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288
육체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이라면 어차피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이번 한 번만 막으면 된다. 아니, 다시 한 번만 더 막아 내면…….
라이는 짜증이 났다.
‘젠장! 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그 순간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아…….’
라이는 비로소 자신이 어떤 늪에 빠진 것인지 깨달았다.
‘이 녀석, 바보였지.’
동시에 리안의 대검이 흑도를 쳐올렸다.
쩡 소리가 나면서 손가락 관절이 뒤틀리는 고통이 밀려들었다. 근육에 쥐가 나면서 손이 열리고, 흑도가 회전하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검사의 신념 (5)
모두의 시선이 허공으로 향했다. 흑도가 태양을 가리며 회전하다가 라이의 뒤편에 푹 소리를 내며 절반 이상 박혀 들었다.
라이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리안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대검을 겨눈 자세로 굳어 있는 리안은 손가락 하나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신적초월의 후폭풍으로 끔직한 고통이 밀려들고 있었다.
길어지는 침묵 속에서 라이가 쯧 하고 혀를 차더니 돌아섰다.
“졌다. 그만하자.”
리안의 눈동자가 충격에 흔들렸다. 18년 만에 처음으로 들어 보는 라이의 패배 선언이었다.
하지만 라이는 딱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흑도를 뽑아 검집에 넣었다. 그리고 클럼프에게 걸어가 고개를 숙였다.
“졌습니다. 패배를 인정합니다.”
“크크, 페이스에 말려 버렸구나. 그래도 너답지 않게 화끈해서 좋았다.”
라이가 입술을 이기죽거리며 중얼거렸다.
“이래서 바보하고는 어울리면 안 되는 거야.”
“그래도 나름 괜찮았잖아? 속은 시원하지?”
잠시 생각하던 라이는 클럼프를 지나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조금은 검사다워진 것 같군요.”
레이나가 빠른 걸음으로 라이를 뒤따라왔다.
“잠깐, 너 이쪽으로 와 봐. 손 괜찮은 거야? 내일 파견 가야 된다며?”
“별거 아냐. 쥐가 나서 검을 놓쳤을 뿐이야.”
“이게 누굴 속이려고. 검사가 그렇게 쉽게 쥐가 나니? 손 이리 내.”
라이의 손목을 붙잡고 돌려세운 레이나는 손을 살폈다. 이제는 피부와 다를 바가 없어진 굳은살만 봐도 그가 단지 재능만으로 이 자리까지 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손등을 살핀 레이나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왼손은 검을 쥐었을 때 충격을 완충하는 역할. 그런데 검지와 중지, 약지의 손톱이 모조리 빠져 있었다.
“호들갑 떨지 마. 손톱은 원래 쉽게 빠져.”
“그런 얘기 처음 듣거든! 어휴, 이래 가지고는 스테이크도 못 자르겠네. 이리 와. 압박이라도 해.”
레이나는 연무장에 마련된 구급상자에서 붕대를 꺼냈다. 그리고 라이의 검지와 중지, 약지를 칭칭 감아 단단하게 압박했다.
긴장이 풀리자 지켜보던 사람들조차 피곤함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쿠안만큼은 여전히 심각한 눈빛으로 리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신적초월…….’
실전에서 펼쳐진 리안의 검술은 확실히 대단했다. 또한 단계별로 평가하는 검술학교에서는 절대로 선보일 수 없는 퍼포먼스였다.
‘하지만 나라면 우회했을 것이다.’
신적초월은 위험하다. 단순히 위력만 높아지는 게 아니었다.
마지막에 라이를 물었던 무브먼트는 외중력으로도 만들어 내기 어려울 만큼 기묘한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도 라이는 리안의 강검에 강검으로 응수했다.
자존심인가? 아니면 경험이 없어서?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이 읽어 내지 못한 어떤 변수가 전장에 더 남아 있었던 것일까?
“검사는 검을 다루는 기술자지.”
“장군님.”
어느새 클럼프가 뒤에 서 있었다.
“하지만 검은 결국 살인을 위한 도구. 그건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야. 그런데도 우리가 검을 추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쿠안은 답할 수 없었다.
“한 자루의 검으로는 결코 세상을 바꾸지 못해. 하지만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검은 다르지. 뛰어난 검사는 전쟁에서 승리하지만 신념을 가진 기사는 세상을 바꾼다. 라이는 리안의 신념에 불타오른 거야.”
“마음속에 품은 검…….”
“어쩌면 신적초월이란, 신념의 실체화가 아닌가 싶어.”
쿠안은 오래전의 일을 회상했다.
아킬레스건이 떨어져 나가기 전의 자신의 모습. 풍장의 제안마저 거부하고 죽기를 선택했을 만큼 단단했던 정신은 이제 망상처럼 아련했다.
“저에게도, 있었던 적이 있죠.”
클럼프는 인자한 눈빛으로 쿠안을 바라보았다. 군인으로서, 한 명의 검사로서 안타까운 후배였다.
“언제까지 방황할 거냐? 그만 군으로 돌아와. 이번에 내 직속 부관이 전역해. 자네가 맡아 준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생각해 보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쿠안은 진심이었으나 군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오늘의 대결로 확실하게 깨달았다. 이미 부러진 검이다. 새로운 검을 품지 않고서는 결코 신적초월에 도달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 이제 자퇴해도 되는 거지?”
리안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고통을 참아 내느라 얼굴이 식은땀으로 범벅이었다. 말이 아닌 결과로 증명해 냈으니 클럼프도 더 이상은 말릴 구실이 없었다.
“그래, 네가 이겼다. 자퇴든 기사 수행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그러니까 처음부터 그런다고 했잖아? 쓸데없이 싸움이나 붙이고 말이야.”
손가락에 붕대를 감은 라이가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
“어디 가서 시체나 되어 있지 마라. 네가 죽으면 내가 찾으러 다녀야 할 것 같으니까.”
모두의 예상과 달리 리안은 화를 내지 않았다. 서로가 최선을 다해 겨루었으니 구질구질하게 대결을 되돌아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야, 하나만 물어보자.”
라이가 단추를 잠그다 말고 돌아보았다.
“땅을 폭파시킨 기술, 그거 검살의 응용이지?”
“그래서 뭐?”
“어째서 나에게는 검살을 쓰지 않았지? 너라면 검을 부수고 대결을 끝낼 수 있었을 텐데.”
라이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고개를 꺾었다. 염장을 질러도 정도가 있지, 지금 자신을 놀리는 것인가?
하지만 리안의 표정에서는 도발의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설마 이 자식,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라이는 클럼프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리안에게 말 안 해 줬어?”
“크크, 어쩌겠냐? 도둑고양이처럼 가져가 버린 걸. 후계자를 제대로 정하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스키마를 열었다더니 그것도 순 뻥이었고.”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에 라이가 콧방귀를 뀌었다.
“어차피 나에게 줄 생각도 없었잖아?”
“에이, 딱히 필요도 없으면서.”
“쳇!”
자신만 모르는 이야기가 오가자 리안이 끼어들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빨리 대답이나 해. 어째서 검살을 시도하지 않았냐고.”
라이는 귀찮다는 듯 몸을 돌려 연무장의 출구로 향했다.
“나에게 묻지 말고 할아버지에게 물어봐. 정말 엉망진창이군. 검사라는 놈이 자기가 뭘 들고 싸우는지도 모르고 있었다니.”
레이나가 라이의 뒤를 따라갔다.
“정말 오늘 출발할 거야?”
“아니, 자고 갈 거야. 피곤해. 식사는 내 방으로 올려 줘.”
라이의 태무시에 리안이 도끼눈을 치켜뜨며 삿대질을 했다.
“야! 어디 가? 왜 검살을 안 썼냐니까? 사람 찝찝하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
‘멍청한 건 약도 없나 보군.’
등 뒤에서 쫓아오는 리안의 외침을 무시하며 라이는 생각에 잠겼다.
오젠트 가문에는 흑발과 청발의 계통이 동시에 내려온다.
어째서 할아버지는 자신에게 대검을 주지 않은 것일까?
어릴 때는 같은 청발이기 때문에 리안을 옹호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의 대결을 통해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적어도 그 검의 주인은 리안이었다.
* * *
시로네와 테스는 레이나의 저택에서 하루를 머물기로 했다.
리안의 방에 모인 세 사람은 반년 동안의 회포를 풀었다. 가장 이슈가 된 것은 에이미의 졸업 시험 탈락이었다.
“그나저나 에이미는 좀 어때? 상심이 컸겠다.”
스피릿 학술지에서 에이미의 불합격 소식을 접한 그들이었다. 카르미스 가문의 수재가 졸업 시험 초반에 탈락했다는 기사를 충격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응. 한동안 의기소침했는데 이제는 괜찮아. 내년 시험에는 분명 다른 결과가 있을 거야.”
“하긴. 에이미라면 충분히 이겨 낼 거야. 보고 싶다. 그때 정말 재밌었는데.”
리안도 천국에서의 일을 회상했다. 이미르와 싸우면서 신적초월을 깨달은 일은 그의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에이미는 마법사가 될 자격이 충분해. 내가 응원한다고 전해 줘. 다음 졸업 시험에는 직접 찾아가서 기를 팍팍 넣어 줄 테니까.”
1년 뒤에는 시로네도 졸업 시험을 치르니 그런 자리에 리안이 빠질 수 없었다.
“좋겠다. 나는 못 가는데. 검술학교는 마법학교보다 늦게 끝나잖아. 차라리 나도 자퇴나 할까? 리안이랑 같이 수행하게.”
리안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검술학교에서 수위권을 다투는 생도가 무슨 자퇴야? 당당히 수석으로 졸업해야지.”
“하지만 네가 없다고 생각하니 너무 허전한걸. 진짜로 따라가고 싶단 말이야.”
테스가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을 짓자 리안은 급하게 화제를 전환할 만한 것을 찾았다. 그러다가 시로네가 책상 옆에 세워 둔 검을 발견하고 물었다.
“그런데 시로네, 너 검을 차고 다니는 거야?”
“아, 저건 선물로 받은 거야.”
시로네는 카즈라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리안과 테스도 천국행을 경험했기에 오브제를 이해하는 건 쉬웠다.
흥미를 느낀 그들이 부추기자 시로네는 직접 시연에 나섰다.
우선 정격조종으로 묘기를 펼친 다음 금강무장을 발동했다. 검이 시로네를 삼키면서 순식간에 유기질로 이루어진 로브가 그를 둘러쌌다.
으스스하면서도 강력한 힘이 느껴지는 자태에, 대범한 리안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테스가 공중에 떠 있는 외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이 구슬은 뭐야?”
“그건 마력 연산장치야. 시분할이라는 기술을 대신 해 주니까 연산이 훨씬 빨라져. 그리고 여기 건틀렛의 수정구는 마력 증폭 장치고. 이 두 가지를 이용하면 마법 운용의 폭을 넓힐 수 있어.”
“그렇구나. 되게 신기하네. 이렇게 복잡한 기능이 있는 오브제도 있구나.”
아르망은 어떤 검사라도 혹할 만한 무기였다. 하지만 친구들은 흥미 이상의 관심은 드러내지 않았다. 신념의 검을 품은 자들에게는 어떤 기물도 도구 이상이 아닐 터였다.
‘리안이 아르망을 다룰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기사 수행은 검술 학교의 수업과는 차원이 다르다.
세상은 리안에게 체계적인 난이도를 제공하지 않는다. 삼류 건달이나 강도쯤이야 얼마든지 해치울 수 있겠지만 범죄자 중에서도 두각을 드러낸 자들은 왕국에서도 애를 먹을 정도로 실력이 출중했다.
그런 측면에서 사용자의 신체 기능을 증강시키고 자체 방어력을 갖춘 아르망은 분명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단테의 경우와 다르게 마검은 리안에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모든 사용자에게 최적의 전투 환경을 제공하는 아르망이지만 100퍼센트 효율을 얻으려면 고난이도의 전술 이해도와 복잡한 시스템 제어 능력이 필수적이다.
직선적이고 패도적인 리안의 성향으로는 아르망의 기능들을 완벽하게 다루기 어려웠고, 아르망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아무리 검이라지만, 정말 칼 같네.’
하지만 리안은 무언가에 의지할 생각이 꿈에도 없었다. 라이와의 일전으로 그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 나는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오늘부터 무패의 전적을 달성할 거라고!”
당당하게 가슴을 치는 리안의 모습을 바라보며 시로네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불이었다. 언젠가는 세상을 불태울 만큼 거대한 불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날 밤.
리안은 이불 속에 파묻혀 몸을 웅크린 채 신음하고 있었다.
신적초월의 후폭풍은 1차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극심한 고통이 찾아오는 시간은 몸이 기능을 회복하는 밤중이었다.
“흐으윽! 흐윽!”
목구멍으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베개를 깨물며 버텨 냈다.
옆에서 자고 있는 시로네에게 고통을 들킬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여기서 악을 질러 버리면 다시는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그를 짓눌렀다.
얼굴은 식은땀으로 범벅이었고 초점은 풀려 있었다. 그럼에도 리안은 무섭게 밤의 어둠을 노려보며 통증을 참아 냈다.
‘다행이다. 이겨서 정말 다행이야.’
시로네가 보는 앞에서 라이에게 패했다면 한동안 나락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터였다.
분명 라이는 강했다. 기술적인 완성도만 놓고 보자면 천재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은 아니었다.
‘좁혀졌다. 분명 좁혀졌어.’
다시 대결하면 같은 결과가 나올리라고 절대 예상할 수 없지만, 어떤 구간에서는 확실히 그를 뛰어넘은 부분이 있었다. 그것만큼은 자신할 수 있었다.
‘할 수 있어. 나는 틀린 길을 선택하지 않았어.’
절대로 닿을 수 없는 거리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리안은 희열을 느꼈다. 고통에 몸이 떨리는 와중에도 목구멍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흐흐, 흐흐흐흐.”
고통과 쾌락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검사의 신념 (6)
저택에서 하루를 머문 시로네는 리안과 테스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클럼프가 상석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고 레이나는 요리 준비에 한창이었다.
시로네가 졸린 눈을 비비며 꾸벅 인사를 올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냐. 아침 먹자.”
굶주린 배를 쓰다듬으며 의자에 앉은 리안이 레이나에게 물었다.
“라이는?”
“벌써 새벽에 나갔지. 걔가 너처럼 한가한 백수인 줄 아니?”
언제나 그렇듯 조크로 시작했지만 이번만큼은 말에 뼈가 있었다. 누나로서 막냇동생이 기사 수행을 떠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쳇, 자퇴하고 하루밖에 안 지났거든! 그리고 나도 아침만 먹고 바로 떠날 거라고.”
레이나가 닭고기 스튜를 접시에 담으며 말했다.
“며칠 쉬었다 가지. 시로네도 왔는데.”
시로네가 접시를 나르며 말했다.
“아니에요. 저도 금방 돌아가 봐야 해서요.”
강난과 약속한 게 있으니 자세한 얘기는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협회장이 어째서 자신을 찾는 것인지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리안이 떠나는 날이기에 사뭇 경건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당사자인 리안은 닭고기 스튜를 세 접시나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한시가 급하다는 듯 짐을 쌌다.
짐이라고 해 봤자 간단한 옷가지와 하루치 식량을 담은 백팩이 전부였다. 가죽 검집을 몸에 차고 등 뒤에 대검을 찔러 넣은 그는 거실에 있는 클럼프에게 다가갔다.
“할아버지.”
“그래, 준비는 끝났느냐?”
준비가 끝났다고 하기에는 한 가지가 남았다.
라이에게 이겼다는 사실은 앞으로의 여정에 큰 용기가 되어 줄 터였다. 하지만 그런 만큼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었다.
“어제 라이가 했던 말이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