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355
호르킨은 눈을 깜박이며 생각에 잠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토르미아 ‘전’ 마법협회장이다.
‘정말로 모르는 건가? 본토에 오래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은 아닌데. 하긴,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은 일이니.’
타르반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임무에 필요한 일이라.”
어차피 이런 곳에서 마주쳤다면 기밀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확률이 컸기에 깊이 캐묻는 것은 삼가는 분위기였다.
“네. 그럼.”
에텔라는 관심을 접는 예의를 드러내며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길을 비켜 달라는 요청이었다.
케이지 B팀 젊은 층의 마음에서 약간의 반발이 일었으나 로즈가 차가운 목소리로 장내를 정리했다.
“열어 드려.”
케이지 B팀이 좌우로 비켜서고 그 사이를 아르민 일행이 빠져나갔다.
대부분 눈을 마주치는 것을 경계했으나 염화의 아로엘라는 마지막까지 시이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 여자 분명 빙결이다. 확실해.’
이유 없이 기분이 나쁘다는 건 화염의 천적밖에 없다는 게 아로엘라의 주관이었으나 묘하게도 적중률은 높았다.
아르민 일행이 시야에서 모습을 감추자 로즈가 곧바로 화이트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때?”
“뭘 어때요? 당연히 실패죠. 모두 생각을 차단해서 아무것도 읽히지 않아요. 그렇다고 공격적으로 파고들어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로즈는 실망하지 않고 다음 건으로 넘어갔다.
“저 남자에게서는?”
화이트가 강도의 리더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올드를 미행한 건 맞아요. 다만 가올드 쪽에서는 대응하지 않고 곧바로 본토를 떠난 것 같아요. 일행이 둘 있는데 1명은 강난이고 1명은 모르는 여자예요.”
“모르는 여자? 흐음.”
세계 최고의 소환 마법사인 줄루지만 타국의 마법사인 데다 워낙에 폐쇄적인 성격이라 얼굴을 아는 자는 드물었다.
“하지만 이상한데. 곧바로 본토를 나갔으면 여기에 들를 이유가 없었던 거 아냐?”
“저놈의 기억에 따르면, 건물에 들어가거나 휴식을 취한 적도 없어요. 오자마자 1시간 만에 바로 빠져나갔어요.”
“그렇군. 그 이유를 찾는 게 가장 빠르게 가올드에게 도달하는 길일 거야. 이제부터 동선을 역추적한다.”
로즈가 골목을 나서자 남은 팀원들이 우르르 뒤를 따랐다.
그때 호르킨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길 쪽을 돌아보았다.
“영감, 왜 그래요?”
“나랑 악수했던 여자 말이야. 분명 어디서 본 얼굴인데 기억이 나지 않아. 마법사회에서는 아니었던 것 같고.”
타르반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 정도 실력이면 어디서든 한 번은 봤겠지. 아무튼 빨리 가자고요. 배고파 죽겠으니까.”
“…….”
타르반의 뒤를 따르는 호르킨의 시선은 에텔라 일행이 사라진 길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복수의 기회 (2)
제2사령부에 도착한 시로네와 플루는 방에서 대기했다.
물론 대기라는 표현은 조원의 말이었고, 실제로는 격리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깥의 동향을 살핀 플루가 시로네의 옆에 앉았다.
“이제 얘기해 봐.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시로네는 바벨의 조종실에서 있었던 일부터 설명했다.
모든 신호를 단일화시켜서 전달하는 울티마 시스템. 그 울티마 시스템을 통해서 얻어 낸 바벨의 역사적 기록들.
플루는 큰 숨을 내쉬고 생각에 잠겼다.
천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대충 들었지만 이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바벨 프로젝트에 기록 말소로 되어 있던 사람, 혹시 리셋에 관련된 그 사람 아닐까?”
맥클라인 거핀.
시로네도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카엘이 지은 큰 죄에 거핀이 관련이 있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거핀은 이 세계의 일과는 무관하게 떠나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기에 초기화 후 재구성이라는 복잡한 방법을 택한 것이겠죠.”
“그것도 그렇지만 나는 울티마 시스템과 관계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대체 어떤 방식이야?”
“언어라기보다는 느낌에 가까워요. 뜨거운 걸 만지면 뜨겁다고 느끼고 날카로운 것에 찔리면 따끔하다고 느끼듯, 그런 신호가 거의 무한대로 구분돼서 들어오는 거예요.”
“흐음, 알 것 같기도 하고…….”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감각을 알 도리는 없을 터였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울티마 시스템은 아카식 레코드의 반대 개념이 아닌가 싶어요. 부분이 변해도 전체는 완벽하다, 이것이 아카식 레코드라면 울티마 시스템은 부분들을 전부 명확하게 구분 짓고 있어요. 만약 가이아인 모두가 울티마 시스템으로 통합되었다면 앙케 라에 대항할 수 있었던 것도 과언이 아니죠.”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숫자가 줄어들수록 힘은 약화된다는 거 아냐?”
“네. 저도 신호의 의미를 구분하는 정도에 불과하니까요.”
플루는 거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랐다.
“그건 정말 좋은 능력이야. 언어를 모르는 이곳에서도 충분히 도움이 될 테고, 앞으로도 응용 방법이 무궁무진할 테니까.”
“네. 일단 이곳에서 살아 돌아간다면.”
시로네의 뼈 있는 농담에 플루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그나저나 바벨은 어디로 가 버린 거지? 천국에 대항할 무기이니 천국으로 갔을까?”
“그럴 수도 있죠. 어쨌거나 세인 씨에게 보고해야 할 것 같아요. 혹시라도 큰 변수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 기회를 봐서 가드락 씨에게 부탁하자. 여기에 있기 정말 싫어하는 것 같던데.”
“클로브도 그렇죠.”
두 사람은 소리 죽여 웃었다.
***
천국 제6천, 제불.
아리우스가 드리모로 들어간 이후, 카리엘은 한시도 대세계전을 떠나지 않았다.
미로는 여전히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 정통한 자라도 정신 에너지가 모여드는 드리모에서 미로에 대한 것만을 추출하는 것은 바다에 물고기를 방생하고 10년 뒤에 다시 그 물고기를 낚는 것과 같은 난이도였다.
‘브라흐마라면 알아서 잘하겠지.’
마라 중에서도 최고의 통찰력을 발휘하는 마라였으니 카리엘도 믿고 맡길 수 있었다.
그럼에도 중앙 연산장치를 바라보는 아름다운 얼굴에서는 그늘이 가시지 않았다.
그때 화면에서 아주 오래전에 보관되어 있던 카테고리의 데이터가 점멸했다.
연도를 살펴보니 천사의 기억 속에서조차 흐릿할 정도로 깊숙한 곳에 저장된 정보였다.
호기심을 갖고 탐색한 카리엘의 눈이 빛났다.
“이건?”
오랫동안 화면을 쳐다보던 카리엘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바벨이 강림했다.
위치 추적을 시도하자 사실로 드러났다. 현재 빠른 속도로 연옥 상공을 날고 있는 붉은 점이 비춰졌다.
“하지만 어떻게?”
가이아와의 전쟁에서 바벨의 생산공정을 붕괴시킨 당사자가 바로 카리엘이었다.
탄생의 대천사 카리엘은 유리엘이 구사하는 파괴라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비생산적이고 비가역적이며 우매한 짓이다.
대신에 그는 바벨 프로그램에 들어가는 알고리즘을 개조하여 바벨이 인식하는 적을 천국에서 신민으로 재설정했다.
가이아 2차 항쟁이 실패로 돌아간 주된 이유였다.
“누가 작동시킨 거지?”
거핀 말소 이후 순수 네피림은 연옥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앙케 라의 전언을 어기고 천사가 나서서 굳이 바벨을 깨울 이유도 없었다.
카리엘은 바벨의 데이터를 전송받아 화면에 띄웠다.
프로그램이 가동되는 순간부터 바벨이 탐색한 화면이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었다.
카리엘 또한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 등장했다.
바벨이 접근하자 순식간에 소년의 얼굴이 확대되었다.
바벨은 최종적으로 공격 불가 판정을 내렸다.
화면 안의 소년이 카리엘이 알고 있는 그 소년이라면,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크크크.”
카리엘은 영혼의 전율을 느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통쾌한 웃음이 폭발했다.
“크하하하하! 크하하하하!”
드디어 자신에게도 기회가 왔다.
인간의 피가 흐르는 것들은 전부 죽어야 마땅하지만, 그중에서도 시로네는 특별히 증오스러운 존재였다.
이카엘이 가장 사랑하는 인간.
“이걸 보고도 내 앞에서 콧대를 세울 수 있을까?”
카리엘은 오랜만에 대세계전을 벗어났다.
그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창백하게 질린 이카엘의 얼굴이었다.
천국 제7천, 아라보트.
앙케 라가 살고 있는 아라보트에는 한때 천사장의 직위에 있었던 대천사 이카엘이 근신하는 방이 있다.
그곳의 복도에 도착한 카리엘은 만면에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물론 시로네의 정보를 순순히 넘길 생각은 없다.
비록 힘을 봉인당했다고 하나 여전히 천사들에게는 이카엘이라는 이름이 영광의 상징으로 통했다.
아직은 시기상조.
하지만 이런 재밌는 사건을 혼자 상상만 하는 것도 속이 근질거릴 지경이었다.
‘어디 잘난 낯짝이나 볼까? 어차피 주도권은 내가 쥐고 있으니까.’
이카엘의 방에 도착하기 직전, 카리엘의 눈앞에서 공간의 균열이 일어나더니 수백 개의 유리판이 각기 다른 명도로 반짝거렸다.
유리판에 연결된 흐릿한 윤곽이 점차 선명해지면서 마침내 실선이 사라지고 한 사내의 모습이 실체화되었다.
특정 형태의 패널에 고유의 정보를 담을 수 있는 시그널.
이카엘의 3각 마라 아슈르가 먹빛의 머릿결만큼이나 깊은 눈동자로 카리엘을 막아섰다.
“아라보트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창조의 천사시여?”
“이카엘을 만나러 왔다. 안에 있겠지?”
카리엘이 대답을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걸음을 옮기자 아슈르가 빠르게 다가와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카리엘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마라 따위가 나를 방해하는 거냐?”
시로네를 붙잡기 직전 아슈르가 나타나 검을 들이댄 것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에는 이카엘의 지령을 받은 터라 그냥 넘어갔지만 이번만큼은 용서가 되지 않았다.
“이카엘 님은 아무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도? 근신 중인 천사가 꿈도 야무지군. 비켜라, 하찮은 마라 따위가.”
카리엘은 아슈르를 거칠게 떠밀었다. 그리고 말리기도 전에 방문을 벌컥 열었다.
모든 천사들의 으뜸, 순백으로 빛나는 이카엘이 바닥에 다소곳이 앉아 카리엘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카리엘.”
카리엘은 힘겹게 입꼬리를 올렸다.
여전히 이카엘의 앞에만 서면 성광체가 위축되지만 오늘만큼은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흥, 땅바닥에 앉은 꼴이라니, 우스꽝스럽군. 한때 천사장의 직위에 올랐던 권위는 어디로 갔지?”
이카엘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존재감이 많이 약해졌구나. 하긴, 너는 예전부터 하나에 집중하면 다른 것을 살필 줄을 몰랐지.”
실제로 카리엘의 안색은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온갖 기발한 것들을 창조하던 총기 어린 눈빛마저 탁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무슨 일을 하는 거지? 라께서는 천사들의 활동을 금지시켰을 텐데.”
“크크크, 알아서 어쩌게? 당신에게는 이제 아무런 힘도 없어. 내가 무슨 짓을 꾸미는지 궁금하겠지. 아니,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일 거야. 하지만 어쩌나? 당신은 그저 예전의 명성만 남은 꼭두각시 천사일뿐이야.”
“초조해하는 모습이 마치 젖 달라는 어린아이 같구나. 무엇이 너를 두렵게 만드는 거지?”
두려워한다고? 내가?
카리엘의 눈이 부릅떠졌다.
“하하하! 난 두려운 거 없어. 심지어 당신보다 더 위대해졌지! 그런 내가 누굴……!”
카리엘의 말이 뚝 하고 끊어졌다.
이카엘이 순백의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다.
옷깃을 헤치고 어깨를 좁히자 상의가 스르륵 아래로 떨어졌다.
곧은 목을 도도하게 지탱하는 어깨, 가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두 팔,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팔등신의 등판 너머로 카리엘의 굳어 있는 얼굴이 보였다.
“이리 오렴, 카리엘. 영특한 아이야. 예전처럼 내 품에 안겨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렴. 그런 다음 푹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괜찮아질 테니까.”
“어…….”
카리엘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그녀에게 달려가려다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그가 그토록 증오하는 이카엘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오직 순백색으로만 이루어진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육체.
어떤 미립자도,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순결의 극치!
예전처럼 그녀의 품에 안겨 뺨을 비비며 모든 걸 털어놓고 싶었다.
그래,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만으로도 모든 게 충족되었던 극상의 아타락시아.
‘그런 그녀를…… 그녀를!’
고작 1명의 인간 따위가 더럽혀 버리고 말았다.
“닥……쳐어어어어어어!”
카리엘의 성광체가 헤일로로 확장되면서 빠른 속도로 회전했다.
방에 있던 모든 물건이 달그락거리고, 이카엘의 황금빛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을 처연하게 가렸다.
카리엘이 다가와 미친 듯이 소리를 퍼부었다.
“닥쳐!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어? 당신은…… 당신은……! 크윽!”
카리엘은 정신의 요동을 견디지 못하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가뜩이나 약해진 존재감에 성광체가 붕괴될 지경이었다.
‘젠장! 어째서……!’
단 한 번도, 모든 것에 맹세코 단 한 번도, 그녀를 독차지하겠다거나 소유하고 싶다는 열망을 가져 본 적이 없다.
인간의 욕망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순수한 경외.
그저 바라보는 것이 좋고, 이카엘이라는 대천사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절대적 행복을 느꼈던 시절이 있었다.
‘어리석은 인간들! 추악한 것들!’
어째서 인간은 아름다운 것을 존재하는 그대로 놔두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그렇게 소유하고 싶었던가? 남들과 이 아름다움을 공유할 수는 없었던 건가?
모두가 이카엘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그것이 그렇게도 질투가 나서, 그녀를 빼앗아 가져 버린 것인가?
카리엘에게 이카엘은 더 이상 경외가 아니었다. 하찮은 인간의 손에 꺾여 버린 시든 꽃일 뿐이었다.
‘용서할 수 없어. 아니, 용서하지 않아!’
카리엘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카엘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