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431
카리엘은 건조한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휘둘리고 있잖아.”
생의 마지막을 직감한 카리엘은 심연에 가라앉아 있던 아주 오래전의 기억을 끄집어 올렸다.
‘그렇죠, 이카엘?’
“태초에 증폭이 있었습니다.”
이카엘은 카리엘과 유리엘을 불러 두고 설명했다.
“그 증폭 속에서 유와 무의 개념이 탄생했죠. 즉, 존재와 비존재가 발생한 것입니다.”
눈을 빛내며 듣고 있는 카리엘과 눈을 마주친 이카엘은 다정한 손길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카리엘은 고양이처럼 즐거워했다.
“유와 무. 그것을 관장하는 개념이 바로 창조와 파괴, 즉 당신들인 것이랍니다.”
카리엘이 물었다.
“그렇다면 증폭되기 전에는 무엇이 있었죠? 아무것도 없었던 것인가요?”
이카엘은 언제나 호기심이 왕성한 카리엘이 좋았다.
“후후,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우오린이 말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지.”
간도는 태초에 대해 이야기하는 우오린의 표정 하나하나를 주시하며 귀를 기울였다.
“즉, 시간도 공간도 없다. 백지를 상상하는 것과는 달라. 설령 백지를 지운다고 해도 무는 아니다.”
인간은 무를 이해하고 있지만 경험할 수는 없다. 무라는 것은 경험 이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결국 무의 상태였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하지만 간도야, 이렇게 생각해 봐야 한다. 만약 이 세상에 ‘있음’이란 상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없음’이라는 상태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설령 태초에 아무것도 없었더라도, 인간은 그것을 ‘없음’이라고 정의해서는 안 된다.
무로 정의하는 순간 오히려 무의 개념에 위배되는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태초의 상태를 어떻게 정의 내리죠?”
우오린이 검지를 치켜들고 말했다.
“꺼짐 상태(Shutdown).”
“꺼져 있다고요?”
카리엘이 되물었다.
이미 이해했으나 다시 한 번 듣고 싶은 열망이었다.
“그래요. 무언가가 있든 없든, 그것 자체가 꺼져 있는 상태. 그렇기에 물질도 개념조차도 없는…….”
이카엘은 거두절미하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어떤 작용이 일어났습니다.”
최초의 원천 개념에서 탄생한 대천사라도 이런 식으로밖에는 꺼짐 상태를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 작용이 꺼짐 상태를 켜짐 상태로 바꾼 것이죠. 바로 그 증폭의 시작 지점에서…….”
우오린은 양손의 검지를 치켜들고 엑스 자로 교차했다.
“있음과 없음의 두 가지 상태가 서로를 지칭하며 탄생한다. 0과 1로 규정되는 정보들이 무한한 패턴으로 조합되면서 마침내 이 우주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지.”
유리엘이 물었다.
“그렇다면 증폭이란?”
평소 호기심을 드러내는 천사가 아니었기에 이카엘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떤 작용이 이 세상을 증폭시킨 겁니까?
이카엘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저로서도 알 수가 없는 일이지요.”
우오린이 말했다.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지. 다만 무언가가 작용했고, 이 세상이 깨어났다. 그 작용이 무엇일까? 아주 미약한 전기적 자극? 우주를 밀어낼 정도의 거대한 폭발? 사실 무엇이든 상관이 없는 일이지.”
우오린은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지금 내 손 끝에서 터진 찰나의 순간이 어떤 우주의 시작과 끝일 수도 있다. 혹은 초월자의 절대적인 명령 같은 것일 수도 있겠지.”
“그렇군요.”
가능성은 무한하여 실체조차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떤 작용을 통해서 무언가가 증폭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말이야, 아니, 기묘하다고 해야 하나?”
우오린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인간에게는 그 작용과 완벽하게 유사한 하나의 단어가 존재한다. 한번 맞혀 보겠느냐?”
간도는 한참이나 궁리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엇이죠?”
“그것은 바로…….”
잠시 뜸을 들이던 우오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내뱉었다.
“마음心이다.”
“크으으으으!”
붕괴되기 직전의 정신 속에서 시로네는 미약하게나마 안정의 빛을 되찾았다.
비로소 시야가 열리고 창백하다 못해 거의 투명해질 지경인 이카엘의 얼굴이 보였다.
‘어째서…….’
이미 회생 불가능이라는 것은 시로네도 알고 있었다.
각오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후회도 미련도 없다.
하지만 이카엘은 그런 시로네를 필사적으로 살리려고 하고 있었다.
대체 왜?
불과 몇 분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것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
“어리석은 자여.”
파이엘이 아파테이아를 발동해 아타락시아를 짓눌렀다.
“꺄아아아악!”
이카엘의 비명 소리가 터지자 조금씩 형태를 잡아 가던 시로네의 정신이 다시금 휘청 쏟아져 내렸다.
“흐으으윽!”
시로네는 전심을 다해 버텼다.
‘안 돼! 이대로 끝나서는 안 돼!’
모든 것이 마지막을 향해 치달을 때, 시로네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줄루의 가르침이었다.
정신을 지배하는 것은 마음.
하지만 마음은 실체가 없기에 단련할 수도 없다.
‘무상심의 비결.’
호흡의 순환 속에 자신을 담아 마음의 활동을 멈추는 것.
‘폭발을 통제하는 거야!’
시로네는 공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숨이 내뱉어질 때마다 중요한 것들도 하나씩 버려졌다.
이카엘도, 천국도, 생명도 죽음도, 머릿속에 가득 차오른 증오도 없다.
오직 들이쉬고 내쉰다.
생물의 기본으로 돌아간다.
“후우. 하아. 후우. 하아.”
꿀렁.
탄력을 잃고 늘어져 있던 시로네의 스피릿 존이 한순간 탄력을 되찾으며 탱글 솟아올랐다.
“마음.”
간도는 우오린의 말을 읊조렸다.
“그래. 태초의 사건이 어떤 것이든 그 사건이 벌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마음. 그 마음의 작용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바로 이 우주다.”
우오린은 소매를 걷고 오른 주먹을 내밀었다.
“따라서 마음은, 율법을 바꾼다.”
펑!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팔꿈치가 펴지자 주먹이 공기를 꿰뚫으면서 충격파가 터졌다.
“초월적인 속도로 주먹을 내밀고 싶다. 이 전심을 다한 열망이 율법을 바꾸고 육체를 움직이는 것이지.”
“그게 바로 신적초월이군요.”
“신적초월, 야차.”
우오린은 정확한 명칭으로 정정했다.
“순간적으로 분노를 증폭시켜 육체에 작용하는 율법을 변화시킨다. 마음의 작용이란 참으로 오묘한 것이야.”
“멋진 실력이십니다.”
“후후, 그럼 내친김에 한 가지 더 보여 주도록 하지.”
우오린은 다시 주먹을 들고 간도를 향해 겨누었다.
“너의 얼굴을 꿰뚫겠다.”
간도의 목구멍으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녀의 의지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어때? 이것도 가능할까?”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힌 간도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합니다.”
“이유는?”
“마음의 권한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우오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내렸다.
“그래. 의지는 오로지 나만의 것. 내가 최고의 일격을 가한다고 해도 너의 얼굴이 관통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신적초월은 육체를 지배하는 방식이니까요.”
“하지만.”
우오린은 기습처럼 다시 주먹을 들었다.
그리고 간도가 무언가를 말하기도 전에 무지막지한 속도로 팔꿈치를 펼쳤다.
“이건 어떨까?”
펑!
주먹이 허공을 강타하면서 폭발음이 터졌다.
절대로 닿지 않는 거리지만 그녀의 주먹이 날아와 얼굴이 박살 나는 기분을 간도는 똑똑히 느꼈다.
“…….”
가까스로 비명을 참은 간도의 두 팔이 부르르 떨렸다.
멀쩡하게 얼굴이 붙어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죠?”
우오린은 간도의 극기에 만족했다.
보통의 인간이었으면 정신이 나가 버렸을 터였다.
“내가 공격한 것은 육체가 아닌 너의 화신이다. 따라서 너는 머리를 박살 내겠다는 나의 의지를 본 것이지.”
간도는 비로소 깨달았다.
눈앞에 앉아 있는 어린 소녀가 얼마나 괴물인지.
“심적초월이군요.”
우오린은 이번에도 정정했다.
“심적초월, 반야. 완벽하게 마음을 비운 상태에서 화신을 통제한다. 마음을 집중하는 신적초월과는 반대되는 것. 100년을 사는 인간이 터득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설령 화신을 깨달은 자들이라도 쉽게 흉내는 못 내지.”
간도는 순순히 인정했다.
마법사인 그에게 심적초월은 달콤한 꿈이지만 어떤 노력으로도 그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할 터였다.
애초부터 노력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기를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야차도 반야도 있지만, 단지 그런 것일 뿐이야. 실제로 너는 내 일격을 견뎌 내지 않았느냐.”
“높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간도는 진심이었다.
평소에는 벌레보다 못한 존재로 태무시하던 우오린이 자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말해 주는 것이 감동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씁쓸한 점도 있었다.
결국은 동정이나 받는 존재.
생물학적 어머니인 테라제 미스트라의 기억이 아니었다면 그녀가 자신에게 이런 정을 내줄 이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우오린은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간도를 잠시 살피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너무 잘 대해 준 게 아닌가 싶었으나 오늘만큼은 그래도 상관이 없을 듯싶었다.
어쨌거나 조만간 막중한 임무를 책임져야 하는 아들이니까.
“들이쉬고, 내쉬어라.”
“네?”
간도가 의문을 담아 고개를 들었으나 우오린은 그저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다.”
전심全心 (5)
“후우.”
꿀렁.
스피릿 존이 시로네를 향해 밀려들자 마치 물방울 속에 갇힌 듯 풍경이 중심을 향해 굴절되었다.
“하아.”
꿀렁.
숨을 내쉬자 이번에는 스피릿 존이 세상을 향해 뻗어 나갔다.
고무줄처럼 주위의 사물이 늘어지면서 팽팽한 긴장감을 드러냈다.
‘들이쉬고.’
꿀렁.
‘내쉬고.’
꿀렁.
시로네의 호흡을 따라 세상이 함께 박동하고 있었다.
그 박동이 이어질 때마다 아타락시아 육탄계의 결과로 폭발을 향해 뻗어 나가던 그의 정신이 조금씩 갈무리되며 제대로 된 형태를 되찾기 시작했다.
“이, 이럴 수가…….”
이카엘은 이름 모를 감동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 인간의 정신이 세상의 사물과 공명할 수 있는 것은 엘리시온의 특징.
하지만 폭발하는 정신을 완전히 잠재운 것은 오로지 시로네 고유의 깨달음에서 비롯된 사건이었다.
이것은 분명 어떤 인간의 경지.