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400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데에 있어 주관적인 기준을 두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객관적인 기준 또한 없다고 믿었다.
인간의 목숨이란 애초부터 기준을 둘 수가 없는 것이니까.
그렇기에 시로네가 데이나를 살린 이유는 단지 그녀가 아직 필요하다는 합리적인 사고방식의 결과였다.
“일어나. 선배님을 찾아야 하니까.”
“네, 제가 찾을게요, 주인님. 저에게 맡겨만 주세요.”
시로네는 데이나를 앞세워 건물 밖으로 나갔다.
이번에 상대한 영생자들은 확실히 다른 사냥 부대와 질적으로 다른 자들이었고, 건물이 파괴된 규모만 봐도 플루가 어디에서 싸웠는지는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선배님!”
시로네는 건물 벽에 기대있는 플루를 보고 달려갔다.
맨살이 드러난 몸에 울긋불긋한 열꽃이 피어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심각한 건 부러진 팔이었다.
“괜찮아요? 어쩌다 이렇게 당한 거예요?”
시로네는 건물 안에 있는 라운의 시체를 살폈다.
아마도 자신이 상대한 적과 다르지 않은 영생자였을 것이다.
아르망의 금강무장 상태에서도 초반에는 고전했으니 그를 이긴 건 플루의 극기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플루는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은 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 정도로 죽지는 않아. 그나저나 저 여자는 뭐야?”
시로네는 데이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선배님의 상처를 치료해 줄 수 있어?”
데이나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치료하는 마법은 없어요. 죄송해요, 주인님.”
“주인님?”
플루의 한쪽 눈꼬리가 올라갔다.
설명하자면 길었기에 시로네는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일단 옷부터 구하는 게 좋겠어요.”
플루의 한숨 소리가 길게 새어 나왔다.
“주, 주인님!”
그때 데이나가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동시에 알 수 없는 힘이 세 사람을 완벽하게 짓눌렀다.
“크윽! 이건…….”
노르의 능력이 아니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전방을 얼보자 벽 너머로 일단의 요정 무리가 등장했다.
요정 72계급 중에 제2계급에 속하는 경외의 요정 미르카가 오만한 표정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려한 화장에 거대한 날개를 달고 있는 것만 봐도 보통의 직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으나, 현재 시로네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페오페?”
미르카의 옆을 따르고 있는 페오페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왔던 길만큼 (1)
제2천 라키아.
타락의 전당 성벽 앞으로 걸어오는 가올드를 바라보며 미로는 무수한 생각에 잠겼다.
20년 전 그의 절규를 들었을 때부터 느끼고 있었던 한 가지 가능성에 대한 단상은, 어쩌면 가올드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것이었다.
‘어리석은 인간 같으니…….’
지금 당장이라도 욕지거리를 내뱉고 싶은 마음을 미로는 억눌렀다.
피 칠갑에 감추어진 가올드의 단단한 근육을 그녀는 바라보았다.
예전의 호리호리한 몸매와는 전혀 다른 모습.
더 이상 새겨질 공간조차 없을 정도로 상처로 가득한 피부.
누가 보더라도 단련에 단련을 거듭한 끝에 완성된 전투적인 육체였다.
그 간극이 기분 좋아서일까?
인류의 존망이 걸린 엄청난 대사건 앞에서도 미로는 농담을 내뱉고 싶었다.
‘많이 섹시해졌다?’
여느 때라면 던져 버렸을 말이 지금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조금은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심정을 대변하듯 미로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정말로 왔다.
불의 거인들을 압살하고, 수많은 마라와 타락천사들을 찢어발기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하지만 왔다고 한들…….’
대체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그저 나를 갖기 위해? 독차지하기 위해? 가올드의 옆에 누워서 오직 그를 위해 속삭이는 사랑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인간이라면 응당 그럴 수 있는 일이지만, 가올드는 이미 정도를 넘어서 있었다.
이곳은 천국 적진의 한복판이고, 카리엘에 의해 마법을 봉인당한 상태에서 그녀의 가치란 고작 그것뿐이었다.
한 인간의 욕망의 대상이 되어 인류의 목숨과 저울질당하는 힘없는 인질.
‘또한…….’
이곳에는 대천사가 무려 2명이나 있다.
카리엘과 유리엘.
카리엘의 힘이 약화되어 있다고는 하나 파괴의 대천사 유리엘과 콤비를 이룬다면 이보다 최악의 조합은 없을 터였다.
결론은, 왔다고 해도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가올드는 이곳에서 죽을 것이고, 자신도 마찬가지.
남은 건 천국의 군대에 의해 전 인간이 살해당하는 것뿐이었다.
“왜 온 거야?”
미로는 차갑게 내뱉었다.
속에서 북받치는 울분 정도야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지만 그럴수록 가올드에게 마음을 던져서는 안 된다.
인질의 가치를 적에게 상기시켜 봤자 희생자의 숫자만 늘어날 테니까.
“너 때문에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었어.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기는 하는 거야?”
미로는 간절히 원했다.
‘돌아가. 제발 지금이라도 돌아가라고, 이 멍청아!’
넋이 나간 듯 위를 올려다보고만 있는 가올드의 모습에 미로는 말에 약간의 감정을 담았다.
“돌려놔! 내가 평생을 바친 업적을 네가 전부 망가뜨렸어. 그러니 돌려……!”
쿵!
가올드의 눈이 풀리면서 두 무릎이 바닥을 찍었다.
척추를 타고 흐르는 신경들의 발광에 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무시무시한 고통 끝에 도달한 것은 지극히 무감동한 평온.
풀이 꺾인 듯 구부러져 있던 그의 고개가 다시금 천천히 일어섰다.
엉망으로 터진 입술 사이로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미안하다.”
미로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심장에서 폭발하는 충격파를 내색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미안하다. 너무 오래 걸렸지? 처음에는…….”
말과 숨이 뒤엉킨 가올드는 다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끊어졌던 20년의 시간이 이어지면서 오직 미로에 대한 감정만이 선명하게 이어졌다.
“처음에는 금방일 것 같았는데, 계속 늦어져서, 더 빨리 오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어서…….”
가올드의 눈이 붉어지자 미로의 눈에도 뜨거운 기운이 차올랐다.
한 인간의 극한까지 농축된 감정은 한낱 말로써 풀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떤 말이 없이도, 가올드가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20년의 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가올드도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인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반쯤 의식이 날아가 있던 눈동자가 비로소 정상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미로는 이것이야말로 20년 전의 가올드라는 걸 알고 있었다.
“돌아가자, 미로야. 이제 그만…… 돌아가자.”
미로는 이를 악물었다.
스스로도 지금 차오르는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분노, 원통함, 혹은 그것으로 포장하고 싶을 뿐인 어떤 다른 무언가.
‘죽어야 한다.’
합리적인 그녀의 이성은 곧바로 감정을 차단하는 해법을 내놓았다.
여기에서 자신이 죽어야 한다.
이미 모든 상황이 기울었지만 최소한 최후의 전쟁을 막기 위한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면, 천국에 특파된 저들 중 몇 사람만이라도 살아서 라키아를 나가야 했다.
“나는…….”
미로가 각오를 끝내고 입을 여는 순간 번쩍! 하고 타락의 전당 후미에서 거대한 광채가 솟구쳤다.
무지막지한 에너지의 파동이 수십 킬로미터를 지나 이곳까지 도달하자 카리엘과 유리엘이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충격파는 앙케 라가 있는 아라보트에서 밀려들고 있었다.
“이카엘…….”
카리엘이 구겨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현재 4대력을 지배하는 대천사들이 이카엘의 천사장의 자격을 검증하고 있는 중이다.
만약 4대력의 대천사들이 이카엘을 제압한다면 자신에게도 좋은 일이다.
그들은 천사장의 권한 밖에서 각자의 판단에 따라 행동할 것이고, 그렇다면 자신의 결정도 그들과 동화되어 별다른 일이 아니게 될 수 있다.
반면에 이카엘이 4대력의 대천사들을 제압한다면 상황은 복잡하게 돌아간다.
그녀는 천사들이 방종하게 구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것이고, 불의 거인족을 잃은 카리엘에게도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반드시 4대력의 대천사가 이카엘을 꺾어 주기를 바라야 하지만, 카리엘은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카엘이 누군가에게 패한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결코 그렇지 않아.’
카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반드시 꺾여야 한다.
다만 그것을 할 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어야 할 뿐이다.
‘내가 짓밟을 것이다. 그녀를 짓밟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건 오직 나밖에 없어.’
조금 전보다 더욱 강력한 에너지 파동이 밀려들어 라키아를 휩쓸었다.
***
아라보트의 높은 첨탑이 지반 깊숙한 곳에서부터 흔들렸다.
쿠우우우우웅!
파동이 지나간 자리는 티끌 하나 남지 않고 정갈했다.
그것은 실로 인간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순수의 극치였다.
“하아, 하아.”
이카엘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를 중심으로 정확히 사방위에, 대천사들이 죽은 듯 드러누워 있었다.
‘강하다.’
4대력의 대천사의 정신에 동시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과연 천국 최강의 사법 아타락시아.’
어떤 천사의 능력보다도 그녀의 증폭은 독특하다.
지성이 범접할 수 있는 한계치의 영역이라 일컬어지는 유와 무 이전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4대력의 대천사들도 세상을 지배하는 개념으로서 어느 하나 손색이 없지만, 그런 자들 4명이 달라붙어도 고작 그로기 상태에 빠트리는 게 전부였다.
“후우, 일단 이것으로 검증은 끝내도록 하지.”
가장 먼저 메타트론이 상체를 일으켰다.
“아직까지는 이카엘, 당신이 천사장이오. 우리는 그것을 믿으며, 시로네에 대한 처우를 온전히 당신의 판단에 맡기도록 하겠소.”
시로네.
이카엘은 그 이름을 떠올리며 천천히 일어섰다.
어쩌면 그저 말로써 그들을 설득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같은 천사끼리 무력시위를 하는 한이 있어도 시로네에 대한 판단을 지켜 냈다.
어째서일까?
대체 그 소년이 자신에게 무엇이기에?
남은 3명의 대천사들이 각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도 메타트론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천국을 지배하는 대천사로서 인간의 방종을 두고 볼 수는 없는 법, 우리는 앙케 라의 명에 따라 전쟁에 나서지 않겠지만 마라를 통해 관여할 것이오.”
이카엘은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말릴 수도 없거니와, 천국의 편에 서 있는 대천사장으로서 인간을 벌하는 일을 막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앙케 라의 전언은 천사의 활동을 금지하라는 것뿐이었다.”
이카엘이 간접적으로 긍정을 표하는 한편 다시 한 번 강조하자 4대력의 천사들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서로를 돌아보았다.
현재 전투가 치러지는 곳은 아라보트를 제외한 6개의 천국 전부.
각자 1명씩 맡아서 단속하면 끝날 일이었다.
“그럼, 가지.”
4명의 대천사가 동시에 빛의 날개를 펼치자 성스러운 바이브레이션이 화음을 일으키며 세상을 뒤흔들었다.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 대천사들을 올려다보던 이카엘은 차갑게 몸을 돌려 아라보트의 첨탑으로 향했다.
그녀가 지켜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 앙케 라뿐이었다.
***
쿠웅.
유리엘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성벽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착지한 것만으로도 모든 풍경이 그를 향해 휘어지는 듯한 집중도가 발생했다.
그가 한 걸음을 내딛자 가올드가 똑같은 간격으로 물러섰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후퇴가 없었던 그였기에 뒤를 따라온 세인 일행은 가올드가 어떤 압박감에 당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이다.’
세인은 감정을 제어했다.
어떻게든 여기까지 오긴 왔지만 진정한 관문은 불의 거인족도, 마라도, 타락천사도 아니다.
눈앞에 서 있는 대천사.
가올드가 극한의 극기로 그의 3각 마라 시바를 처리하기는 했지만 권속의 율법만 따졌을 때 유리엘의 무력은 시바를 훨씬 초월한다고 예상할 수 있었다.
“가올드.”
“내가 맡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