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386
결국 각자의 개성에 따라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일.
이미 약속했던 것과 같이 유리엘이 먼저 손을 들었다. 이어서 카리엘이 들었고, 메타트론, 레이엘 순으로 손이 올라왔다.
유일하게 찬성하지 않은 자는 파이엘뿐이었다.
이카엘의 부재와, 앙케 라의 전언에 대한 거부라는 상황에서도 대부분 찬성한 것은 대천사들의 확고한 자존감이었다.
‘이것으로 지긋지긋한 인간은 사라진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카리엘의 성광체에 이카엘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
아라보트의 꼭대기 층에 도착한 이카엘은 바로 눈앞에 있는 철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둥! 둥! 둥!
앙케 라의 박동이 강렬한 소리를 내며 문틈 밖으로 새어 나왔다.
“앙케 라여, 당신의 종이 알현을 요청합니다.”
점액질로 둘러싸인 적갈색 피부의 거대한 몸체.
딱히 개성이랄 것이 없는 붕괴된 형태지만, 그것이야말로 앙케 라의 전체성을 상징하는 특징이었다.
중량 26톤의 내부에는 생물을 이루는 모든 기관이 발현 전의 잠재성만을 지닌 채 유지되어 있고, 말단에서 벽면을 타고 이어지는 신경들은 공간 전체를 잠식한 채로 마치 뇌처럼 작용하고 있었다.
몸체의 중심이 불룩 솟아오르더니 면도칼로 베어 낸 듯 가로로 그어졌다.
이어서 피부가 걷히고 거대한 눈동자가 튀어나와 마치 갓난아이처럼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근신 이후 처음으로 마주하는 앙케 라의 모습에 이카엘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바닥에 늘어진 신경들이 서로 맞물리면서 기괴한 고주파가 음성을 발현시켰다.
“끼익! 이카엘이여, 끼익! 연옥의, 끼익!”
고막을 찢을 듯 거슬리는 소리가 점차 안정되면서 나지막한 저음으로 변했다.
“이단들이 활동을 시작했다.”
이카엘은 부복했다.
앙케 라가 만든 최초의 개념. 그렇기에 이카엘은 특별하다.
결코 저질러서는 안 되는 죄를 지었음에도 라가 그녀를 타락천사로 떨어뜨리지 않을 정도의 결심을 내린 것은 그런 이유였다.
“어떤 이단도 당신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미로의 시공 너머에 있는 세계의 누군가가 변화를 꾀했다.”
이카엘은 고개를 쳐들었다.
앙케 라는 아카식 레코드.
전체를 아우르는 그의 개념 속에서 변화를 꾀할 수 있다는 것은, 보통 인간은 아닐 것이다.
“그 변화가 결과를 현재로 인도하고 있다. 어쩌면 그가 남긴 대답을 들을 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너의 죄를 사하는 이유이다.”
이카엘은 고민에 잠겼다.
앙케 라가 전쟁을 피하는 이유는 결국 무언가의 대답을 듣기 위해서일 것이다.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라께서는 어떤 질문에 대한 대답을 원하시는 겁니까?”
“나는 어찌하여…….”
앙케 라는 말했다.
“……없는가?”
질문을 들은 이카엘의 눈빛이 아련하게 변했다.
오래전의 기억들이 성광체의 표면을 따라 아름답게 흘렀다.
그리고 한 소년의 얼굴도.
“제가 수습하겠습니다.”
이카엘은 단호한 목소리로 고했다.
대천사장에 오르면 천국의 모든 전권을 쥘 수 있다.
물론 같은 대천사끼리는 통제력이 떨어지겠지만, 최소한 무의미한 희생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조건이 있다.”
“조건이라 하오시면?”
“네가 저지른 죄를 말소하겠노라.”
이카엘의 눈이 커졌다.
아카식 레코드로 말소시키면 단순히 다른 사람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어느 누구도, 이카엘 자신조차도 거기에 대한 기억을 잃게 된다.
타락천사가 될 것을 각오하고, 대소멸조차 각오하고 선택했던,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아름다움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나에게 답을 가져올 인간이 연옥에 있다. 감수할 수 있겠느냐?”
이카엘의 성광체가 흔들렸다.
그것은 공포였다.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아니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기억이 말소되고 만다.
‘하지만…….’
이카엘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나는 대천사장의 직위를 되찾아야 한다.’
결정을 내린 이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수하겠습니다.”
앙케 라는 두 번 묻지 않았다.
그의 눈이 번쩍 뜨이며 온 세상의 정보가 물결처럼 흔들렸다.
이카엘의 성광체가 광륜으로 퍼지며 티끌보다 작은 검은 물방울 하나가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미안합니다.’
이카엘의 눈에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라의 부름 (3)
이미르의 본체가 머물고 있는 곳은 헬 하임의 지하 깊숙한 곳이었다.
얼음의 바다에서 수십 킬로미터 아래로 내려가면 빛조차 들어오지 않지만, 이미르와 공생하는 생물체 수오이가 주위를 떠다니며 미약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고체 분자 사이를 자유로이 오가는 수오이는 헬 하임의 생물체들이 그렇듯 비실체적 실체의 성질을 지니고 있고, 양자 전달이라는 독특한 능력을 통해 세상의 모든 정보를 그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천국에서 이미르의 본체를 구속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영원히 녹지 않는 헬 하임의 얼음 속밖에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물리력도 자신을 구속할 수 없다.
그것이 파괴될 수 있는 형태라면, 그는 무엇이든 파괴할 수 있다.
다만 율법, 그의 율법은 전쟁의 선봉장이었고 아직은 때가 아님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수오이가 이미르의 눈동자 사이를 떠나며 반투명한 몸체에 여러 가지 영상을 띄웠다.
천국의 사정도, 천국 밖의 사정도, 그리고 그보다 훨씬 멀리 떨어진 다른 세계의 사정에도 이미르의 눈동자는 무심했다.
그때 멀리 무리를 지으며 떠다니던 수오이 수십 마리가 겹치면서 한 남자의 전투 장면을 띄웠다.
대직도를 들고 있는 소년, 아니 이제는 청년의 기골을 지닌 그가 수많은 자들과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수오이의 정보는 그저 정보일 뿐이다.
이미르는 자신의 판단을 믿었고, 그 판단은 언제나 틀린 법이 없었다.
‘아직은 아니다.’
이미르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콰콰콰콰콰콰콰콰!
단지 그것만으로도 심연의 빙벽에 2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균열이 일어났다.
‘아직은 아니지.’
이미르는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
카리엘은 인간을 멸하기 위한 준비로 바쁘게 움직였다.
대세계전의 수많은 장치들을 빠르게 날아다니는 모습을 바라보던 유리엘은 은하경 아래에 붙잡혀 있는 미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에게 신성 세례를 받은 아리우스를 대동하고 무심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유리엘과 시선을 마주치더니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유리엘은 깨달았다.
미로의 시공을 열어 천사를 능멸한 가증스러운 인간이지만 마음속의 분노가 증오로까지 번지지 않는 것은, 그녀에 대한 경외가 깃들어 있기 때문임을.
여유를 부리거나, 자신감이 넘치는 게 아니다. 마음이 없기에 걱정조차 없는 것.
어쩌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적인 심상의 경지, 무상심이었다.
‘인간에게 호기심이 느껴지는 건 처음이군.’
유리엘이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생각? 어떤 생각?”
미로가 턱을 괴고 되물었다.
“모든 생각. 지금 네 머릿속에서 흐르고 있는 사유들이 궁금하군.”
“흐음.”
미로는 턱을 괸 손에서 검지를 빼내 유리엘을 가리켰다.
“잘생겼네. 애인은 있을까?”
미로의 시선이 대세계전을 훑었다.
“천사의 장치치고는 너무 조잡한 거 아냐? 미관도 엉성하고 말이야. 저 쪼다 같은 대천사는 뭐가 그리 바빠서 저렇게 돌아다니는 거지? 현실에서는 배가 고픈데 먹을 건 안 주나?”
미로는 당장 떠오르는 생각들을 나열하고는 배시시 웃었다.
“혹시 풀어 달라고 하면 내 미모에 반해 보내 주지 않을까?”
유리엘은 미로의 앞에 착지했다.
4미터 길이의 극락곤이 빛으로 뭉치면서 빠르게 회전했다.
극락곤 파괴사법-천도은하륜.
우우우우우우!
두려운 굉음을 내며 극락곤이 휘어지듯 들어오자 미로보다 카리엘이 먼저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회전이 멈추는 순간 공기를 쥐어짜 내는 듯한 예리한 소음이 고막을 관통했다.
극락곤을 미로의 관자놀이 옆에 우뚝 멈춰 세운 유리엘이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주제를 알아라. 날 화나게 해서 좋을 건 없을 거야.”
“그런데…….”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미로가 마치 졸린 것처럼 반쯤 눈을 감고 물었다.
“왜 심쿵했어?”
“…….”
천사에게 심장은 없지만, 어차피 심쿵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도 그는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반박하지 못하는 건 미로를 흔들려고 할수록 오히려 자신이 흔들리는 듯한 불쾌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극락곤을 거둔 유리엘은 카리엘에게 날아갔다. 이제는 그도 미로가 빨리 소멸해 버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중앙 연산장치의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카리엘이 말했다.
“그러게 건드려서 좋을 거 없다고 했잖아. 천국의 군대를 능멸한 장본인이야.”
유리엘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고결한 천사의 정신에 침투하여 미동을 일으킬 수 있는 인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카리엘이 자신의 병력 상황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나저나 어때, 네 쪽 상황은?”
“1각, 2각, 3각, 모두 건재하다. 물론 내 지배하에 있는 평천사들도.”
“그렇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카리엘과 달리 유리엘은 찝찝한 듯 미로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카리엘.”
“응?”
유리엘이 여전히 미로에게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심쿵이 무슨 뜻이지?”
***
앙케 라의 알현을 끝낸 이카엘은 빛의 승강기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더 이상 그녀는 근신 방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눈으로 보는 바깥의 경치에 그녀의 눈빛에 선함이 담겼다.
세상이 아름다운 이유는 모든 게 세상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아마도 무언가를 잊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잊었기에 그것이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홀가분함.
모든 죄가 말소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오래전 모든 생물체를 벌벌 떨게 했던 대천사장의 권위와도 직결되는 일이었다.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풍경을 둘러보던 그녀의 표정이 점차 사라져 갔다.
어느새 대천사장의 근엄함을 되찾은 그녀가 정면을 응시하며 짧게 말했다.
“아슈르.”
챙!
이카엘의 정면에 수십 개의 패널이 박히더니 곧바로 아슈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권속의 율법에 따라 이카엘의 힘이 개방되면서 그의 능력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당신의 종이 부름에 응답합니다.”
아슈르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쳐흘렀고, 눈빛에서도 예리한 기운이 번뜩였다.
대천사 이카엘의 3각 마라라는 것만으로도 그의 자부심은 최고조에 달했다.
“카리엘은?”
“우려하던 대로입니다. 현재 백경을 소집해 다른 대천사들의 병력을 소집하고 있습니다. 24시간 후면 연옥으로 떠날 듯합니다.”
“전해 주세요, 당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신호를 지배하는 아슈르라면 말보다는 정보를 전달하는 게 빠르다.
하지만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이라 오히려 두려웠다.
“이카엘 님, 저는…….”
“시간이 없습니다. 정신 결합을 허합니다.”
아슈르는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어서 수많은 패널들이 펼쳐지면서 이카엘의 성광체로 녹아들듯 사라졌다.
아슈르가 수집했던 정보가 빠르게 뇌리를 스치면서 모든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졌다.
이카엘은 눈을 내리깔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결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후우.”
이카엘의 눈꺼풀이 살며시 내려오고, 그녀의 가슴에 공기가 빨려 들어갔다.
다음 순간, 그녀의 눈이 무섭게 부릅떠지면서 분노의 일갈이 터졌다.
카~리~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