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389
시로네가 소리치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이카엘의 전언을 들은 반군 사령관 크루드와 가올드 일행, 간부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무슨 일이야?”
플루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시로네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나 분위기는 험악했다.
이카엘은 화가 난 듯 시로네를 노려보고 있었고 시로네 또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입술을 짓깨물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카엘이 짜증 난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내 실수를 인정하지.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다. 원하는 것을 말하라. 천국이 원하는 조건은 오직 전쟁의 중단이다.”
이카엘은 어느새 근엄한 대천사장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시로네에게는 그 모습만이 전부였다.
지휘통제실로 자리를 옮긴 모두는 원탁에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몇몇 사람은 자리가 없어 서 있었고, 그중에는 시로네와 플루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카엘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벽을 노려보는 시로네의 모습에 플루는 의아했다.
시로네가 어째서 이카엘과의 면담을 조건으로 걸었는지도 의문이지만, 대천사와 단둘이 앉아 서로 얼굴을 붉힐 수 있는 일이 세상에 과연 존재할까 싶었다.
사령관 크루드가 말했다.
“우리의 조건은 이렇다. 반군을 천국으로 복귀시키는 것. 일화의 술을 금지할 것. 또한 케르고인의 제사권을 박탈하고 모든 종족을 대상으로 지도자를 뽑을 것. 이렇게 세 가지다.”
이카엘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어째서 인간은 이토록 평등을 좋아하는 것일까?
이 세상 만물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들은 평등을 제1의 가치로 여긴다.
‘나약하기 때문에.’
그래, 나약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굴종이 아닌 나약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수용하마. 앞으로 너희가 일화의 술에 의해 고통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는 안 돼.”
벽에 서 있던 간부 하나가 나섰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흉흉한 눈빛으로 이카엘을 노려보고 있던 그는 천국과의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자였다.
“너희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봤는데. 이제 와서 없었던 일로 하고 끝내자고?”
“데브라, 자중해라.”
크루드가 만류했으나 데브라는 울분을 참지 못했다.
“적어도 너희도 같은 고통을 당해야 하는 거 아냐? 천사 중의 1명이 대표로 사죄하고 자결해라! 그게 바로 내 조건이다!”
평등.
이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앙케 라의 의지에 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알겠다. 수렴하지.”
원탁이 수군거렸다.
데브라야 이성을 잃었다고 치지만 설마하니 천사의 자결까지도 허용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자 눈치를 보고 있던 또 다른 간부가 나섰다.
“영생을 얻게 해 줘.”
악성종양이 몸에 퍼져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자였다.
“너희는 죽을지언정 소멸하지 않잖아? 그런데 천사 따위 1명 죽이는 게 뭐가 대수겠어? 우리에게도 영생을 줘! 그것이 조건이다!”
평등.
세 번이나 이어진 평등의 제안에 이카엘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눈빛이 차가워지는 순간 장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어서 지휘통제실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디까지 방종할 참이냐, 인간들이여.”
치이이이이잉!
이카엘의 광륜이 확장되며 순식간에 아타락시아가 집적되었다.
가올드가 에어 프레스로 짓누르자 원탁이 납작하게 내려앉았다.
이미 자리를 벗어난 이카엘이 천장을 뚫고 날아올랐다.
“젠장! 쫓아!”
이카엘의 전매특허인 아타락시아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힘을 증폭시킨다.
그렇기에 최강이다.
잔잔히 흐르는 봄바람조차도 아타락시아가 작용되면 세상을 쓸어버릴 정도의 태풍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세인이 철륜안을 돌려 이퀄리브리엄을 시전했으나 이카엘의 정보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공격해! 지금 붙잡지 못하면 멸망이다!”
크루드는 협상을 망친 간부들을 노려보다가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들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자신조차 순간적으로 어쩌면 하고 바라는 감정이 들었으니까.
이카엘이 증폭시키고 있는 것은 사령부 지하를 흐르는 수맥이었다.
증폭력은 최소 2만 배 이상.
수맥이 뚫고 나오는 순간 사령부의 모든 것은 박살 나 버릴 것이다.
“대천사장으로서 명하노니.”
아타락시아가 화려한 빛을 천공으로 쏘아 올렸다.
“멸하라.”
땅이 수직으로 흔들리고 바닥에 균열이 갔다.
철로 만든 건물들이 종잇장처럼 찢어지기 시작하자 인간들의 얼굴에 절망이 담겼다.
가올드의 생각은 정확했다.
전투라는 이름으로는 정의 내릴 수 없는, 오직 강력함 그 자체가 이카엘이었다.
-제거 대상 : 대천사 이카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려는 그때, 흑색 물체가 빠른 속도로 이카엘에게 날아왔다.
모두에게는 잔상이었지만 이카엘에게만큼은 바벨의 형태가 박제된 것처럼 똑똑히 보였다.
피할 수 없는 속도가 아님에도 피할 수 없는 이유는 기억 속에 뚫려 있는 검은 구멍 때문이었다.
‘뭐지? 대체 무엇을 망각했기에 정신이…….’
인간의 기준으로 1만 자 이상의 생각이 지나간 뒤에야 바벨은 이카엘의 앞에 도착했다.
그녀는 여유롭게 몸을 뒤틀었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구속력이 그녀의 몸을 붙잡았다.
빠르게 시선을 돌린 그녀의 눈동자에 금강무장으로 변신한 시로네가 아카마이의 안티테제를 발동하고 있는 게 보였다.
‘시로네……?’
쾅!
바벨의 주먹이 이카엘의 얼굴을 후려쳤다.
무지막지한 위력에 노출당한 이카엘의 몸이 수직으로 내리꽂히다가 지상에 충돌하기 직전 금빛 날개를 펼치며 추락을 막아 냈다.
“저, 저럴 수가…….”
전투태세를 갖춘 반군들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번만큼은 가올드도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카엘이 누운 상태에서 부드럽게 몸을 일으켜 세우자 곧바로 시로네가 지상에 착지했다.
금강무장의 촉수들이 공작새의 깃털처럼 펼쳐져 이카엘을 겨누고, 외에 달린 아카마이의 눈동자가 그녀를 옭아맸다.
‘안티테제인가.’
이카엘은 어깨를 터는 것으로 구속력에서 벗어났음을 증명했다.
‘하급 천사 정도는 충분히 묶을 수 있겠군.’
분명 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하지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세상 만물 중에 그녀보다 강한 건 없다.
“시로네,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면…….”
쿵!
땅을 울리는 소리에 이카엘의 걸음이 멈췄다.
금속 천사 바벨이 시로네의 곁을 지키며 전투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카엘은 살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과 닮은 존재가 시로네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지독히도 불쾌했다.
라의 부름 (6)
‘이카엘, 어째서…….’
시로네는 처연한 눈빛으로 이카엘을 바라보았다.
미간을 구기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선한 인상과 전혀 달랐다.
그녀는 대체 무엇을 감추고 있는 것일까?
아니, 어째서 변한 것일까?
거핀을 만난 이후 인간의 편에 서게 되었다던 그녀의 모습은 사라지고, 강력한 권위로 인간을 통제하는 대천사장의 위엄만이 얼굴에 서려 있었다.
만약 조금만 늦었더라도 반군 제1사령부는 폭발하고 말았을 터였다.
수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녀를 때렸다는 것보다도, 그녀의 손에 의해 누군가가 죽는다는 사실이 더 무서웠다.
“이제 그만두세요. 평화협정을 맺으러 왔다고 해 놓고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는 건가요?”
“시로네, 영원한 평화는 없습니다. 단지 휴전을 제의하러 왔을 뿐. 하지만 인간의 방종이 하늘에 닿았으니 율법에 의해 멸하는 것뿐입니다.”
앙케 라는 사라진 자의 질문에 대한 답을 듣기를 원한다. 오직 그것을 위한 휴전이다.
수족이나 다름없는 천사들의 활동을 금지시키면서까지 대답을 갈구하는 라의 의지는 이카엘의 몸속 깊은 곳까지 전해져 왔지만, 그렇다고 오만한 인간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협상은 결렬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반군을 멸하고 천국의 권위를 세울 것입니다.”
“그렇게 쉽게 될까?”
시로네의 뒤편으로 가올드 일행이 다가왔다.
주위에는 전투준비를 끝마친 반군들이 수백 기의 구로이에 탑승한 상태였다. 멀리서 타이탄이 가동되는 엔진음이 들렸다.
이카엘의 입장에서는 그저 같잖을 뿐이었다.
어떤 인간도 대천사를 위해할 수는 없다. 율법의 위상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가능한 경우라면 율법을 넘어서는 율법. 인간을 초월하는 것뿐.
‘그 사람처럼…….’
이카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리라.
“준비해. 온다.”
이카엘의 몸에서 짙은 전의가 피어올랐다.
아타락시아가 아니라도 산천초목이 부르르 떨 정도로 강력한 기운에 시로네 일행은 바짝 긴장했다.
가올드는 전에 없이 매서운 눈초리로 이카엘을 노려보았다.
실제로 접한 대천사의 무력은 역시나 대단했다.
하지만 질 수 없다.
이길 수 없을지언정, 그에게도 절대로 져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었다.
쿠쿠쿠쿠쿠쿠쿠!
이카엘이 서 있는 자리의 땅이 짓눌리면서 원을 따라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이 무시무시한 폭발력을 머금으며 튀어 나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지하기 전에 그녀가 도달할 수 있는 거리는 반군 사령부 전체.
즉, 첫 번째 타깃은 반드시 죽는다.
가급적 이번 사건에 끼어들지 않을 생각이었던 케이지 B팀조차 먼 거리에서 방어 태세를 갖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대상은…….’
이카엘이 눈을 번쩍 뜨며 튀어 나갔다.
‘시로네.’
라는 천사들의 활동을 금지시켰지만 원천 개념에서 탄생한 대천사들은 라의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미 ‘굽어보기’로 이곳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살피고 있을 터.
이카엘은 점차 다가오는 시로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워낙에 빠른 속도라 시로네를 포함한 모든 풍경이 시간이 정지한 듯 멈춰 있었다.
‘내 의지를 보여 주지 않으면 천사장의 권위가 흔들리게 된다.’
벌써 우스운 꼴을 많이 보였다.
여기서 더 흔들리게 되면 대천사들은 이카엘의 권위를 벗어나 제각각 행동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라의 의지를 이루는 데에 크나큰 난관이 생길 것이다.
‘따라서…….’
시로네를 제거한다.
여기까지 생각한 시점에 그녀의 몸은 시로네와의 거리를 절반 정도 좁히고 있었다.
그러자 천천히 풍경이 움직였다.
바벨과 가올드가 거의 동시에 중심을 기울이고 이어서 세인과 줄루, 아르민이 움직임을 보였다.
다음으로 강난이, 그다음으로 에텔라, 시이나, 쿠안이 반격의 자세를 취했다.
마지막으로 플루가 도킨스 알고리즘에 의해 자동 동작을 수행할 때까지도, 시로네는 움직이지 않았다.
금강무장의 상태에서 인지능력은 엄청나게 상승한다.
따라서 부동의 결과는 온전히 그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생각이 빠르다는 건 어떤 의미로 불행한 일이다.
보지 않아도 될 것을 보게 되고,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을 생각하게 되니까.
이카엘은 이를 악물고 시로네에게 손톱을 세웠다.
심장을 뽑아낼 것이다.
바벨이 휘두른 수도를 회피하며 5개의 손가락을 시로네의 심장 쪽으로 내밀었다.
수십 미터 전부터 밀려온 바람이 시로네를 덮치면서 그의 로브가 뒤로 밀려났다.
동시에 이카엘의 손이 우뚝 멈춰 섰다.
‘어째서…….’
시로네의 슬픔에 잠긴 얼굴이 드러났다.
‘울고 있습니까?’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대천사의 권위보다도, 앙케 라보다도 강력한 억제력이었다.
과연 자신은, 이 소년에게 얼마나 전부를 던져 버렸던 것일까?
반격을 도모하려던 모두의 동작이 정지한 가운데, 시로네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예전처럼…… 한번만 안겨 보고 싶었을 뿐인데…….”
시로네의 목소리에 이카엘의 성광체가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기억은 말소되었다. 하지만 말소되었다는 기억은 말소되지 않았다.
그 작은, 어쩌면 미립자보다도 얇을 말소의 테두리에 묻어 있는 건 우주보다도 더 큰 깊은 감정.
그녀는 진실로 기억을 잃어버렸지만,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 되었던 기억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깨달았다.
그것이 무엇이건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이카엘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시로네를 안아 줄 수는 없지만 그를 해칠 수도 없었다.
‘내가 받아들이면 되는 거야.’
이카엘은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