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283
신적초월 (3)
동기들이 부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테스. 전부터 느낀 건데 너 정말 몸 예쁘다. 따로 운동이라도 하는 거야?”
“운동은 무슨. 훈련 따라가기도 벅찬데. 게다가 딱히 좋은 것도 아니야. 오늘처럼 근접박투라도 걸리면 되게 거추장스럽다고.”
동기가 이해한다는 듯 안쓰러운 눈웃음을 지었다.
“하다보면 별별 애들이 다 있으니까. 은근슬쩍 닿는 남자들도 있고. 물론 나에게 그러면 허리를 분질러버리겠지만.”
또 다른 동기가 거들었다.
“불리한 건 사실이지. 하루 열 끼를 고기만 먹고 사는 근육 괴물들이랑 힘으로 겨루어야 하니까.”
탱크탑을 착용한 테스가 훈련복을 입으며 말했다.
“어차피 여자에게 유리한 종목도 있으니 뭐. 어쨌든 마지막 평가니까 열심히 하자.”
“그래. 휴가 받으면 잠부터 자야지. 근육도 좀 빼고. 올해에는 꼭 남자친구를 사귈 거야.”
옷을 갈아입은 동기가 가볍게 몸을 풀면서 물었다.
“그러고 보니 테스는 어때? 리안하고 진도는 아직도 그대로야? 그 아이 진짜 무심하다.”
무릎을 뒤로 구부린 테스가 발바닥을 엉덩이까지 당기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괜찮아. 리안은 꿈이 크거든. 남자친구가 성공하면 나야 좋은 거지.”
“어휴. 그러지 말고 튕기기도 하고 그래봐. 너처럼 예쁜 애가 좋아해주면 절을 해도 모자랄 판국에.”
“정말 괜찮다니까.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뭐.”
친구들 앞에서는 웃어넘겼지만 사실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근래 들어 리언은 예전보다 말 수가 줄어들어 있었다. 고민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도무지 말을 해주지 않았다.
‘대체 뭐야? 나한테까지 이러기야?’
오늘까지는 참아보기로 했다. 어차피 내일이면 휴가니 심각한 고민이더라도 편하게 물어볼 수 있으리라.
탈의실을 나서자 생도들이 복도를 따라 훈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인파 속에서 한 남자가 빠져나와 테스에게 다가왔다. 테스는 즉각 싫은 티를 냈으나 사갈시에 익숙한 그는 다정한 눈빛으로 말을 걸어왔다.
“안녕, 테스? 여기서 보네.”
“같은 건물이니까 당연히 보겠지. 누가 들으면 지옥에서라도 만난 줄 알겠네.”
남자의 이름은 바위어. 제1계급 가문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현 토르미아 국방부 차관이었다.
식민지 사령관인 테스의 아버지와 오랜 전우로 어릴 때부터 테스와 알고 지냈다.
각진 사각턱에 금발머리, 깊은 눈동자는 누가 봐도 매력적이었다. 몸은 제대로 각이 잡혔고 검술 실력도 출중해서 사교계에서는 벌써부터 혼수자리가 들어온다는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바위어는 자신의 여자가 될 1순위에 테스를 꼽았다. 엘자인 가문의 위세도 대단하지만 아름다운 외모와 멋진 몸매는 자신의 짝이 되기에 부족한 점이 조금도 없었다.
“테스. 오늘 저녁이나 하는 게 어때? 반 년 동안 열심히 훈련했으니까 말이야.”
“미안하지만 안 돼. 리안하고 선약이 있어서.”
“거짓말하지 마. 그 자식이 너를 받아주지 않는다는 건 모든 생도가 알고 있다고.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오랜 친구와 저녁 정도는 먹을 수 있는 거잖아.”
“싫어. 너도 싫고, 리안이 혹시라도 너를 의식하게 되는 것도 싫어. 그러니 옛 정은 잊고 서로 모른 척하자.”
바위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영리하고 사리분별이 확실한 테스가 리안에게 꽂힌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실력도 별로고 무엇보다 미래조차 없다. 스키마도 못하는 검사가 어떻게 지휘관이 된단 말인가?
“테스. 잘 생각해야 돼. 언제까지 어린애처럼 굴 거야? 너도 꿈이 있잖아. 나와 함께라면 그 꿈을 이룰 수 있어. 리안은 절대로 널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고.”
테스는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바위어는 그녀의 눈빛에서 철벽을 느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를 차지하고 싶은 소유욕은 강해졌다.
“테스. 뭐하고 있어? 가자.”
차갑던 테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녀는 바위어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 복도 끝에서 기다리는 리안에게 달려갔다.
‘저 자식이……!’
바위어는 굴욕감에 몸을 떨며 리안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리안은 무심한 눈빛으로 살기를 흩어버리고는 돌아설 뿐이었다.
리안과 테스는 말이 없었다. 리안은 근래 들어 과묵했고 테스는 바위어와의 관계를 리안이 신경쓸까봐 노심초사했다.
건물 밖으로 나온 뒤에야 리안이 말을 꺼냈다.
“바위어가 또 귀찮게 구는 거야?”
테스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제까짓 게 귀찮게 굴면 어쩔 건데? 설마 신경 쓰이는 건 아니지? 앞으로는 말도 걸지 말라고 했어.”
“걱정하지 마. 신경 쓰지 않으니까.”
테스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리안이 바위어를 의식한다면 그것도 골치 아픈 일이지만, 막상 무심한 대답을 듣고 나니 하찮은 취급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별로였다.
“리안. 요즘 들어…….”
“시로네는 얼마나 강해졌을까?”
테스는 입을 다물었다.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처음부터 리안의 생각 속에 자신의 자리는 없었다.
리안이 날마다 극한의 훈련을 하는 이유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시로네에게 견줄 수 있는 기사가 되기 위해서였다.
기사서약의 주종관계라면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녀에게도 시로네는 소중한 친구였기에, 가끔씩은 둘의 관계를 잊어버리는 게 문제였다.
테스는 서운함을 털어내고 리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엄청 강해졌을 걸? 시로네는 천재니까. 하지만 너도 최선을 다 했잖아. 지금 네 모습을 보면 놀라서 까무러칠 거야.”
리안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최선을 다 할 때마다 느끼는 건 시로네라는 인간의 비범함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도 오랜 고민의 해답이 보이고 있었다. 더 이상 갈등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제대로 놀라게 해줘야지.”
훈련장으로 들어가자 벌써부터 많은 생도들이 모여 있었다. 오늘이 지나면 왕국에서 내로라하는 기사 지망생들의 성취도가 한 장의 성적표로 또 다시 찍혀져 나오게 된다.
테스는 대부분의 평가에서 상위권을 차지하여 이미 선두그룹에 안착한 상태였다.
반면에 리안은 여전히 꼴등을 벗어나지 못했다.
“부대 차렷!”
쿠안이 훈련장으로 들어오자 생도들이 모두 기립했다. 처음 입소했을 때의 긴장한 모습은 사라지고 하나같이 절도 있는 기개가 느껴졌다.
“쉬어. 오늘은 레슬링 평가다. 알고 있겠지?”
“네!”
통일된 복창 소리가 메아리쳤다.
깐깐한 쿠안이라도 만족스러울 정도였지만 1년 중에 가장 기분 나쁜 날을 맞이한 터라 말투는 까칠했다.
“뭐해? 상의 탈의해.”
경주라도 하듯 훈련복의 단추가 풀어졌다. 살색의 상반신을 드러낸 남자들은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요지부동으로 쿠안을 주목했다.
어느 누구도 여자 생도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기사 수업을 받는 자로써 무례한 짓이었고, 속된 마음이 있다고 해도 쿠안에게 걸리는 날에는 끝장이었다.
하지만 남자들끼리 몸을 살피는 것에는 쿠안도 별다른 제제를 걸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수컷의 호전성이고 야생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평가 기간이 가까워질수록 공용목욕탕을 이용하는 생도의 수는 현저히 줄어든다. 육체는 솔직해서 훈련의 과정이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경쟁을 앞두고 몸을 보이는 것은 전술적으로 좋지 않다. 상의를 탈의해야 하는 레슬링 평가항목이 마지막 날에 치러지는 것도 이러한 이유였다.
생도들의 시선이 집중된 곳은 바위어의 몸이었다. 마치 갑옷을 입은 것처럼 커다란 근육들이 갈라졌고 목부터 시작되는 승모근은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들었다.
‘엄청난 벌크 업이다. 한 달 동안 얼마나 키운 거야?’
‘인간 골렘이잖아. 걸리면 뼈도 못 추리겠어.’
검의 기술에서는 세검을 다루는 테스가 1위지만 신체 능력만 따지자면 중장보병을 보직으로 희망하는 바위어가 우위였다. 특히나 레슬링은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장기로 맨손으로 곰의 목도 꺾어버리는 실력자였다.
“우아아아…….”
이곳저곳에서 감탄사가 터지자 바위어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감탄의 대상은 바위어가 아닌 리안이었다. 모두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리안의 몸은 하나의 소근육도 놓치지 않고 발달해 있었다. 인간의 피부 안에 저토록 다양한 근육이 들어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완벽하게 집약되어 있다는 느낌. 마치 형틀에 넣고 쥐어 짜낸 것과 같은 단단함이 전해져왔다.
육체파라면 지지 않는 남자 생도들조차 넋을 잃었으니 테스의 눈에 하트가 새겨진 건 당연했다.
‘리안…….’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이내 아련하게 변했다. 리안이 지금의 몸을 완성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미르의 팔을 먹은 이후, 리안의 오른팔은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상태였다. 완력이 강해진 것은 좋지만 밸런스가 무너졌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리안은 대검보다 무거운 곤봉을 하루에 3천 번씩 휘두르는 극한의 훈련을 감행했다.
생물의 피드백이란 참으로 놀라워서, 시간이 지날수록 몸 전체가 오른팔과 균형을 맞추는 식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현재 리안의 몸이었다.
완벽한 신체균형을 이룬 그의 근력은 반년 전에 비해 무려 4배나 강해져 있었다.
어쩌면 스키마를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 중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일 지도 몰랐다.
‘검에 몸을 맞춰버렸군.’
생도들이 리안의 외형에 감탄하는 동안 쿠안은 기능적인 측면에 주목하고 있었다.
근력이나 내구력 같은 1차원적인 목표를 위해 만든 몸이 아니다.
검을 휘두르는 작업에 최적화된 형태였다.
‘하지만 상당히 기묘하다. 단련한 자의 몸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마치 처음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쿠안의 위화감은 정확했다.
리안의 몸은 비정상적인 오른팔의 피드백을 통해 보통의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완성태의 한계를 넘어선 상태였다.
‘어쨌거나 지켜보면 알게 될 일이지. 스키마 유저들 사이에서 저 육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쿠안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었다.
“모두 주목. 오늘 평가에 대해 짧게 설명하겠다.”
정신을 차린 생도들이 쿠안을 주목했다. 짜증스럽게 리안을 노려보던 바위어도 고개를 돌렸다.
“레슬링은 중장보병 보직의 전공과목이다. 따라서 너희 같은 애송이들에게 특별한 기술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2인 1조가 되어 대결을 펼치며 밀착된 상태에서라면 타격도 상관없다. 어차피 구별할 수도 없으니까. 체급이 다르기 때문에 승패는 평가 항목에 들어가지 않고, 또한 ‘접기’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쿠안의 마지막 말을 들은 생도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스키마는 가상의 인체도식으로 특정 빌드의 도식을 여러 장 겹쳐서 효력을 발휘한다.
‘접기’는 스키마의 고등 기술로 특정 인체도식을 반으로 접어 마치 두 장을 겹친 것과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근력 강화를 베이스 테크닉 트리로 삼은 검사가 접기를 시행했을 경우 근력이 두 배 이상 상승한다.
더욱 높은 수준으로 들어가면 두 번의 접기가 들어가고 이를 ‘더블’이라고 부른다.
이런 식으로 트리플, 쿼드라, 펜타로 발전되며 현재까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접기의 한계는 7회로 알려져 있다.
물론 생도수준에서는 싱글조차도 어려운 기술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닌 카이젠 검술학교는 토르미아에서 가장 많은 인재들이 모이는 명문.
아직은 교관들에게 애송이 취급받는 그들이라도 절반 이상이 기본적인 접기 정도는 구사할 수 있었다.
테스는 리안을 돌아보았다. 예상대로 표정이 어두웠다. 리안의 실력은 다른 생도에 비해 뒤떨어지는 편이 아니다. 하지만 평가 항목에 스키마가 들어가는 한 언제까지고 꼴등은 그의 차지였다.
스키마의 기술에는 접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체 도식 두 장의 성질을 한꺼번에 발현시키는 ‘투과’나 테크닉 빌드를 거꾸로 뒤집는 ‘역전’, 인체도식을 사선으로 접는 ‘교차’등 수많은 고등기술이 개발되어 있다.
신적초월 (4)
아직까지는 육체능력만으로 비등하게 버티지만 결국 경쟁자들의 수준이 높아지면 결국 격차는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학교에서도 리안의 사정을 알면서도 선뜻 예외 규정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1조부터 평가를 시작하겠다. 2조, 3조는 나와서 몸을 풀고 나머지는 쉬어.”
1조에 속한 생도들이 눈을 부라리며 훈련장으로 향했다. 평가지를 들고 자리에 앉은 쿠안이 시작 신호를 보내자 괴물 같은 기합을 내지르며 난폭한 육탄전을 벌였다.
쿠안이 대결에 집중하자 생도들은 여유를 되찾았다. 언제나 그렇듯 테스가 리안의 옆자리로 찾아왔다. 평가를 앞두고 리안과 대화를 나누는 게 좋았다. 마치 전쟁터에서 연인과 단 둘이 있는 기분이 든다고 할까?
하지만 테스의 소소한 즐거움은 바위어가 다가오는 것으로 망치고 말았다.
발달된 턱을 치켜세우며 걸어온 그가 리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이, 리안. 어때? 이번에는 꼴등을 면할 수 있겠어?”
“신경 꺼. 네 일 아니니까.”
“하하! 물론 그렇지. 꼴등 같은 거야 내가 알 바가 아니지. 하지만 갑자기 재밌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어쩌면 너랑 연관이 있을 수도 있고.”
“무슨 소리야?”
리안이 돌아보자 바위어가 엄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랑 붙는 게 어때? 레슬링. 혹시 알아? 최강자인 나를 꺾으면 학교에서도 너를 인정할지. 꼴지를 벗어나려면 뭐든 해봐야 하는 거 아니겠어?”
리안은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되돌렸다.
“누군가의 인정 따위 필요 없어. 싸워야 한다면 누구하고도 싸우겠지만, 쓸데없는 힘자랑은 하고 싶지 않아.”
바위어는 희미하게 웃었다. 싸움은 피하고 싶고 자존심은 세우고 싶은 전형적인 약자의 말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자존심이 발목을 잡게 될 터였다.
“흐음. 지금 말에 책임 질 수 있는 거겠지?”
그렇게 말한 바위어는 훈련장을 살폈다. 그리고 2조의 대결이 끝나가는 틈을 놓치지 않고 손을 들었다.
“교관님! 건의할 사항이 있습니다.”
“뭐야?”
“리안과 겨루고 싶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이미 두 사람 사이에 협의는 끝난 상태입니다.”
생도가 평가 방식을 바꾸는 건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쿠안도 특별히 생각에 잠겼다. 리안이 대상이라면 그에게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동기들 중에 육체능력이 가장 뛰어난 바위어를 상대로 심적초월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같은 조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하겠다.”
리안과 바위어가 협의를 마쳤어도 다른 조원들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바위어는 자신만만했다.
어차피 레슬링으로 자신을 이길 상대는 없으니 고득점을 얻기 위해서는 제안을 마다하지 않을 터였다.
예상대로 바위어의 상대는 순순히 수긍했다.
승패가 성적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해도 압도적인 실력 차가 나는 상대라면 장기를 발휘하기가 힘들었다.
리안의 상대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스키마 유저가 아닌 리안이라면 잘해봐야 본전이고 못하면 심각한 손해였다.
각자의 이해득실이 맞물려 결착이 나자 쿠안이 평가지의 이름에 두 줄을 긋고 조원을 바꿨다.
“좋다. 리안과 바위어는 17조로 들어간다.”
바위어가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리안의 옆에 앉자 테스는 알 수 없이 불안했다.
실전 검술에서 리안을 제압할 사람은 동기들 중에서도 많지 않을 테지만 레슬링의 바위어는 정말로 위험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대결을 제안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부디 평가의 일환으로만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바위어가 굳어 있는 리안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어때? 진짜로 나랑 붙게 되어버렸는데? 이제와 후회되는 건 아니겠지? 무서우면 지금 말하고. 살살 해줄 테니까.”
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없다면, 따로 말을 지어내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후로 평가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8조가 경기장에 들어가자 10조인 테스가 나갈 채비를 했다. 레슬링은 격한 운동이기 때문에 미리 스트레칭을 해두지 않으면 부상을 당할 위험이 높았다.
“리안 갔다 올게.”
“그래. 열심히 해.”
바위어가 한마디를 보탰다.
“별 것 아닌 상대야. 상위권의 실력을 보여주고 오라고.”
테스는 바위어의 말을 무시하고 훈련장으로 향했다. 그럼에도 바위어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차가운 시선을 보낼 수 있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일단 리안과 대결이 시작하면 그녀의 눈빛은 뜨겁게 타오르게 될 것이다.
테스의 차례가 돌아왔다. 상대는 고딤이라는 자로 우직한 성격의 검사였다. 훈련병 시절의 반삭 머리를 고수하는 그는 테스와 마주서자 홍조를 띄웠다.
사람을 죽이는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에서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하지만 신체접촉이 심한 레슬링까지 함께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막상 대결에 들어가자 고딤의 눈빛은 마치 맹수를 상대하는 전사처럼 날카로워졌다.
테스가 먼저 달려가 고딤과 충돌했다. 고딤은 무게 중심을 낮추고 두 팔을 내밀어 그녀의 허벅지를 끌어당겼다. 순간적으로 다리가 들렸으나 테스는 절묘하게 한 바퀴를 돌아 기술을 무력화시켰다.
그 모습에 바위어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대단하군, 테스. 정말 멋진 여자야. 그렇지 않아?”
리안도 테스의 재능과 실력은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위어의 말은 불쾌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테스의 기술이 아닌 몸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나랑 싸우려고 하는 거지?”
“이유는 알고 있을 텐데?”
바위어는 비웃음을 지었다. 과묵한 입이 열리는 것을 보아하니 테스를 빼앗길까봐 초조해지는 모양이었다.
“정말로 그런 이유라면 다시는 테스를 끌어들이지 마라. 대신 싸우고 싶으면 언제든 찾아와. 나는 도망치지도, 피하지도 않으니까.”
“하하! 자신만만하군. 하지만 너에게 다음이 있을까?”
바위어는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테스가 없는 지금이 속마음을 드러낼 절호의 기회였다.
“오젠트 리안. 소문은 익히 들었지. 네가 하는 훈련을 악귀 수행이라고 부른다던데. 승부에 인생을 걸었다, 뭐 이런 건가? 어쨌거나 좋아. 그렇다면 이번 대결에서 패하는 쪽이 테스에게서 물러나는 게 어때?”
리안은 가당찮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