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358
니플헤임의 빙판이 요동쳤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다면 마치 수면이 동심원을 그리듯 퍼져 나가는 듯한 얼음 분자의 율동을 볼 수 있을 터였다.
가올드는 그 파동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가 서 있었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크으으으!”
가올드는 악귀처럼 이를 악물었다.
목을 타고 올라와 관자놀이까지 이어진 핏줄이 마치 환형동물처럼 꿈틀거렸다.
안내인은 빙판에 무릎을 꿇은 채로 그림리퍼가 소멸한 자리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이,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때 빙판이 파동을 견디지 못하고 굵은 균열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퍼졌다.
지그재그로 뻗어 나가는 한 줄기의 균열이 마치 의식을 가진 것처럼 안내인을 향해 커브를 틀어 쇄도했다.
“히이이익!”
강난이 안내인의 옷깃을 붙잡고 몸을 날리자 그들이 있던 자리에 폭 4미터의 균열이 빠르게 지나갔다.
균열이 멈추고 일대는 완전히 초토화가 되었다.
가올드가 니플헤임에 새긴 존재감이었다.
휘오오오오오오!
빙판에 붙어 있던 그림리퍼들이 승천하면서 생애 축적해 왔던 라이프 스트림을 바깥으로 토해 내기 시작했다.
“어어? 어어?”
안내인의 눈이 충격에 흔들렸다.
무려 10여 개의 블랙 엘릭서가 동시에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보는 장관이었다.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멈출 것 같을 정도의 강력한 쾌락에 의식마저 혼미해졌다.
톡톡 소리를 내며 엘릭서가 빙판 위를 구르는 것을 보자 그는 미친 사람처럼 사지를 휘두르며 달려갔다.
차가운 빙판에 손바닥이 베이는 것조차 모른 채 그는 넋이 나간 채로 엘릭서를 쓸어 담았다.
양손에 받치고 보니 제법 묵직했다.
제법 묵직했지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을 들고 있는 기분이었다.
‘만약, 이게 전부 내 거라면…….’
안내인의 눈이 욕망에 휩싸였다.
하지만 강난의 차가운 얼굴을 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물어보지도 않은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 아니, 그러니까 절반은 내 거…….”
“주워. 전부 다.”
안내인이 허겁지겁 엘릭서를 주워 담는 것을 확인한 강난은 가올드에게 발길을 돌렸다.
‘천하의 멍청이 같으니!’
통각 10만 배.
보통의 인간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경험. 하지만 가올드에게는 그저 흔한 현실이다.
어차피 고통이라는 것도 뇌로 전달되는 신경계의 특수한 신호에 불과할 뿐.
단지 그런 일이다.
벗어날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는 극한의 고통을 감당하며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
그것이 바로 가올드에게 내려진 저주였다.
“괜찮아요?”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가올드가 개구쟁이처럼 콧잔등을 찡그렸다.
“크크, 안 괜찮으면? 키스라도 해 주게?”
강난은 콧김을 내쉬었다.
만의 하나라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가올드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예민한 감각기관의 고통? 생애 최고의 짜릿함?
“미안하지만 늙다리하고는 그런 취미 없어요.”
“이거 왜 이래? 처음 만났을 때는 수줍어서 고개도 못 들더니.”
결단코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강난은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당시의 그때를 회상했다.
‘내가…… 그랬던가?’
대범한 모습을 보자 안심이 되었으나 그럴수록 속에서는 불길이 치솟는 강난이었다.
가뜩이나 예만한 감각이 순식간에 100배나 치솟았다.
평범한 인간조차 손끝이 베인 정도의 고통을 100배로 증폭시키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구를 것이다.
그런데 가올드는 기본적으로 1천 배의 증폭이 들어가는 인간.
정말로 괜찮을 리가 없다는 건 속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잘 들으세요. 앞으로 통각을 올릴 때는…….”
“이제야 좀 길이 보이는군. 빨리 가자고.”
가올드는 강난의 말을 끊고 안내인에게 향했다.
현실을 직시한 안내인의 얼굴은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여정의 초반에는 한몫 제대로 챙길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림리퍼 40개체를 일순 초토화시킨 무력을 보자 비로소 자신이 어디에 끌려온 것인지 깨달았다.
배신이니 뒤통수니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망령 외에 아무것도 없는 니플헤임에서, 가올드는 자신의 목숨을 쥐고 있는 신이나 다름없었다.
‘날 죽이겠지. 분명 그럴 거야.’
수확한 엘릭서의 50퍼센트를 갖는다는 조건.
비율로 봤을 때는 센 편이지만 실상 블랙 엘릭서 2개를 얻으면 그중 하나를 갖는 것이다.
적어도 여태까지의 셈법은 그랬다.
하지만 엘릭서의 숫자가 불어나자 그 50퍼센트라는 비율이 어마어마한 비중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미 엄청난 양의 엘릭서를 지불해야 하는 입장에서 자신을 살려 둘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몇 개나 모았지?”
안내인은 움찔하며 주머니를 열었다.
“에, 그러니까…….”
기존에 있던 24개에 이번에 얻은 14개.
무려 38개의 블랙 엘릭서가 수중에 있다고 생각하자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보다시피 38개입니다.”
안내인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저, 저는 그리 큰 욕심은…… 그러니 부디…….”
“돌아가라.”
“네?”
살려 달라고 빌 참이었던 안내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절반은 놔두고, 절반만 가지고 돌아가. 이제부터는 네가 안내할 수준이 아니다.”
40개체의 그림리퍼가 동시에 나타날 정도라면 헬에 가까울수록 더 많은 적이 나오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이쯤에서 욕심을 접는 게 안내인에게 좋은 일이었고, 블랙 엘릭서의 대량 획득에 대한 50퍼센트의 비중이 갈수록 커질 것이라는 손익계산도 깔려 있었다.
‘돌아가라고? 진심인가?’
아마도 진심일 것이다.
원한다면 언제라도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강자들이 치사하게 뒤통수를 칠 이유는 없으니까.
가장 두려웠던 문제가 해소되자 안내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19개의 블랙 엘릭서를 들고 본토로 돌아간다.
무려 38년 동안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차라리 블랙 엘릭서 10개 정도를 써서 커뮤니티를 세우자. 그럼 부하들을 부리면서 평생 놀고먹을 수 있겠지.’
하지만 머리와 달리 마음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블랙 엘릭서 10개로 커뮤니티를 세우면 수중에 남는 것은 9개.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묘해서, 마치 원래 있어야 할 19개 중에 10개를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또한 남아 있는 9개라는 숫자도 평생 보관해 두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감이 있었다.
‘아이 씨, 하나만 더 있었어도 미련 접을 텐데. 10개면 10개지 9개가 뭐야? 찝찝하게.’
블랙 엘릭서 1개만 있어도 세상을 다 가질 것 같은 기분은 이미 그것을 이루고 난 뒤에 찾아오는 더 큰 욕심 앞에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그래, 딱 하나만 더. 어차피 지금 돌아간다고 해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잖아.’
그림리퍼의 발생 빈도가 낮은 길은 외워 두고 있지만 데이터가 100퍼센트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계약을 파기하면 어떡해?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지. 헬까지 안내하겠어.”
가올드는 안내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생애 마지막 기회를 붙잡은 듯한 간절한 눈빛이었다.
“크크, 그래, 남자라면 크게 한탕 해야겠지. 안내해라.”
“지당하신 말씀.”
안내인은 냉큼 일어서서 앞장섰다.
블랙 엘릭서를 잔뜩 담은 보따리를 두드리며, 어릴 적 부모님의 말을 떠올렸다.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라.
#4. 바이오 쇼크
“끝났습니다. 일어나시죠.”
시로네와 플루는 안경과 비슷한 기계장치를 벗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7일 동안 격리당한 채 하루에 한 번씩 신체검사를 받았고, 오늘은 뇌파 측정이 있는 날이었다.
“제 소견으로 별다른 이상은 없군요. 이 시간부로 격리 조치를 해제할 테니 숙소로 돌아가셔도 됩니다.”
시로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7일 동안 철통같은 감시 아래 화장실조차 제대로 가지 못한 상황이 드디어 끝나게 된 것이다.
검사실을 나선 시로네와 플루는 나란히 숙소로 향했다.
여태까지 말을 조심했던 시로네가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죠? 이토록 집요하게 우리를 검사하는 이유가 뭘까요?”
미확인 병원체의 감염은 처음부터 핑계일 뿐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색하지 않았던 이유는, 손발이 묶인 상황에서 카운터를 날릴 기회마저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그게 의문이야. 약속했던 반군 통합 건도 지지부진하고. 격리가 풀렸으니 뭔가 변화가 있겠지. 네가 대외 활동에 치중하는 동안 내가 조금씩 알아볼게.”
“굳이 그럴 필요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와 상관없는 일일 수도 있어요.”
시로네 팀의 지상 과제는 반군을 통합하는 것.
설령 레이시스에게 비밀이 있다고 해도 사령부 내부 사정이라면 괜히 긁어 부스럼을 낼 필요는 없었다.
‘아니야. 분명히 뭔가 있는데.’
격리당하는 동안에는 외부와의 정보가 철저하게 차단되었지만 검사실로 오가면서 얻은 사소한 변화가 그녀를 찜찜하게 만들었다.
‘걸리지 않는 정도에서 탐색을 해 봐야겠어.’
복도를 지나가던 노르인이 플루를 흘끗거렸다.
***
제2사령부 비밀 실험실에 레이시스가 들어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붉은 망토를 걸치고 있었고, 표정은 한껏 상기된 상태였다.
“야맹에서 요청한 물건을 보냈다고?”
“네. 지금 해체 중입니다. 확인하시죠.”
실험대에는 점액이 묻은 회색빛 가죽 안으로 두꺼운 지방질이 달린 고깃덩어리가 걸쭉하게 올라와 있었다.
건너편 테이블에는 그 생물의 얼굴에 해당하는 부위가 안치되어 있었다.
늘어진 뱀처럼 긴 코와 원형의 구강 안에 박힌 톱니처럼 뾰족한 이빨을 확인한 레이시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확실하다. 드디어 얻었구나.’
박요종 이제르몽.
연옥 사냥 랭크 A급에 속하는 생물체로, 동족 이외의 모든 대상을 구속하는 안티테제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을 거부하는 율법으로, 이제르몽이 서식하는 고향 행성의 독특한 기제일 것이라 추측된다.
“야맹을 너무 우습게 봤군. 이제르몽이라니.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구해 왔잖아?”
“저도 놀랐습니다. 사령부의 정예병조차 안티테제에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는데요.”
“사냥 방법을 찾았거나 뛰어난 자를 고용했겠지. 둘 다일 수도 있고. 아무튼 시작하지. 퓨직스 머신을 가동시켜.”
레이시스가 몸을 돌린 곳에 4미터 높이의 유리관을 중심으로 팔각형의 꼭짓점마다 거대한 유리구가 놓여 있는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생물 혼합기 퓨직스 머신.
2종 이상의 생물을 혼합하여 복합적인 형질을 갖춘 새로운 생물체를 만들어 내는 장치였다.
‘어떻게든 이제르몽을 강화시켜야 돼.’
박요종 이제르몽은 자체로도 굉장히 뛰어난 기능을 보유하고 있지만 안티테제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여러 가지 특성을 결합하면 더욱 완벽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천사의 행동을 억제할 정도의 안티테제. 그 정도의 위력을 내지 못하면 전쟁에서는 쓸 수 없어.’
각종 엘릭서를 완벽한 비율로 녹인 다음 물을 붓고 블랙 엘릭서를 첨가하자 검고 길쭉한 액체가 호스를 타고 통으로 흘러내렸다.
일화의 술에 쓰이는 ‘플라즘’이었다.
오직 유기질에만 반응하는 플라즘은 생물을 녹여 고유의 유전정보를 흡수한다.
이것을 다른 플라즘과 섞어 전기적 자극을 가하면 두 개체의 특징이 합성된 새로운 생물체가 탄생하게 되는데, 이는 일화의 술의 기제와 완벽하게 똑같은 것이었다.
다만 인간만을 재료로 하는 게 아니기에 종류가 늘어날수록 실패 확률 또한 높아진다.
레이시스가 시로네를 눈독 들이는 이유도 네피림의 강력한 정신으로 종간 결합의 변수를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사령관님, 이제르몽의 플라즘이 완성되었습니다.”
통에 담겨 출렁이는 플라즘을 본 레이시스의 눈이 희열로 번뜩였다.
코를 막고 싶을 정도의 악취가 풍겼지만 그녀에게만큼은 세상 무엇보다도 달콤한 향기였다.
‘나는 끝없이 진화할 것이다.’
그녀를 신의 자리로 인도할 생명의 물이었다.
복수의 기회 (6)
퓨직스 머신에 넣을 수 있는 8개의 슬롯 중 하나에 이제르몽의 플라즘이 부어졌다.
남은 슬롯은 7개.
레이시스는 이제르몽의 안티테제 능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또 다른 생물체인 볼툼, 그랩버, 리스톤의 형질을 결합시킬 생각이었다.
모기를 천 배 확대시킨 듯한 볼툼은 혈액을 빨아들인 대상에 친밀감을 갖는 ‘혈액 유착’이라는 독특한 형질을 가지고 있다.
용혈반응을 억제하기 위해 진화된 심리 기제로 추측되며, 실험실에서는 이 특성을 통해 생물체를 종속시키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다.
“볼툼의 플라즘을 붓겠습니다.”
자기 부상 능력이 있는 그랩버와 생물의 활동성을 높이는 리스톤의 플라즘까지 부어지자 네 종류의 생물체가 퓨직스 머신에서 섞이기를 기다렸다.
일화의 술과 달리 독특한 형질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메인 타입을 설정해야 하는데, 현재 메인은 이제르몽이었고 서브 타입의 3종이 안티테제를 강화하게 될 것이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버튼을 누르자 유리구에 절반가량 차 있던 4종의 플라즘이 중심의 유리관으로 모조리 빨려 들었다.
진공상태의 내부에 전기가 흐르자 액체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오오오!”
언제 봐도 경이로운 장면이었다.
한때는 비인도적인 생체 실험에 거부감을 느꼈던 연구원들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손으로 생물을 만든다는 창조주의 기쁨을 외면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