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331
네이드는 입을 벌리고 있었고, 이루키는 빠르게 눈을 깜박거렸다. 유일하게 에이미만이 담담한 표정으로 시로네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야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시로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번에는 농담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물방울처럼 떨어졌던 그녀의 감정이 어느새 가슴속에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어, 저기…… 우리는 좀 비켜 줄까?”
마야가 다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두 번은 용기 내지 못할 것 같아서 모두가 있는 곳에서 말하고 싶었어. 미안해, 시로네. 하지만 너를 사랑하게 되어 버렸어. 내 마음을 받아 줘.”
마야는 주머니에서 편지지를 꺼냈다. 꽃향기가 났다.
“읽어 줄래?”
시로네에게 편지지를 전한 그녀는 모두의 시선을 외면하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대답은 그때 들을게.”
알 수 없는 말을 남겨 두고 마야가 떠나자 네이드는 에이미의 눈치를 살폈다. 이런 상황을 맞이하고도 여전히 흐트러짐이 없는 포커페이스였다.
벤치 뒤로 걸어간 에이미는 시로네의 어깨 너머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좋겠다. 여자에게 고백도 받아 보고. 뭐라고 적혀 있어?”
마야의 진심이 담긴 편지를 돌려 보는 건 무례한 짓이다.
하지만 시로네와 에이미의 미묘한 관계를 생각하면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단언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시로네가 우물쭈물하자 에이미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가볍게 쳤다.
“장난이야. 뭐가 그렇게 심각해? 마야가 너 좋아한다는 거 알고 있었잖아.”
“아니, 너무 갑작스럽기도 하고…….”
“얼른 방에 들어가서 혼자 읽어 봐. 두 번, 세 번 읽어 보라고. 그런 다음 네가 원하는 걸 하면 돼. 마야는 좋은 애니까. 나는 먼저 가 볼게. 내일 보자. 안녕.”
에이미는 숨 쉴 틈도 없이 말을 내뱉고 자리를 떠났다.
얼굴만 태연했다 뿐이지 목소리는 화가 나 있었고, 행동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야야, 너 어떡할 거야? 정해 둔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
시로네는 편지지를 쥐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에이미와 마야.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좋은 사람들이다.
‘이제는 결정을 해야겠구나.’
어쩌면 마야의 고백이 잘된 일일 수도 있다.
천국이니 인류니, 그런 거창한 문제를 논하기에 앞서 반드시 먼저 정리해 두어야 하는 일이 아니었나 싶었다.
“네이드, 이루키. 부탁할 게 있어.”
***
다음 날 오후.
시로네는 교장실로 들어갔다.
알페아스가 말없이 서고를 가리키더니 비밀 문을 개방했다.
계단을 통해 방으로 내려가자 예상했던 사람과 예상치 못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자는 가올드와 플루, 후자는 에텔라와 시이나였다.
“선생님?”
“왔구나, 시로네.”
시이나의 얼굴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천국의 존재와 위험성, 이번 사건에 대한 흑막과 연루된 인물들에 대해 빠짐없이 들은 상태라 감정이 담기지 않을 수 없었다.
시로네는 가올드가 알페아스를 찾아온 이유를 깨달았다.
수족이 잘려 나간 지금 가올드가 도움을 청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알페아스 마법학교의 교사라면 충분한 전력감이 될 수 있을 터였다.
“혼자서 마음고생이 심했겠구나. 이제 선생님들이 지켜 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카르시스 수도회의 비숍인 에텔라라면 인류의 존망을 앞두고 행동에 나서지 않을 리가 없으나 시이나의 이번 결정은 오로지 시로네를 위해서였다.
세계적 규모의 사건 속에서 시로네의 인생이나 감정, 존엄성 따위는 드러낼 여지가 없다. 오직 제자의 안위를 지키겠다는 교사의 마음으로, 시이나는 기꺼이 천국행을 선택한 것이다.
“선생님…….”
알게 모르게 서러웠던 것일까?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인생이 파괴된다는 두려움과 국정원에 잡혀 사형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악몽을 꿨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왔냐? 계약 조건대로 모든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불렀다. 오늘 이스타스를 개방하고 미로를 만난다. 삼매경에 들어가 대화는 불가능하겠지만 천국에 가기 전에 반드시 확인해 두어야 할 일이지.”
가올드의 목소리는 상기되어 있었다.
미로하고는 무려 20년 만의 재회가 되는 셈이다. 또한 그녀를 보게 되는 마지막 날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대로 가도 되나요? 아직 요원들이 남아 있을지 모르는데요.”
국정원은 이스타스 주변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미로의 시공이 있다고 알려진 ‘상층부’를 찾기 위해 창고를 수색했다.
비록 허탕을 치고 발길을 돌렸으나, 여전히 잠복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크크, 괜찮아. 여기까지 온 마당에, 상관없잖아?”
가올드는 당당하게 방을 나섰다.
토르미아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마법사가 아무런 문제 없다는 듯 행동하자 다른 사람들도 군소리 없이 뒤를 따랐다.
이스타스의 바리케이드를 넘어가자 아흔여덟 채의 창고들이 해체된 블록처럼 흩어져 있었다. 분리 형태의 최고 레벨 상태에서 작동이 중지되어 있었다.
“여기는 전혀 달라진 게 없군.”
가올드는 이스타스의 계기판 덮개를 열었다.
어느 것부터 건드려야 하는지 알지 못해서 손길이 방황하는 그때, 건물 뒤편에서 10명의 국가정보원 요원들이 튀어나왔다.
“미케아 가올드, 왕국 보안법에 의거하여 반역죄로 체포한다.”
시로네는 황급히 전투태세를 갖췄다.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닥치자 가올드를 따라나선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제1급 대마법사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미쳐 있다는 걸 간과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쉬운 판단조차 가올드에게 맡겨 버릴 수 있었던 걸까?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가올드는 요원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계기판을 살피고 있었다.
“흠, 이거 어떻게 조작하는 거였지? 어이, 빨간 버튼이었던가?”
요원들의 뒤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파란 버튼이잖아, 이 멍청아.”
요원들이 좌우로 갈라서며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를 눈에 담는 순간 시로네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기분을 느꼈다.
올백의 머리에 눈썹은 없었고, 얇고 가느다란 입술은 피부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가장 기괴한 것은 그의 호박색 눈동자였다. 마치 시계 톱니바퀴처럼 홍채가 째깍째깍 돌아가고 있었다.
“아아, 맞다, 파란색이었지? 나이를 먹으니 자꾸 깜박깜박해서.”
남자는 가올드의 말을 무시하고 알페아스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시로네가 보기에는 완벽한 등속도 운동으로 허리를 구부렸다.
“잘 지내셨습니까, 교장 선생님.”
“그래. 오랜만이구나, 세인.”
“세, 세인?”
시로네는 그제야 요원들에게서 눈길을 돌렸다.
일전에 가올드가 말했던, 초자연 심령과학 연구회의 초대 멤버 중 한 사람. 또한 이스타스의 마스터 방정식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었다.
에텔라가 시로네의 어깨를 부드럽게 짚고 요원들을 가리켰다.
“시로네, 공감각으로 저들을 살펴봐.”
에텔라의 지시에 따르자 세인의 스피릿 존이 촉수형으로 갈라져 국정원 요원들과 빠짐없이 연결되어 있는 게 느껴졌다.
“정신 지배?”
“맞아. 그것도 최상위 레벨의 정신 지배야.”
국정원에서 나왔다면 요원들의 무력은 보통이 넘을 것이다. 또한 직업적 특성상 정신 계열에는 저항 훈련이 되어 있다고 봐야 했다.
그런 자들에게 100퍼센트 확률로 마인드 컨트롤을 성공시킨 인물.
그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정신력의 20배에 해당하는 집중력이 필요하다고 아린에게 들은 적이 있다.
이스타스가 웅 소리를 내며 가동했다.
파란색 버튼에서 손을 뗀 가올드가 여전히 계기판을 바라보며 시로네에게 세인을 소개했다. 이 또한 계약에 포함되는 일이었다.
“세인은 서번트이자 정신 계열 마법사다. 현재 블랙 라인에서 스네이크라는 가명으로 활동하고 있지. 이래 봬도 레드 라인 지정 트리플 A급 범죄자야. 사인이라도 받아 둬.”
“블랙 라인이라고요?”
시로네는 불안한 표정으로 세인을 곁눈질했다.
블랙 라인은 마법의 금기를 부정하고 오직 개인적 신념으로 마법을 부리는 자들의 집단.
단순히 사람을 죽이고 괴롭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천하의 악인인 아케인조차 레드 라인 스펙트럼의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인간의 정신에 무단으로 침투하여 지적 사유물을 도굴하는 마도7걸의 아리우스 정도는 되어야 사회시스템을 붕괴시킬 수 있는 위험 인자로 분류되는 것이다.
“보통 블랙 라인에서 정신 계열 최강을 꼽으라면 두 사람 정도를 들지. 하나는 마도7걸의 기타루맨, 그리고 스네이크다. 우리 팀에서 오더를 맡을 거야. 물론 지휘관은 나지만 말이야.”
세인이 코웃음을 쳤다.
“헛소리는 여전하군. 협회에서 소꿉놀이 좀 했다고 진짜 바보가 된 거냐? 너 같은 놈이 지휘관 흉내라도 낼 수 있는 건 내 오더가 정확하기 때문이야.”
‘이루키랑 비슷한 성격이네…….’
시로네는 세인에게서 이루키의 거만함을 보았다.
인간을 초월하는 계산 능력을 보유하고 살다 보면 저렇듯 자신에 대한 신뢰도가 정점을 찍게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최종 결단 (5)
“저리 비켜. 기계치인 것은 여전하군.”
세인은 가올드의 가슴팍을 밀어내고 직접 계기판을 살폈다.
전 마법협회 협회장이 누군가에게 밀침을 당한다는 것은 시로네에게 극히 생소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시로네의 눈빛은 이내 아련함에 잠겼다.
‘아, 그렇구나.’
네이드와 이루키.
만약 시로네가 미로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수십 년이 지난 후의 두 사람 모습이 저럴까?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사건의 중심에 휘말렸던 초자연 심령과학 연구회의 초대 멤버 가올드, 미로, 세인.
20년이 흘러 서로의 길이 완전히 갈렸어도 그들의 시간은 여전히 멈춰 있는 것이다.
가올드는 세인의 뒤통수에 대고 중지를 치켜세웠다.
세상이 알아주는 대마법사라도 동창끼리 만나게 되면 유치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는 세인의 어깨 너머로 시종 계기판을 흘끔거렸다.
하지만 그에게 기계란 철들을 마구 붙여 놓고 주문을 외우면 작동하는 미지의 물체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재밌는 생각이 난 듯 사악하게 웃었다.
“크크, 너 그거 알아? 국가정보 요원에게 정신 마법을 거는 건 사형이야. 오래 살고 싶으면 내가 복직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게 좋을 거다.”
세인이 계기판을 빠르게 조작하며 말했다.
“레드 라인의 법 따위 알 게 뭐야, 멍청한 놈. 정신 지배에 걸린 이상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기억하지 못해. 어지간히 불안한 모양인데, 차라리 생매장이라도 시킬까?”
에텔라가 미간을 찡그렸다.
카르시스 수도회의 비숍으로서 세상을 혼탁하게 만드는 블랙 라인의 마법사를 용납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알페아스를 믿기 때문이다.
설령 아끼는 제자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더라도, 카르시스 수도회의 신념을 깨는 임무를 요청할 사람이 아니었다.
‘무언가 뜻이 있으신 거겠지.’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녀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아무것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개인의 신념으로 평가할 수 있을 만큼 가벼운 사안이 아니다.
20년 전, 혹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을 거대한 흐름의 전말을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사명감만이 그녀를 움직이는 전부였다.
세인은 이스타스의 마스터 모드로 들어갔다.
패널에 녹색 글자가 점멸하자 몇 가지 기호를 조합하여 빠르게 정보를 입력했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던 시이나가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물었다.
“그런데 이스타스 상층부가 정말 있기는 한 건가요? 국정원의 정보 요원들조차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간 것으로 아는데요.”
“상층부는 존재한다. 다만 들어갈 방법이 없을 뿐이지. 애초부터 그렇게 설계했다. 이스타스의 모든 패턴을 분석한 나조차도 접근할 수 없도록 만들었지.”
시로네는 사방에 깔린 창고들을 돌아보았다.
이미 모든 창고가 개별적으로 해체되어 있는 상태에서 접근할 수 없는 방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죠? 실제로 지금 모든 창고에 들어갈 수 있는 상태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세인 씨도 이스타스의 마스터키를 만든 것이고요.”
세인은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시로네를 자세히 관찰했다.
가올드가 특별히 신경을 써서 소개를 했을 때부터 프로젝트에 속해 있다는 건 알았으나 아무리 봐도 물렁한 애송이에 불과했다.
“네가 어떻게 마스터키를 알고 있지?”
“초자연 심령과학 연구회 회원이거든요. 제 친구 중에도 서번트가 있는데 그 친구가 그랬어요. 이스타스의 마스터 방정식은 누가 손대더라도 이보다 더 아름답게 만들 수는 없을 거라고.”
세인은 웃지 않았다. 하지만 설명은 더 자세해졌다.
“아마도 그럴 거다. 복잡한 4차원 도식을 3차원으로 등치시킨 방정식이니까.”
하나의 차원을 수학적으로 소거시키는 것은 개미에게 인간의 언어를 이해시키는 난이도와 비견될 수 있다. 그렇기에 누구라도 마스터 방정식만 있으면 연구회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3차원의 형태를 띠고 있을 뿐 실제로는 4차원의 좌표를 찾아가는 지도.
“상층부라는 건 공간에 국한되는 게 아니군요.”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로네의 통찰력이 제법이었으나 이 정도도 해내지 못하면 애당초 가올드의 프로젝트에 동참할 자격은 미달인 셈이었다.
“그래. 3차원으로 봤을 때 이스타스는 단지 89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창고일 뿐이지. 하지만 상층부는 그보다 높은 차원에 있다. 그렇기에 요원들이 찾아내지 못한 것이야.”
“특정 공간에 더해서, 특정 시간이 맞물려야 된다는 건가요?”
“바로 그거야. 333큐브를 예로 들면 좌표 1. 1. 1의 큐브를 좌표 3. 1. 3으로 옮겼을 때 변하는 건 공간에 더해 시간이다. 아무리 빨리 돌려도 0.1초는 걸리기 때문이지. 이것을 시공간이라 한다. 나는 여기에 착안해서 어느 누구도 미로에게 접근할 수 없는 방법을 찾아냈지. 바로 큐브의 원점에 미로의 시공을 숨기는 것이다.”
어느새 모든 사람들이 세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한때는 세인의 스승이었던 알페아스조차 20년이 지난 지금은 배우는 입장이었다.
“큐브를 어떤 식으로 돌리든, 즉 이스타스의 패턴을 어떤 식으로 바꾸든, 큐브의 시공간상의 원점은 절대로 움직이지 않고, 그렇기에 상층부 또한 완벽하게 은폐될 수 있다. 이것을 계산하기 위해 만든 것이 현재 너희가 쓰고 있는 이스타스의 마스터 방정식이다.”
시로네의 목구멍으로 침이 꼴까닥 넘어갔다.
음지의 연구회의 장난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마스터 방정식에 이런 심각한 이유가 있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시이나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상층부에 가기 위해 모인 게 아닌가요?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면,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거죠?”
“또 하나의 마스터키.”
그 말이 키워드라도 된 듯 공터에 파짓 하고 전기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시로네에게도 익숙한 플리커 마법 특유의 소음이었다.
스케일 마법사의 전매특허를 통해서 나타난 건 한 쌍의 남녀였다.
여자는 작고 아담한 키에 펌을 먹인 단발로 귀여운 인상이었고, 남자는 큰 편에 속하는 키에 금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렸다.
중요한 건 두 사람 모두 시로네와 구면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세상에 같은 사람이 2명 존재할 수 없다면 눈에 붕대를 감은 금발의 남자가 다른 사람일 수는 없을 테니까.
영겁의 성찰자, 광안의 아르민이 걸어오고 있었다.
“오, 오빠?”
시이나는 자신이 보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세상을 떠돌며 화폭에 풍경을 담고 있어야 할 아르민이 어째서 인류 최악의 사태의 중심에 와 있는 것일까?
“정, 정말 아르민 오빠야?”
시이나가 다가갔으나 아르민은 차갑게 그녀를 외면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의 아내인 케이라 또한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이스타스로 향했다.
시이나는 충격을 받은 듯 자리에 멈췄다. 머릿속이 꼬여서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정확한 시간에 도착했군. 하긴, 세계 최고의 시간 마법사에게 무례한 말이었나?”
세계 최고의 시간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