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429
그렇기에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시이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또한 그것은 더 이상 쿠안의 죽음이 모두의 죽음에 수렴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죽으면 안 돼! 당신이 죽으면……!’
아르민을 밀치고 뛰어나간 시이나는 스톱 장벽의 바깥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오지 마!”
그때 쿠안의 외침이 그녀의 발을 굳게 만들었다.
인지는 늦었지만 분명 동시에, 무명의 검이 그녀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시이나를 베지 못한 무명이었으나 더 이상 조롱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쿠안이라는 정체 모를 인간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십시오.”
뒤늦게 경어를 붙인 쿠안은 수많은 상처에 당해 피 칠갑을 하고 있었다.
심장만큼 빠르게 헐떡이고 있었으나 여전히 눈빛은 살아 있었다.
아르민이 시이나를 다시 데리고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그가 다시 무시무시한 살의를 담아 무명을 향했다.
‘젠장. 진짜 강하다, 이 자식.’
만약 이 생물체가 인간 세상으로 넘어간다면 풍장은 얼마를 희생시켜 이놈을 막아 낼 것인가?
죽음의 끝자락에서도 어쩔 수 없이 드는 검사의 호기심이었다.
또한 그렇기에 이어지는 의문은 이것이었다.
‘지금의 나라면 풍장을 벨 수 있을까?’
트라우마에 시달려 일부러 외면했던 생각이 처음으로 머리에 장착되었다.
반드시 이길 수 있으리라는 확신은 여전히 들지 않지만 예전처럼 질 것이란 생각도 없었다.
그 순간 쿠안은 뜨거워졌고, 처음으로 세상에 태어나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 끝낸다.’
스키마로 출혈을 최대한 억누르고 있지만 팔의 절단면에서 나오는 피를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이것이 마지막.
‘후회는 없다.’
쿠안은 검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무명에게 다가갔다.
절뚝. 절뚝.
다리를 저는 쿠안의 모습을 지켜보는 무명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풍경이 휘청휘청 흔들리더니 급기야는 쿠안의 모습이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인지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건 평생을 가도 못 하겠지.’
경지의 문제가 아닌 개성의 분화.
너와 나의 검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무명은 처음으로 검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나의 검이다.’
무명이 돌진하는 것과 동시에 쿠안의 몸이 회전했다.
“흐에에에에에!”
광기 속에 담긴 적확한 살의가 무명의 검이라면, 쿠안의 검은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그래.’
모든 것이 뒤죽박죽 뒤섞여 있는 풍경 속에서 쿠안은 시이나의 얼굴을 정확히 끄집어냈다.
‘나는 어릿광대 피에로.’
다가가지도 멀어지지도 못하는, 그저 그녀의 앞에서 춤을 추는 피에로.
“흐에에에에에!”
무명의 검로가 공간을 무한으로 쪼개듯 더욱 첨예해졌고, 쿠안은 그 무한의 죽음을 향해 몸을 날렸다.
‘내가 이긴 거야.’
설령 죽더라도 시이나의 곁에는 아르민이 있다.
‘내가 이긴 거라고.’
아르민을 이겼다.
내가 시이나를 구했다.
비참했던 삶의 마지막에 남은 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작은 위안 하나뿐.
쿠안은 눈시울이 붉어졌으나 아내 괴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검을 움켜쥐었다.
무슨 상관이 있을까?
‘나는 검귀다!’
쿠안의 몸이 사상 최대치의 속도로 회전하면서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
전체를 장악해 나가던 무명의 검로 사이를 한 줄기의 섬광이 베고 지나갔다.
* * *
“에르가아아아아!”
줄루는 목청이 찢어져라 절규를 토해 냈다.
크게 치켜떠진 눈동자 아래로는 붉은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영혼이 빠져나간 표정은 한기를 느낄 만큼 괴기스러웠다.
흐오오오오오!
그럴수록 리치의 위력은 막강해졌다.
칼리의 4대무구가 번갈아 가며 능력을 발동시켰으나 그 어떤 죽음도 리치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리치의 정수리 위에서 전기의 구체가 떠올라 사방으로 전력을 퍼트렸다.
푸른 전기는 사라진 뒤에도 백광의 잔상을 망막에 새겼고, 번쩍번쩍 빛나는 풍경 속에서 시온의 장비들이 파괴되었다.
줄루는 정신이 세 살로 회귀한 것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외롭다.
우주에서 가장 고독하다.
어느 누구에게도 던지지 못했던 마음은 아귀가 되어 내면의 살을 파먹으며 깊숙이, 더욱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어 가 줄루의 고독을 심연까지 끌어내렸다.
흐오오오오오!
“이럴 수가…….”
칼리의 피부가 파르르 떨렸다.
리치는 인간의 마음이 어디까지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줄루의 정신은 더욱 탁하고 어둡게 강해졌고, 리치의 전격은 끝을 모르고 퍼져 나갔다.
시온의 벽을 따라 긁어 가던 수백 개의 전기가 급기야 하나로 뭉쳐 칼리의 몸을 강타했다.
“꺄아아아아악!”
죽음의 신이 내지르는 비명조차도 리치의 슬픔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리치는 칼리의 몸을 끌어안고 스스로 전기가 되었다.
파스스스스스!
칼리의 검은 육체에 실금 같은 균열이 일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딱딱한 재가 되어 굳어 갔다.
리치와 칼리가 동시에 소멸한 뒤에도 나락으로 떨어진 정신은 쉬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줄루는 무릎을 꿇고 몸을 끌어안은 채 연신 에르가의 이름을 불렀다.
“에르가. 에르가.”
“키르르르.”
상사가 발동되면서 작고 검은 새 한 마리가 줄루의 눈앞으로 떠올랐다.
차가운 표정의 에르가가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줄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아아아아! 으아아아아!”
카냐는 바벨을 끌어안고 오열했다.
엉망으로 파괴된 형태는 죽음보다 더 처참해 보였다.
처음부터 생명은 존재하지 않았으나 카냐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인간은 너무나 고독한 존재라서.
“어째서…… 삶이란 이렇게 힘든 것인가요?”
우오린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소녀처럼 물었다.
“어째서 마음을 주는 쪽이 더 아파야 하는 것인가요?”
간도는 아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우오린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누군가를 떠올리며 아파하는 그녀는 알고 있을까?
지금 자신이 그녀를 바라보며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아마도 모르겠지.’
그것이 인간이니까.
카리엘마저 떠나 버린 타락의 전당에서 유리엘은 전쟁의 마지막에 와서야 앙케 라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여전히 가올드는 싸우고 있으나 더 이상은 어떤 위협도 되지 못했다.
정신은 이미 지옥으로 떠나 버렸고, 현재 그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마지막 투쟁 본능이 만들어 내는 동물적 신호일 뿐이었다.
“아아아아! 아아악!”
강난은 온 힘을 다해 두 팔을 잡아당겼다.
에 걸린 손목에서 조금씩 얼얼한 감각이 전해져 왔다.
그것은 분명 고통일 테지만, 강난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된다!’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의 능력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고 있다는 뜻.
가올드에게 가야 한다는 맹목적인 의지가 강난의 육체를 초월해 작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아악! 아악! 아악!”
수갑과 손목이 충돌하면서 덜컥덜컥 소리가 들리고 벌겋게 달아오른 피부가 벗겨지면서 피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것이 인간.’
유리엘은 생각한다.
마음을 던지는 자.
선으로도 악으로도 흐를 수 있고, 그렇기에 이 세상의 절대성을 붕괴시키는 것.
아카식 레코드에서 태어났으나 아카식 레코드의 바깥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
“아악! 아악! 아악!”
강난은 온 힘을 다해 팔을 휘둘렀다.
신적초월을 통해 자충의 능력을 넘어선 힘이 가해지자 마침내 을씨년스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으지직. 으지직.
뼈가 으스러지면서 그녀가 내리치는 팔의 반동이 조금씩 커져 가고 있었다.
전심全心 (3)
맥클라인 거핀.
천국 역사를 통틀어 아카식 레코드의 소멸에 가장 근접했던 존재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천사들에게 짙은 상처를 남겼다.
천사의 성광체에 망각은 존재하지 않지만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의 무게에 눌려 화석이 되어 버린 그 존재가 지금 파이엘의 성광체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때도 그랬었지.’
차가운 기억에 보존되어 있던 의문이 해동되면서 또다시 혼란이 찾아왔다.
인간은 강한가, 약한가.
어째서 그들은 한낱 동물적 욕망에 휘둘리면서도 가끔은 그것을 초월한 극상의 정신체에 도달하는가.
수많은 존재들에게 수만 번 정의된 생물이 인간이지만 그들을 완벽하게 지칭할 수 있는 말은 아직까지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그만큼 복잡한 생물이라서?
‘아니.’
파이엘은 생각했다.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인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끝없이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소멸시켜야 한다.’
파이엘의 성광체가 폭발적으로 퍼졌다.
천국을 집어삼킬 만큼 빠르게 확장되던 광륜이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조여들면서 한 톨의 점이 되어 사라졌다.
“안 돼!”
창공을 빠르게 가르며 다가오던 이카엘이 상황을 깨닫고 소리쳤다.
아파테이아-멸극의 폐안.
파이엘의 전매특허인 멸극의 폐안은 소멸의 원천 개념을 집대성한 능력으로, 일단 발동이 되면 대천사들조차 꺼리는 최악, 최강의 기술이었다.
“대천사의 의지를 시행한다.”
파이엘의 후드 안에 박힌 빛으로 그린 눈동자가 헤일로와 같은 완벽한 원으로 변했다.
그 2개의 원의 중심에 깊고 맑은 점이 찍혔다.
우스꽝스러운 얼굴이지만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비인간적이고 무정한, 그렇기에 경외감까지 느껴지는 눈이었다.
‘이상하다.’
시로네는 반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직지를 통해 살펴본 파이엘은 껍데기에 불과했고 현재 소멸의 원천 개념은 세계 전체에 골고루 퍼져 있었다.
그것이 바로 성광체가 사라진 이유.
-세상을 닫는다.
파이엘의 눈이 천천히 감기자 시로네를 담고 있는 풍경의 색채가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크으으으윽!”
화신의 소멸감을 느낀 시로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我.
내가 사라지면 우주도 사라진다.
그것이 바로 멸극의 폐안, 자기 자신을 닫는 것으로 세상을 닫아 버리는 소멸의 극의였다.
“으아아아아!”
아직 멸극의 폐안은 절반도 닫히지 않았지만 시로네는 절망감에 몸부림쳤다.
일체유심조의 이치로 아르망의 화신을 장착하지 않았다면 이미 공허의 무로 풀어져 버렸을 터였다.
‘버텨야 해! 버티지 않으면…….’
결국 소멸할 것이다.
하지만 시로네가 할 수 있는 건 조금이나마 화신을 유지하는 것뿐.
멸극의 폐안은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속도로 시로네의 세상에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퍽 하고 시로네의 눈에 실핏줄이 터지더니 코에서도 피가 흘러내렸다.
사력을 다해 화신을 유지해 보지만 눈을 감고 말고는 파이엘의 선택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대천사의 원천 개념이 지닌 강력한 힘이었다.
‘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