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286
“그래. 레이나에게 얘기는 들었다. 고생이 많았다.”
카즈라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시련을 겪고 난 뒤여서인지 시로네의 기도는 몰라보게 강해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로네의 변화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시로네도 클럼프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말을 돌리지 않았다.
“리안이 학교를 자퇴했다고요.”
클럼프가 과장스럽게 속상한 티를 내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래. 네가 어떻게 설득 좀 해 봐라. 이런 막무가내가 있나.”
“저는 찬성입니다.”
머리를 긁고 있던 클럼프의 손이 멈췄다. 리안은 물론이고 시로네를 모르는 쿠안까지도 의외라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찬성? 말인즉슨 리안이 학교를 자퇴해도 좋다는 거냐?”
“네. 저야 정황도 모르고 연유도 듣지 못했지만, 리안이 그렇게 결정했다면 그것이 옳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클럼프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
시로네의 등장으로 회심의 변수가 생겼다고 여겼건만 리안의 변호인을 자처한다면 이보다 골치가 아플 수 없었다. 아주 까다로운 변호인이 될 테니까.
“그래. 리안의 군주로서 네 의견도 충분히 수렴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합당한 이유를 댈 수도 있는 거겠지?”
시로네는 리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여전히 면이 서지 않는 듯 리안이 살그머니 시선을 내리자 클럼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합당한 이유 같은 건 없습니다.”
“뭐라?”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게 리안에게 더 효율적인 것인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습니다.”
시로네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제가 아는 리안은 어떤 상황에서도 도망치는 친구가 아닙니다.”
리안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천 마디 말보다도 더욱 자신감이 생기는 말이었다.
“어리석은 판단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결코 회피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리안을 응원해 주는 게 친구로서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허탈감이 폐부를 간질이는 탓에 클럼프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름다운 우정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것은 지켜 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영악한 놈. 내가 무엇에 약한지 이미 꿰고 있구먼.’
가주인 비쇼프를 상대할 때하고는 또 다르다. 확실히 이런 식으로 나와 버리면 의리의 사나이 클럼프로서는 단호하게 막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로네도 이미 알고 있듯이, 그는 감정만으로 일 처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떤 마음인지는 알겠다. 또한 설득력도 있어. 하지만 시로네, 그것은 너와 리안의 정당성일 뿐이다. 너희는 아직 세상을 몰라. 적어도 나는 수십 년 동안 검사의 길을 걸었다. 단지 학교일 뿐이라고 생각하느냐? 천만에. 언젠가는 오늘의 자퇴가 리안의 발목을 잡을 날이 올 거다.”
쿠안이 손을 들었다.
“이쯤에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쿠안에게 향했다.
시로네는 쿠안을 처음 보았지만, 풍기는 기운만으로도 예사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실 교사로서 면담이나 하려고 장군님의 부름에 응한 게 아닙니다. 이걸 직접 전해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쿠안은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리안의 자퇴서였다.
“장군님을 존경하고 또한 도와 드리고 싶지만, 자퇴 철회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미 학교를 포기한 학생을 다시 가르치는 건 제 교육 철학에 어긋나서요.”
“끙.”
클럼프로서는 산 넘어 산이었다.
쿠안의 고집은 검술학교에서도 알아줄 정도로 쇠고집이다. 상대가 공인 3급 검사의 장군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부탁 좀 하세. 어떻게 이번 한 번만 넘어가 주면 안 되겠나?”
‘할아버지…….’
리안은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했다. 손자를 위해 까마득한 후배에게 부탁하는 장군의 모습에서 그의 부정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쿠안은 정말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교사로서 무책임한 의견입니다만, 사실 리안은 학교에서 미래가 없습니다. 물론 기술적인 부분에서 배울 것은 있지만 평가 항목은 엄연히 스키마가 주가 되죠. 현재 뇌의 강화 또한 스키마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의견이 나오고는 있습니다만, 그렇더라도 학교에서 가르칠 성질이 아닙니다. 아시겠지만 교육과 실습은 천지 차이죠. 또한 실습과 실전은 아예 다른 계통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진검 승부도 아니고 생도들끼리 레슬링에서 이겼다고, 그것을 점수로 포함시킬 수는 없습니다.”
쿠안의 말이 딱히 불쾌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쿠안 또한 리안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솔직한 의견을 낸 것뿐이었다.
방 안을 적막이 감쌌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때 집사장 루이스가 또다시 문밖에서 일렀다.
“큰 어르신, 둘째 도련님이 오셨습니다.”
리안의 얼굴이 강하게 일그러졌다.
오젠트 라이.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에 평생의 앙숙이 집에 들어오다니. 시로네하고는 다른 의미로 보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다.
라이가 보무도 당당하게 들어오자 시로네는 황급히 비켜섰다. 오젠트 가문의 사서로 일했을 때 한 번 보았을 뿐이지만 인상만큼은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흑발의 계통에 차가운 얼굴. 냉정한 분위기는 여전했지만 전보다 월등히 성장했다는 게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기운이었다.
레이나가 따라 들어오자 이번만큼은 루이스도 문을 닫지 못했다.
라이의 등 뒤로 다가간 그녀가 도끼눈을 치켜뜨며 소리쳤다.
“야! 너는 뭐가 그렇게 바빠서 코빼기도 안 비쳐? 한 달 만에 집에 들어온 거 알아?”
누나의 잔소리에는 냉정한 라이도 인상이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바빴어. 어쩔 수 없잖아. 조만간 파견이라 짐 꾸리러 온 거야. 배고프니까 밥이나 차려 줘.”
레이나는 씩씩대며 라이의 뒤통수를 노려보다가 루이스에게 귓속말로 식사를 준비하라고 일렀다. 오랜만에 집에 들어온 동생이니 따듯한 음식이라도 해 먹여서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라이는 클럼프에게 다가가 각이 잡힌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같은 군인이니 집에서도 허투루 대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
“음,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구나. 아, 인사해라. 여기는 검술학교 교사 쿠안이다.”
라이의 눈빛이 변했다.
‘쿠안? 죽음의 마술사 쿠안?’
공인 시험에 합격하고 군대에 들어가서 들은 이야기가 있다. 물론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지만 풍장을 상대로 생존해서 돌아온 유일한 검사의 이름이 분명 쿠안이었다.
라이는 쿠안에게 돌아서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오젠트 라이라고 합니다.”
“그래, 얘기는 들었다. 듣던 대로 기질이 좋구나.”
쿠안도 최대한 점잖게 인사를 받았다. 리안을 대할 때하고는 태도부터 다른 모습이었다.
‘저 아이로군. 오젠트 가문의 천재 검사.’
작년에 공인 10급을 땄는데 벌써 8급 하사관이 되었다. 풍기는 기운도 차갑고 예리한 것이, 마치 젊은 시절의 자신을 보는 듯했다.
쿠안이 충분히 품평을 할 수 있도록 차렷 자세로 기다린 라이는 다시 클럼프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검술학교 고관님이 어째서 여기에?”
레이나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리안이 학교를 자퇴했어. 그래서 할아버지가 생각을 돌려 보려고 부르신 거야.”
“학교를 그만뒀다고?”
라이는 진의를 확인하듯 리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리안도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다. 시로네에게는 면이 서지 않지만 라이에게는 눈싸움 하나까지도 밀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라이는 그저 코웃음을 치더니 관심 없다는 듯 말했다.
“그게 무슨 대수라는 거야?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면 되잖아.”
레이나가 혀를 끌끌 찼다.
“너는 어쩜 그렇게 무심하니? 형이나 되어 가지고 동생 인생이 걱정되지도 않아?”
라이는 리안을 지나쳐 문으로 향했다.
“애초부터 안될 놈이었어. 지금이라도 포기하는 게 좋지. 빨리 밥이나 줘. 나 배고파.”
라이의 뒤통수를 따라 시선을 옮기던 리안이 말했다.
“잠깐 기다려.”
그리고 라이가 돌아보자 손가락으로 그의 미간을 겨누었다.
“너도 학교 안 다녔잖아?”
“너하고는 다르지. 난 다닐 필요가 없는 거고, 너는 다녀 봤자 헛수고인 거니까.”
리안의 이에서 뿌드득 갈리는 소리가 났다.
검사의 신념 (3)
“계급장 좀 달았다고 벌써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성적이야 어찌 됐든 나도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냐. 검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 있어.”
“신적초월이 별거라도 되는 줄 아냐?”
레이나가 의외라는 듯 라이를 살폈다.
리안의 신적초월에 대해서 지나가듯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걸 기억하고 있다는 건 자기밖에 모르는 성격으로 따졌을 때 기묘한 일이었다.
“육체를 초월한다? 참으로 대단하군. 박수라도 쳐 주리?”
리안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뭐야? 너 지금……!”
“그딴 것에 의지하다간 몸이 먼저 부서질 거다.”
리안의 입이 닫혔다.
“그래, 신적초월은 분명 이루기 어려운 경지지. 하지만 그렇다고 대단하다는 뜻은 아니야. 세상에는 어려우면서도 쓸데없는 일들이 널리고 널렸어. 아마 삽으로 퍼서 산을 옮기는 게 더 어려울 거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짓을 하지 않아. 육체를 초월해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너는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야. 신적초월? 남들보다 조금 더 세질 수는 있겠지만 결국 거기까지야.”
잔인한 말이었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리안과 비슷한 경지에 오른 시로네도 이번만큼은 반박할 수 없었다. 심적초월. 화신의 힘을 통해 마력의 한계를 초월한다. 하지만 피드백을 초월하면 결국 정신은 붕괴되고 마는 것이다.
리안은 이를 악물고 가까스로 말을 내뱉었다.
“닥쳐. 네가 뭘 알아? 어차피 너는 경험해 본 적도 없잖아?”
“그래, 나는 못 하지. 대단하군. 응원하마.”
라이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방을 나서기 전에 말했다.
“축하한다. 처음으로 내가 못 하는 걸 할 수 있게 됐구나.”
리안은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빠르게 뛰는 심장을 통제할 수 없고, 몸은 의지와 상관없이 부들거렸다.
신적초월이 실전에서 얼마나 통할지는 분명 미지수였다. 하지만 십수년을 수행한 끝에 기적처럼 찾아온 유일한 희망이기도 했다.
“……기다려.”
라이는 리안의 말을 무시하듯 걸음을 옮겼다.
“바빠. 네 앞가림이니 네가 알아서 해.”
“기다리라고 했잖아!”
리안의 고함 소리에 방이 쩌렁쩌렁 울렸다. 놀란 사람이 없는 이유는, 모두 지금쯤이면 터질 때가 됐다는 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이가 귀찮은 티를 역력히 내며 돌아서자 리안이 성큼성큼 걸어와 라이를 마주 보았다.
“오젠트 라이, 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진검으로 승부하자.”
레이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간을 주물렀다.
“리안, 너 자꾸…….”
“아니, 난 진심이야. 만약 내가 라이에게 진다면 학교로 돌아가지. 어때, 이 정도면 승부할 조건이 되나?”
라이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난 네가 학교에 가든 말든 관심 없어. 그만두고 싶으면 알아서 해. 귀찮게 하지 말고.”
“하하! 그래? 무서워서 도망치는 건 아니고?”
라이의 얼굴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너를 무서워한다고?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군.”
“아하, 그럼 바쁘신가?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변명은 궁색하군. 나 같은 건 일 검에 끝낼 수 있다고 늘 떠벌리지 않았나? 아니면 뭐야? 네가 말하는 검사라는 게 계급장 놀음이나 하는 입만 산 놈을 말하는 거냐?”
“하아.”
라이는 피곤한 듯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동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결투해 주마. 수련장에서 기다리지. 준비하고 나와.”
차갑게 돌아서서 문으로 향하던 그가 무언가 생각난 듯 리안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너, 앞으로 도발은 하지 마라. 그것도 전혀 소질이 없으니까.”
“저게 진짜……!”
리안이 당장 뛰쳐나가려고 하자 시로네가 팔을 붙잡고 말렸다.
“침착해, 리안. 오히려 네가 도발에 당했잖아.”
“아.”
리안은 뒤늦게 깨닫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렇다고 분노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되지도 않는 혓바닥을 그렇게 놀렸건만 단 한마디로 역전을 시킨 라이가 얄미워 죽을 지경이었다. 물론 시로네는 리안이 너무 순진하다고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문밖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테스가 눈치를 보며 들어왔다.
“리안, 정말로 하는 거야? 만약 지면 검술학교에 다시 들어가야 해.”
“흥, 내가 한입 가지고 두말하는 거 봤어?”
“그런 얘기가 아니고…….”
테스는 살며시 시선을 돌려 쿠안을 살폈다. 이미 자퇴서를 수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이상 설령 리안이 생각을 고친다고 해도 추가적인 문제가 생긴다.
하지만 리안은 개의치 않았다.
만약 라이에게 진다면 무릎을 꿇고 비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학교로 돌아갈 것이다. 받아 주지 않는다면 교문 앞에서라도 버티고 있을 작정이었다.
“할 거야. 약속이니까. 하지만 난 돌아가지 않아. 이길 각오로 승부를 청한 거라고.”
리안은 클럼프를 돌아보았다.
“할아버지, 허락하시는 거죠?”
클럼프는 팔짱을 끼고 심각하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수련장으로 가자.”
* * *
수련장은 레이나의 저택 뒤에 마련되어 있었다. 레이나 말고도 클럼프와 라이가 거주하지만 라이는 매일같이 파견 생활에 바쁘고 클럼프도 대부분 장군 막사에서 머물기에 관리는 되어 있지 않았다.
구색만 갖춘 자그마한 공터의 중앙에 여장을 풀고 나온 라이가 허리에 검을 차고 모두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안이 준비를 하는 동안 레이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라이에게 다가갔다.
“야, 너 정말로 할 거야? 난 이런 거 싫어. 형제끼리 진검으로 싸울 필요는 없잖아.”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둬. 안 그러면 저 바보가 승낙하겠어?”
“그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그만이야. 어차피 누나 입장에서는 잘된 일 아냐? 저 바보가 학교로 돌아갈 테니까.”
무사히 대결이 끝나서 리안이 얌전히 승복한다면야 레이나로서도 한시름 놓는 일이었다. 하지만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둘의 대결이었기에 노파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 아무튼. 적당히 살살 하고, 빨리 끝내.”
“나도 바빠. 말 안 해도 그럴 거야.”
레이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자기중심적인 성격이지만 사리 분별은 확실한 라이는 리안과 달리 어릴 때부터 잔소리가 필요 없는 동생이었다.
‘하긴, 진짜로 걱정할 사람은 따로 있지.’
리안은 수련장 구석에서 라이를 노려보며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테스가 다가와 리안의 어깨와 팔을 힘차게 주물렀다. 근육이 뭉쳐 있는 게, 대범한 리안으로서도 의미가 깊은 대결이긴 한 모양이었다.
“자, 자! 파이팅! 긴장 풀고!”
테스는 최선을 다해 리안의 기운을 북돋았다. 물론 리안이 학교를 그만두는 것은 싫지만, 누군가에게 초라하게 당하는 꼴을 보는 건 더더욱 싫었다.
리안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정신을 가다듬는 데 치중했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쿠안 교관에 시로네까지 지켜보는 상황이니 절대로 질 수 없는 대결이었다.
레이나가 다가와 리안의 어깨를 짚었다.
“오늘 대결만큼은 난 중립이야. 그러니까 적당히 해. 오기 부리지 말고.”
“흥, 라이나 걱정하는 게 좋을 거야. 이제는 나도 예전의 내가 아니니까.”
레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라이는 패배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고 레이나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한때는 그녀도 검을 휘두른 적이 있기에 실력의 격차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리안이 이길 확률은 없다고 봐야겠지. 라이가 동생 체면 생각해서 봐줄 애도 아니고.’
클럼프와 쿠안이 수련장으로 들어오자 리안은 할아버지에게 받은 대직도를 들었다.
전장으로 걸어가는 리안의 등 뒤에서 시로네가 말했다.
“리안, 꼭 이겨라.”
리안이 고개를 돌리며 미소 지었다. 어느새 긴장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문제없어. 나에게 맡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