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425
시온을 뒤흔드는 괴기스러운 비명이 터지면서 신장 10미터의 사신이 정체를 드러냈다.
로브는 허리가 유난히 길었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긴 소매 끝으로 늘어뜨린 앙상한 해골의 손가락이 을씨년스러웠다.
빛의 흡수율이 100퍼센트에 근접한 로브로 인해 마치 공간에 구멍이 뚫린 듯했다.
1티어급 몬스터로 불리는 죽음의 마법사지만 줄루는 살면서 리치를 마주친 적이 없었다.
따라서 리치는 곧 그녀의 화신이 투영된 자기 자신.
처음으로 만난 생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그녀의 일그러진 욕망이 투영된 존재였다.
“에르가!”
가슴을 부여잡고 피눈물을 흘리는 줄루의 얼굴은 로브 속에 감추어진 리치의 얼굴을 대변하듯 영혼이 빠져나가 있었다.
흐오오오오오오오!
칼리는 리치의 모습에서 생소한 감정을 느꼈다.
그녀의 주인인 파이엘에게서나 접할 수 있었던 거대한 공포.
죽음은 생물의 끝이지만 모든 것의 끝은 아니다.
진정한 끝은 죽음 너머에 있는 것. 영원한 고독.
리치에게서 풍기는 그 고독의 기운이 칼리를 떨게 만들고 있었다.
“에르가아아아아아!”
줄루의 목소리는 마치 저승에서부터 밀려들어 오는 듯 아련하게 멀면서도 자극적이었다.
내가 죽였다.
생명을 빼앗으면 영원히 자신의 곁에 있어 줄 것만 같아서, 처음으로 만난 친구의 목을 잔혹하게 졸라 죽였다.
‘이럴 수는 없어.’
칼리는 무시무시하게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4개의 무구를 동시에 휘둘렀다.
‘어떤 인간도 죽음의 공포를 이겨 낼 수는 없다.’
죽음이야말로 생물의 지배자인 것이다.
“소멸하라!”
칼리의 검이 리치의 로브를 베고 지나갔으나 오히려 베인 건 그녀의 검이었다.
텅 빈 공허함 속에 벨 수 있는 건 없다.
흐오오오오오오!
리치가 앙상한 두 손을 내밀며 칼리를 뒤덮었다.
* * *
“이건 꽤나…… 흥미롭군.”
성취의 천사와 가라스 사이에서 태어난 네피림 무명은 아르민이 펼친 스톱의 장막 밖에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르민의 세상에서 오직 그만이 유일하게 도달했다고 추정되는 광속의 영역.
그것은 분명 끝없는 성취욕을 지닌 채 태어난 무명에게도 수십 개의 장벽 바깥에 있는 경지였다.
하지만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통찰력을 지닌 그에게 장벽은 결국 시간의 문제일 뿐이었다.
“오호. 아하. 그렇군.”
검을 늘어뜨린 채 시종 고개를 끄덕거리는 모습에 아르민은 소름이 돋았다.
어떤 행동을 취한 것은 아니지만 시시각각 광채를 내는 그의 눈빛을 볼 때마다 확신이 들었다.
성장? 각성? 진화?
인간의 어떤 개념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할 만큼 빠른 속도로 경지를 씹어 삼키며 다가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제길! 이대로는……!’
아르민이 도박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그때, 무명의 옆으로 시커먼 바람이 밀려들었다.
챙!
무명은 손쉽게 검을 들어 쿠안의 공격을 막아 내고 반격을 개시했다.
마치 오래된 연구에 골몰하던 학자가 바람을 쐬듯, 쿠안을 몰아붙이는 얼굴은 지극히 평온했다.
‘빌어먹을 자식이.’
쿠안은 그 표정이 못마땅했다.
목숨을 걸고 칼부림을 펼치는 상황에서 졸린 듯한 눈을 하고 있다니.
무명에게는 검의 부딪침이 유치한 소꿉장난에 불과한 것인가?
‘검을 우습게 알아?’
쿠안이 사방으로 외중력을 뽑아내며 진동했다.
좌우로 진동하는 육체가 어느 순간 무명의 곁을 지나쳐 갔다.
“커억!”
쿠안의 몸에 수십 개의 상흔이 생기면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바닥을 굴러 중심을 잡은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무명을 노려보았다.
“이런…… 너무 얕았군.”
무명이 칼날에 묻은 핏물을 털 어내며 고개를 돌렸다.
“다음에는 조금 더 깊을 거야.”
쿠안의 앙다문 입속에서 뿌드득 이가 갈렸다.
치명타를 허용하지 않은 대가로 얻은 수십 개의 작은 상처는 오히려 그의 검술에 대한 자부심을 난도질했다.
쿠안이 땅을 박차고 튀어 나가는 것과 동시에 무명이 달려들었다.
정면으로 충돌한 두 검사는 일순 경합을 벌이는 듯했으나 불과 몇 초 만에 다시금 쿠안의 몸에 상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스톱의 장막 안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시이나가 황급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우리가 나가야 해!”
쿠안의 실력으로는 무명을 제압할 수 없다.
설령 기술을 빼앗기는 한이 있더라도 초반에 승부를 보는 게 가장 좋은 판단이었다.
그 순간 아르민이 시이나의 허리를 껴안고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오빠?”
“…….”
아르민이 대답이 없다는 것에서 시이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오빠! 이거 놔!”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 봐도 아르민은 시이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미 플리커 마법을 정복한 무명은 이곳의 세 사람 모두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쿠안이 어떻게든 계기를 만들어 주면 시이나를 데리고 도망치는 게 최선이었다.
“오빠! 오빠!”
시이나는 더욱 거칠게 몸을 흔들면서 아르민을 떼어 내려고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얼어붙은 듯 행동을 멈추고 눈을 부릅뜨며 전방을 바라보았다.
쿠안을 베고 지나간 무명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아하, 이 맛이구나.”
쿠안은 잠시 등을 보이고 서 있다가 씁쓸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마침내 치명타, 쿠안의 옆구리가 벌어지면서 시뻘건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하아.”
분노의 탄식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진짜 미쳐 버리겠네.”
절망. 절망 (3)
쿠안은 스키마로 근육을 조여 출혈을 막았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하게 검을 겨누었다.
“호오, 그런 기술도 있구나.”
무명의 입가에 실금 같은 미소가 지어졌다.
단지 보는 것만으로 인체 도식을 꿰뚫고 응용하는 통찰력은 인간의 입장에서 이해 불가능한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필요가 없겠어.”
무명이 돌진하는 것과 동시에 쿠안의 몸에서 24개의 외중력이 뿜어져 나왔다.
각각의 외중력은 마치 고무줄에 연결된 공처럼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며 쿠안의 몸을 진동시켰다.
극히 괴이한 움직임이었지만 무명에게는 외길처럼 정해진 동선에 불과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무명은 쿠안보다 월등한 무브먼트를 선보이며 그를 압박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예측과 예상, 심지어는 상상과 망상의 영역마저 넘어 버린 궤적.
“크윽!”
또다시 치명타가 들어가자 쿠안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바닥에 착지했다.
무명이 쌍검을 교차해 밀고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 검을 들었으나 돌진하는 힘에 의해 벽까지 밀리고 말았다.
카카카카칵!
칼날이 짧은 거리를 마찰하면서 단단히 고정되고, 두 검사의 시선이 검광 사이에서 충돌했다.
“아하, 이제 알겠어.”
이제 무명의 관심은 검술이 아닌 쿠안에게 쏠렸다.
아르민이 스톱 마법으로 방어막을 친 것은 납득이 된다.
장벽이 사라지는 순간 플리커 마법을 시전하여 순식간에 두 사람의 목을 칠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력의 차이를 깨달은 쿠안이 살길을 포기하고 바득바득 덤비는 이유는 의문이 들었다.
결국 그가 내린 해답은, 아주 비효율적이고 불합리한 인간의 마음이었다.
“저들을 살리기 위해 죽는 것인가?”
쿠안은 시이나와 짧게 눈을 마주쳤다.
검사의 초인적인 신경으로도 억누르지 못한 찰나의 진심이었다.
그리고 무명은 쿠안의 눈동자에 비친 여자의 얼굴을 놓치지 않았다.
기억에 의하면 그것은 사랑이다.
아버지라 부르기도 혐오스럽지만, 가라스의 동물적 본성 중에서도 최상에 위치한 종족 번식의 욕구.
‘아니, 그렇다면 오히려 더 말이 되지 않는다.’
가라스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는 육체마저 개조한다.
그런데 쿠안의 행동 양식은 오히려 그런 동물의 기본적인 본성을 역행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저들은 너를 미끼로 삼아 도망칠 생각이다. 게다가 여자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오히려 옆에 있는 남자의 아이를 낳고 싶어 하지. 그런데 어째서 이런 행동을 하지?”
종족 번식의 욕구가 성취욕으로 변환되어 있지만 기본적으로 가라스의 유전물질을 부여받은 존재.
무명의 눈으로 직접 보고 느낀 것이라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후우우우우.”
쿠안은 깊은 곳에서부터 숨을 끌어 올렸다.
굳이 가라스의 촉을 빌리지 않더라도 시이나가 아르민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러고 있는 것일까?
시이나와 아르민을 살리는 대가로 얻는 건 죽음뿐인데도, 무엇을 기대하며 싸우고 있는 것일까?
‘좋겠군, 마법사들은.’
마법사들은 언제나 최고의 선택만을 한다.
그렇기에 아르민과 함께 있는 시이나의 판단은 이번에도 옳을 터였다.
마치 급전을 받자마자 부리나케 레스토랑으로 달려간 자신에게 망설임 없이 죽음을 이야기했던 그때처럼.
시이나의 곁에 있고 싶었다.
검사 따위가 아닌, 유일한 1명의 남자로서 머물고 싶었다.
그리고 이 순간, 쿠안은 모든 희망을 내려놓았다.
“내가 알 게 뭐야, 멍청아.”
쿠안은 여태까지 끌어 올린 호흡을 한 번에 토해 내며 검을 휘둘렀다.
두어 걸음 물러선 무명이 하찮은 존재를 보듯 눈가를 찡그리며 이기죽거렸다.
“어리석군. 자신의 행동에 대한 당위조차도 모른 채 죽음을 선택하다니. 그것이 인간인가?”
달려드는 쿠안을 향해 쌍검을 겨누고 눈을 부릅뜨자 무명의 두 팔이 연기처럼 풀어지는가 싶더니 고속 베기가 전방을 휘감았다.
후우우우우우웅!
가히 검막이라 부를 정도의 속도.
공기가 불에 타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쿠안의 눈에 수십 개의 칼날이 밀려들었다.
‘찾았다, 내 무덤.’
절대적인 죽음이 다가오는 상황 속에서도 쿠안은 묘하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가 선택한 무덤은 시이나의 마음속.
시이나가 보는 앞에서, 그녀를 위해 죽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되는 것이다.
‘나도 알아. 유치하지.’
쿠안의 몸이 급격히 궤적을 틀면서 검막을 우회했다.
‘사실은 화가 나는데도…….’
아르민이 시이나를 끌어안고 있다는 것이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는 데도 한마디 말조차 하지 못하는.
쿠안은 무명의 주위를 더욱 빠르게 휘돌았다.
그에 반응하여 무명의 검이 뱀처럼 휘어지며 뒤를 쫓자 쿠안의 몸에 수십 개의 상처가 생겼다.
치명상이 아니더라도 치사량의 출혈이었다.
“놔! 이거 놔!”
시이나는 목이 터져라 쿠안을 부르고 있었지만 소리는 시간의 장벽을 넘어가지 못했다.
“시이나! 진정해! 아직은 때가 아니야!”
아르민의 심정도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플리커 마법으로 간격을 좁혀 무명에게 스톱을 건다면 이 난관을 타개할 가능성이 조금은 있다.
하지만 무명이 같은 방식으로 마법을 회피한다면, 그다음은 100퍼센트 확률로 시이나가 죽는 것뿐이었다.
“기다려! 조금만 더 참아!”
“쿠안 씨! 쿠안 씨!”
세상이 고속으로 회전하는 풍경 속에서 쿠안은 시이나의 얼굴을 찰나 동안 눈에 담았다.
‘그래, 이것이 나다.’
그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며 그녀가 보는 앞에서 칼춤이나 추고 있는 어릿광대.
“큭큭큭! 큭큭큭큭!”
쿠안은 허파를 들썩거리며 웃었으나 잔뜩 일그러진 얼굴은 마치 울고 있는 듯했다.
“그래, 검의 천재라는 칭호 따위, 너에게 주마.”
회피만을 거듭하던 쿠안이 마침내 검막의 안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나는 검귀다.”
후우우우우우웅!
사방으로 외중력이 뻗으면서 쿠안의 몸이 팽이처럼 회전했다.
“응?”
이미 인간의 발상을 초월한 동작을 수행하던 두 검사였기에 지켜보는 자들은 변화조차 감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외중력의 진의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무명은 전투 중에 처음으로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뭐지?’
쿠안의 동작이 애매했다.
여태까지의 궤적이 외길이었다면, 갑자기 판단을 내려야 하는 두 갈래 길로 갈라진 기분.
‘아니, 그래 봤자 달라질 건 없어. 상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