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289
클럼프는 마시던 찻잔에서 입을 떼고 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어째서 검살을 시도하지 않았지? 할아버지는 알고 있잖아.”
“아, 그거.”
클럼프는 입맛을 다시며 찻잔을 내렸다.
괜히 헛바람이 들까 봐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지만 이제 기사 수행을 떠나는 마당이니 말해 줘도 상관없을 터였다.
“네가 차고 있는 검은 평범한 물건이 아니다. 혹시 오브제라고 들어봤냐?”
“오, 오브제?”
리안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대검을 뽑아 들었다. 어젯밤에 시로네가 시연했던 정격조종과 금강무장의 기능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면서 심장이 뛰었다.
시로네와 테스도 얘기를 듣고 거실로 나와 대검을 주목했다. 패도적인 형태를 강조한 것 외에는 별다른 특징을 찾을 수 없는 검이었다.
리안은 대검을 수직으로 세우고 올려다보았다.
“이게 오브제였단 말이지? 그래서 파괴하지 않았다는 거야? 어떤 능력이 있는데?”
클럼프는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그 검의 공식 명칭은 다. 이름만큼이나 능력도 굉장하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는 어떤 상황에서도…….”
“상황에서도?”
클럼프가 눈을 매섭게 치켜뜨며 또박또박 말했다.
“파괴되지 않는다.”
거실에 정적이 흘렀다.
“그, 그리고?”
“응? 뭐가 그리고야? 파괴되지 않는다니까? 용암에 떨어지든, 톱으로 자르든, 망치로 후려치든 손톱만큼도 깨지지 않는다고. 엄청나지 않냐?”
어떤 의미로는 검사의 로망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십 가지의 기능이 집약되어 있는 아르망과 비교하면 허탈하리만큼 단순한 게 사실이었다.
“어, 그게…… 엄청나. 엄청나게 대단하기는 한데, 그래도 오브제잖아. 검이 파괴되면 그냥 새로 사면 되는 거 아닌가?”
“어리석기는. 실전에서 무기의 내구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나 하냐? 어제 대결만 해도 가 아니었으면 전투가 훨씬 어려웠을 거다.”
리안도 그 사실은 인정했다. 아니, 돌이켜보면 이미 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적이 있었다. 바로 이미르의 스트레이트 펀치를 막아 내던 순간이었다.
강철로 만든 시그나와 엑스드조차도 종잇장처럼 구겨 버린 이미르지만 리안의 대검만큼은 파괴하지 못했다. 가 아니었다면 이미르의 주먹은 검을 뚫고 나가 리안의 몸을 박살 냈을 터였다.
“어쨌든 그런 검이다. 라이는 검살을 시도하지 않은 게 아니야. 못 한 거지. 어릴 때 라이가 그거 엄청 가지고 싶어 했어.”
리안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자신도 이제는 제법 당당한 검사가 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어릴 때만 해도 라이는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자랑거리였다.
“쳇, 그럼 라이에게 주지 왜 여태까지 아껴 뒀어?”
“걔는 투박한 거 싫어하잖아. 어울리지도 않을 거고.”
일말의 기대를 갖고 물어보았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리안의 표정이 더욱 밉상으로 변하자 클럼프가 입가를 찢으며 웃었다.
“크크크, 뭘 기대한 거냐? 내가 특별히 너를 위해서 준비했다고 생각한 거냐?”
“누가 뭐래요? 되지도 않는 독심술은.”
클럼프는 아닌 척하지만 시로네는 예상할 수 있었다.
라이는 아마도 를 정말로 갖고 싶어 했을 것이다. 기능을 떠나서, 선대 가주의 검을 물려받는 건 대단한 영광이었다. 하지만 검은 리안에게 전해졌다.
그럼에도 농담으로 받아치는 것은 손자에게 부담감을 지우고 싶지 않은 할아버지의 마음이리라.
“말이 나온 김에 에 얽힌 일화를 들려줄까?”
“응? 일화가 있어?”
리안이 눈을 빛내며 관심을 드러냈다. 투덜대기는 해도 의 고유 능력이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럼. 나도 젊을 적에 너처럼 검술 수행을 하러 다녔단다. 당시에 산적 떼를 혼자서 토벌했지. 상당한 강적이었어. 섬멸시키기는 했지만 나 또한 죽음을 앞둔 치명상을 입었다. 그렇게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산을 내려왔지. 그런데 지도에도 없던 이상한 마을이 나왔다. 다른 마을과 크게 다른 점은 없었지만 묘하게도 사람들이 말수가 적고 음침했어.”
시로네 일행은 숨소리를 죽이고 클럼프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훗날 토르미아의 장군이 된 사람과 오브제의 운명 같은 만남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곳에서 한 노인과 손녀딸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검상이 깨끗하게 나아 있더구나. 어떻게 치료를 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흐릿한 의식 속에 남아 있는 건 수없이 되뇌던 주문 같은 말이었지. 스밀레, 스밀레, 하고 말이야.”
입속으로 중얼거려 보던 리안이 되물었다.
“스밀레? 그게 무슨 뜻이야?”
“모르지. 어떤 주문이었을 수도 있고, 마법의 일종이었을 수도. 어쨌거나 노인은 밤새도록 그 말을 읊조렸던 것 같아.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마을을 둘러보았지. 골동품 가게가 있었어. 이상한 물건들이 많은 가게였지.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색색들이 연기가 담긴 유리병을 팔고 있었다는 거야. 무엇에 쓰는 것이냐고 물어봐도 주인은 말해 주지 않더구나.”
이제부터 본론이라는 듯 클럼프는 차를 머금고 입안을 축였다.
“그러다가 카운터 너머에 대검 한 자루가 걸려 있는 걸 본 거야. 그게 바로 네가 차고 있는 다. 나는 한눈에 보통 검이 아님을 알아봤지.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듯 주인에게 다가갔다.”
리안은 굳은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 그래서?”
클럼프가 눈을 깜박이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응? 그래서라니? 당연히 돈을 지불하고 샀지.”
긴장감이 허탈감으로 변하면서 리안의 입에서 막말이 나왔다.
“지금 장난해?”
클럼프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오른쪽 눈썹을 찡그렸다.
“뭐야, 인마? 일화를 듣고 싶다며?”
리안은 머리를 긁적였다.
또다시 할아버지에게 당하고 말았다. 열여덟 살이나 먹은 손자를 놀리는 게 그렇게나 재밌을까?
“괜히 긴장했잖아. 난 또 생사를 초월하는 이상한 일이라도 겪은 줄 알았네.”
“푸하하하하! 내가 미쳤냐, 검 따위에 목숨을 걸게? 리안, 명심해라. 진정한 검은 손이 아닌 마음으로 쥐는 법이다. 어쨌거나 큰 결심 하고 구매한 거야. 소중히 다뤄.”
“쳇. 꼰대 같은 소리는. 그나저나 큰 결심이라면 얼마나 준 거야? 어쨌든 오브제니까 대충 200만 골드 정도 되려나?”
“그거? 8천만 골드.”
땡그랑! 리안은 대검을 바닥에 팽개쳤다.
“젠장! 미쳤군! 그냥 부서지지만 않는 검을 8천만이나 주고 사? 그 돈이면 명검을 수백 자루는 사겠네!”
“오브제잖아, 인마! 그리고 내 돈 주고 내가 산다는데 네가 뭔데 참견이야? 그렇게 함부로 다룰 거면 다시 내놔! 가져가려면 8천만 내놓든가!”
“싫어요! 준다고 했으면 끝이지 이제 와 본전 타령은!”
리안은 누가 가져갈세라 황급히 대검을 주워 들고 품에 안았다.
“검을 바닥에 팽개치는 검사가 어디 있어? 너한테 그 검은 과분해! 당장 내 방에 걸어 놔!”
“왜요? 깨지기라도 할까 봐요? 언제는 진정한 검은 마음으로 쥐는 거라더니!”
시로네와 테스는 황당한 표정으로 말다툼을 지켜보았다.
“……참 비슷한 두 사람이야.”
“그러게.”
한참을 옥신각신하던 그들은 지친 듯 말을 멈췄다.
결국 승자는 리안이었다. 대검을 다시 검집에 넣은 그는 클럼프더러 보라는 듯 가죽끈을 평소보다 단단히 동여맸다.
씩씩거리는 것도 잠시, 클럼프는 무언가를 떠올리고 미소를 지었다.
무려 18년이나 기다렸던 순간이다. 그것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되자 늙은이의 마음이 뭉클하게 조여들었다.
‘보면 볼수록 날 닮았어.’
검술에 대한 재능은 없다시피 하지만 의 주인은 처음부터 리안이라고 정해 놓았다.
기능이 좋아서 8천만 골드를 지불한 게 아니다.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검. 그것이야말로 오젠트 가문에 가장 어울리는 신념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 순간 자신의 모든 철학은 를 통해 리안에게 전달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지. 8천만 골드를 지불한 다음에 다시 찾아갔는데 마을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으니 말이야.’
물론 산골 마을에 8천만 골드라는 거금이 들어왔다면 마을 전체가 살기 좋은 터전을 찾아 이동해도 될 만하긴 했다.
하지만 리안에게 말하지 못한 미묘한 느낌도 있었다.
어쩌면 자신은 치명상을 입고 산속에 쓰러져 있었을 뿐이고, 마을과 집을 오갔던 한 달의 기간은 사실 무아지경에서 꿈속을 거닐었던 게 아닌가 하고.
어쨌거나 클럼프의 인생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중의 하나였다. 또한 그날의 깨달음을 계기로 그는 승승장구하여 결국 공인 3급의 검사인 장군의 위치까지 오르게 되었다.
“할아버지, 그럼 갔다 올게요.”
리안은 어느새 표정을 고치고 불타는 눈빛으로 작별 인사를 고했다.
“그래. 가장 중요한 것은 너를 지키는 것이다. 실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반드시 승리만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라.”
피할 수 있는 싸움은 피하는 게 좋다는 말이었다.
할아버지의 조언을 마음에 새긴 리안은 진심을 담아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못난 손자를 끝까지 믿어 주셔서.’
리안은 가족과 친구의 배웅을 받으며 저택을 나섰다. 정문에 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잠시 마차를 바라보며 목적지를 생각하던 리안이 결심을 내리고 시로네에게 돌아섰다.
“시로네, 열심히 해라. 비록 나는 자퇴했지만, 그냥 내가 먼저 졸업했다고 생각해.”
“그래. 너도 몸조심해. 연락 자주 하고.”
리안은 눈물을 글썽이는 테스를 돌아보았다. 여태까지 잘 견뎠지만 막상 진짜로 떠날 때가 되자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리안은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검사답지 않게 정이 많은 여자지만 그런 테스가 좋았다. 언젠가는 당당히 그녀의 앞에 마주 설 날이 오리라.
“테스, 갔다 올게.”
“나쁜 자식. 한마디 상의도 안 하고…….”
“미안. 내가 생각이 짧았어.”
테스는 리안의 선택을 이해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이해해 주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무심한 남자를 모질게 내치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참아 주는 거야. 다음에 돌아와서도 나에게 이렇게 차갑게 대하면 그때는…….”
리안은 넓은 가슴으로 테스를 끌어안았다.
“강해져서 돌아올게.”
테스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아 냈다.
‘강해지지 않아도 돼. 살아서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리고 리안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꼭 강해져서 돌아와.”
그렇게 모든 사람과 인사를 끝마친 리안은 마차에 올랐다. 앞만 보고 달리는 성격대로 그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차가 출발하고 네 사람이 남자 공간이 텅 빈 기분이었다. 그것이 리안의 존재감이었다.
시로네는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며 기도했다.
‘훌륭한 검사가 되어서 돌아와라, 리안. 나도 열심히 할게.’
리안의 앞날에 무운이 깃들기를.
마법협회 (2)
부리나케 준비를 하고 문을 나서자 경비들이 플루의 앞에 일렬로 서 있었다. 시로네는 머뭇거리다가 슬그머니 열의 후미에 끼어들어 기립했다.
그것이 정답이었는지 플루는 시로네를 흘끗 살피고는 하루 일과를 지시했다.
“이곳은 왕국 마법의 산실 마법협회입니다. 훌륭한 마법사분들이 근무하고 계시지만 그만큼 범죄자들도 많고 테러의 위험도 크죠. 오늘도 개미 한 마리 들어올 수 없는 철통같은 경비로 3층을 사수합시다. 기억하세요. 마법협회가 곧 국가의 힘입니다.”
플루는 경비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더니 소리쳤다.
“그럼 각자 위치로 해산!”
경비들이 담당 구역으로 흩어지자 복도에는 시로네만 덩그러니 남았다. 플루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부르더니 몸을 돌렸다.
“너는 날 따라와.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은 순찰 및 시설 관리야. 수상한 사람이 있으면 검문하는 거지. 만약 협회에서 승인한 등록증이 없다면 곧바로 체포해도 돼.”
시로네가 듣기에도 대단한 권한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천하의 마법협회에 수상한 사람이 들락거릴 일은 거의 없을 듯했다.
예상대로 플루의 말은 으름장에 불과했다. 1시간 정도 지켜본 바에 의하면 그녀는 할 일이 거의 없었다. 경비들의 인사를 받거나 작은 일이 터지면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다시 순찰을 도는 게 전부였다.
‘완전 편하잖아?’
소위 말해 철밥통이라는 게 이런 직업이 아닌가 싶었다.
물론 이렇게 업무가 편해진 이유는 대대로 뛰어난 마법사들이 이 자리를 거쳐 갔기 때문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때 천장의 램프가 돌아가면서 빨간 불이 들어왔다. 사이렌이 3초 정도 울리더니 누군가 장치를 차단한 듯 뚝 하고 소음이 끊겼다.
긴장한 시로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반면에 플루는 대수롭지 않게 멈춰 서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복도 모퉁이에서 경비가 달려왔다. 하지만 그의 표정도 딱히 긴박하지는 않았다.
“저기, 경비부장님.”
“무슨 일이에요? 사이렌이 울리고.”
“그게…… 마력 제어장치의 기판이 과열되는 바람에 내부 회로가 타 버렸습니다. 지금 정비 팀에 연락을 취해 두었습니다.”
마법협회의 거의 모든 구역은 마력 제어장치를 통해 마력을 제한하고 있다. 기술적 한계로 제2급 대마법사 정도가 되면 통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부분의 테러를 막을 수 있고, 간혹 발생하는 직원 간의 충돌에서 피해를 줄이는 데에도 효과적이었다.
“흐음, 그게 자꾸 말썽이네. 야, 따라와. 가 보자.”
플루를 따라 기관실에 도착하자 연금술사들과 마법사들이 벽을 뜯어내고 작업에 열중이었다.
시로네는 마력 제어장치의 기판을 흥미롭게 살펴보았다. 마법학교의 이천번 시스템에도 도입된 기술이지만 내부 회로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예상대로 정밀한 마도공학의 진수가 집약되어 있었다. 시로네도 이제는 졸업반에 들어가는 수준이지만 그럼에도 회로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다.
플루가 정비 팀이 일하는 곳으로 다가가 물었다.
“좀 어떤가요? 고쳐질 것 같아요?”
“아, 플루 씨. 이거 시간 좀 걸리겠는데요. 기판이 완전히 타 버렸어요. 그러고 보니 올해만 벌써 세 번째로군요. 아무래도 부조정 장치에서 오류가 생긴 것 같은데, 완전히 뜯어내야 할 것 같아요.”
플루도 자신이 전담하는 3층의 마력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것에는 걱정이 깊었다.
“이미 상부에 건의는 드렸어요. 아마 이번 분기 정비에 새것으로 교체할 것 같은데요, 그동안에 임시방편으로 어떻게 안 되겠어요?”
마법협회가 아무리 강건한 조직이라도 빈틈은 용납되지 않는다. 마력 제어장치가 고장 났다는 건 현재 3층 보안에 심각한 구멍이 생겼다는 뜻이었기에 대충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다.
“보수하면 한 달은 더 버틸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뮤톨도 녹아 버렸고 제인스 장치도 교체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건 비보급 물품이라 협회에 재고가 없어요. 청구해야 합니다.”
“흐음, 하지만 청구하면 너무 늦는데…….”
플루는 손톱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마력 제어장치 또한 보안에 관련한 일이니 그녀의 관할이었다. 보통은 비보급 물품이라도 재고는 남겨 두지만 18층이나 되니 먼저 쓰는 쪽이 임자였다.
플루는 시로네를 돌아보았다. 멍한 표정으로 기판을 살피는 그의 얼굴을 한참이나 지켜보던 그녀는 마침내 결심을 내리고 말을 꺼냈다.
“야, 너.”
“네? 저요?”
플루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오라는 표시를 했다. 시로네가 다가가자 기관실의 구석으로 데려간 그녀는 정비 팀에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심부름 하나만 해라.”
“심부름이라면…….”
“마차를 타고 골드 스트리트로 가 달라고 해. 거기 중앙 분수대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바로 아킴 연금술 상회가 나오거든? 거기가 협회 지정 거래처야. 거기 들어가서 물건 몇 개만 가져와.”
플루는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품명을 줄줄이 적었다. 그리고 찍 소리가 나도록 종이를 찢은 다음 시로네에게 건넸다.
쪽지를 손에 든 시로네는 생소한 품명들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간단한 심부름이지만 이런 쪽으로는 문외한이라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네, 일단 가 볼게요. 그런데 지불은 어떻게 하죠?”
“지불 안 해도 돼. 월말에 협회에서 일괄 결제하거든. 자, 이걸 보여 주면 될 거야.”
플루는 목에 걸고 있는 직원증을 시로네에게 건넸다. 일련번호가 적혀 있었고, 라비드 플루라는 이름 옆에 공인 8급의 직급이 동색으로 새겨져 있었다.
사진은 그녀가 막 입사한 2년 전의 것이었는데 커다란 맹꽁이 안경을 쓰고 있어 지금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얼굴이 빨개진 플루가 도끼눈을 뜨고 소리쳤다.
“야! 남의 사진을 뭘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빨리 안 집어넣어?”
“아, 죄송해요.”
시로네는 얼른 속주머니에 직원증을 넣었다.
여자에게 어떤 사진은 공포와도 같기에 플루 또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아, 진짜. 진즉에 바꿨어야 했는데.’
사진을 교체한다는 생각은 예전부터 했지만 업무에 치이다보니 시간이 지나면 까맣게 잊어버리는 게 문제였다.
무안해진 플루는 괜히 헛기침을 하더니 시로네의 옷매무새를 만졌다.
“아무튼 잘 갔다 와. 폼 잡아 보겠다고 막 차고 다니지 말고, 무조건 주머니에 넣고 다녀. 마법협회 직원증은 아무나 차고 다닐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시로네도 마법협회 직원증의 중요성은 알고 있었다.
동색의 직원증만으로도 왕국 공인 기관의 90퍼센트 이상이 개방되고 레드 라인 산하기관의 60퍼센트 이상의 시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또한 특정 영역 내에서 왕족을 제외한 모든 계층에게 체포 및 기소 권한을 발휘할 수 있으며 영내 감찰 시 국가기관의 협조 요청하에 도청 및 감청, 잠입, 특공, 특파의 임무를 제약 없이 수행할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흔한 플라스틱 카드에 불과하지만 내부에는 양자암호 코드가 집적되어 있어 복제 또한 불가능했다.
그런 대단한 권한이 담긴 카드를 소지하자 몸이 뻐근해지는 기분이었다. 다시 한 번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직원증을 확인한 시로네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심해서 다녀올게요.”
시로네는 그길로 몸을 돌려 마법협회를 나섰다. 꿈에 그리던 승강기를 탈 수 있는 기회였으나 생소한 심부름에 긴장이 되어서인지 익숙한 계단을 이용하게 되었다.
마차를 타고 골드 스트리트에 도착하자 수많은 상점들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가는 형태로 배치되어 있었다. 길은 여덟 방향으로 뻗어 있었고 구역마다 취급하는 품목이 달랐다.
중앙 표지판에 연금술 거리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오른쪽으로 들어가자 일반 건물을 5배 정도 확대시켜 놓은 듯한 건물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