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374
이카엘과 만나기 위해 천국에 왔지만, 이제는 그럴 수만은 없게 되었다.
“바벨에게 가자.”
변화의 시작 (1)
드리모.
세상의 모든 정신 에너지가 흘러드는 다차원 공간.
수많은 의식이 뒤섞인 이곳에서 세계를 정의 내릴 수 있는 명확한 규칙은 없다.
무엇이든 이루어질 수 있고, 무엇이든 부정당할 수 있다.
목이 잘린 후에 칼이 들어오기도 하며, 칼이 들어왔는데도 목이 잘리지 않을 때도 있다.
그렇기에 명확한 의식체가 드리모를 거닌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행위.
고도의 정신적 이해도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이곳의 모든 게 함정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도굴꾼 아리우스가 느끼기에 벌써 10년은 늙어 버린 듯했다.
뇌수를 머리카락처럼 길게 늘어뜨린 브라흐마는 아리우스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해법을 제시했다.
신중한 인간 1만 명이 타협을 통해 이루어 낸 판단을 1초 만에 할 수 있는 그조차도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끝에 도달한 장소였다.
“후우. 후우.”
아리우스는 지친 몸을 천천히 이끌고 신전으로 들어갔다.
만약 여기에도 키워드가 없다면…….
미로는 어쩌면 인간이 아닐 것이다.
오직 미로라는 이름 하나로 그녀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추출했다.
생물이기에, 인간이기에 있을 수밖에 없는 정신적 트라우마.
그 트라우마로 미로를 강타해서 그녀를 공겁의 차원에서 깨어나게 하는 게 본래의 작전이었지만 이제는 그조차도 확률이 희박했다.
구름 위에 떠 있는 신전.
실제 미로의 신전도 이렇게 생겼을까?
정갈하고도 고풍스러운 문을 열고 들어간 아리우스는 일말의 기대를 담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내 인상을 구겼다.
무언가를 살필 필요조차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그저 먼지 한 톨 없이 뻗어 있는 깨끗한 신전의 바닥만이 보이는 것의 전부였다.
“빌어먹을! 어떻게…… 어떻게 트라우마가 없을 수 있지! 어떻게!”
아리우스는 이를 까득 깨물었다.
도굴꾼으로서 수많은 자들의 정신 속에 들어갔다.
세상에서 가장 선량한 사람이라 이름난 자의 마음속에도 탁한 심리와 결코 드러낼 수 없는 트라우마는 있는 법이다.
그것이 인간이고, 그렇기에 세상은 유지된다.
하지만 미로는 그런 룰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듯했다.
‘이럴 수는 없어. 그녀도 인간이야.’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녀 또한 인간으로서 살아왔다. 사랑하고, 실수하고, 욕망하고, 미워했다.
다만 그것이 회한과 수치심, 부정과 자괴로 연결되지 않았을 뿐이다.
말 그대로 고매함의 극치. 어떠한 금기도 없고 어떠한 집착도 없기에 무한히 자유로운 정신.
“이제 어떡할 건가? 네가 말한 키워드라는 것을 찾지 못했는데.”
브라흐마가 물었다.
대답 여하에 따라 목숨이 오가겠지만 아리우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완벽한 인간은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선택을 해야 할 시점이었다.
‘내가 인간을 잘못 이해한 것인가? 인간은 본래 불완전한 게 아니었단 말인가?’
“아리우스, 찾을 수 있는가?”
두 번째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을 때 브라흐마는 뇌수를 펄럭거리며 날아올랐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리우스는 턱을 괴고 한곳을 맴돌았다.
미로.
역사상 유례없는 스케일 마법의 천재.
‘어쩌면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인지도 몰라. 조금 더 디테일하게 검사할 필요가 있다.’
미로는 평생을 승승장구했다. 그런 그녀에게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라면 아마도 20인의 심판.
‘그렇군.’
아리우스는 걸음을 멈추고 신전의 기둥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숫자를 세어 나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정확히 스무 번째의 기둥 앞에 서서 무언가 다를 것이 있나 살펴보았다.
‘없는데?’
숫자는 정신을 이루는 주요한 키워드.
키워드라는 게 존재한다면 바로 여기에 있어야 했다.
‘심판이란 이름으로 찾아야 하나? 하지만 여기에는 심판을 상징할 만한 물건이…….’
“아리우스, 시간이 되었다.”
등 뒤로 다가온 브라흐마가 연보랏빛 광채를 내며 사악한 표정을 드러냈다.
이미 카리엘이 지시한 시간은 넘었다. 나름의 판단으로 여기까지 왔으나 그도 더 이상은 시간을 끌 수 없었다.
칼날로 변한 브라흐마의 팔이 아리우스의 목을 따기 위해 빠르게 휘둘리는 순간.
“아!”
아리우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2개의 칼날이 목을 집은 채 멈췄다. 갈라진 피부 사이로 피가 새어 나왔으나 아리우스는 고통을 느낄 정신이 아니었다.
“아…… 아아아…….”
아리우스가 기둥에 다가가자 브라흐마도 칼날을 거두고 조금 더 지켜보았다.
“있다. 있어.”
요철이 균등한 격자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실금이 가 있었다.
‘20인의 심판! 그날 무슨 일이 있었다.’
실금을 향해 뻗어 가는 아리우스의 손끝이 떨렸다.
그것을 지켜보던 브라흐마가 능력을 발동했다.
실금의 트라우마가 증폭되면서 풍경이 변했다.
온통 까만 공간에 작은 우물 하나가 있었으나, 더 이상 풍경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았다.
허겁지겁 달려간 아리우스는 안을 들여다보았다.
미로의 정신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실낱같은 상처.
그 상처의 현장이 영상처럼 비치고 있었다.
“이, 이건……!”
아리우스의 눈이 충격에 흔들렸다.
그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지극히 인간적인, 하나의 장면이었다.
“크크크. 크크크크.”
전신의 세포가 간지러우면서 몸 전체로 폭소가 튀어나왔다.
“크하하하하! 크하하하하!”
생애 최고의 영애이자 희열.
미로를 정복했다.
빈틈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마법사의 정신에 새겨진 유일한 약점을 그가 찾아낸 것이다.
‘오직 나밖에 모르는 것. 미로는 이제 나의 것이다.’
브라흐마가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
“찾았으면 어서 시작하라. 카리엘 님이 기다리고 계시다.”
보채지 않아도 할 생각이었다.
공겁의 차원에서 강제적으로 끄집어내어졌을 때 그녀의 표정이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으니까.
“그럼…… 시작해 볼까?”
미로의 정신이 우물과 연결되어 있기에 아리우스는 곧바로 뛰어들었다.
브라흐마가 뒤를 따랐고, 미로가 가진 유일한 트라우마로 그물을 엮어 공겁의 차원에 던졌다.
삼매경에 빠져 있는 미로의 정신이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크윽!”
의식조차 없는 상태에서 그녀는 오직 관성으로 정신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부정할수록 끝없이 밀려드는 한 가지의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오직 그에 대한 생각만이 탁한 감정으로 뇌리를 두드려 댔다.
“허억!”
삼매경이 깨진 미로의 눈이 번쩍 뜨였다.
공겁의 무한성이 사라지면서 혼탁한 사념들이 급류처럼 밀려들어 와 아리우스와 브라흐마까지 함께 휩쓸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타난 풍경은 드리모에 있던 것과는 다른 오직 그녀만의 신전이었다.
가부좌를 취하고 있는 미로가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자 아리우스가 희열에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미로는 대답 없이 시선을 돌려 브라흐마를 살폈다.
3각 마라. 천사 쪽에서 어떤 식으로든 방법을 찾아낸 게 분명했다.
‘트라우마를 이용하다니…….’
예전부터 거슬리기는 했지만 결국 그것이 발목을 잡을 줄이야.
“가증스러운 미로여.”
브라흐마가 허공에 떠올랐다.
“모든 것이 끝났다. 앙케 라의 의지를 받드는 것만이 인간에게 남은 숙명. 이제부터 네 뼈를 토막 내 주마.”
‘내 육체는 어디 있지? 이미 천국으로 옮겨진 건가? 그렇다면 돌이킬 수는 없다.’
아리우스가 말을 보탰다.
“혹시라도 다시 삼매경에 들어갈 생각이라면 접어 두시길. 물론 이유는 알고 있겠지만요.”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미로에게 다가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상당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신에게 그런 면이 있을 줄이야.”
미로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심지어는 자신조차도 외면하는 생각을 타인이 알게 된다는 건 엄청난 충격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보통의 인간의 기준에서였다.
결과적으로 아리우스는 상대를 잘못 고른 셈이었다.
“허접한 마법사 따위가.”
“하하하!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습니까? 그런 허접한 마법사에게 속마음을 들켜 버린…….”
아리우스는 말을 멈췄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신전보다 거대해진 미로의 눈동자였다.
바짝 조여든 홍채가 조금 전의 눈동자만큼이나 커졌을 때, 브라흐마가 돌진했다.
“가증스러운 미로여!”
브라흐마의 유언이었다.
찍!
천장에서 내려온 손가락에 개미처럼 짓이겨져 버린 브라흐마의 시체를 바라보던 아리우스는 다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스케일의 상대성이 무한대로 커져 가고 있다.
아리우스는 벼락에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완벽한 위대함.
거대하고 거대해서, 한낱 미물의 감각으로는 인지조차 되지 않는 우주 최고의 존엄이 눈앞에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희열에 취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인생 최고의 감동이 머릿속에 가득 차면서,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아리우스는 미칠 듯한 감동에 그녀를 덮쳤다.
울창한 숲을 지나 호수를 건너고, 볼록한 2개의 산을 뛰어 넘어, 그렇게 수많은 세월이 지나 도착한 곳은 거대한 기둥이 세워진 세상의 끝이었다.
‘아, 아아아아……!’
아리우스는 목발을 짚으며 힘겹게 고개를 쳐들었다.
하늘에 거대하게 떠 있는 미로의 얼굴을 본 순간 눈물이 흘렀다.
“드디어, 드디어 만났군요.”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무릎을 꿇은 그는 두 팔을 활짝 편 채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이 우주에 미로만큼 사랑스러운 것은 없다. 이 우주에 미로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이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것.
그렇기에 너무나 완벽하고, 그렇기에 어떠한 약점도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
생애 최고의 감동 앞에서, 아리우스는 주름살이 가득한 얼굴을 기울여 그녀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월! 월월월!”
그리고 개처럼 엉덩이를 흔들었다.
아리우스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비굴한 동물로, 그는 스스로를 격하시켰다.
미로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니. 이 얼마나 불경스러운 일인가.
그녀는 절대적이다. 절대적인 자에게 흠집은 없어야 한다.
그렇기에 가장 형편없는 취급을 받아야 하는 것은 바로 눈.
보지 말아야 될 것을 봐 버린 이 두 눈조차도!
푹!
아리우스의 두 손이 안와 깊숙이 파고들었다.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온 힘을 다해 안구를 뽑아낸 아리우스는 미로에게 바치듯 떨리는 양손을 치켜들었다.
“절대자시여, 부디 이 어린 종을 받아 주시옵소서.”
미로는 무심하게 아리우스를 내려다보았다.
차원의 벽을 절감한 그는 두 번 다시 이 벽을 넘지 못할 것이다.
아리우스에게 미로는 신이었다.
‘차원의 벽은 이미 깨졌다. 일단은 나가야겠지.’
미로가 눈을 감자 세상이 꺼졌다.
동시에 대세계전에 설치되어 있던 도어가 폭발하면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현실의 미로에게서 2명이 튀어나왔다.
하나는 장님이 되어 버린 아리우스였고 하나는 짓이겨진 브라흐마였다.
카리엘은 수백 미터의 거리를 단숨에 주파해 미로의 앞에 도착했다.
“드디어 다시 보게 되는군.”
삼매경에서 빠져나온 미로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왔다.
“월월! 크르르르!”
동시에 아리우스가 바닥에 엎드려 개처럼 짖어 댔다.
미로의 종이 된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주인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카리엘이 얼굴을 걷어차자 이내 깽 소리를 내며 허겁지겁 미로의 뒤에 숨어 볼을 비볐다.
천사의 얼굴을 확인한 미로가 입을 열었다.
“카리엘, 오랜만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