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418
언뜻 스쳐 지나간 의문은 소멸의 공포 앞에서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퇴각해야 한다. 모두 도망쳐야 해. 그것만이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이야.’
개인 통신 장치에 손을 가져다 댄 크루드는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인정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전군……!”
일단 내뱉으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
말이야 번복하면 그만이더라도, 스스로 패배를 시인한 순간 붕괴되어 버린 의지는 결코 일어설 수 없는 것이다.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크루드가 숨을 크게 불어 내쉬며 반군 전체에게 명령을 하달하려는 그때, 한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플루가 거인들의 공세를 돌파하며, 아라보트의 무시무시한 불길을 똑바로 노려보며 뛰어가고 있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는가?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어.”
그런데 어째서 그녀는 기다리는 것은 죽음밖에 없는 소멸의 중심으로 가는 것일까?
“빌어먹을! 너 따위에게 휘둘리지 않아!”
흉흉하게 눈을 부릅뜨고 몸을 일으켜 세운 크루드는 파이퍼의 기능을 최대치로 설정하고 땅을 박찼다.
***
제불 지하 11층.
제불의 지하에는 수많은 천사들의 지성이 이룩한 총아가 자리하고 있었다.
천국의 군수공장 시온.
천국에서 생산되는 모든 물건이 이곳에서 나오고, 카리엘의 대법전이나 유리엘의 극락곤도 예외는 아니었다.
끝없이 뻗은 강철 다리 아래로 기능조차 짐작할 수 없는 수많은 기계들이 쇳물을 튀기며 철컹철컹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길이 복잡하군.”
줄루는 강철 다리의 미로처럼 얽힌 길을 멀리서 파악하며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찾았다.
그의 어깨 위에는 작고 부리가 넓적한 검은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줄루가 세 살 때 최초로 소환에 성공한 10티어급 몬스터 에르가였다.
인간의 말을 따라 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능력이 없지만 지금처럼 어두운 길을 혼자 걸을 때면 그녀는 늘 에르가를 곁에 두고는 했다.
“쪽. 쪽. 쪽. 쪽.”
줄루의 어깨에서 뛰어내린 에르가가 강철 다리 아래를 지나더니 공갈 젖꼭지 빠는 소리를 흉내 냈다.
“그래, 거기구나.”
줄루는 여섯 갈래로 갈라지는 다리에서 세 번째 다리를 선택했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난간 뒤에 숨어 있었다.
-어째서 혼자 가려고 하지?
줄루가 메타게이트를 혼자서 찾아오겠다고 했을 때 세인은 그녀의 판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에텔라는 프랭크와인을 만나야 하기에 따로 떨어져야 하지만 잉그리스와 시온은 똑같이 제불에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아르민 일행과 합류하여 함께 움직이는 것이 임무를 성공시킬 확률이 높을 테지만 줄루는 한사코 혼자 가기를 원했다.
-그편이 나에게는 낫다요.
줄루의 말을 곱씹던 세인은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고, 그렇게 그녀는 시온의 남쪽 끝에 있는 메타 게이트 생산 공장을 찾아낼 수 있었다.
띠처럼 이어진 트레일러에 수많은 메타 게이트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어떤 인간도 쉽게 들어올 수 없었던 장소.
땅의 나라에서 메타 게이트의 가치가 얼마나 높은지만 떠올려도 절로 물심이 들 법한 광경이었으나 줄루의 눈빛은 처음과 똑같이 차분하기만 했다.
“갖은 분란은 다 일으켜 놓고 이제는 내뺄 궁리를 하는 것인가?”
트레일러의 건너편에서 들린 여자의 목소리에 줄루는 메타 게이트 쪽으로 뻗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4개의 팔을 가진 나신의 여성이었는데, 피부가 검고 뱀처럼 찢어진 눈에 틀어박힌 동공마저 빛을 빨아들이고 있어 멀리서 봤을 때는 그저 그림자가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줄루는 여자의 머리 위에 떠 있는 붉은 빛을 내는 삼각형의 개수를 확인했다.
3각 마라 칼리.
소멸의 대천사 파이엘의 직속 수하였다.
‘강하다.’
줄루는 차갑게 눈을 내리깔았다.
천국에 와서 3각 마라의 무위를 몸소 실감한 그녀지만 눈앞에 있는 마라는 무력과 별개로 다른 마라들과 차원이 다른 이질적인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올 때가 있으면 갈 때도 있는 법. 순리를 따르기 위한 것뿐이다. 방해하지 마라.”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대륙어도,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방해?”
칼리가 4개의 팔을 벌리고 손바닥을 활짝 펼치자 검과 방패, 채찍과 해골이 각각의 손에 쥐였다.
“죽음의 신에게 대항할 수 있는 생물은 없다.”
칼리의 검이 그어지자 시커먼 선이 공간을 가르며 줄루에게 쇄도했다.
순간 이동으로 회피한 줄루는 에르가를 소멸시키고 3티어급 몬스터 쿠거를 소환했다.
크아아아앙!
거대한 맹수가 당장이라도 칼리를 씹어 삼킬 듯이 접근해 날카로운 손톱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칼리의 방패가 손톱을 막는 순간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며 쿠거의 몸을 감쌌다.
“크아아아아!”
쿠거의 털이 증발하고 피부에 검버섯이 피더니 마치 부패되듯 고름이 차올랐다.
칼리의 네 가지 무구는 모두 사망의 개념을 담고 있고, 그중에서도 방패는 가장 빠른 죽음을 유발시키는 질병을 발생시켜 어떤 생물도 살아남을 수 없게 만든다.
“생명 있는 것들은 모두 내 발 앞에 엎드릴지니.”
방패를 치운 칼리가 검을 휘두르자 쿠거의 거대한 몸이 싹둑 절반으로 잘려 나갔다.
쿠거는 최상위급 소환 몬스터에 속하고 특히나 줄루가 구사할 수 있는 몬스터 중에서는 가장 물리력이 강하다.
쪽쪽쪽쪽쪽쪽쪽.
그런 쿠거를 한 방에 제압하자 줄루가 물고 있는 공갈 젖꼭지의 빠는 소리가 더욱 빠르게 들렸다.
“자, 선택하라. 너에게 어울리는 죽음은 무엇이냐?”
칼리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상체를 활짝 젖히자 시커먼 다리가 연기로 풀어지면서 몸이 떠올랐다.
“……이거 위험한데.”
줄루는 진실로 그렇게 생각했다.
***
“흐으으으. 흐으으으.”
제불의 복도를 따라 수많은 천사들이 배를 부여잡고 흐느끼고 있었다.
그 굴욕적인 광경의 끝에, 사탄과 계약을 한 프랭크와인이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뒤편에는 흉측한 몰골로 변신한 야맹의 수하들이 또 다른 천사를 찾아 흉악한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키키키! 더, 더 많은 천사를…….”
천사의 능력에서 자유로운 사탄이지만 그들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가는 태초의 역사에서부터 알고 있다.
천사의 개념을 파훼하더라도 그들이 합심하여 육체 능력만으로 덤벼든다면 결과는 모르는 일.
그렇기에 사탄은 천사를 죽일 수 있는 가장 쉽고 편한 길을 모색했다.
그 결과물이 가라스와 결합한 야맹의 수하들이었다.
“흐으윽! 이렇게 존재하느니…….”
배 속에서 가라스의 씨앗이 커져 가는 것을 느낀 천사는 눈을 질끈 감고 광륜을 거꾸로 회전시켰다.
펑 소리와 함께 천사의 몸이 빛으로 변해 소멸해 버렸다.
수치심.
고귀한 정신을 지녔다고 자부하는 천사들에게 소멸보다도 무서운 감정이었다.
한 천사의 소멸을 시작으로 복도에 쓰러진 모든 천사들이 광륜을 회전시켜 스스로 존재를 지웠다.
“크크크, 레이시스는 멍청했어.”
가라스의 성질을 이용해서 강한 힘을 손에 넣는다?
“아니, 그냥 가라스가 되면 되는 것이지.”
눈앞에 있는 모든 천사들이 자결하자 율법의 시소에 의해 사탄의 존재감이 더욱 강력한 힘으로 구축되기 시작했다.
“우오오오오오오!”
덩치는 더욱 거대해졌고, 관자놀이에서 뿔이 튀어나와 휘어지듯 일어섰다.
장갑처럼 두꺼운 가슴근육을 꿈틀대며 주먹을 움켜쥐자 열화의 불꽃이 화르르 피어올랐다.
“아직 아니야. 조금 더 필요하다.”
송곳니가 턱 밑까지 내려온 얼굴로 자신의 주먹을 쳐다보던 사탄이 불꽃을 복도 끝으로 쏘며 소리쳤다.
“가라! 1명의 천사도 빠짐없이 찾아내라! 그리고 유린해라! 이제부터 천국은 우리의 세상이다!”
“키아아아아아!”
가라스의 형태로 변신한 수십 명의 수하들이 복도 끝에서 이글거리는 불꽃을 향해 뛰어들었다.
천사의 연회장.
“흑. 흑흑.”
가라스에게 당한 천사들이 스스로 존재를 소멸시킨 반면에 단 1명의 천사만큼은 자리를 피해 아무도 없는 연회장에 숨어들었다.
하지만 그녀라고 해서 율법의 이치를 어길 수는 없었고, 점차 배는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성취의 천사 아디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너무나도 행복했던 그녀였기에 결과를 알고서도 차마 떠날 수가 없었다.
“사라지고 싶지 않아. 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위대한 천사시여.”
1각부터 3각까지, 3명의 마라들이 아디오의 곁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대장격인 미련의 마라 루벨이 말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그것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였다.
가라스의 씨앗이 잉태된다고 해도 천사의 내구력이라면 소멸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육체에 가해지는 피해를 떠나서, 개념을 다루는 천사에게 괴물의 아이를 낳았다는 정신적 충격은 어마어마할 터였다.
“아, 안 돼! 아아아아!”
아디오가 눈을 크게 치켜뜨며 소리를 지르는 것과 동시에 펑 하고 배가 폭발했다.
그녀의 성광체가 미친 듯이 흔들렸고, 권속의 율법에 따라 3명의 마라가 현실에 존재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흑, 흐으으으윽!”
아디오는 바닥에 쓰러져 비참한 눈물을 흘렸다.
이제 와 깨닫는 것은, 처음부터 다른 천사들과 똑같이 소멸을 선택했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꾸룩. 꾸룩.
아디오의 몸에서 빠져나온 생물체가 어미를 무시하고 연회장의 문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누구도 원치 않았던, 네피림의 탄생이었다.
그날의 오후 (1)
정오의 태양이 아라보트를 비추는 가운데 시로네와 이카엘은 한참이나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발할라 액션은 여전히 시로네의 머리 위에서 회전하고 있었고 그것을 바라보는 이카엘의 눈은 지독히 차가웠다.
‘천국을 파괴한다고?’
시로네가 설명한 마법의 이론에 의하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번에야말로 그를 죽여야 한다.
이카엘의 고운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며 맹수의 발톱처럼 오므라들었다.
그럼에도 튀어 나갈 수 없는 이유는, 살의를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상대의 기질을 읽어 내는 시로네의 직지 때문.
‘아니, 그런 게 아니다.’
페오페를 회생시키면 시로네는 천국을 파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카엘에게는 딱히 어려울 게 없는 일이고, 그녀가 아는 시로네는 내뱉은 말을 번복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불확실한 가정에 승부를 걸기보다는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
‘아니, 그런 것도 아니야.’
이카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시로네의 아타락시아는 자신이 빙의를 통해 직접 전수해 준 능력이었다.
시로네의 정신과 동화되면서 그에 대해 많은 감탄과 뿌듯함, 애절한 감정을 느꼈었다.
‘기억이 나지 않아.’
대부분의 것들은 그녀의 정신에 선명하게 떠오르지만 문제는 애절함이라는 감정이었다.
‘나는 저 소년을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다시금 정신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이카엘은 시로네에게 향하는 자신의 감정을 명확한 언어로 정의 내릴 수 없었다.
사랑?
단순히 사랑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얕다.
깊은 곳까지 감정을 파고들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카엘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죽여야 한다.’
시로네를 믿을 수 없다.
아니, 믿을 수 없는 건 오히려 자신.
완벽하지 못한 기억을 가지고 상대를 분석하려고 하는 건 어떤 경우에서든 좋지 않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되는 거야.’
그렇게 결정을 내린 이카엘이 말했다.
“좋습니다. 페오페를 회생시켜 드리죠. 단,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페오페만 구할 수 있다면 상관없어.”
시로네는 손에 들고 있는 작은 요정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도 이것이 잘한 결정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페오페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영겁에 가까운 수명을 낭비하고 처참한 몰골로 쪼그라들었다.
‘페오페를 살려야 해.“
지금 당장은 그것만이 전부였다.
“요정을 제 앞에 내려놓으세요. 생명력을 증폭시키는 것은 고도로 예민한 작업입니다.”
이카엘이 거래를 택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였다.
일단 아타락시아가 발동하기 시작하면 모든 정신을 페오페에게 집중해야 한다.
직지의 시로네라면 그 빈틈을 정확하게 파고들어 치명적인 일격을 먹일 수도 있을 터.
신뢰할 수 없는 상대 앞에서 행할 전략이 아니었다.
“걱정하지 마. 페오페가 살아나기 전까지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을 테니까.”
“부디…….”
이카엘이 무미건조한 말투로 대답하자 시로네도 경계심을 놓지 않고 천천히 다가갔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거리를 좁히는 시로네를 바라보며 이카엘은 같은 생각만을 계속 되풀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