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357
복수의 기회 (4)
천국 제5천 마테이.
일화의 술로 태어난 거인은 요툰하임에서 신성한 의식을 통해 율법을 깨닫고 마테이로 돌아온다.
‘율법을 지키는 자’로서 천국의 치안을 유지하고 외부 세력과 싸우는 게 그들의 주된 임무였다.
유리엘을 대동한 카리엘은 마테이에 우뚝 솟은 거대한 성을 올려다보았다.
고결한 대천사의 등장에, 일화의 술 4단계에 도달한 신장 15미터의 거인들이 고개를 숙였다.
최선을 다해 허리를 구부렸지만 워낙에 거대한 몸이라 2미터 30센티미터에 이르는 카리엘의 정수리 근처에도 오지 못했다.
카리엘은 코웃음을 치며 정문을 지났다.
그렇지 않아도 그의 심기는 몹시 불편한 상태였다.
거인의 왕 이미르는 ‘부분’을 소멸시키고 동면에 들어갔으니 어쩔 수 없다고 친다.
하지만 최소한 군단장 기르신만큼은 맨발로 튀어나와 고개를 조아려야 할 것이 아닌가.
“이것들이 진짜……!”
현재 천국의 정세는 엉망진창이었다.
73구역의 빛, 시로네가 일화의 술을 깬 이후로 신민들은 앙케 라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모든 게 변했다.
당장이라도 연옥으로 날아가 반란군을 처단하고 싶지만 유리엘을 대동하지 않으면 제 몸조차 지킬 수 없는 게 현재 카리엘의 상태였다.
‘두고 보자. 조만간 끝장을 내 줄 테니까.’
제불의 구조물이 완벽함이라면 마테이의 성은 오직 웅장함으로 승부하고 있었다.
메카, 노르, 케르고의 어떠한 색도 섞이지 않았고, 순수 자연 상태의 재료를 거인의 힘만으로 쌓아 올렸다.
거인이 아니고서는 운반할 수 없는 거대한 기둥만 봐도 그들의 사고방식을 알 수 있었다.
홀을 지나 벽처럼 높은 중앙 계단을 오르자 천장까지 닿아 있는 거인 근위병들이 도열해 있었다.
족히 세상을 파괴할 무력.
하지만 그들은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이미르의 지시가 내려지기 전까지는.
“위대한 대천사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는 어인 일로?”
어쩌면 이곳에서는 가장 작을지도 모를, 신장 3미터의 거인이 검은 망토를 끌며 다가왔다.
덩치는 크지 않지만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이 울릴 정도의 중량감이 전해져 왔다.
일화의 술 7단계에 도달한 거인 군단장 기르신.
이미르가 자연 상태 그대로의 암석 같다면 그는 일천 번 단련한 검과 같은 인상이었다.
“군단장 기르신이 천사님을 뵙습니다.”
카리엘의 앞에 선 기르신은 곧바로 한쪽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일격만으로 능히 산을 쪼갠다고 알려져 있는 무장이라도 율법이 정한 위상을 넘을 수는 없었다.
카리엘은 그것이 못마땅했다.
8명의 대천사 중에서 무력에 관해서는 딱히 내세울 게 없는 그였기에 힘의 논리를 숭배하는 자들의 속마음이 괜히 들여다보이는 기분이었다.
“7단계에 도달하면 몸도 굼떠지는 것인가? 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너는 고작 100미터를 움직였군.”
기르신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거인에게는 천사와 같은 무한한 정신은 없지요. 미리 기별을 했으면 마중을 나갔을 것입니다.”
기르신의 대처는 확실히 이미르와 달랐다.
어느 정도 잔머리를 굴릴 줄 아는 거인이라면 지나간 일로 트집을 잡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내가 직접 찾은 이유는 너에게 지시를 내리기 위해서다.”
“지시라고 하시면?”
“지금 당장 거인군을 이끌고 반란군을 소탕해라.”
기르신의 미간이 좁혀졌다.
현재 제불에서 천사들 간에 의견 대립이 있다는 것은 소문을 들어 알고 있다.
하지만 천사의 활동을 금한다는 라의 전언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또 하나의 반역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오나, 라께서는…….”
“그렇기에 너를 찾은 것이다. 라의 전언은 어디까지나 천사에게만 유효한 것. 무엇보다 현재 반란군은 일화의 술로 탄생한 거인을 발견 즉시 소탕하고 있다. 거인군이 움직일 명분은 충분할 텐데?”
기르신은 깨달았다,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는 거인군을 움직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들이 추종하는 것은 오직 이미르.
앙케 라의 명령에 복종하는 이유 또한 이미르가 복종하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뜻에 따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카리엘의 얼굴이 사악하게 구겨졌다.
근위병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고동처럼 크게 울렸으나, 기르신의 표정은 차분하기만 했다.
“거절을 하겠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카리엘은 탄생의 천사 고유의 성물인 ‘대법전’을 펼쳤다.
엄연한 협박이었고, 다음 말을 내뱉을 때에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카리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거인군은 이미르 왕의 명이 없이는…….”
“으아아아! 하찮은 거인 따위가!”
대법전을 닫은 카리엘은 그것으로 기르신의 정수리를 미친 듯이 찍어 댔다.
괴성을 지르며 팔을 휘둘러 대는 그의 얼굴에서는 천사의 품격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쾅! 쾅! 쾅! 쾅!
아무리 힘이 약화되었어도 대천사가 휘두르는 공격은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저 입을 다문 채로 버티고 있는 기르신의 이마를 타고 핏물이 흘러내렸다.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유리엘은 최초부터 알고 지낸 천사의 갑작스러운 변모를 생각했다.
‘이건 너답지 않다, 카리엘.’
탄생의 대천사 카리엘. 그가 대법전으로 기르신의 머리통을 부수고 있었다.
‘그토록 인간이 증오스러운 것이냐? 아니, 이제는 너도 알고 있을 테지. 지금 네 모습은 마치…….’
유리엘은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좌우에 도열한 근위병들에게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율법의 위상은 낮지만 종의 자부심만큼은 천사 못지않은 게 바로 거인이다.
그런 거인의 군단장이 부하들 앞에서 굴욕적인 폭력에 당하고 있으니 울분이 맺히는 것은 당연했다.
쿵.
1명의 거인이 발을 내디디며 나설 채비를 하자 유리엘의 성광체가 헤일로로 확장되었다.
그것을 깨달은 기르신이 차분한 표정을 깨고 무섭게 눈을 부릅뜨며 부하를 돌아보았다.
“윽…….”
군단장의 눈빛에 압도당한 근위병이 실수였다는 듯 슬그머니 자리로 돌아갔다.
대법전이 내리쳐질 때마다 바닥에 균열이 가면서 지반이 함몰되고 있었지만 기르신은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지금은 나설 때가 아니다. 우리가 떼로 덤벼도 파괴의 천사 유리엘은 이기지 못해.’
대천사 중에서도 전투력만으로는 전성기의 이카엘과 맞먹는다고 알려진 파괴의 화신.
‘버텨야 한다. 우리의 왕, 이미르 님께서 오실 때까지.’
카리엘은 지친 손을 파르르 떨며 물러섰다.
성광체가 흐릿해지고 사고 회로가 녹아 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아, 하아.”
기르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핏물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창조를 갈구하는 카리엘에게는 혐오스러운 광경이었다.
“가자!”
카리엘이 몸을 돌려 멀어지자 유리엘은 그제야 감정이랄 것을 드러내며 거인들을 돌아보았다.
율법이 정한 천사의 존재감이 산처럼 거대한 거인의 두 다리를 후들후들 떨리게 만들었다.
“자중해라, 기르신. 너는 이미르가 아니다.”
빛의 날개를 펼친 유리엘의 몸이 아름답게 떠오르더니 섬광으로 변해 정문으로 날아갔다.
***
머리가 하얗게 새어 버린 가올드의 얼굴은 악귀처럼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강력한 에어 건이 산탄으로 퍼지면서 40개체의 그림리퍼를 모조리 관통했다.
그러자 갑자기 빙판이 진동하더니 그림리퍼의 형체가 성난 불꽃처럼 연기로 화했다.
우오오오오오오오!
후드가 사라지면서 흉측한 해골이 드러났다.
듣는 것만으로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은 귀곡성이 폭발하자 안내인이 머리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으아아아악!”
처음부터 여기에 오는 게 아니었다.
블랙 엘릭서 따위, 호화로운 삶 따위는 이 소리를 듣는 자에게 망상일 뿐이었다.
“제, 제발…… 그마아아아안!”
안내인의 외침을 신호로 강난이 땅을 박차고 달려갔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10년 전의 사건이 떠오르면서 사고가 마비된 상태였다.
‘저 바보가!’
선명한 연보랏빛 아우라를 뿜어내는 그림리퍼가 강난을 향해 대낫을 거칠게 휘둘러 댔다.
하나같이 마하의 단계를 넘어선 베기였다.
그들 또한 어떤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만 기존의 물리계와는 전혀 다른 기제가 작용하는 듯했다.
마치 탁구공이 튀는 것처럼 날렵한 움직임으로 공격을 회피한 강난이 흑마의 다리로 돌진해 킥을 날렸다.
흑마의 두꺼운 다리가 우직 부러지면서, 불이 붙은 듯 검은 연기가 무성하게 피어올랐다.
끼이이이이이이이!
흑마의 비명 소리가 고막을 뚫었으나 강난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가올드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흑마들이 날뛰는 탓에 세상이 검은 장막에 휩싸인 기분이었다.
“내가 진짜 못 살아!”
주저앉은 강난이 힘을 밀어 넣자 스타킹의 허벅지 부위가 퍽퍽 트이면서 물방울 패턴으로 구멍이 뚫렸다.
그림리퍼의 낫이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순간 그녀의 몸이 중력권을 이탈하듯 20미터 상공으로 솟구쳤다.
수많은 그림리퍼 사이에 파묻힌 가올드가 보였다. 그림리퍼의 형체가 연기로 퍼질 때마다 철색의 섬광이 번뜩이며 가올드가 있는 곳을 할퀴었다.
현재 가올드를 지켜 주는 마법은 초보자들도 할 수 있는 에어 실드에 불과하지만 어떤 공격도 그가 펼친 구체의 방어막 안으로 침투하지 못했다.
“크으으으!”
가올드의 얼굴이 도깨비처럼 일그러지기 시작하자 강난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안 돼!”
가올드를 중심으로 대기의 압력이 갑자기 치솟았다.
통각 10만 배-에어 프레싱.
쿠구구구구구궁!
지진이 일어난 듯 빙판이 떨리면서 그림리퍼의 시커먼 연기체가 고무처럼 납작하게 눌렸다.
“후우우우!”
가올드는 볼을 부풀리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는 동안 짓눌린 그림리퍼들은 바닥을 기듯 빠져나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왔다.
조금이라도 빠져나갈 여지를 주면 순식간에 재생되어 버리는 게 니플헤임의 특징이었다.
그림리퍼의 포위망 안으로 들어온 강난이 화가 난 듯 걸음을 빨리하며 소리쳤다.
“미쳤어! 진짜 죽고 싶어서……!”
눈이 풀린 가올드가 희미하게 입가를 찢었다.
그 얼굴 앞에서 강난은 잔소리를 퍼부을 수가 없었다.
웃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오지 말라고 했잖아. 너 때문에 끝장을 못 냈어.”
“헛소리하지 말아요. 여기서 죽으면 모든 게 끝난다는 거 몰라요?”
“걱정하지 마. 10년 전과는 다르니까.”
강난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지금도 위험했잖아요!”
자기상환적 돌연변이.
가올드가 20인의 심판의 날 얻게 된 병명이었다.
생물의 기능적 한계는 환경에 국한되기 마련.
인간이 불에 타는 이유는 불이 없는 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며, 샐러맨더가 불에 타지 않는 이유는 불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생물의 리미트를 정하는 게 환경이라면, 가올드는 끔찍한 고행을 통해 자신과 환경의 연결 고리를 끊어 버렸다.
환경이 존재하지 않기에 줄기세포 단계에서 발생한 돌연변이의 리미트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상 속에서도 정상인보다 신경계가 최소 1천 배나 예민한 가올드의 세상은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세상과 완전히 달랐다.
말 그대로 지옥.
단순히 숨을 쉬기만 해도 유리 가루가 폐로 들어가는 것 같고 바람만 불어도 피부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
하지만 그 대가로 얻은 것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극기와 상상을 초월하는 정신력이었다.
“통각 1만 배부터는 엄청나게 위험해지는 거 알잖아요! 지금도 머리가 새 버리고 기억이 날아가는데, 그 이상으로 올렸다가는 정말로 죽어요!”
“죽지 않아.”
가올드는 차갑게 돌아서서 멀어져 갔다.
“고통 따위로는, 절대로 죽지 않아.”
강난은 두 주먹을 움켜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결국 체념한 듯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물러섰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고통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 죽을 수 없었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어째서 가올드에게 이런 저주가 내렸는지는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최강의 악령 40개체를 한순간에 소멸시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가올드의 풀린 눈이 조금씩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미소를 되찾은 그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그림리퍼를 도발했다.
“덤벼라, 덜떨어진 해골바가지들아.”
우오오오오오오!
인간의 말을 알아들었을 리는 없지만 마치 신호를 받은 듯 모든 그림리퍼가 아우라를 확장시켰다.
수많은 원혼들이 지르는 비명이 설경을 뒤흔들더니 연보랏빛의 아우라가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쳤다.
소용돌이는 이내 수천 개의 해골로 돌변했고, 일제히 가올드를 향해 쏘아졌다.
하늘이 어둠에 뒤덮이면서 태양이 가려지고, 어둠이 깔린 곳에서 수천 개의 해골 폭탄이 가올드를 덮쳤다.
“크크. 크크크크!”
가올드는 이를 악물고 자세를 낮췄다.
사악하게 입꼬리를 찢은 그의 눈동자에서 동공이 사라졌다.
통각 10만 배-에어 프레싱.
퍼어어어어어어엉!
모든 것이 아래로 쏟아져 내리고, 거대한 어둠이 굉음 소리와 함께 짓눌렸다.
복수의 기회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