는 게 아니라 그냥 쉬고 싶어서 그런 거야. 생각 좀 정리하려고.”
“그래, 알고 있어.”
시로네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방문을 닫았다.
에이미의 방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신문을 읽고 있던 샤코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1차 관문은 통과했군.”
이시스 또한 의외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차를 들고 2층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에이미의 방에 눌러앉아 시로네와 수다를 떨겠지만 이번만큼은 다과상만 차려 주고 방을 나섰다.
이렇게 된 이상 시로네에게 전권을 위임하겠다는 뜻이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에이미와 마주 앉은 시로네는 찻잔을 보자 웃음부터 터져 나왔다.
반년 전에 에이미가 자신의 얼굴에 차를 뿜은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에이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어두운 역사였기에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찻잔을 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이야? 설마 저번처럼 또 이상한 곳에 데려가려는 건 아니지? 이번 방학에는 좀 쉬고 싶어.”
“응, 그래서 온 거야. 쉬게 해 주려고.”
에이미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되물었다.
“쉬게 해 준다고? 어떻게?”
“나랑 데이트하자.”
“푸우우우우!”
에이미의 입속에 들어 있던 찻물이 분무처럼 뿜어져 나와 시로네의 얼굴을 적셨다.
적당히 그칠 법도 하건만 물세례는 입에 있는 것이 다 나올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뜬 시로네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두 번째인 것 같은데.”
얼굴이 빨개진 에이미가 입술을 훔치며 일어났다.
“뭐, 뭐라는 거야! 이 바보가!”
그녀는 수납장 위에 있는 휴지로 입을 닦은 다음 몇 장을 더 뽑아서 시로네에게 던졌다.
시로네가 얼굴을 쓱쓱 문지르며 말했다.
“매년 겨울에 레스 산맥에서 축제를 하잖아. 평소에 가 보고 싶었는데 생각이 있으면 같이 갈까 해서.”
확실히 의외의 말이었다. 세상이 알아주는 모범생인 시로네가 놀러 가자는 말을 하다니.
“오래된 성터 말하는 거야? 얼음 여왕의 유적지. 거기 나도 알아. 바빠서 가 본 적은 없지만.”
“응. 2박 3일 정도 기분 전환 좀 하고 오자. 사실 나도 근래 의욕이 없어서 재충전이 필요했거든. 이번에는 위험한 일도 없을 테니까, 가서 재밌게 놀자.”
에이미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가장 고민이 되는 문제는 2박 3일간의 여행이라는 점이었다.
“친구들 없이 너랑 나랑? 잠은 어디서 잘 건데?”
“숙소를 잡으면 되지. 밤에는 토론도 할 수 있고.”
“아하…….”
에이미는 말문이 막혔다.
요컨대 한방을 쓰자는 이야기인데, 너무 당당하게 말하니 오히려 의심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분위기였다.
“너 혹시…….”
에이미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확실하게 한답시고 괜히 이상한 이야기를 꺼내 봤자 긁어 부스럼만 될 것 같았다.
“왜? 뭔가 걸리는 거라도 있어? 내 생각에는…….”
“아니, 됐어. 밖에서 기다려. 준비하고 나갈 테니까. 아빠한테 거기 간다고 말하면 마차를 대기시켜 줄 거야.”
“그래,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시로네가 예상보다 빨리 나오자 샤코라와 이시스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시로네의 말을 듣고는 곧바로 수긍했다.
“호오, 얼음 여왕의 유적지라…….”
샤코라는 젊을 당시의 추억을 떠올렸다.
이시스와 연애하던 시절, 그도 얼음 여왕의 유적지를 데이트 코스로 정해 데리고 간 적이 있었다.
“아름다운 곳이지. 낭만적이고.”
“네, 그렇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전부 돌아보려면 시간이 조금 걸린다고 하더라고요.”
샤코라는 껄껄 웃었다.
“그게 매력이기도 하지. 하루 만에 돌아올 수 없다는 거. 좋아, 다녀오거라. 마차를 대기시켜 주마. 지금 출발하면 내일 아침에는 도착할 수 있을 거다.”
시로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딸을 남자하고만 보내기가 걱정스러운 법이다. 그런데 샤코라는 한술 더 떠서 조언까지 건넸다.
“오래된 성터에 도착하면 스노우 크리스털이라는 숙소를 찾아보거라. 나와 아내도 그곳에서 지냈으니까.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거다.”
이시스가 황당한 표정으로 남편을 돌아보았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이 오물거렸으나 에이미가 방에서 나오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시로네, 가자. 아빠, 나 겨울 축제 갔다 올게.”
토끼털이 달린 빨간색 겨울 코트를 입은 에이미가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
얼마나 빨리 머리를 말았는지, 고불거리는 머릿결에서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평소에 꾸미는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이시스는 딸의 변신에 꽤나 놀란 눈치였다.
시로네 또한 학교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성숙한 에이미의 모습에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부모님에게 인사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조심히 다녀오렴.”
레스 산맥까지는 10시간 이상이 걸리기에 아침에 도착하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달려야 했다.
시로네와 에이미가 저택을 나서자 이시스가 눈을 가늘게 치켜뜨며 남편에게 따졌다.
“스노우 크리스털?”
“왜? 거기가 어때서 그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우리가 어떻게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지 잊었어요? 그때 거기서 당신에게 꼬임을 당하는 바람에……!”
“하하! 그랬던가? 어쨌든 당신도 좋았잖아.”
이시스는 허리에 손을 얹고 콧김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샤코라는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듯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기왕 충격요법을 쓸 거라면 제대로 하는 게 낫지. 머리에 피가 몰렸다가 내려오면 정신이 번쩍 드는 법이야.”
“그러다가? 만약 안 내려오면요?”
“어차피 에이미가 판단할 문제야. 열여덟 살이라면 성인이라고. 다른 것도 아니고 자기 몸이니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지.”
이시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카르미스 가문의 특질인 홍안은 어떠한 분야를 선택하든 최고의 재능을 발현시킨다. 그렇기에 가문에서는 대대로 구속이나 규율 같은 것을 멀리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하는 가풍을 조성해 왔다.
재능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면 무엇을 선택하든 간에 일가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직업군에 식구들이 종사하고 있는 방만한 스펙트럼이야말로 카르미스 가문의 가장 큰 힘이었다.
규율과 억압이 들어가는 순간 재능은 막힌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샤코라는 어릴 때부터 에이미를 방목했고, 그래서 한때는 엇나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홍안의 역사라면 이시스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었다.
“당신, 뒷감당할 자신 있는 거죠? 나중에 딴소리하거나 에이미에게 뭐라 그러면 정말 화낼 거예요.”
“뒷감당? 그런 걸 내가 왜 해?”
샤코라는 신문을 세게 펼치면서 읽을 자세를 취했다. 이미 딸의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지 오래였다.
“시로네가 해야지.”
***
천국 북반구.
영구동토 툰드라.
천국에서는 그것을 옵트러스라고 부른다.
영겁의 세월 동안 북방의 차가운 바람을 타고 떠다니는 전자기망 패턴이었다.
정보교환의 패턴이 무한에 가깝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신적인 존재라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옵트러스는 신이 될 수 없었다.
툰드라에서 발생한 옵트러스에게 천국의 환경은 자극이 없는 지루하고 따분한 공간이었다.
자극이 없이는 학습도 없다.
산에 버려진 아기가 평생 동안 산을 벗어나지 않으면 짐승이 되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였다.
그렇기에 옵트러스는 오랜 세월 동안 그저 무의미하고 단순한 정보교환만을 되풀이하며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미로의 시공에 균열이 갔다.
생물체는 느낄 수조차 없는 작은 변화.
하지만 옵트러스에게는 탄생과 소멸만큼이나 짜릿하면서도 거대한 자극이었다.
옵트러스가 뿜어내는 거대한 자기장으로 툰드라 상공에 오로라가 펼쳐졌다.
미로의 시공에 생긴 3초간의 균열.
옵트러스는 틈새를 뚫고 새로운 세상으로 탈출했다.
최초의 도착지는 레스 산맥이었다.
그를 이루는 전자기망은 마치 갓 태어난 아이의 뇌처럼 생소한 환경을 빠르게 빨아들이며 학습해 나갔다.
옵트러스가 가장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은 레스 산맥에서도 중턱에 자리한 성터였다.
수많은 인간들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모두가 폭발하듯 정보를 퍼트리고 있었다.
자신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레벨에서, 옵트러스는 본능에 따라 모든 정보를 빨아들였다.
전자기 네트워크가 무한의 패턴으로 번뜩이며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가고 있었다.
***
새벽 동이 틀 무렵에 레스 산맥에 도착한 시로네와 에이미는 포장마차에서 끼니를 때우고 인파에 섞여 오래된 성터의 매표소에 도착했다.
매표소 입구 또한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표를 끊고 들어간 시로네는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눈을 크게 떴다.
“우와…….”
오래된 성터는 돌이나 흙이 아닌 얼음을 재료로 하여 완벽하게 보수 작업이 끝나 있었다.
태양 빛이 난반사를 일으키면서, 눈에 비치는 모든 풍경이 다이아몬드처럼 반짝거렸다.
씩씩한 에이미조차도 지금 보이는 풍경 앞에서는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시로네는 흡족했다.
갈리앙트 유적지에 데려갔을 때만 해도 시작부터 일이 꼬이는 바람에 면목이 없었다. 앵무 용병단하고 사투를 벌인 것도 모자라 천국까지 따라가서 죽을 고비를 넘기지 않았던가.
당시의 고생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이번만큼은 즐거운 여행을 하리라 다짐했다.
“가 보자. 재밌겠다.”
시로네와 에이미는 눈밭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탑과 탑을 연결하는 무지개다리도, 흉벽을 따라 세워진 난간도, 성 내부에 설치된 계단도 전부 얼음이었다.
‘이래서 겨울 축제라고 부르는 거구나.’
기온이 올라가면 구조물이 붕괴될 것이기에 초봄만 되어도 유적지를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여름이 오면 얼음은 녹아 사라지고 을씨년스러운 성의 잔재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마치 겨울날의 추억이 한여름 밤의 꿈이었던 것처럼.
“시로네, 우리 저거 먹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