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388
날카로운 철 손톱이 이카엘의 미간을 향해 찌르고 들어가는 순간 시로네가 울티마 시스템을 가동했다.
‘안 돼! 멈춰!’
바벨은 수도를 겨눈 채로 동작을 멈췄다.
하지만 이미 자리에는 아무것도 서 있지 않았다.
어느새 몸을 날린 이카엘이 바벨의 등 뒤를 지나 반군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바벨의 속도를 몸소 체험했었던 세인은 이카엘의 움직임을 본 것만으로 소름이 돋았다.
‘저런 괴물과 싸워서 미로를 탈환해야 한다고?’
인간의 생각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 이카엘이 모두를 향해 고했다.
“라의 의지를 받들라. 이 시간부로 전쟁을 중단한다면 라께서도 너희를 해방시켜 줄 것이다.”
“해, 해방? 우리가 승리한다는 건가?”
반군들이 웅성거렸다.
대형 타기스를 보유해도 전쟁의 승패는 장담할 수 없는 판국에 천국에서 먼저 휴전을 제의할 줄은 예상 밖이었다.
사령관 크루드가 나섰다.
“해방이라 함은, 정확히 어떤 걸 의미하는 거지?”
“원하는 조건을 말하라. 내 역량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수렴하겠다.”
크루드는 세인을 돌아보았다.
솔직히 이카엘이 등장한 순간부터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할 정도로 절망적이었기에 이토록 저자세로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세인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신호를 보냈다.
물론 그가 이곳에 온 것은 반군 해방이 아닌 미로를 구하기 위해서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얘기를 들어 보는 게 순서였다.
“자리를 옮기지.”
크루드가 지휘통제실을 가리키자 이카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협상을 할 사람은 네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카엘이 시로네를 돌아보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물론 시로네는 73구역의 빛으로 반군에게 상징적인 존재다.
하지만 협상 테이블에서 무언가를 결정하기에는 경험도 위치도 애매한 게 사실.
이카엘이 유독 시로네를 지목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일단 보내.”
가올드가 말했다.
시로네가 신의 징벌을 가동하는 조건으로 내건 것이 이카엘과의 단독 대면이라면 전술적으로도 옳은 선택이었다.
가올드 일행에게 신뢰감이 있는 크루드는 결국 승낙했고, 시로네와 이카엘은 간부의 안내를 따라 지휘통제실의 복도를 나란히 걸었다.
여전히 시로네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그녀는 어째서 자신에게 이렇게 냉담한 건지, 많은 생각들이 맴돌았으나 입 밖으로 꺼낼 시간은 아직 아니었다.
단지 그녀도 자신과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할 뿐이었다.
“이곳입니다. 도청이 불가능한 유일한 곳입니다.”
간부는 반군 사령부에서 가장 보안이 철저한 면담실의 문을 열고 두 사람을 들여보냈다.
문이 닫히고 경계병들마저 자리를 떴다.
반경 100미터 이내에는 접근하지 말라는 이카엘의 지시였다.
시로네의 위험도를 고려하면 말도 안 되는 요구지만, 어차피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면담실의 탁자에 마주 보고 앉은 시로네와 이카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긴장을 견디지 못한 시로네가 먼저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오랜만이네요.”
그제야 이카엘도 웃음기를 드러냈다.
“그렇군요. 무사히 돌아가서 다행이에요.”
이카엘이 아타락시아를 전수해 주었던 상황을 시로네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곳에서 다시 만날 날도 없었으리라.
다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이카엘이 시로네를 지목한 이유는 앙케 라의 의지에 따름이다.
또한 이곳에 온 이유는 반군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협상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거지?’
시로네를 보는 순간부터 마음을 긁는 듯한 감각이 끝없이 이어졌다.
73구역의 빛. 직접 아타락시아를 전수해 주었던 소년.
그런데 어째서 대천사의 능력을 넘겨주려고 했던 것일까?
당시의 감정을 떠올리던 이카엘의 성광체가 놀란 듯 움찔거렸다.
그녀의 미간이 구겨지고, 알 수 없는 감정이 온몸을 잠식했다.
“괜찮아요?”
시로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습니다. 그럼 우선 반군의…….”
“그 전에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시로네에게는 무엇보다 먼저 들어야 할 말이었다.
이카엘이 대답을 기다리듯 눈을 깜박이자 시로네는 심호흡을 하며 신중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요, 저에게 무언가 해 줄 이야기가 없나요?”
이카엘의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시로네와 자신 사이에 딱히 전할 말은 없다.
그럼에도 부정하지 못하는 것은, 바벨을 봤을 때처럼 또다시 아련해지는 감정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아니요.”
이카엘은 단호하게 말했다.
애써 부정하는 차가운 목소리였다.
“개인적으로 할 이야기는 없습니다.”
시로네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목숨을 걸고 천국행을 선택한 것은 그녀를 만나면 반드시 들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무 말도, 해 줄 게 없다고요?”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군요, 저는.”
그 순간 이카엘의 목소리가 떨렸다.
없는 기억이지만, 마음은 이미 던져져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말을 쥐어짜 내려고 했다. 그럴수록 알 수 없는 어딘가에서 거대한 슬픔이 밀려들었다.
고통을 참듯 얼굴을 찡그린 그녀가 힘겹게 내뱉었다.
“당신에게 해 줄 말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카엘은 마음을 괴롭히는 어떤 것의 존재를 찾아 헤매듯 시로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순간 아름답게 반짝이는 눈에서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금 흘리고 있는 눈물의 의미를 그녀는 알지 못했다.
라의 부름 (5)
타락한 거인들의 나라 무스펠헤임.
꺼지지 않는 화염이 지평선 끝까지 뻗어 있는 곳에는 불의 거인족이 살고 있었다.
일화의 술을 통해 태어난 거인 중에서 증오의 화신을 품은 그들의 머릿속에는 목적도 원인도 불분명한 불타는 증오뿐이었다.
괴성을 지르며 서로를 상처 입히는 아귀다툼의 전장 속을 카리엘은 유유히 걸어 나갔다.
그들도 한때는 천국의 지휘 체계 아래 속박되어 있던 자들이기에 아름다운 대천사에게 불의 입김을 뿜었다가는 즉각 소멸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불의 거인족의 수장 수르트가 카리엘을 마중했다.
신장 7미터에 화염의 갑옷을 입고 서 있는 자태는 가히 신장에 비할 바였으나, 그런 그도 대천사를 마주할 때는 가장 경건한 자세로 무릎을 꿇었다.
“미천한 자가 카리엘 님을 뵙습니다.”
뜨거운 열기가 카리엘을 덮쳤다.
천국에서 생물학적으로 최고의 강자는 단연 이미르겠지만 불의 거인족은 다른 거인보다 조금 독특한 데가 있다.
바로 고유의 마법을 구사한다는 것.
아마도 불의 정형화되지 않은 발상의 자유로움에 기인한 성질일 것이다.
이미르와 견줄 전사는 이카엘의 3각 마라 아슈르 정도가 있지만 연옥에서 최강의 검사는 단연 수르트였다.
“나를 위해 해 줄 일이 있다.”
수르트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가 차고 있는 불의 검 무스펠이 거대한 화염을 토해 내며 길게 땅을 밀고 나아갔다.
대천사가 불의 거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은 천국으로 돌아가기를 꿈꾸던 수르트에게는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무슨 일이든 맡겨만 주십시오!”
카리엘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앙케 라는 모든 전권을 이카엘에게 맡겼고 그녀는 전쟁을 중단시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카리엘의 목적은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손발이 잘린 지금 이카엘에게 대항할 방도는 없다.
하지만 놈들은 온다.
‘가올드.’
그는 반드시 올 것이다. 미로가 살아 있는 한.
‘인정하긴 싫지만…….’
미로는 뛰어나다.
인간 중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를 보유하고 있다면, 천국의 정세를 바꿀 기회는 언제든 올 터.
지금은 병력을 모으는 데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최정예부대를 꾸려서 제2천 라키아로 와라. 타락의 전당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저희에게 가장 어울리는 장소로군요.”
불의 거인은 천국 출입이 금지되어 있지만 율법의 원리에 따라 타락천사의 도시 라이카만큼은 예외였고, 이것이 바로 카리엘이 제2천으로 도주한 이유였다.
“시간이 없다. 즉시 출발하도록.”
지시를 내린 카리엘은 곧장 날아올라 천국으로 향했다.
손님을 맞이할 시간이었다.
***
“아무것도 말해 줄 게 없다고요?”
시로네는 이카엘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게 사실일지도 모른다.
헛된 망상, 혹은 그랬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이고 지극히 인간다웠던 기대감.
그런 작용들이 착각을 불러일으켰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머릿속에 잔상으로 남아 있는 이 흐릿한 기억은, 그리고 그 기억을 만지려고만 하면 심장이 뛰는 느낌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혹시…….”
시로네는 차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똑같은 대답을 들었을 때 그 슬픔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애써 둘러 물었다.
“거핀이란 분은 어떤 사람인가요?”
쿵.
이카엘의 성광체가 다시 흔들렸다.
천사들이 이 광경을 봤다면 정신을 잃을 정도로 놀랐을 터였다.
거기에 생각이 미친 이카엘은 정신을 다잡았다.
천국의 지휘관으로서 반군과의 휴전협정을 위해 온 자리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거핀은 최후의 가이아인입니다. 천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광자계를 이탈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현재는 모든 정보가 소실되었지만요.”
거핀 말소는 시로네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카엘은 어떻게 그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가능한 이유는 하나.
거핀의 유적을 통해 인간이 거핀의 존재를 짐작하듯 그녀에게도 거핀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이 사물화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고작해야 100년을 사는 인간에게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곳은 거핀과 가장 깊은 연관이 있는 천국이었다.
“친한 사람이었나요?”
이카엘은 고개를 저었다.
당시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골이 지끈거렸다.
“아뇨. 그는 고지식한 인간이었습니다. 타협을 몰랐죠. 그가 아니었다면 가이아인도 그토록 많은 희생을 치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첫 번째 천국행에서 이카엘을 만났을 때하고는 미묘하게 반응이 달랐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바벨의 기록에 의하면 가이아와 천국은 서로의 존멸을 걸고 치열하게 싸운 것으로 나와 있으니까.
“적으로 만났던 것이군요.”
“수없이 충돌했고 수없이 논쟁했죠. 강한 사람이었어요. 대천사인 저조차도 결판을 짓지 못했으니까요.”
이카엘의 입꼬리가 자신도 모르게 올라갔다.
싸우는 기억을 떠올리는 것임에도 그녀의 눈에 행복한 빛이 감돌았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이카엘이 문득 말을 멈췄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색 빛깔로 가득 차 있는 기억의 공간에 시커먼 구멍 하나가 뻥 하니 뚫려 있는 기분.
그 검은 공간을 바라보는 순간 모든 마음이 그곳으로 빨려 들어가며 가슴이 구겨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이카엘은 눈을 부릅뜨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는 안 돼. 더 이상 얕보일 수는 없다.’
그녀는 소리를 증폭시켜 모두에게 고했다.
“협상 대상자를 바꾸겠습니다. 책임자는 이곳으로 오세요.”
시로네는 다급해졌다.
분명 그녀는 알고 있고, 그렇기에 말을 해야만 했다.
“어째서 속이는 거죠?”
“무엇을? 저는 아무것도 속이는 게 없습니다.”
“예전하고 다르잖아요! 저에게 아타락시아를 전수해 준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카리엘을 견제하기 위해서입니다. 덕분에 이렇게 대천사장의 자리에 다시 오를 수 있었죠.”
“아뇨, 당신은 나에게 말을 해야 돼요. 그럴 책임이 있어요.”
“제가 책임져야 할 것은 오직 천국뿐입니다.”
“당신은……!”
시로네는 벌떡 일어났다.
두 사람 모두 핵심을 외면하며 기의만으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당신이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