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268
‘평범한 취향이어서 다행이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우오린의 수집품인 엘 크라우치의 도자기 인형 같은 것은 악취미가 아니고서는 모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하니까.
“20실버를 주고 땄으니까 1골드만 받는다고 가정해도 80실버를 번 셈이네.”
“하하! 너다운 생각이네. 하지만 그런 걸 따질 때는 지나지 않았어? 마법학교 최고의 갑부가 말이야.”
“최고의 갑부? 내가?”
에이미는 시로네의 코트를 가리켰다.
“아르망. 장물 가치로만 20억 골드가 넘는다며? 그렇다면 경매에서는 최소 2배 이상 뛸 거 아냐? 한마디로 너, 지금 우리 학교를 통째로 매달고 다니는 거라고.”
그제야 깨달은 시로네는 눈을 깜박거렸다.
워낙에 상식을 초월하는 액수다 보니 검에 대한 가치를 따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40억 골드가 넘어가는 S급 오브제를 달고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검을 차고 있는 옆구리가 결리는 기분이었다.
‘이러다가 누가 훔쳐 가면 어떡하지? 아니지, 정신을 공유하니까 도둑맞을 일은 없겠구나.’
에이미는 자신의 가방에 얼음 여왕의 인형을 고이 집어넣었다. 지켜보고 있던 시로네가 바깥을 가리키며 말했다.
“게임해서 더우니까 열도 식힐 겸 나가자.”
“응. 나도 바람 좀 쐬어야겠다. 스케이트라도 탈까? 여기 빙질이 되게 좋다고 들었거든.”
시로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 아버지가 만들어 준 스케이트로 얼음 호수에서 신나게 놀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좋아! 그럼 스케이트장으로 출발!”
전투 마법사의 철학 (1)
스케이트장에는 연인들이 많았다.
시로네와 에이미는 빙상장의 외곽을 도는 흐름에 합류하여 스케이트를 탔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싱싱하게 맞부딪쳐 왔다.
앞사람을 따라 얼음 위를 미끄러지는 동안에는 에이미도 잠시나마 현실에서의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좋았던 기분은 조크레 일행이 스케이트장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순간 사라지고 말았다.
흐름에 합류하지 않은 그들은 빙상장의 중앙에서 스케이트 묘기를 선보였다.
규정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미운털이 박혀서인지 에이미는 그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야?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스케이트 타려고 온 거겠지. 신경 쓰지 마.”
에이미는 조크레 일행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
당당하게 졸업 시험에 합격하고 망중한을 즐기는 그들을 볼 때마다 탈락의 상처가 덧나는 기분이었다.
“됐어. 그냥 우리가 피해 주자. 어차피 땀은 식혔고, 다른 곳도 둘러보고 싶으니까.”
“그럴까? 알았어.”
시로네와 에이미는 어기적어기적 스케이트 날을 밀면서 출구를 향해 나아갔다.
“어이! 벌써 가려고?”
시로네가 돌아보자 조크레가 팔을 휘두르며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황급히 에이미를 끌어당기는데 그가 방향을 꺾으면서 급정거했다. 스케이트 날이 빙판을 갈면서 얼음 가루가 팍하고 뿌려졌다. 차가운 것들이 얼굴을 적시자 시로네의 미간이 좁혀졌다.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사람 얼굴에 대고.”
“하하! 뭘 그런 걸 가지고 화를 내? 들은 것과 달리 쫀쫀한 성격이네. 그냥 장난친 거잖아.”
“그러니까 왜 장난을 치는 건데요?”
에이미가 시로네를 밀치며 앞으로 나섰다.
“자꾸 따라다니는 이유가 뭐야? 할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해. 유치하게 애들처럼 이러지 말고.”
“오랜만에 만났잖아. 이것도 인연인데 재밌게 놀자고. 우리끼리는 아직 해결해야 할 숙제도 남아 있고 말이야.”
“해결? 무슨 해결?”
조크레 하면 생각나는 건 명문 학교에서 경쟁을 포기하고 도망치듯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는 것뿐이었다.
‘응? 설마……?’
에이미의 머릿속에 흐릿한 장면이 떠올랐다.
전학을 가기 전에 조크레가 사랑 고백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렇기에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사소한 사건일 뿐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시로네의 눈치가 보였다.
농담처럼 말을 했다고 데이트라는 말을 정말 농담으로만 받아들일 여자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에이미는 여자였고 백치도 아니었다.
남자와 여자가 단둘이 2박 3일 여행을 왔으면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각오하고 시로네를 따라나선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과거사로 괜히 시로네를 찝찝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고백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는 기분이 나쁘지 않겠지만 당사자가 앞에 서 있다는 건 다른 문제였으니까.
“됐어. 너랑 얘기하고 싶지 않아. 시로네, 우리 다른 데로 가자. 이런 애들하고 어울릴 필요 없어.”
에이미가 자리를 피하려고 하자 조크레는 시로네를 무시하듯 지나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잠깐 기다려. 하던 얘기는 마저…….”
조크레가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시로네가 어깨를 붙잡은 채로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싫다고 하잖아요.”
“너, 이 손 안 놔? 학교는 달라도 나는 네 선배야. 정식 마법사라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예요.”
조크레는 건방진 시로네의 모습이 황당했다.
“천한 신분 주제에 주위에서 떠받들어 주니까 아주 기가 살았군. 너, 그거 아냐? 에이미랑 나는 열세 살 때부터 알던 사이야.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언제 만난 게 무슨 상관이에요? 그렇게 따지면 우리는 열두 살 때 만났어요. 싫다는 사람 자꾸 괴롭히지 말고 가 주세요.”
“뭐? 열두 살에 만났다고?”
조크레는 시로네의 거짓말에 기가 찼다.
학술지를 달달 외운 덕분에 시로네의 과거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마법학교에 입학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그가 어떻게 열두 살에 에이미를 만날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귀족도 아닌 산꾼의 자식이.
“의외로 뻔뻔한 놈이군. 그런 거짓말이 통할 것 같아? 너, 이 바닥에서 선배에게 찍히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특히나 너처럼 빌붙을 곳도 없는 놈은 그냥 퇴출이야.”
“치졸한 협박이나 하는 선배들이 있는 곳이라면 들어가고 싶지도 않아요.”
“이 자식이 진짜!”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드는 시로네의 모습에 조크레는 이성을 잃고 주먹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주먹을 휘두르려는 순간 어디선가 눈뭉치가 날아와 뒤통수에 퍽 소리를 내며 박혔다.
전투 마법사의 철학 (2)
“아욱!”
골이 울릴 정도로 단단한 눈덩어리였다. 더군다나 그가 서 있는 곳은 미끄러운 빙판이었다.
중심을 잡지 못한 조크레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황당함은 잠시였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어떤 겁 없는 인간이 이런 장난을 친단 말인가?
“뭐야! 누구야!”
조크레는 뒤통수를 만지며 고개를 돌렸다.
회색 머리의 미소년이 스케이트장 밖에서 눈뭉치를 툭툭 던지며 서 있었다. 반대편 손에는 추운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아이스커피가 쥐여 있었다.
“아무리 여자에게 인기가 없어도 그렇지, 데이트 중인 커플을 건드리면 쓰나.”
낯이 익은 얼굴에 조크레가 눈을 가늘게 떴다.
비비안이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 아이…… 단테 맞지? 에어하인 단테.”
단테는 신발을 신은 채로 스케이트장에 들어왔다. 빙판을 박차면서 한쪽 다리로 미끄러지듯 다가오자 루드반스와 비비안이 자신도 모르게 길을 열어 주었다.
‘세상에. 진짜 단테잖아?’
비비안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마법학교에 입학했을 당시부터 왕국 1등의 자리를 놓친 적이 없던 만인의 우상이었다. 그런 단테였기에 시로네에게 패했다는 소식이 학술지에 실렸을 때 왕국의 모든 학생들이 경악했던 것이다.
조크레도 학창 시절에는 단테의 기사를 스크랩해서 노트에 붙여 두고 각오를 불태웠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학생 시절의 추억에 얽매일 것인가.
무엇보다 통성명도 하기 전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은 일생일대의 굴욕이었다.
“어이, 너…….”
단테는 조크레의 말을 무시하고 시로네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다, 시로네. 에이미도.”
에이미가 팔짱을 끼고 그를 흘겨보았다.
“어쭈? 이제는 선배 이름도 막 부르네?”
“하하! 어차피 다음 학기부터는 같은 졸업반인데 뭐.”
에이미도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이천번 대결 당시에는 깍듯이 선배 대접을 받았기에 친근한 태도가 오히려 어색했을 뿐이다.
하지만 단테의 성격은 정말이지 쿨해서, 그런 기억은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학교에서는 라이벌이라도 밖에서 동창을 만나니 반가움이 앞서는 게 사실이었다.
시로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런 곳에서 보네. 어쩐 일이야?”
“보다시피, 놀러 왔지. 방학 때마다 여행을 하거든. 그런데 크레아스는 처음이라. 누가 겨울 축제를 추천해 주더라고.”
“그렇구나. 혼자 온 거야? 클로저하고 사비나는?”
“걔들은 방학하자마자 특훈. 지금쯤 지옥이 뭔지 깨닫고 있을걸. 하여튼 어울리기 피곤한 애들이라니까.”
단테가 어깨를 으쓱하자 시로네는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게 놀다가도 문득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하지만 단테의 여유로운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부담감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테, 역시 대단하구나.’
가끔씩 이천번 대결을 회상할 때면 단테를 이겼다는 사실에 깜짝깜짝 놀라고는 한다.
마법을 떠나서 그에게는 스타성이 있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힘은 노력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수도 바슈카 출신답게 옷도 잘 입었다.
푸른색 코트에 검은 스키니 바지를 입었고 보라색 머플러를 감은 모습은 튀지 않으면서도 빛나 보였다.
게다가 한쪽 귀에는 피어싱까지 하고 있었다. 패션에 문외한인 시로네의 입장에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조크레는 생각이 달랐다.
완전히 무시당했다.
그것도 에이미가 보는 앞에서. 아니, 에이미의 남자 친구인 시로네가 보는 앞에서.
가장 화가 나는 점은 시로네와 에이미, 단테가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너무나 빛나 보인다는 것이었다.
‘천재들은 천재들끼리 논다 이거냐? 이렇게 모아 놓고 보니까 진짜 짜증 나네.’
조크레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말을 던졌다.
“어이, 단테.”
“응?”
단테가 빨대를 물고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에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는 까맣게 잊은 듯했다.
“사람을 때렸으면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그것도 마법사 선배에게.”
“선배? 네가 누군데?”
“아인스 마법학교 졸업생 조크레다. 너같이 유망주 소리나 듣는 위치가 아니란 말이야.”
단테는 빨대를 쪽쪽 빨면서 눈을 깜박거렸다.
단테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조크레는 불안했다.
자격지심이라고 비하해도 할 말은 없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머릿속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물론 아인스 마법학교는 조크레가 사랑하는 모교였고 전학을 선택한 일에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다.
하지만 단테는 무려 왕립 마법학교 출신이었다.
왕국 최고의 명문.
비록 지금은 시로네에게 당한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알페아스 마법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어차피 그곳 또한 5대 명문인 건 마찬가지.
무엇보다 공인 제2급의 대마법사인 올리비아의 직전 제자였으니 자신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미안. 못 들어 본 이름인데. 그리고 재밌게 노는 커플에게 찝쩍거린 건 너잖아?”
“이게……!”
조크레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못 들어 본 이름이라는 말이 가시처럼 가슴에 박혔다.
마이너에서는 제법 이름이 알려졌기에 일말의 기대를 갖고 있던 루드반스와 비비안도 시선이 차가워졌다.
“단테, 착각하지 마라. 네가 뭐라도 된다고 생각하냐? 그래 봤자 학생이야. 그리고 시로네에게 처절하게 패했지. 그런 시로네는 천민이고. 세상이 인정하는 천재니 뭐니 하던 에이미도 결국 재수생일 뿐이라고.”
“아주 줄줄이 꿰고 다니네.”
단테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그게 너희와 우리의 차이점이지. 우리는 학술지에 실리고, 너희는 그걸 사서 읽고 말이야.”
오히려 시로네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신이 촌철살인을 좋아한다면 단테는 상대의 약점을 가차 없이 짓밟아 버린다.
쿨하다면 쿨한 거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지옥이었다.
예상대로 조크레 일행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눈에서는 살기마저 엿보였다.
도발을 할 생각이었다면 제대로 먹힌 것이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걱정이 앞섰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조크레는 분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어째서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하는가?
상식적으로 입장은 반대가 되어야 맞다.
졸업에 성공한 사람은 한껏 거드름을 피우고, 저들은 그런 자신을 질투와 시기의 눈으로 쳐다보아야 정상인 것이다.
‘흥! 한심한 것들! 학교 간판이 인생을 대신 살아 줄 것 같아?’
조크레는 시로네 일행을 노려보며 어떻게 하면 저들을 굴복시킬 수 있을까 고민했다.
‘응? 저건…….’
그때 시로네의 코트 아래로 무언가 반짝이는 게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검집이었다.
‘어째서 축제에 검을 차고 다니지? 아니, 그보다 천민이잖아? 무기를 소지해도 되나?’
조크레는 곰곰이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깨닫고 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그랬군, 그랬어. 결국 너도 똑같잖아.”
조크레의 성격이 갑자기 변하자 단테가 무섭다는 듯 슬그머니 물러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조크레는 시로네를 가리켰다.
“당당한 척하더니 자격지심에 절어 있는 놈이었잖아? 오죽하면 천민이 검을 차고 다니겠어? 하긴, 애인이 최고 귀족이니 구색이라도 맞추고 싶었겠지.”
비비안이 살펴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정말이네? 근데 저거 불법 아냐?”
“당연히 불법이지! 어디 천민이 검을 차? 이래 놓고 네가 큰소리를 칠 수 있어?”
시로네에게 다가간 조크레는 코트를 열어젖혔다.
어차피 평민이 검을 차는 건 중죄에 해당하기에 손 속에는 거침이 없었다.
단추가 뜯어지면서 코트가 열리고, 허리에 차고 있던 아르망의 은색 검집이 드러났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한심하기는. 이런다고 귀족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시로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물러서세요. 그리고 코트 변상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