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290
‘여기구나, 아킴 연금술 상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무려 20미터 길이의 선반이 여덟 줄로 뻗어 있었다. 선반 위의 물건은 어느 하나도 같은 게 없었는데, 마법학교 학생인 시로네조차도 용도를 모르는 게 태반이었다.
‘네이드가 왔으면 눈이 돌아갔겠지. 나중에 졸업하면 같이 와 봐야겠다.’
카운터는 입구에서 가장 먼 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손님은 20명 정도가 있었고, 구석에는 연금술사들이 자리를 깔고 앉아 수십 종의 물건을 늘어놓고 살펴보고 있었다.
카운터를 지키는 사람은 총명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연성 중급’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 걸 보니 연금술사이거나 지망생인 듯했다.
“저기, 여쭤 볼 게 있는데요.”
시로네가 다가오자 남자가 책을 덮으며 일어섰다.
“네, 어떤 물건을 찾으시나요?”
“저는 마법협회에서 왔는데요. 이런 물건 있나요?”
시로네는 플루가 적어 준 쪽지를 카운터에 내려놓고 그대로 내밀었다. 물건의 종류와 개수를 보아하니 어차피 설명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남자는 쪽지에 적힌 품목을 쓰윽 훑어보더니 금세 파악했다.
“마력 제어장치가 과열되었나 보군요. 제가 찾아 드리죠. 그런데 직원증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협회 쪽과의 거래는 월말 결제 방식이라서.”
“아, 네. 여기요.”
시로네는 플루의 직원증을 꺼냈다.
남자는 카운터 아래로 들어가더니 인식 장치에 카드를 댔다. 삑 소리가 나면서 승인 표시가 떴다. 남자가 시로네에게 직원증을 돌려주며 말했다.
“네, 확인 감사합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남자는 얇은 철제 상자를 들고 선반을 돌아다니며 물건들을 담았다. 연금술 재료 중에는 취급이 어려운 것들도 있기에 아무 데나 담을 수 없었다.
기다리는 동안 시로네는 카운터에 손가락을 튕기면서 허밍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연금 서적 쪽으로 돌아서자 검은 후드를 쓰고 있는 2명이 빠르게 고개를 되돌렸다.
‘뭐지? 왜 후드를 쓰고 있을까? 저 사람들도 마법사인가?’
시로네는 조금 더 살펴보았으나 두 사람은 더 이상 특별한 행동을 보이지 않고 물건을 찾는 척하며 반대편 선반 너머로 사라졌다.
시로네의 시선을 피해 빠져나온 그들은 사람들이 없는 구석으로 들어갔다. 오른편에 서 있는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젠장, 마법협회에서 왔잖아. 어떡하지? 여기에서 일을 치르기는 그른 것 같은데.”
“혁명을 완수하는 데 위험은 따르는 법이야. 그냥 여기서 해 버리자고.”
“하지만 우리가 실패하면 형제들을 구할 수 없어. 그러지 말고 자리를 옮기자. 골드 타워로 가자고. 이럴 때를 대비해서 침투 루트를 만들어 놓은 거잖아.”
“쳇, 할 수 없지. 거긴 마지막까지 아껴 두려던 곳인데.”
후드의 인물들은 조용히 연금술 상회를 빠져나갔다.
시로네는 카운터에서 5분 정도 기다렸다. 물건을 전부 수집한 남자가 돌아와 철제 상자를 카운터에 놓고 내밀었다. 종류가 다양했지만 의외로 크기가 작아서 무겁지는 않을 듯했다.
“여기 물건 나왔습니다. 배달도 가능합니다만, 5시 이후에나 도착할 겁니다. 급하면 지금 가져가셔도 상관없고요.”
“그럼 그냥 가져갈게요. 별로 안 무거워 보이는데요.”
“하지만 취급에는 주의해 주세요. 충격에 예민한 물건도 있으니까요.”
“네, 조심할게요.”
시로네는 갓 태어난 아기를 안듯 조심히 상자를 들고 상회를 나왔다. 얼마나 취급에 주의해야 안전한지 모르기에 최대한 신중을 기해 걸음을 옮겼다.
큰길로 나온 그는 마차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한 블록 너머에서 펑 하고 강한 폭음성이 터졌다. 땅이 약진을 일으키고, 혼비백산한 비명 소리가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뭐지?”
수많은 골목 사이에서 사람들이 큰길가로 달려 나왔다. 선두에 서 있는 자들의 얼굴은 겁에 질려 있었고, 반쯤 풀린 동공에는 조금 전의 충격이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테러다! 골드 시티가 폭발했어!”
“테러?”
시로네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왕국의 수도 바슈카에서 테러라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다.
시민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대부분이 골드 타워 쪽을 바라보며 인상을 쓰고 있었지만 업무가 바쁜 사람들은 욕을 하면서도 갈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마법협회 (3)
‘예상보다 희귀한 상황은 아닌 것 같네. 어떡하지? 가 봐야 하나?’
민간인에게 가해지는 테러는 중범죄에 속했기에 왕국에서도 즉각 대처할 터였다. 사건 현장에 가 봤자 딱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테지만, 그렇다고 무시하고 협회로 돌아가기에는 뒷맛이 좋지 않았다.
2차 피신한 사람들의 인파가 큰길 쪽에서 우르르 밀려왔다. 그들이 지나치면서 외치는 소리에 시로네는 조금 더 자세한 정황을 알 수 있었다.
“검은혁명단이야! 골드 시티에서 인질을 잡고 농성하고 있어!”
“제길. 하필이면 앞뒤 안 가리는 미친놈들이라니.”
“테러진압반은 뭐 하는 거야? 아직 연락 안 했어?”
소리는 흘러넘쳤지만 골드 타워로 향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고, 그래야만 했다. 테러범을 상대로 일반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전문가에게 맡기는 편이 나았다.
‘나는 어떡하지?’
마법학교 학생이라면 전문가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 마당에 손가락만 빨고 있을 정도로 비전문가도 아니었다.
인도에 서서 연기를 지켜보는 사람들 속에서 말이 들려왔다.
“지독한 자식들. 이번에도 동료들을 석방하라는 거겠지. 빨리 진압하지 않으면 인질들을 다 죽일 거야. 전에도 3명이나 죽었잖아.”
시로네의 마음이 조금씩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일단 가서 사태 파악은 해 봐야겠다.’
자신의 몸 정도는 스스로 지킬 수 있으니 가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사건 발생 현장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초기 대응이 가능한 입장이었고, 학생이라도 나름대로 실전 경험은 충분히 쌓은 전투원이었다.
결정을 내린 시로네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인도에 서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도로를 역주행하는 그를 보고 소리쳤다.
“어이, 꼬마야! 그쪽으로 가지 마! 거긴 테러 지역이라고!”
시로네는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시민의 말을 들어서는 아니었다. 상자가 덜컹거리는 바람에 빨리 뛸 수가 없었다. 버리고 가면 그만이지만, 단순히 상황을 파악하러 가는 마당에 협회의 물품까지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시로네는 각오를 굳히고 순간 이동을 시전했다. 섬광으로 변해 허공을 질주하자 지켜보던 사람들이 전부 하늘을 쳐다보며 눈을 똥그랗게 떴다.
“뭐, 뭐야? 마법사잖아?”
* * *
테러 사건은 왕국 주요 기관에 빠르게 접수되었다.
마법협회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검은혁명단이 골드 타워를 폭파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협회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왕국 치안청에서 협조 공문이 내려왔고, 협회 또한 가능한 모든 지원을 하겠다는 답신을 보냈다.
하지만 공인 8급의 마법사에게까지 직통으로 정보가 전달되지는 않았다. 플루는 여전히 3층 기관실에 머물러 마력 제어장치의 정비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만 바깥이 소란스럽다는 생각은 들었다.
“무슨 일이지? 잠시만 작업하고 계세요.”
기관실의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자 경비들이 할 일을 멈추고 구석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더욱 의아해진 플루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들에게 걸어갔다.
“왜들 그래요? 어디서 사고라도 났어요?”
“아, 부장님. 지금 시내에서 검은혁명단이 테러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검은혁명단이라는 말에 플루의 인상이 구겨졌다.
바슈카의 음지인 라둠에는 범죄자 외에도 정복 전쟁에서 패해 흘러들어 온 수많은 아인종들이 모여 살고 있다. 하지만 수도 정책상 인간 외의 종족은 경제활동이 금지되어 있기에 평소부터 불만이 많았고, 그런 불만이 쌓이고 쌓여 검은혁명단 같은 과격 테러 단체가 조직된 것이다.
그들의 요구 사항은 언제나 한결 같았다. 왕성 지하에 갇혀 있는 검은혁명단의 동지들과 부단장인 카니마르를 석방하라는 것.
당연히 왕국에서는 요구 조건을 들어줄 수 없었고, 그럴수록 검은혁명단은 더욱 과격하고 과감한 테러 활동을 하며 수도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었다.
“지저분한 것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민간인을 건드리는 거야?”
당장 현장에 달려가서 묵사발을 내고 싶은 플루였다. 하지만 너도나도 직권을 남용하기 시작하면 결국 협회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될 터였다.
화를 가라앉힌 플루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디래요?”
“아, 그게 골드 타워랍니다. 골라도 제대로 고른 거죠.”
“어머, 골드 타워를 뚫었다고요?”
골드 타워는 타국의 화폐가 거래되는 외환은행이다. 물론 왕국 재무부에 일정량의 외화를 보유해 둔 상태지만 일시적으로라도 거래가 마비되면 경우에 따라서는 심각한 무역 손실을 볼 수 있는 요충지였다.
‘그런 만큼 검문검색도 삼엄하지. 대체 어떻게 들어간 거지?’
플루의 어깨가 흠칫했다.
“잠깐만요! 골드 타워라고요?”
“네. 왜 그러시죠? 혹시 예금이라도……?”
플루의 머리가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골드 타워는 아킴 연금술 상회에서 고작 한 블록 떨어진 곳이다. 그렇다면 시로네가 사건을 접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가만있자, 지금 몇 시지? 시간상으로 봤을 때…….’
변수를 가감해서 생각해도 분명 현장에 있을 시간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가장 그녀를 두렵게 한 것은, 가올드를 만나기로 한 손님이 사고를 당하는 것이었다.
“에이! 진짜!”
플루는 생각을 접고 복도를 뛰어갔다. 마주 걸어오던 경비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부장님, 어디 가세요?”
“저 외근합니다! 금방 돌아올게요!”
플루는 계단을 껑충껑충 뛰어 내려갔다.
정문을 나서자 시민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멀리 흐릿하게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포착한 플루는 곧바로 광자화 마법을 걸었다. 그녀의 몸이 빛으로 변하더니 굉음을 내며 창공을 휘어져 날아갔다.
* * *
“얌전히 있어! 허튼수작 부리는 놈부터 죽여 버릴 테다!”
골드 타워를 폭발시킨 검은혁명단의 인원은 총 8명이었다. 모두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보기에도 흉흉한 무기를 들고 있었다.
사슬이 달린 낫, 쌍도끼, 도리깨, 장검 등으로 무장한 그들이 골드 타워 안을 휘젓고 다니자 붙잡힌 20명의 인질들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너희는 이 시간부로 혁명의 희생양이다. 우리의 동지를 해방시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해야 할 것이야! 거부하는 자에게는 죽음보다 끔찍한 고통이 따를 것이다!”
“으앙! 엄마, 무서워!”
네 살배기 사내아이가 엄마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모두가 침묵하는 정적 속에서 아이의 울음은 사이렌 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
“쉬쉬! 조용히 해. 울면 안 돼.”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다그쳐 보았으나 아이의 울음은 멈출 줄 몰랐다.
테러범들이라고 멀쩡한 정신으로 이런 짓을 하는 건 아니다. 가뜩이나 심란한 판국에 애까지 울자 짜증이 솟구쳤다.
검은혁명단의 대원 하나가 엄마와 아이에게 다가가 소리쳤다.
“울음 안 그쳐! 계속 울면 너부터 죽여 버릴 테다!”
“으아아아앙! 엄머어! 엄머어!”
엄마가 자식을 품에 끌어안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금방 조용히 시킬게요. 곧 그칠 거예요.”
테러범은 참을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이곳에 모인 인질들 전부는 혁명 대업을 이루기 위해 장렬하게 전사해야 할 운명이었다.
“닥쳐! 너희는 혁명이 우스워 보이나!”
테러범이 발을 들어 아이를 걷어차자 엄마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옆구리를 얻어맞은 아이는 수 미터를 날아가 바닥에 쓰러졌다.
숨조차 쉬지 못하고 컥컥거리자 한 여성이 달려와 재빨리 아이를 끌어안고 다독였다.
“왜 애를 때리고 그래요! 무서우니까 울 수도 있는 거죠!”
낫을 들고 있는 중키의 대원이 사슬을 돌리며 다가왔다.
금발 머리를 뒤로 넘긴 여성의 얼굴에는 부티가 흘렀고 차림새며 장신구도 고급스러웠다.
그녀의 이름은 아리아. 며칠 전에 시로네와 같은 마차에 탔던 바로 그 여성이었다. 다음 주에 외교 실습을 나가기에 환전을 하러 들렀다가 꼼짝없이 검은혁명단에게 붙잡힌 판국이었다.
“닥쳐라. 혁명의 대업을 완수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다.”
“흥! 혁명? 그래 봤자 돈이 필요한 거 아니에요? 여기 있는 돈 다 가지고 가면 되잖아요!”
“크크크, 돈?”
대원은 어깨를 들썩이며 탁한 목소리로 웃었다.
검은혁명단에게 돈이란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다. 어차피 가지고 있어 봤자 바슈카에서는 어떤 경제활동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왕국은 수도의 시궁창에서 자생하는 테러리스트를 섬멸할 수 없었고, 그럴수록 더더욱 경제적 압박을 가해 힘을 죽이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은 테러리스트에게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무기가 되어 주었다.
돈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은 흔히 숭고함으로 포장되기 마련이었다. 검은혁명단은 왕국을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더욱 많은 아인종들을 신성한 신념이라는 기치 아래 끌어모으고 있었다.
“꺄악!”
대원은 아리아를 일으켜 세우고 팔을 뒤로 꺾었다. 그런 다음 낫을 들고 있는 자신의 팔로 그녀의 목을 강하게 조였다.
아리아의 눈앞에 날카로운 낫이 섬뜩한 빛을 발했다.
“크크크, 부잣집 딸내미여서 그런가? 냄새가 기가 막힌데? 어때? 여태까지 잘 먹고 잘 컸으니 사람들 앞에서 몸매 자랑 좀 해 볼까?”
후드의 어둠 속에서 두껍고 푸르스름한 혓바닥이 내려왔다. 인간보다 두 배는 길었고, 침에서는 코를 찌르는 악취가 풍겼다. 아리아는 인상을 찡그리며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이, 가지고 놀 시간 없어. 곧 테러반이 올 거야. 슬슬 시작하자.”
아킴 연금술 상회에서 있었던 두 사람 중 1명이 바깥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원도 인간 여자에게 딱히 관심은 없었기에 순순히 따랐다.
“크크, 그렇다면 이 여자를 첫 번째 타깃으로 하지. 귀족인 데다가 곱상하게 생겨서 효과가 만점일 거라고. 안됐군, 아가씨. 하지만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았잖아.”
검은혁명단은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게다가 원하는 것은 동료의 석방뿐. 경각심을 주기 위해 일단 1명을 죽이는 건 그들이 주력으로 미는 공포 전술이었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아리아는 그제야 상황을 깨닫고 발버둥 쳤다.
하지만 인질 중에서 그녀를 위해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의 엄마도 그저 자식을 품에 안고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낫을 든 대원은 아리아를 붙잡고 골드 타워의 부서진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시민들이 모두 대피한 길거리는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가근방의 상인들만이 가게 안에서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잘 들어라! 우리는 검은혁명단이다! 지금 당장 검은혁명단의 카니마르 부단장을 석방하고 감옥에 갇힌 동지들을 해방시켜라! 그러지 않으면 10분마다 1명씩 죽이겠다! 우리의 결의가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여자를 죽이겠다!”
아리아의 얼굴이 시체처럼 질렸다.
“꺄악! 살려 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
지켜보던 상인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돌렸다. 아리아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검은혁명단은 한다면 하는 놈들이었다. 가련한 처녀는 재수 없게도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움직이지 말고 있어. 원망하고 싶으면 왕국을 원망해라.”
대원의 낫이 아리아의 목덜미에 닿았다.
편하게 죽일 생각은 없다. 효과가 없으니까. 절반 정도만 목을 가르면 여자의 생명은 고통 속에서 천천히 식어 갈 터였다.
“혁명을 위해 죽어라!”
여기가 생의 끝이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대원의 목소리는 진실했다.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비명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죽음의 공포에 이성이 마비되고, 몸이 마음대로 경련을 일으켰다.
“잠깐! 잠깐 기다려요!”
대원의 낫이 아리아의 목을 가로로 그으려는 순간 황량한 거리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뭐야?”
골드 타워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대원들이 창문을 통해 목소리의 주인을 살폈다.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소년이 철제 상자를 들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누구냐, 넌?”
마법협회 (4)
시로네는 숨이 차서 대꾸를 못 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사태가 긴박해지자 전력으로 달려온 참이었다.
“다짜고짜 사람을 죽이면 어쩌자는 거예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대화로 풀면 되잖아요.”
“뭐? 사람을 죽여? 감히 혁명의 대업을 살인으로 폄하하다니!”
아리아는 시로네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며칠 전에 마차에서 호감을 느꼈던 소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그녀는 유일한 희망인 시로네에게 사정했다.
“살려 주세요! 제발 저 좀 살려 주세요!”
“닥쳐! 이미 혁명은 시작되었어!”
대원이 아리아의 목에 낫을 걸자 다급해진 시로네는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했다. 철제 상자를 옆구리에 끼고 손을 내밀며 소리쳤다.
“잠깐! 그렇다면 차라리 나를 인질로 잡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