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276
얼음 여왕이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나약한 인간들이여, 내 앞에 무릎을 꿇으라.”
얼음 여왕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하자 관광객들이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목소리 좋고! 그럴듯한데?”
“어이, 여왕님! 이쪽도 돌아보라고. 그러지 말고 이 기회에 얼음 여왕하고 악수나…… 컥!”
남자가 갑자기 목을 부여잡고 무릎을 꿇었다.
동시다발적으로 사람들에게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피가 몰린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었다. 필사적으로 공기를 빨아들이지만 호흡은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정상적으로 서 있는 사람은 시로네 일행뿐이었다.
시로네는 사람들의 변화를 관찰했다. 어느새 그들의 목에 원뿔 가시가 박힌 목걸이가 채워져 있었다.
리리아가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저건 법륜……?”
법륜은 형태에 율법의 이치를 담는 제령회의 퇴마 도구로, 완벽한 원에 근접할수록 효력이 극대화된다.
민간에서 구할 수 있는 법륜은 그저 흉내만 낸 것으로 기껏해야 심신의 안정을 도모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제령사가 소지하는 정식 법륜은 열반의 경지에 도달한 무구 제작사가 아니면 제조부터 불가능했다.
리리아가 보기에 사람들의 목에 걸린 법륜은 진품이었다.
원의 완벽성을 눈으로 구별할 수는 없지만, 오랜 수양을 거친 제령사들은 심안으로 원의 기질을 느낄 수 있었다.
“구속의 법륜. 이 세계의 물건이 아니야. 너희도 조심해. 율법의 파동에 휩쓸리면 저런 꼴이 될 테니까.”
율의 파동에 당한 사람들 모두가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을 꿇자 법륜이 느슨해지며 비로소 기도에 공기가 들어왔다.
여기저기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컥! 컥! 뭐야? 이 목걸이 누가 채웠어?”
“어이! 누가 제발 이것 좀 풀어 줘!”
겁에 질려 소리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조크레는 등골을 타고 흐르는 전율을 느꼈다.
법륜의 형태는 얼음 여왕 고유의 기억이 구현된 것이지만 사람들의 목을 조이는 방식은 그가 제안한 전략이었다.
얼음 여왕은 세상의 규칙을 바꿀 수 있다.
사실 이 정도까지 가능할까 싶었지만 모두가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보자 확실히 깨달았다.
800년 전 시대를 풍미했던 얼음 여왕의 전설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됐다! 정말로 됐어!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이대로라면 세상을 지배하는 일도 꿈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800년 동안 동면을 취해서인지 그녀는 과거의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던 마법사가 사탕 하나 주면 구슬릴 수 있는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얼음 여왕은 내가 갖겠어.’
일단 이곳을 정리한 이후에 얼음 여왕을 살살 구슬려 자신의 여자로 만들 생각이었다.
팔백 살이 넘은 사람과 사귄다는 게 이상하기는 했지만, 잘만 구슬리면 넘어올 듯했고, 무엇보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5년 전에 자신을 매몰차게 차 버렸던 에이미와 비교해도 조금도 떨어지는 외모가 아니었다.
혼자서 그런 망상에 빠져 있는데 얼음 여왕이 조크레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이냐?”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물어보며 의지하는 얼음 여왕의 태도에 조크레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심기를 거슬릴 필요가 없었기에 실제 여왕을 대하듯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네. 모두가 여왕님에게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리리아는 얼음 여왕의 개성을 이루는 대부분의 요소에 조크레의 입김이 작용했음을 깨달았다.
‘결국 예언대로인가…….’
대부분의 강림 신화가 그렇듯이 이번에도 얼음 여왕은 1명의 인간을 만나 세상을 악의 구렁텅이로 빠트릴 터였다.
시로네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살풍경을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대체 이게 뭐지? 마법은 아닌 것 같은데.”
율법을 모르는 입장에서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등가교환이 아니다.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목을 조이는 법륜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천국의 요정부장 이기린의 규정외식도 이렇게까지 해괴하지는 않았다.
설명할 시간이 없는 단테가 짧게 말했다.
“율법이라고 불리는 능력이야. 조심해. 저 여자는 세상의 규칙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어.”
“규칙의 변화?”
시로네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아카식 레코드였다.
하지만 무한의 마법사가 아니고서는 어떤 존재도 이토록 거대하게 규칙을 뒤틀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
처음부터 아카식 레코드일 경우였다.
“어떤…… 개념체 같은 건가?”
리리아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인간의 육체로 헌신한 정신체를 보고 본질을 파악한다는 것은 영적 계통의 종사자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이 아이, 율법을 알고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이 전체의 규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간다.
신단에서도 소수에게만 전해지는 율법의 메커니즘을 시로네가 알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맞아. 애초에 위격을 따질 수 없는 정신체였어. 데미갓이라고 부르는 현상이야. 율법을 모르는 너희가 방어하는 건 불가능해. 나한테서 떨어지지 마.”
에이미가 주먹을 들고 조크레에게 소리쳤다.
“너!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는 거야?”
“하하하! 꾸민다고? 아직도 이게 장난으로 보여? 우리는 세상을 정복할 거야.”
“헛소리 좀 하지 마! 진짜 맞을래?”
조크레는 코웃음을 치고는 사람들에게 전했다.
“모두 여왕님을 경배하라. 명에 따르지 않으면 여왕님의 율법이 너희를 죽일 것이다.”
법륜이 목을 조이고 들어가자 시퍼렇게 질린 사람들이 손으로 바닥을 짚고 컥컥거렸다.
그러다가 쥐어 짜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여, 여왕님 만세!”
“여왕님을 따르겠습니다!”
여왕을 경배한 사람들의 얼굴색이 평온한 상태로 되돌아오자 시로네는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조크레의 지시에도 율법이 적용되고 있다. 논리적으로 대상을 지정하는 마법과 달리, 율법은 전체의 균형을 재조정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얼음 여왕을 찬양하는 소리가 하늘을 찌르자 조크레는 생애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쾌감을 맛보았다.
마치 그들 모두가 자신을 경배하는 듯했다.
“어때? 이것이 나의 힘이다. 지금이라도 내 밑으로 들어온다면 저런 꼴은 면하게 해 주지.”
조크레는 시로네 일행이 벌벌 떠는 모습을 기대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어느 누구도 움직이지 않고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단테가 삐딱하게 걸어 나왔다.
“어이, 너.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냐? 네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건지 알고 있어?”
“하! 내가 미쳤다고 생각해? 천만에! 사람들이 어떤 상태인지 보고도 몰라? 너희도 결국에는 저런 꼴이 될 거다.”
“너, 방금 수백 명을 죽일 뻔했어.”
조크레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세상을 지배하겠다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나 말하고 있는 거냐? 그 말에 정말로 책임질 수 있는 거겠지?”
“크으윽……!”
조크레는 대답하지 못했다.
세상의 지배자가 된다는 것은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품어 봤을 야망이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감옥에 가는 것도 싫고, 죽는 건 더더욱 싫은 1명의 인간일 뿐이었다.
얼음 여왕은 규칙을 바꿀 수 있다. 따라서 목줄을 채워 놓으면 죽기 싫어서라도 명령에 복종할 것이다.
여기까지가 조크레의 계산한 생각의 전부였다.
하지만 만약 거부한다면?
모조리 목뼈가 부러진 상태로 시체가 되어 버린다.
물론 죽고 싶은 사람은 세상에 없겠지만, 일단 상상을 하고 보니 견딜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내가 정말로 세상을 정복할 수 있을까?’
단테의 말대로 잠시 미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비비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흥!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우리의 말에 따르면 아무도 죽지 않아! 그렇다면 첫 번째 희생자는 너희가 될 거야!”
조크레는 멍한 표정으로 비비안을 돌아보았다. 하룻밤 사이에 그녀의 눈빛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언제까지 너희가 세상의 주인공일 줄 알았어? 지금 이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건 우리야!”
‘비비안…….’
조크레는 비비안을 보고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찾아온 한 번의 기회를 잡기 위해 모든 것을 잃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래,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다. 여기까지 왔으면 무엇이 되었든 끝장을 봐야 하는 것이다.
거대한 사업에는 용기가 필요한 법이니까.
평정심을 되찾은 조크레가 손을 내밀며 걸어 나왔다.
“무릎을 꿇어라, 에이미. 그리고 나한테 잘못을 빌어라. 그러지 않으면 이 자리의 모두를 죽이겠다.”
조크레의 말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고개를 쳐들었다. 벌써부터 법륜이 목을 조여 오는 기분이었다.
“어이! 무릎을 꿇어! 이러다 정말 죽겠어!”
“망할 꼬맹이들아! 빨리 시키는 대로 하란 말이야! 잘못했다고 빌어!”
관광객들은 시로네 일행이 조크레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
설령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더라도 당연히 조크레에게 복종을 해야 마땅한 일이다.
“빌어! 저분들에게 싹싹 빌란 말이야! 나에게는 처자식이 있다고! 아무것도 아니잖아!”
“제발 나 좀 살려 주게! 시키는 대로 해!”
시로네 일행은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에서 주도권을 내주면 앞으로도 조크레 일행의 의도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다.
에이미가 싸늘한 눈으로 조크레를 노려보았다.
“어째서 하필 나야? 왜 굳이 내 사과를 받고 싶은 거지? 내가 네 마음을 받아 주지 않아서?”
에이미가 정곡을 찌르자 조크레의 얼굴이 붉어졌다.
스케이트장에서의 당황하던 그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곳은 전장이었고, 개인적인 감정을 신경 쓰는 것은 사치일 뿐이었다.
‘효과가 있어. 저 녀석, 정말 그것 때문에 나한테 사과를 받고 싶어 한 거야? 어리석기는…….’
조크레를 도발한다고 딱히 좋은 대책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변수를 만들려면 상대를 흔들어 놓아야 했다.
작전대로 조크레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좁은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분노가 치밀었다.
“닥쳐! 내 말에 따르지 않으면 모두 죽어! 정말로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죽어도 상관없다는 거야?”
단테가 말했다.
“사람들이 죽는다면 그건 네가 죽인 거지. 우리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살인자가 돼서 평생 도망치며 살든지.”
단테는 진심이었다.
마법사에게 선과 악을 구별하는 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해결책이 없는 상황이라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기보다는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게 나았다.
“에이미, 저딴 녀석 말에 휘둘릴 필요 없어. 그럴 배짱도 없는 자식이니까.”
조크레가 위협적으로 소리쳤다.
“흥! 과연 그럴까? 정말 죽여 줘? 앙!”
겁에 질린 사람들이 에이미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이 망할 계집애야! 정말 다 죽일 셈이야? 무릎을 꿇으라고! 잘못했다고 빌어!”
“제발 나 좀 살려 줘! 이러다가 다 죽겠어!”
에이미는 입술을 짓깨물었다.
그녀의 판단도 단테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상대의 요구에 응해 봤자 더 큰 요구가 기다릴 뿐이다.
하지만 막상 지목을 당한 입장에서는 수백 명의 목숨이 자신의 판단에 걸려 있는 셈이니 피가 마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시간을 끌자. 시키는 대로 할게.”
에이미가 다가오자 조크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그렇지, 제까짓 게 뭐라고 버티겠어?’
그때 시로네가 에이미의 어깨를 붙잡았다. 에이미가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자 조크레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뭐 하는 거야? 사람들이 전부 죽어도 애인의 자존심만은 챙겨 주고 싶다 이거냐?”
시로네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에이미가 네 말에 따라야 할 이유는 없어.”
조크레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소위 말하는 마법사의 냉철함이라는 것인가?
아니, 오만함이다.
애인의 자존심을 세우는 일이 수백 명의 목숨보다 가치가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율의 파동 (3)
“주제 파악을 하는 게 어때?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거냐? 학교에서나 네가 최고지, 이런 곳에서 이름값이 통할 것 같아?”
시로네는 조크레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대로 버틴다면 사람들이 죽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될 일이라면 훨씬 간단한 해결책이 있었다.
시로네는 마치 저격수처럼 시야의 포커스를 좁혔다. 얼음 여왕의 얼굴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한 번에 끝내야 해.’
최단시간 내에 얼음 여왕을 제거한다.
그렇게 되면 이곳의 공간을 지배하고 있는 이상한 능력도 사라질 것이다.
시로네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자 조크레는 심리적인 압박감에 시달렸다.
마치 포커 게임에서 깡패를 들고 있는 게 확실한 사람이 재산을 올인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대체 어떻게 돼먹은 녀석들이야?’
수백 명의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도 배짱을 부리다니. 그의 상식으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을 얕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감히 나를 우습게 봐!”
조크레가 소리치는 순간, 시로네의 아르망이 칼집에서 빠져나와 섬광처럼 쇄도했다.
아르망이 노리는 것은 조크레가 아닌 얼음 여왕이었다.
얼음 여왕은 율법을 발동해 빠르게 멀어져갔다. 그럼에도 속도에서 밀리자 아예 하늘로 날아올랐다.
‘파괴의 율법.’
얼음 여왕의 율법이 아르망에게 씌워졌다. 하지만 마검은 부르르 떨었을 뿐 파괴되지 않았다.
‘어째서?’
얼음 여왕에게는 생소한 경험이었다.
‘화신체?’
완벽한 삼위일체를 이룬 물체는 율법으로 변화시킬 수가 없고, 천국에서는 이를 화신체라 불렀다.
얼음 여왕은 빙결의 율법을 발동했다. 아르망의 칼날에 서리가 끼면서 얼음이 덩어리지기 시작했다.
속도가 느려지자 얼음 여왕은 여유를 되찾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에 부딪힌 듯 등짝에 충격이 가해졌다.
‘뭐지?’
의문의 답을 찾을 겨를도 없이 빙결의 율법을 증폭했다. 거대한 얼음 덩어리에 갇힌 아르망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지상으로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